2021년 8월 6일 (금) 촬영
경복궁역 5번 출입구입니다.
경복궁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안녕 모란"이란 주제로 열리는 전시회를 보려고 이 곳을 찾았습니다.
안녕 모란 전시회는 2021년7월 7일부터 10월 30일까지 입니다.
코로나 시국이라 사전 예약을 해야 하지만, 현장 접수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현장 접수는 안될 때도 있습니다.
지금 시간이 오전 9시 30분인데요, 기온이 섭씨 30도 쯤 올라 갔는지 벌써 덥네요.
박물관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입장시킨다고 하네요.
고궁박물관에서 본 겅복궁입니다. 입장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며 경복궁 주변을 돌아 봤습니다.
경복궁 용성문에서 본 흥례문과 회랑입니다.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인 흥례문의 모습입니다.
용성문입니다. 고궁박물관에서 경복궁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죠.
용성문 밖에서 본 경복궁의 서쪽 담장입니다. 뒤에 보이는 산은 북악산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전경.
밖에서 본 흥례문 서쪽 회랑입니다.
경복궁의 금천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 금천 위에 영제교와 함께 금천을 지키는 천록이 있습니다.
유화문입니다. 사용하지 않는 문이지만 궁 담장 밖임에도 시정장치가 있습니다.
경복궁 고궁박물관 뜰에는 북관대첩비 복제품이 있습니다.
북관대첩비, 北關大捷碑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1592~1598) 때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길주,백탑교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병들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승전비다.
그러나 정문부 선생의 업적을 모함한 무리에 의하여 혁혁한 전공은 가리워지고 오히려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그 후 선생이 돌아가신 지 43년 후에야 모든 것이 밝혀지고 선생이 돌아가신 지 85년 뒤인
1708년에 그곳에 부임했던 함경도 북평사 최창대(崔昌大, 1669~1720)가 글을 짓고 이명필(李明弼)이 글을 써서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에 고을 주민의 뜻을 모아 마침내 북관대첩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200년후 러,일전쟁(1804~1905)이 일어나자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소장이 이 비석을 읽어보고 자기네 조상들의 패전기록을
알게 되자 이 비석을 뽑아 일본으로 보내버렸다.
그 후 이 비석은 일본 황실에서 보관하다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졌다.
이러한 사실을 당시 일본유학생이었던 조소앙(1887~1958) 선생이 기고한 글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으며
이 비석 또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그 후 한국정부와 민간단체들이
수차례 비의 반환에 노력을 기울여 2005년 10월 20일에 비를 반환받게 되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에 관한 귀중한 역사적 자료인 동시에 남북 간의 잃어버린 역사상을 회복하고
한,일간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증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으로부터 반환받은 북관대첩비는 남북 협의에 따라 2006년 3월 1일 북한에 인도하였다.
현재 북관대첩비는 원소재지인 함경북도 김책시에 복원(북한 국보로 지정됨)되었으며,
원래의 비는 3기를 복제하여
경복궁과 독립기념관 그리고 정문부 선생의 사당과 묘역이 있는 의정부시에 각각 세워 놓았다.
북관대첩비에서 본 유화문과 근정전입니다.
모란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민간을 막론하고 식물 자체는 물론
무늬로도 오랫동안 사랑받았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도 풍요와 영화로움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궁궐이나 생활용품을
꾸밀 때 용과 봉황, 거북에 견줄 만큼 모란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모란에 담긴 의미는 살아서의 부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 인물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무늬로
모란을 썼습니다. 왕실 흉례 때 고인의 시신과 혼이 자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모란도 병풍을 둘러 고인을 지키고,
죽음 후 조상신이 된 국왕과 왕비가 나라에 영원한 안녕과 번영을 가져와줄 것을 기원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 왕실에서 모란이라는 식물과 그 무늬를 어떻게 향유하는지를 보여줌으로서 모란에 담긴
다양한 상징을 소개합니다. 제목 "안녕 모란"은 서로에게 안부를 물으며 건네는 인사이기도 하고, 조선 왕실의
안녕을 빌었던 모란무늬처럼 우리 모두의 안녕을 비는 주문이기도 합니다.
모란 그 크고 화려한 꽃송이에, 그 화사한 향기 속에 여러분의 안부를 물어 봅니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해 봅니다.
전시실입구입니다.
조형물을 통해 나오는 빛이 주위를 온통 모란으로 치장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하네요.
무늬로 피어나다.
중국 오대 (10세기) 때 처음 나타난 모란무늬는 대표적인 길상무늬 중의 하나로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민간과 왕실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사랑받았다. 모란무늬가 길상무늬로 자리 잡은 데에는 연꽃을 꽃 중의 군자로,
모란을 부귀한 자로 비유한 송대 주돈이(1017~1073)가 저술한 <애련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모란무늬는 고려시대부터 성행하기 시작해 조선 말, 대한제국까지 꾸준히 쓰였다.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각종 의례, 생활용품 등에도 모란무늬를 즐겨 장식하였다. 특히 행복한 삶에 대한 축원으로 가득한 혼례와 관련된
의복, 부채, 병풍 등 여러 물건에 모란은 주된 장식 무늬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이후 벽사(闢邪)와 기복(祈福)의 풍조가 강하게 나타나 다양한 길상무늬가 크게 유행하는 가운데
모란의 길상성 또한 더욱 강조되어,
각종 생활용품과 공예, 건축물 등의 장식에 그 어느 시기보다도 풍성하고 화려한 자태로 피어났다.
꽃, 괴석을 그린 그림 / 조선 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한 폭에는 모란을, 다른 한 폭에는 찔레꽃과 등나무꽃을 괴석과 함께 그린 장식화이다.
고종(재위 1863~1907)의 아버지 흥선대원군(1820~1898)의 거처였던 운현궁 노락당 도배지 속에서 발견되었다.
두 폭이 마주보는 면 가운데에 잘려나간 부분이 있어, 벽장을 장식했던 그림으로 보인다.
부귀와 풍요를 비는 마음.
조선 왕실에선 궁궐의 건축물과 각종 의례 및 생활용품에 모란무늬를 장식해 왕실에 상서로움이 가득하길 바랐다.
궁궐 정전에 왕이 자리하는 어좌와 어좌 뒤에 세우는 곡병, 어좌 위쪽을 장식하는 지붕 모양의 당가(唐家)에는
용과 봉황, 일월오봉과 함께 모란무늬를 장식해 국왕의 위엄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또한 모란은 경복궁 자경전의 꽃담이나 교태전의 화계, 궁궐 후원에 있는 각종 석조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꽃,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십장생 등 다른 동식물 무늬와 함께 쓰여 왕실의 생활공간에 정취를 더했다.
모란무늬는 궁중에서 사용한 생활용품과 장식 물품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가구와 의복, 장신구, 도자기, 각종 집기에는 동식물 무늬를 비롯하여 복을 기원하는 문자무늬와 길상무늬가
사용되었고, 모란은 다른 무늬와 함께 장식되어 왕실의 번영과 풍요로움을 기원했다.
모란을 그린 청화백자 / 조선
청화 안료로 모란을 그린 백자이다. 조선 후기에는 부귀, 장수, 다남 등 복을 기원하는 길상무늬가 크게 유행하면서
각종 생활용품과 장식품의 무늬로 즐겨 사용되었다.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모란 역시 길상무늬의
유행과 함께 그 의미가 더욱 부각되어, 푸른색 안료로 모란 무늬를 가득 그린 청화백자의 유행이 두드러졌다.
모란무늬 청화백자는 왕실과 민간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왕실 자기의 모란은 형태의 묘사와
세부 표현이 세밀한 특징을 보이며, 농담을 거의 이용하지 않은 짙푸른 채색이 돋보인다.
모란을 그린 청화백자.
모란무늬를 장식한 보자기 / 조선.
중요한 물품을 소중히 보호하기 위해 사용된 보자기는 복을 불러들여 담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담는 물품의 특징이나 그 주인의 신분에 걸맞게 소재, 색, 무늬 등을 달리하였는데
모란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늬로 자주 장식되었다. 모란무늬는 보자기의 주된 무늬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다양한 길상무늬를 그림으로 그린 보자기에서 보조 무늬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때론 단독으로, 때론 다른 무늬와 함께 장식되어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고 다른 무늬의 의미를 북돋았다.
모란무늬를 장식한 보자기.
복온공주 혼례용 방석 / 조선 1830년.
복온공주(1818~1832)의 혼례 때 사용한 방석이다. 혼례 절차 중 신랑과 신부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마시는
합근례 때 이와 같은 "만화방석,滿花方席"을 사용했다.
방석 전체에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과 자손의 번창을 의미하는 연꽃, 복을 상징하는 박쥐,
짝을 지어 날아다니는 새, 행복을 나타내는 나비 등을
가득 수놓아 부부의 해로, 자손의 번창과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기원했다.
꽃, 길상무늬 무늬판 / 조선, 1879년.
왕실 여성들이 혼례 때 입었던 대란치마에 찍었던 금박 무늬판이다.
"壽千萬歲,수천만세" 글씨를 모란, 복숭아, 석류, 국화로 가득 감싼 모양이다.
뒷면에 "기묘계동대란금판대쇼삼개"라는 묵서가 있는데
"기묘년인 1879년 음력12월 대란치마용 금박 무늬판 크고 작은 것 세 개"를 제작했음을 뜻한다.
인생의 가장 화려한 순간.
부귀와 풍요를 기원하는 모란무늬는 일생에 가장 경사스러운 예식인 혼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신부의 혼례복인 활옷, 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부채, 방석 등 혼례 용품에 연꽃, 새끼를 거느린 봉황, 나비 등과 함께
모란을 풍성하게 수놓아 부부의 화합과 자손의 번창, 행복을 기원했다.
모란도 병풍은 혼례 때 주요하게 쓰인 병풍 중 하나였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혼례 관련 의궤인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 (1627년)부터 20세기 초까지 왕실 혼례 관련 기록물을 통해 모란도 병풍이 꾸준히 사용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란도 병풍이나 가마, 자수로 가득한 혼례복 등은 민간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품이었다.
조선 초부터 사대부 및 민간에서는 왕실의 각종 물품을 관리하는 재용감과 같은 관청에서 혼례 용품을 빌려 썼다.
이러한 풍속을 통해 모란 가득한 혼례 용품이 민간에도 전해졌다.
꽃, 길상무늬 무늬판 / 조선, 1879년.
왕실 여성들이 혼례 때 입었던 대란치마에 찍었던 금박 무늬판이다.
"壽千萬歲,수천만세" 글씨를 모란, 복숭아, 석류, 국화로 가득 감싼 모양이다.
뒷면에 "기묘계동대란금판대쇼삼개"라는 묵서가 있는데
"기묘년인 1879년 음력12월 대란치마용 금박 무늬판 크고 작은 것 세 개"를 제작했음을 뜻한다.
복온공주 혼례용 방석 / 조선 1830년.
복온공주(1818~1832)의 혼례 때 사용한 방석이다. 혼례 절차 중 신랑과 신부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마시는
합근례 때 이와 같은 "만화방석,滿花方席"을 사용했다.
방석 전체에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과 자손의 번창을 의미하는 연꽃, 복을 상징하는 박쥐,
짝을 지어 날아다니는 새, 행복을 나타내는 나비 등을
가득 수놓아 부부의 해로, 자손의 번창과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기원했다.
유리창에 모란을 그린 가마 / 20세기 초.
왕실 여성들이 궁을 출입하거나, 혼례 때 삼간택에서 뽑힌 여성이 숙소인 별궁에 갈 때 이용한 가마로 "덕응(德應)"
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인 왕실 가마가 나무 구조에 주렴을 드리우던 것과 달리,
19세기 이후 유입된 판유리에 풍성한 모란을 그린 독특한 가마이다.
이 유물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가마가 20세기 초에 촬영된 유리원판 사진에 있고,
1905년 순종(재위 1907~1910)과 순정효황후(1894~1966)의 가례 때 제작한 가마에 유리로 창을 만든 예가 있어
대한제국 시기 전후에 제작한 혼례용 가마로 보인다.
복온공주 혼례복 / 조선, 1830년.
순조(재위 1800~1834)의 둘째 딸인 복온공주(1818~1832)가 혼례 때 입은 옷으로, 제작 시기와 착용자가 알려진
유일한 혼례복이다. 모란, 연꽃, 봉황무늬를 주로 수놓는 일반 혼례복과 달리,
10여 종의 화초 및 나비, 복숭아와 석류 같은 과실, 보배무늬를 쏟아질 듯 수놓았다.
혼례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각의 무늬는
부부의 화합과 장수, 자손 번창 등을 의미하며 복온공주 부부의 혼례를 축원하는 상서로운 기운을 담았다.
공주의 혼례는 예조에서 주관하는 국혼으로 치러졌으며, 혼례복 등 혼수 용품 또한 궁중 수방에서 제작하였다.
궁중자수의 전통과 정교한 기술을 고스란히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다.
복온공주 혼례복의 전면.
궁중 여성 혼례복 / 조선 1880년 이후.
창덕궁에서 보관되어 전해 내려온 조선시대 궁중 혼례복이다.
혼례복의 겉감과 안감 사이에는 종이심을 대어 옷의 형태를 유지하게 했는데,
이 종이심이 1880년 헌종(재위 1834~1849) 비 효정왕후(1831~1904)의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열린 과거시험의
답안지로 확인되어, 제작연대를 1880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석류와 불수감무늬 비단을 바탕으로 하고,
앞길과 뒷길, 소매에는 비단 색실과 금실로 모란, 연꽃, 봉황무늬를 화려하게 수 놓았다.
직물을 덧대어 수선한 흔적을 볼 수 있어, 한 옷을 여러 사람이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실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빌다.
모란은 조선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는 도상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조선 궁궐의 장식 그림으로 일월오봉도 만큼이나 많이 그려진 것이 바로 모란도였다.
특히 모란도 병풍은 왕실 조상을 섬기는 의례에 중요하게 사용하여 왕실과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흉례는 고인이 된 국왕과 왕비를 왕실과 나라를 돌보는 조상신으로 모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흉례의 각 절차마다 고인의 시신이나 혼이 자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모란도 병풍을 설치했다.
이를 통해 고인이 자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그를 시위(侍衛)했다.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진전(眞殿)의 어탑(御榻) 뒤에도 으래 모란도 병풍을 두도록 했다.
그밖에도 왕릉의 석물, 선원전(璿源殿) 같은 진전 건축, 왕실 사당 건축의 곳곳에 모란 무늬를 조각해 장식했으며,
신주를 놓는 의자(교의,交倚), 부장품을 운반하는 가마(채여,彩轝), 신주를 운반하는 가마(신여,神轝) 등에서도
모란 장식을 확인할 수 있다.
철종의 국장을 기록한 의궤 / 조선 1865, 보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철종(재위 1849~1863)의 국장을 기록한 책이다. 왕의 관을 산릉으로 모시는 행차 그림 중
무덤에 함께 매장할 물품 등을 실은 채여를 볼 수 있는데, 모란이 그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흉례에 사용하는 물품을 모란이 그려진 가마에 넣어 이동하는 것은
<세종실록> <오례>부터 정해진 법도였고 <국조상례보편>에도 정리되어 조선 전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조성한 것을 기록한 의궤.
조선 1789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보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정조(재위 1776~1800)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위치를 옮긴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두르는 병풍석, 봉분 좌우에 설치하는 돌기둥인 망주석, 정면에 설치 불을 밝히는 장명등 등
무덤을 만들 때 사용하는 다양한 석물에 모란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왕실의 흉례와 모란.
조선 왕실은 흉례를 치를 때 장식과 바탕색이 없는 옷을 입고 무늬 없는 병풍을 사용한 한편
살아있을 때와 다름없는 화려한 의장을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흉례에 색을 더한 장식 중 모란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왕의 혼을 모시는 의자. 매장용 물품을 운반한 가마에는
모란이 장식되었다. 왕릉에 설치하는 석물의 꾸밈에도 모란이 주된 무늬로 쓰였다.
흉례에 사용된 병풍 중에는 모란도 병풍의 비중이 가장 커, 왕이 죽어 땅에 묻히고 삼년상을 치른 후
종묘에 모셔질 때까지 각 절차마다 왕의 시신과 혼이 자리한 곳에는 언제나 모란도 병풍을 둘렀다.
왕실의 흉례는 국가의 가장 큰 슬픔인 동시에 선왕이 나라를 보살피는 조상신이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생전의 권위를 그대로 재현해 내세에서도 풍요롭기를 기원하는 행위였다.
그러한 의례에 놓여 공간의 위엄을 높인 모란에는 고인이 된 왕의 시신과 혼을 공경하는마음,
조상신이 된 국왕이 나라를 굽어 살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신여 / 조선.
신주를 옮길 때 사용했던 가마로, 사방에 모란을 새겼다.
왕실의 각종 제례를 글과 그림, 표로 정리한 병풍<제례의궤도> 제1폭에 그려진 신여(神轝)와 형태가 같다.
신주를 이동하는 행차 그림에는
신여를 비롯해 더 큰가마인 신연(神輦)도 등장해 절차마다 다른 크기와 형태의 가마를 사용한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룬 정조의 죽음.
모란은 정조의 마지막 길도 화사하게 장식했다. 정조의 마지막 길을 지킨 모란도 병풍.
왕릉이 조성되는 동안 정조의 시신을 모셨던 빈전에서는 제사지낼 때 일월오봉도 병풍을 둘렀다.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의 흉례 때는 모란도 병풍을 둘렀다.
11월 3일 왕릉으로 향하는 정조의 마지막 행차.
왕릉으로 가는 길, 여러 차례 제사를 지내면서 모란도 병풍을 설치했다.
왕릉에 도착하여 정자각에 관을 임시 보관할 때도 모란도 병풍이 함께했다.
관을 능위에 묻고 신주를 길유궁에 임시 보관하며 모란도 병풍을 펼쳤다.
능에서 궁궐로 신주를 모셔와 모란도 병풍을 편 혼전(효원전)에 안치하고 삼년상을 치뤘다.
삼년상이 끝나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흉례의 마지막 절차. 신주를 종묘 밖에 임시 보관하며 모란도 병풍을 두었다.
모란도 병풍은 마지막까지 정조의 곁을 지키며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
조선 왕실의 조상 숭배와 모란
조선 왕실에서는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진전에 두고 제사지내며 왕실의 조상을 극진히 모셨고,
이를 통해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다. 조상을 모시는 이와 같은 공간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모란무늬를 장식했는데
현재 궁안에 남아 있는 진전인 창덕궁 신선원전을 통해 그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선원전 내부에는 12칸의 감실을 설치해 어진을 모셨는데 용,봉황 등
왕을 상징하는 다양한 상징물과 더불어 왕조의 풍요가 영원하길 기원하는 모란과 넝쿨무늬로 장식했다.
또한 감실 안 북쪽 벽마다 네 폭 병풍 모양의 모란도를 부착했다.
어진 외에 다른 형태로 왕실 조상을 모실 때도 모란이 사용되었다.
왕을 낳은 후궁의 신주를 모신 칠궁은 감실마다 모란과 넝쿨무늬로 장식했다.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임시로 신주를 다른 공간에 옮길 때도 모란도를 둘러 신주를 보호했다.
왕이나 왕에 준하는 왕실 인물과 관련된 공간에 제한적으로 사용했던 일월오봉도상과 달리
모란은 중요 왕실 인물의 위엄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장식으로 두루 활용되었다.
모란도 병풍 / 조선
<영정모사도감의궤>(1901년)에는 어진을 모신 선원전 각 실마다 4폭의 모란도 병풍을 설치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창덕궁 신선원전의 뒷벽에 설치된 모란도는 이 기록과 일치한다. 이 병풍은 4폭이라는 점,
각 폭마다 테두리 전체를 푸른 비단으로 두른점, 폭이 좁다는 점에서 창덕궁 신선원전의 모란도와 형태가 유사하다.
어진을 모시는 의자 / 20세기 초, 창덕궁 관리소.
왕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올린 진전(眞殿) 중 현재까지 궁궐 안에 남아 있는 창덕궁 신선원전에 있는 교의이다.
좌판의 너비가 깊이에 비해 긴 비율로 되어 있어 어진 폭에 맞춰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교의의 세부를 모란으로 장식하였는데,
등받이에 모란을 새겼으며 가죽으로 만든 좌판에도 박쥐와 함께 모란무늬를 장식했다.
몸체에 모란, 국화, 매화 등 꽃무늬를 새긴 향로이다.
<영정모사도감의궤>(1901)에 실린 다양한 기물 중 유사한 형태의 향로가 있는데 뚜껑의 사자는 유실되었으나
향로의 모양과 무늬 구성 방식이 동일하다. 바닥면에 "칠실,七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여러 어진을 모신 진전의 각 실 중 일곱 번째 실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모란1.
이어 2~3편이 이어지나 봅니다
상세한 설명과 사진까지
언제나 성의를 다하신 글 감동입니다.
예전엔 작약과 모란 구분이 어려웠고,
그 시기가 짧아 매우 아쉬습니다.
중국 웬만한 가정에는 모란꽃이 그림으로
소장한다지요 부귀의 상징으로요.
언젠가 예술의 전당 미술전시회에서
모란과 작약으로만 전시를한 여류화가
그림이 너무나 감동이었는데,
이번 소개해 주신 모란도 궁금합니다.
늘 고맙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