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성 설창수 선생
시인, 사상가, 언론인
파성 설창수는 1916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출생하였다.
1931년 진주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TK단에 가담, 활동하다가 체포당했으며 1939년 도일하여 니혼대학(日本大學) 법문학부 예술과에 재학 중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선동한 혐의를 받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송환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1946년 「경남일보」 주필, 사장을 역임하는가운데 좌익문화단체에 대응하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1947년 동인지 「등불」에 시 「창명(滄溟)」 등 4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하였다.
1949년 영남예술제(1959년 개천예술제로 변경)를 창시하여 1960년 제11회까지 위원장을 역임하는 한편 문교부 예술과장을 지내었고, 개천예술제를 개최하는 등 60여 년 간 진주지역 문화예술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1957, 1965, 1975, 1988년 등 4차례 국제펜클럽 한국대표를 지냈으며, 1960년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정계를 떠났으며, 이후 독재타도에 앞장서는 등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대표의장에 선출되었다.
1981년에 문학협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영남문학회]와 [시와 시론]의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시와 시론」은 1952년 대구에서 발간한 시와 비평을 중심으로 하는 문예잡지로, 발행인은 유치환(柳致環), 편집인은 구상(具常)이었는데, 이종후(李鍾厚)·김춘수(金春洙)·박두진(朴斗鎭)·이호우(李鎬雨) 등과 주요 멤버로서 활동하면서 초기의동인지인 「등불」 을 「영문(嶺文)」으로 고쳐 1961년까지 18집을 발간하였다.
1951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223여 회와 1972년 일본에서 2차례의 시화전을 개최하는 등 왕성한 창작의욕을 돋보였다.
그는 700여 편의 시, 1백여 편의 수필, 8편의 희곡을 남기는 등 현대 진주지역 문화예술계의 개척자·선구자로서 위치를 차지한다.
1998년 6월 26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聽水軒(청수헌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성 설창수는 암울한 일제감정기 학생시절 두 차례나 옥고를 치룬 향토색 짙은 역사의식 속에서 탈주지주의적 정신주의를 추구함으로써, 물질적인 빈곤 속에서도 정신적인 풍요를 탐미하는 문학의 다양성을 제시하였다. 그가 기초한 개천예술제의 전신인 제1회 영남예술제 창제 취지문은 민족혼과 예술혼을 접목시키려는 독특한 파성의 예술관을 보여준다.
식민지 굴레에서 벗어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방안은 그에게 예술올림피아로 승화시키는 문제였다.
그의 시 세계에서는 민족혼과 예술혼을 찾아가는 고행의 흔적이 역력하다. 기존의 관념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가운데 시를 종교처럼 믿고 사랑할 뿐이었다.
미의 선민(選民)이 시인이며, 성서와 경전에 대신함이 시인의 시라 하고, 신의 문이 열리기 직전 암실의 자리에 이르는 영혼의 자리가 시의 궁극적인 자리라고 했다.
시집으로 「개폐교」(1950), 「설창수시선」(1960), 수필집「성좌 있는대륙 」, 산문집「청수헌 산고」 등과 1984년에는 「설창수 문학전집(6권)」을 간행하였다.
그 외 「파초(芭草) 제2장」, 「적막」, 「의랑 논개(義娘 論介)의 비문」, 「나의 꿈, 나와 조국」(1992) 등이 있으며, 1959년 눌원 문학상, 진주시 문화상,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과 은관문화훈장, 그밖에 예총예술대상, 향토문화대상 등을 받았으며, 1990년 그의 시 정신을 기리는 파성 문학상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내고 박생광 선생
화가
내고 박생광은 1904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보통학교와 진주농업학교를 나왔다.
1920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교토[경도(京都)]의 다치가와 미술학원[입천산운 미술학원(立川酸雲美術學院)]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1923년에는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 [경도시립회화전문학교(京都市立繪畵專門學敎)]에 입학하여 신일본화를 공부했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23년에 선전(鮮展 :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주취하던 鮮展(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에서 처음 입선하였다.
1929년부터 일본의 명랑미술전, 신미술인협회전 등 여러 미술전에 출품하였으며, 1940년부터 1944년까지는 일본 미술원전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였다.
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곤양 다솔사에 출입하였으며, 광복 후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청동다방을 운영하면서 자택을 문화의 중심지로 활용하였다.
광복 후 진주에서 개최되었던 백양회(白陽會) 창립전에 참가하였으며, 당시 진주지역 예술문화계의 중심인물로서 1949년에는 영남예술제의 창제자로 참여했다.
한국전쟁(6.25전쟁) 후에도 진주에서 꾸준히 활동하다가 1967년에는 홍익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 출강하기도 하였으며, 1968년에 상경하였다.
1973년에 개최된 ‘한국현대작가 100인전’, 1974년에 개최된 ‘한국원로작가 수작전’에 출품하였고, 그 해에 다시 도일하여 일본미술원전의 원우가 되었고, 이듬해 세 차례의 개인전을 도쿄[東京(동경)]에서 개최했다.
1976년에 개최된 ‘한국현대동양화대전’에 출품하였으며 1977년 서울 진화랑에서 연 귀국전은 왜색풍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1981년 백상기념관 개인전을 통해 독창적인 채색 한국화가로 각광을 받았다.
이후 경주 여행과 인도성지 순례를 다녀왔으며, 1984년에 개최된 ‘현대미술초대전’과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개최된 한국미술특별전에 초대 출품하였다. 그리고 1985년에는 ‘한국미의 원초적 형상전’에 출품하였다.
대표작으로 「월벽」(1958년), 「밤의 매화」(1976년), 「무당」(1981년), 「무속」(1983년) 등이 있다.
1970년대 일본체류 시절 채색을 절제하고 그린 그의 작품들을 통해 신일본화풍의 영향을 받은 정교한 배치와 색면 분할적 화면을 엿볼 수 있는데, 1980년대에 새 안료기법을 개발하며 자신만의 채색화풍을 성취하기까지 복잡한 내면적 고뇌와 숱한 암중모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을 성취하기까지 한때의 왜색이라는 비난을 딛고 말년에 한국의 역사 및 민화, 무속화, 그리고 불화에 기초하여 한국 채색화 전통의 한국화를 새로운 영역을 연 진주출신의 대표적인 현대 한국화가로 평가된다.
1963년에는 경상남도 문화상, 그리고 1981년에는 제7회 중앙미술대상을 수상하였으며, 1985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4년에는 내고 박생광의 탄생 100주년 및 서거 20주기를 맞아 서울, 수원, 창원, 진주, 부산에서 회고전으로 ‘박생광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동경 이경순 선생
시인
동기 이경순은 1905년 11월 11일 진주 명석면 외율리에서 태어나 평생 진주만을 지킨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인의 정신과 예술혼이 각별했던 진주의 시인이며, 동기 이경순을 후배 문인들은 흔히 [아나키스트] 시인이라 부른다. 청년 시절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의 사상 단체인 [연맹]에 가입해 아나키스트 시인들과 어울렸다.
나라 잃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시인으로서 택할 수 밖에 없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청년시절 사상운동은 시인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었다. 국권상실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일체의 정치 권력을 부정하는무정부의식과 통하게 되었으며, 이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24년 일본 동경 사립 주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대학 전문학부 경제과 중퇴, 1942년 일본포 화시 경북의과의전 졸업 등의 학력에서 보듯이 당시 엘리트로서 편안한 길을 갈 수가 있었지만 시인은 문학의 길을 선택해 꿈을 실현시키고자했던 것이다.
동기 이경순은 예술을 ‘예술을 위한 예술’ 만으로 보지 않고, 소속한 사회나 민족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반항을 택한 것이다.
동기 이경순은 해방 후 진주에 정착해 진주문단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1946년 설창수 유치진 등과 함께 [진주 시인협회]를 창립하고, 지방 문예지의 효시인 詩 동인지인 [등불]동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47년 동인지 [등불]에 [여인에게]를발표, 1928년 경향신문 []에 이어 1948년 [영남문학]에 [] 등을 발표하여 사실상 문단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1949년 [백민 17집]에 []이란 작품으로 정식 등단했다.
동기 이경순은 1929년 우리나라 종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창제자로 참여한것을 비롯해 1964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상을 받으셨고, 남해 창선 중 ·고등학교장, 진주상고 교장, 한국문협 진주지부장, 한국예총 진주지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육계와 문화예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스스로 돈키호테를 닮고자 호를 []로 지었다.
“해방 이듬해 월북 작가인 송영의 [황혼]을 진주극장에서 상영할 때 이병주씨가 연출하고 내가 [동기]라는 별칭으로 출연해 그때부터 호칭이 필명으로 됐다”고 했다.
동기 이경순은 1983년 비봉산을 오르다가 다리를다쳐 병석에 들어 투병 끝에 1985년 8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돈키호테] [ 고고한 학] [교육자] [아나키스트] 등~~의 단어들이풍기는 시인의 모습은 암울했던 시대의 울분을 삭이며 평생 시대조류를 거슬러 올라간 가난한 시골 선비가 연상된다.
[~~~~]는 1987년 평소 그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이덕 시인에 의해 발의가 되어 서정 주, 최재호, 김윤양, 이명길씨 등이 중심이 되어 2년만인 1989년 평소 그가 자주 거닐던 남강 가에 세워졌다.
~~에는 시인의 시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시 [저 언덕]이 새겨져 있다.
청남 오제봉 선생
서예가
청남 오제봉은 1908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출생하였다.
불교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출가하여 승문에 입문한 이래 서예에 정진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의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동 415번지에 있는 義谷寺(의곡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경향각지의 시인·묵객 등을 의곡사로 초청하여 무료숙식을 제공하는 등 예술가들에게 향토예술인 양성과 후원에 남다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6년 서울에서 조선미술동맹창립과 더불어 조선미술동맹 진주지부도 설립되었으나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반발한 오제봉은 조선미술도맹 진주지부를 탈퇴하고 박생광(朴生光) 등과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동 216번지 청동다방을 사무실로 하는 문화 건설대를 조직하였다.
1949년 11월에는 巴城 설창수, 乃古 박생광, 東騎 이경순 등과 함께 전국적인 규모인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정명수, 정대기, 정현복, 강주식, 김창국 등과 함께 서예부문 행사를 주관하였다.
특히 예술인에 대한 오제봉의 지원은 진주를 예향의 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설창수, 박생과으 조영제 등과 이러한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진주의 예술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63년에는 유명작가 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예향도시 진주를 전국에 알리었고, 이후에도 개인전과 초대전을 개최하는 등 작품활동과전시회를 통한 시민의 정서함양에 열성적으로 노력하였으며 문화예술의 도시로 건설하는 데 앞장섰으며 일조를 하였다.
만년에는 부산으로 이거하여 서예실을 운영하다가 1991년 향년 83세의 나이에 별세하였다.
수상 및 유작의 대략은 국전문교부장관상 수상(1959년), 부산 눌원 문화상 수상(1963년), 부산시 문화상수상(1964년), 국전심사위원장 및 한국원로작가(1980년), 경남 진주 논래비문 액서(1960년), 진주촉석루[영남제일형승]액서(1960년), 합천 해인사, 동래 범어사, 곤양 다솔사, 고성 옥천사 등에 주련 및 액서가 남아 있고, 전국 각지에 유작이 많이 산재되어 있다.
1980년 [청남서예집]이 발행되었다.
효석 조영제 선생
화가
조영제의 호는 효석(曉石)으로, 1912년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서 1928년 진주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의 가와바다 회화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였다.
1943년 5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제 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 「부인의초상 」으로 처음으로 선전(鮮展) 수상 작가가 되었고, 광복을 전후하여 당시 진주농업학교에서 미술을 지도하였고, 광복 후에는 진주의 미술활동을 주도했다.
1947년에는 진주미술인 동호회, 그리고 1949년에는 개천예술제의 창립인으로 참여하였으며, 홍영표, 김경과 함께 경남미술연구회에 참여하였다.
이후 민전 초대작가와 도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경남 미협 지부장, 진주미협 지부장, 개천예술제 대회장을 역임하는 등 진주의 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경상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구상 계열의 서양화와 수묵담채화 계열의 한국화를 넘나들며 계절의 변화에 따른 풍경화 연작을 그렸으며, 진주성 촉석루의 풍광과 함께 남강에서 빨래하고 낚시하는 정경을 소박하게 담아냈다.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경상남도 도립미술관 등지에 조영자의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촉석루-여름」 , 「촉석루-거울」, 그리고 「촉석루-겨울」등이 있다.
1984년 72세의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줄곧 진주에 살면서 촉석루와 함께 하는 진주인의 서정이 담긴 유화와 수묵담채화로 촉석루 풍경화의 대표 화가이다.
50여 년간 진주화단에서 진주성 촉석루를 소재로 한 작품을 가장 많이 제작하여 [촉석루 화가]로 알려져 있다.
고운 홍영표 선생
화가
홍영표는 1917년에 출생한 진주지역의 화가이며 교육자로 호(號)는 고운(稿雲)이다.
진주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등학교)와 일본 동경 가와바타 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였다. 인천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진주사범고등학교, 진주고등학교, 진주여자고등학교, 진주농업고등학교, 해인대학 등에서 후진 양성과 서양화 지도 보급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매산, 풍곡, 동기, 효석, 은초, 유당, 청남, 파성, 김경 등과 깊은 교우를 가지면서 진주미협 창립(1949년)과 개천예술제 창제자의 한사람으로 진주지역의 미술문화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산 바다, 일출 등 자연을 대상 삼아 다양한 기법으로 우리나라 파스텔화의 원조로 손꼽히는 작가이며 혼이 스며있는 색체화가라고도 일컬어지는 홍화백은 유화일색인 우리화단 풍토에서도 평생 파스텔만 고집해온 대표적인 작가로 파스텔이 주는 특유의 섬세한 느낌을 이용해 구상계열의 밀도 있는 작품세계를 꾸준히 선보여왔다.
자연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닌, 이를 세밀히 관찰한 후 자신의 느낌으로 세계를 표출해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으로 주로 세필보다는 면과 선을 대담하게 생략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펼쳤으며 최근에는 우리풍속도인 민화에도 관심을 보인 반 추상화의 음양도를 작화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의 예술 세계는 자연에 뿌리를 두고 거기 와 닿는 여러 소재들을 관조의 세계에서 걸러낸 것으로 면면이 밝은 생동감이 넘친다.
고운 홍영표는 파스텔화 작가로 국내에서도 독보적 존재이며, 서울과 진주를 왕래하면서 활기찬 전시회와 작품 활동으로 진주 서양화 보급에 크게 기여 하였고, 그동안 한국서양화 원로중진 작가전 초대, 동서양화 명가작품초대, 파리아트83호 대전 및 대한미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예술만을 고집하며 고희의 나이에도 자신의 예술은 [지금부터]라며 경남 진주에서 향토재야작가로 일관되게 처신해왔다.
40여 년 동안 고향에서 미술교육에 헌신, 공로 퇴임했으며 [경남미술교육회], [영남미술제]를 주도하고 [학교미술의 이론과 실제], [화론] 등의 저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진주고, 진주사범, 진주농대 등에서 가르친 후학들로는 강정완(재불화가), 배재식(서예가), 정건(서울대교수), 정문규(인천교대교수), 하종현, 박덕규, 황덕성, 성용환, 서영환, 정의부 등이 중앙화단과 지방에서 쟁쟁한 중진작가로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노원 이용준 선생
서양음악 작곡가
노원 이용준은 1905년 경남 통영(충무)태생으로 1928년 일본 오사카 관서음악학교를 졸업하여 작곡, 관현악 지휘 등 음악활동을 하다가 1932년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사 문예부에 입사하여 작곡을 발표하였다.
1943년 전 만주국예문협회근무, 차문수 방송국 관현악단에서 지휘하였으며, 1946년 통영 수산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1948년부터 10여년간 진주여중, 여고에서 음악교사를 역임하면서, 진주여고 교가, 졸업가를 작곡하였다.
오페레타 [연꽃은 진흙에서 피다], [콩쥐팥쥐,] [양산가], [견우직녀], [바보온달]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작사로는 [자장가] 등이있다.
1949년부터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의 발기인으로 활동하면서 합창, 취주악, 피아노 등의 경연대회를 열었다.
1954년에는 김재수와 당시 진주봉래초등학교 및 진주천전초등학교 등 진주시내의 초등학교에서 합창단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55년에는 개천예술제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장되면서 진주지역 외의 많은 음악인들을 초청하여 당시 진주극장에서 독주를 비롯하여, 독장, 중창, 합주 등의 음악 공연을 펼쳤다.
1958년에는 개천예술제 음악부에 작곡부문이 신설되면서 진주지역에서도 작곡활동이 더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62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1964년 지구레코드사에서 작곡집(가요곡)을 펴내고, 1991년 향년 86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청파 박세제 선생
언론인
박세제는 1917년 2월 26일 진주시 수정동 503번지에서 출생하여 1936년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주요 경력으로는 1949년 영남예술제를 발기하였고 1955년~1960년 진주 고적보존회 상무이사, 1957년~1980년 진주문화원장, 1972년~1981년 개천예술재단(법인)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74년~1980년 진주 민속보전회설립 및 이사장, 진주개천미술관 건립 발기 원로미술작품전시, 1979년 한국예총 진주지부장 및 고문, 개천예술제 운영위원 개천예술제 대회장(10회)를 역임하였다.
지역 언론사인 경남일보사의 근무경력은 1946년 경남일보사 정경부장을 시작으로 1955년 경남일보사 상무, 1955년 진주 신문인협회 회장, 1958년 부사장, 1963년~69년 이사회 회장 및 사장을 지냈으며, 공로 및 업적은 1963년 진주 시립도서관 개관 기증(현 연암 도서관), 1963년 한산대첩 고문, 1966년 인권상임위원(민주공화당), 1967년 갱생보호위원(법무부), 1968년 법 생활운동연사(부산지방검찰청), 1979년 무형문화재 한량무 발굴, 진주시 교육위원회 부의장 및 고문, 진주 상공회의소 고문, 진주 관광협회 이사장, 진주고등학교 총동창회 회장 및 고문을 지냈고 진주시 문화상 심사위원, 경상남도 문화재위원, 경상남도 문화상 심사위원, 한국문화원 연합회부회장, 한국 상록회 부회장을 지냈다.
수상 경력으로는 1960년 개천문화상, 촉석루재건(고적위원회), 1963년 향토문화 공로상(상록수), 1965년 일반 문화상(경상남도 교육위원회), 1973년 국민훈장동백장등이며 감사장은 1955년 위국애족(경찰국), 1960년 진주 중안초등학교 발전 감사장(기성회), 1963년 진주문화원 도서관기증 감사장(진주시장), 1967년~69년 언론창달 공로, 감사장 등 다수이다.
1981년 진주시 본성동 496번지 자택에서 65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