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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의 흥행이 이처럼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건 1천만 관객을 노리고 만든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와 달리 처음부터 이 영화가 블록버스터가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다. 스타도 없고, 막대한 제작비를 들이지도 않았고, 장르는 대중적 소구력이 약한 사극이었으며, 게다가 영화가 상영될 당시 다른 블록버스터들의 개봉이 줄을 이었다. 이처럼 도대체 흥행에 유리한 요소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왕의 남자>가 한국영화의 기록을 새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1,230만이라는 숫자를 남긴 지금 되돌아본 <왕의 남자>가 남긴 건 악재를 호재로 바꾼 지혜였다. 그리고 그 지혜는 한국영화계의 각종 병폐들에 약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스타 대신 모두 주인공으로
스타는 영화가 생겨난 이래 가장 중요한 흥행요소 중 하나였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스타는 영화 흥행에 있어 절대적인 존재다. <왕의 남자>도 처음엔 스타를 지향했다. 누구나 갈망하는 톱스타들에게 시나리오를 돌렸지만,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2004년 여름 당시 막 뜨고 있던 스타 장혁에게 답이 왔다. 장생 역에 장혁 카드가 들어오자, 손쉽게 캐스팅이 이뤄지는 듯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던 10월 연예계와 체육계에 병역 비리 광풍이 몰아친 것이다. <왕의 남자>의 주연배우 장혁은 그렇게 <왕의 남자>를 떠나 군대로 갔다. 10월 크랭크인 예정이었던 영화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12월 말, 당시 <왕의 남자>의 배역을 원했던 이문식과 김수로로 영화를 찍자는 얘기들이 나왔다. 그 때 잊혔던 카드 감우성이 떠올랐고, 김수로는 자신이 양보를 하고 감우성이 <왕의 남자>에 합류할 수 있게 독려를 해줬다.
12월 말까지 캐스팅이 되지 않으면 3개월 이상 기다려준 스탭들을 모두 해산하고 무기한 연기 내지는 엎어질 뻔한 <왕의 남자>는 그렇게 재개됐다. 박해일을 기대했던 공길도 결국 검증되지 않은 신인 이준기가 맡기로 했고, 우려의 시선 속에 촬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 당시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스타가 존재하지 않는 현장에서 모든 배우들은 자신이 주인공인 냥 캐릭터를 연기해냈고, 이에 공길, 장생, 연산, 녹수, 육갑, 칠득, 팔복까지 톡톡 튀는 연기들이 나왔다. 영화가 공개되자 관객들은 돌아가며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했다. 한번은 공길로, 한번은 장생으로. 이렇게 반복해 영화를 본 ‘폐인’ 층은 <왕의 남자>의 흥행 폭발에 주요한 뇌관이 되었다.
경제적 압박을 완성도 절박으로
블록버스터 급으로 흥행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그 만큼의 흥행 규모를 예상하고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 붓기 마련이다. 하지만 <왕의 남자> 제작사 이글픽처스 정진완 대표는 <왕의 남자>를 기획할 당시, 330만 관객을 목표 수치로 잡고 제작비를 책정했다. 사극 장르였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기록인 330만 명을 넘기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관객 수 330만 명을 기준으로 할 때 예상되는 수익금은 최대 85억 원 정도였다. 따라서 제작비와 마케팅비를 합친 금액은 무조건 85억 원 이하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당시 30억 원이라는 빚을 지고 있던 이준익 감독과 <왕의 남자>가 창립작인 이글픽처스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책정된 금액이 40억 원대. 하지만 사극 하면 기본적으로 100억 원 가까운 돈이 드는 게 정석이었던 한국영화계에서 40억 원으로 사극을 촬영한다는 게 가능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이들을 도왔다. 당초 경희궁을 비롯해 실제 궁궐들을 돌아다니며 로케이션을 할 계획이 문화재청의 반대로 무산된 것이다. 정진완 대표는 “궁궐 장면이 중요해 그래도 로케이션을 하고 싶었다. 이준익 감독과 내가 문화재청 위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도 하고 매일 찾아가 촬영 허가를 요청했다. 그런데 결론은 ‘세트장 지어서 하라’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캐스팅과 촬영허가 문제로 크랭크인이 미뤄지는 사이 KBS2 < 불멸의 이순신>이 종영을 했고, 그 세트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곳에 머물며 방송용 세트장을 이용한 것은 제작비를 절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래 예산보다 3억 원을 더 줄여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배우들의 연기나 감독의 연출에 있어 집중력으로 이어졌고,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영화 내적인 밀도를 더욱 충실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게다가 실제 궁이 아니었기에 궁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카메라 워킹이 가능했고 이것이 보다 역동적인 장면을 탄생하게 했다.
소규모 마케팅이 입소문 마케팅으로
영화 흥행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마케팅이다. 대부분의 흥행작들은 영화가 개봉되기 오래 전부터 관객들에게 영화를 인지시키기 위해 홍보비로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붓는다. 제작비를 능가하는 마케팅비를 쓰는 일도 그리 드문 경우는 아니다. <왕의 남자>는 관객들의 인지도 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영화였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왕의 남자>라는 제목을 미리 알고 있었던 관객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신 비슷한 시기 개봉을 앞두고 엄청난 물량공세를 쏟아 부은 <태풍> <청연> <야수>에 관객들은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왕의 남자>의 마케팅 책임을 맡은 영화사 아침 정승혜 대표는 정공법을 택했다. 큰 영화들 틈바구니에서 영화의 질로 승부를 걸어야 하기에 과장된 광고 문구나 대규모 프로모션 행사 대신 일반 시사회 규모를 늘리고 네티즌들의 입소문을 유도해내기로 한 것이다. 포스터 제작, 버스 광고, 시사회 등 일반적인 마케팅 외에 따로 한 것은 제작보고회와 주인공들의 극중 의상 패션쇼를 열어 언론에 노출시킨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개봉 2주 전부터 거의 매일 시사회를 열었다.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본 관객들이 느낀 건 ‘발견의 기쁨’이었다. 알고 있던 영화는 <태풍> <청연> <야수>였는데, 남들이 잘 모르는 <왕의 남자>를 보니 무척 좋더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발견한 것을 소문내고픈 네티즌들의 성향은 그대로 인터넷 상으로 이어졌다. 개봉 전까지 포털사이트 네이버 40자 평에는 무려 5,000건에 가까운 댓글들이 올라왔고, 각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서 <왕의 남자>는 상위에 랭크됐다. 이런 입소문 마케팅은 개봉 후에도 계속됐다. 영화를 보고 ‘발견’한 관객들이 다른 이들에게 이 영화를 알리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에게 권하고, 일부는 함께 다시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두 번째 보면서 또 다른 새로움을 발견한 관객들은 영화관을 세 번, 네 번 반복해 찾았고 <왕의 남자>는 1,230만 명이라는 대중적인 인기 외에도 한 영화를 62번이나 본 폐인이 등장했을 만큼 마니아적인 인기를 얻었다. <왕의 남자>는 최초 마케팅 예산으로 19억 원을 잡았었고, 영화가 112일이나 상영되면서 그 비용이 조금 증가해 총 27억 원의 마케팅비를 썼다.
최악의 개봉일이 최고의 시점으로
개봉 첫 주 관객 수가 영화 흥행을 가늠하는 성공 기준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들은 경쟁작이 없는 시기에 최대의 스크린을 확보하고 개봉하려 한다. <왕의 남자>는 개봉 시점과 배급 사정으로 봤을 때도 최악의 시점이었다. <왕의 남자>가 개봉했던 지난해 12월 29일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청연>과 <나니아 연대기> 등 대작이 함께 개봉했다. 게다가 2주 전인 12월 둘째 주에 장동건, 이정재 등 거물급 스타가 버티고 있는 <태풍>과 할리우드 기대작 <킹콩>이 개봉을 한 상태였고, 개봉 2주 후에는 <야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커다란 작품들과 겨루는 시기를 지나면 곧바로 설날을 겨냥한 영화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왕의 남자>의 개봉 원칙은 CJ엔터테인먼트에서 함께 투자를 받은 <태풍>과 2주 간격을 두고 개봉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겨울 한국영화 최고의 블록버스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태풍>은 겨울시즌을 독식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먼저 개봉하겠다고 밝혀왔고, <왕의 남자>는 자연스레 <태풍>의 2주 후인 12월 29일에 개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9일에는 역시 <태풍>을 피한 <청연>과 <나니아 연대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반 대규모 스크린 수 확보는 불가능했다.
배급을 맡은 시네마서비스 측은 “300개 이상의 스크린 수는 불가능하다”고 통보해왔다. 시작은 전국 255개 스크린이었다. 하지만 5일 째인 1월 1일 관객 수 100만을 돌파하며 목표였던 330만 명 돌파는 무난할 조짐이 보였고, 스크린 수는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봉 5주차에 이르러 스크린 수는 최대였던 399개까지 늘어났다. 이후로도 스크린 수는 줄지 않았다. 시네마서비스는 1월 개봉작이었던 <사랑을 놓치다>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대규모 배급을 포기하면서까지 <왕의 남자>의 스크린 수를 줄이지 않았다. <왕의 남자>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승승장구했다. 이것은 결국 대작 블록버스터라 한들 그 작품성이 인정받지 못하면 대중들의 외면을 받는다는 사실의 틈바구니에서 <왕의 남자>가 호재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개봉했던 국내외 블록버스터들은 기대만큼의 완성도를 보이지 못한 가운데 빠르게 사라졌고, <왕의 남자>는 외형적 대작들이 포진한 극장가에서 작지만 알찬 영화가 벌이는 싸움이 결코 위험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결과적으로 <왕의 남자>는 전형적인 개봉 시기 공식을 뒤엎은 사례로 남게 됐다.
시대가 극복해준 사극 장르
사극은 제작비용은 많이 들면서도 전통적으로 초흥행작이 되는 경우가 드문 장르다. 개봉 당시의 다른 여러 가지 사정도 마찬가지였지만, 사극이라는 태생적 특성상 <왕의 남자>가 이토록 히트할 것이라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왕의 남자>에는 일반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주기 쉬운 동성애 코드까지 녹아 있었다. 언론시사회 후의 반응도 ‘영화는 괜찮은데 흥행에 대한 확신은 없다’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왕의 남자>는 이런 단점들조차 흥행의 요소로 부각됐다. 우선 동성애 코드는 기대하지 않았던 신인배우 이준기 신드롬이 불면서 간단히 극복됐다. 이준기의 곱상한 외모는 여성 관객들을 열광시켰고, 이는 크로스섹슈얼이라는 새로운 남성상을 부각시키는 사회적 이슈로 연결됐다. 물론 이 같은 이준기 열풍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젊은 층에 내재돼 있던 ‘예쁜 남자’에 대한 관심이 이준기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비슷한 시기 개봉했던 <브로크백 마운틴> <메종 드 히미코>등 동성애를 다룬 외화들에 대한 좋은 평가와 반응은 상대적으로 약한 <왕의 남자>의 동성애 코드를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줄여주는 역할을 했다.
영화 개봉 중간엔 정치권에서도 알아서 <왕의 남자>를 도왔다. 1월 노무현 대통령이 <왕의 남자>를 관람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정치권에서는 <왕의 남자>를 빗댄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을 연산군에,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자격 논란이 일던 유시민 장관을 공길에 비유하는 정치인들의 발언이 공중파 방송 메인뉴스와 중앙 일간지 1면을 장식했다. 영화를 꾸준히 홍보할 뉴스거리가 떨어져 갈 무렵에 정치인들에 의해 다시금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왕의 남자>가 현실 정치에 대한 풍자로 읽히자 정치에 관심이 많은 중장년층과 남성 관객들까지 극장을 찾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회적 이슈들까지 <왕의 남자>를 도와준 셈이다.
“잘 되려니까 다 도와준 결과가 된 것 같다”는 정진완 대표의 말처럼, 어쩌면 <왕의 남자>의 이 같은 상황극복기는 '성공했기 때문에 성공의 요소로 엮어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분명한 건, <왕의 남자>가 그동안 한국영화가 가지고 있었던 제작비 상승, 스타 의존, 무리한 마케팅 등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충무로에서는 <왕의 남자>의 성공으로 인해 스타 캐스팅에 의존하지 않고, 합리적인 제작비로 승부를 거는 작품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이젠 <왕의 남자>가 거둬들인 1,230만 명이라는 숫자가 가진 의미와 미덕을 충무로에서 실행에 옮기는 일이 남았다.
이글픽처스 정진완 대표 인터뷰“볼거리보단 이야기가 중요”
창립작으로 한국영화사의 어느 누구도 느끼지 못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 이글픽처스 정진완 대표는 <왕의 남자>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우선 축하한다. <왕의 남자>로 인터뷰하는 게 이젠 지겨울 때도 됐을 것 같다.
(웃음) 인터뷰뿐만이 아니다. 예전에 알음알음 하던 강연도 이젠 거의 조직적으로 들어온다. 기업체, 대학원 가리지 않고 <왕의 남자>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왕의 남자>는 한류를 고려하고 만든 영화가 아닌데도 ‘왕의 남자와 한류’ 이런 제목의 강연도 있더라. 강연 다니느라 바쁘다.
요즘 기분이 어떤가?
가끔씩 내가 <트루먼쇼>의 짐 캐리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여기저기 불러내고 이야기하고 그래 놓고선, “이건 다 우리들이 만든 쇼야” 이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그래도 요즘엔 그런 게 좀 많이 나아졌다. 이제야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영화가 엎어질 뻔 한 적이 있었다. 간신히 장혁이라는 배우를 건졌는데, 군대에 가버리고. 그 후로 거의 3개월 동안 프로젝트가 공중에 떠 있었다. 10월에 크랭크인을 하려고 스탭들이 다 모였는데, 마냥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고, 그들도 살아야 하니까 다른 영화 가서 일하라고 하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기다린 것도 다 잘되려고 그랬던 것 같다. 크랭크인이 늦어지면서 KBS 세트장을 활용할 수 있었고, 스타가 없으니 상대적으로 더 짜임새 있어진 면도 있고.
<왕의 남자>가 충무로의 관행을 바꿀 것이라는 말들이 있다.
이번에 깨달은 건데, 우리 관객들은 볼거리보다는 이야기의 밀도에 더 관심이 많다. 따라서 단순한 볼거리를 위해 많은 제작비를 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지금보다 1.5배 밀도 있는 이야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 또,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보다는 각 시점마다 느끼는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은 이야기가 중요하다. 앞으로 이글픽처스의 작품들은 스토리의 내밀함에 관심을 더 둘 것이다.
국내는 장악했는데, 해외에서는 어느 정도 관심이 있나?
대만과 중국, 일본 등에서는 관심이 있는데, 그 밖의 국가에서는 저조한 편이다. 칸에 진출하는 것도 실패했다. 영화제에서는 1,800컷이 넘는 <왕의 남자>를 상업영화로 보는 편이고, 서구 관객들에겐 사설 등의 뉘앙스가 잘 전달되지 않는 편인 것 같다. 이번에 칸 마켓에 가서 좀 팔아볼 생각인데, 한국 관객들이 주는 상을 많이 받아 괜찮다.
캐릭터 사업도 시작했다.
미리 기획한 게 아니어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시작됐다. 많이 늦은 거지. 그래도 <왕의 남자> 캐릭터화가 잘 돼서 다른 한국영화들도 부가상품들로 또 다른 수익을 만들어내는 기반을 만들고 싶다.
<왕의 남자>와 관련돼 가장 고마운 사람은?
이준익 감독, 스탭들 다 고맙다. 그래도 지난 4월 18일 마지막 상영회 때 눈물 흘리던 팬 카페 회원들을 잊을 수 없다. 끝나고 무대인사 하는데 나까지 눈물이 나서 말을 못하겠더라. <왕의 남자>는 ‘폐인’들이 많은 영환데 ‘폐인 마케팅’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왕의 남자> 성공으로 인해 나와 관련 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해하고 술을 사고 다닌 친구들, 가족들도 물론 고맙다.
다음 작품은?
이제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한국의 <에린브로코비치> 같은 영화다. 미국 다우코닝사를 상대로 힘겨운 소송 끝에 승소를 한 한국인 변호사의 실화다. 한국인의 콤플렉스, 큰 것에 대한 동경, 이런 것들이 다양하게 녹아 있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
이준익 감독 인터뷰“절박한 관객들을 건드렸다”
<왕의 남자> 성공의 기쁨을 뒤로 하고, 강원도 영월에서 차기작 <라디오 스타> 촬영에 한창인 이준익 감독과 전화로 만났다.
이 정도의 성공을 예상했었나?
당연히 못했다. 개봉 전에 <공포 택시> 때부터 갚지 못한 빚 30억 원만 다 갚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은 했다. 그런데 한 번에 다 갚는 건 안 될 것 같더라. 그래서 <왕의 남자> 찍으면서부터 바로 <라디오 스타> 시나리오를 썼다. 바로 다음 작품 들어가야 채권자들이 그래도 쟤가 뭔가를 하는구나 하고 좀 기다려 줄 것 같아서.(웃음) 그 덕분에 <왕의 남자> 끝나고도 계속 일만 했다.
<왕의 남자>와 관련해 가장 감격스러웠던 때는?
700만 들었을 때. 그때 빚 다 갚는 수익을 올렸다. 물론 아직 정산이 안 되서 돈은 수중에 없지만 그때가 가장 감격스러웠다. 촬영하면서 콘티 짜다가 내일 모레 돌아올 대출금 이자 막을 고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감격 이해 못한다.
<왕의 남자>의 성공 원인은 분석해봤나?
원래 그런 거 잘 안하는데 하도 질문을 많이 받아서 생각해봤더니, 대중들의 속성이라는 결론이 나오더라. 대중들은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데이터에 의존해 예측한 걸로는 <왕의 남자>는 대박감이 못된다. 대중들의 취향은 예측할 수 없는 거다.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고 무언가 해볼 수 있다는 용기를 가져도 될 것 같다.
그럼 어떤 면이 대중들을 열광시켰을까?
요즘은 고도의 포스트모던사회 아닌가. 점차 개인화되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절박감이 강해진다. 전통적인 계급 안에서 해소될 수 없는 정보격차에 따른 새로운 계급들이 생겨난다. 이런 구조에서 사람들은 더 외로워지는데, <왕의 남자>의 캐릭터 하나하나는 이런 절박감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걸 보면서 각 캐릭터가 다 나와 같은 면이 있다고 발견하고 동화되니까 열광한 것 같다.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과 절박감들이 일종의 페이소스라면 관객들은 이걸 보면서 페이소스가 정화되면서 오는 카타르시스라고 할까, 아무튼 이런 것 때문에 더욱 빠져들고 여러 번 보고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왕의 남자> 전과 후에 달라진 점은?
불편함이 사라졌다. 돈에 대한 공포에서 사라졌다는 거, 그리고 채권자들에 대한 미안함이 사라졌다는 거. 그런 면에서 많이 편해졌다.
영화에 대해 아쉬운 점은 없었나?
없다. 빚 다 갚았는데 뭐가 아쉽나. 후회 없다. 난 예술을 하는 게 아니다.(웃음)
<라디오 스타>는 어떤 영화인가?
왕년의 스타 박중훈과 매니저 안성기가 시골에서 겪는 휴머니즘을 담은 영화다. <왕의 남자>와는 반대로 찍을 거다. 다른 사람이 찍은 것처럼 완전히 반대로 찍어보고 싶다. 내가 원래 기억상실증이 좀 있어서 예전 작품 했던 걸 금방 까먹는 경향도 있긴 하니까 다른 영화처럼 느껴질 거다. 무엇보다 재미있게 만들 거고, 올 추석 개봉이 목표다. 앞으로 두 달 반 동안 영월에서 다 찍고 올라갈 생각이다.
송주연 기자
첫댓글 다시봐도 감동인 기사요~~~~ 감독님의 마인드...ㅋㅋㅋ 맘에 듭니다~~~
뿌듯 뿌듯~~
아... 종영회 부분은 정말... 다시 안습이오... 근데 저기 상영관내사진 우리 종영회날 아니오? 찍힌 츠자들 누구시오?ㅋㅋㅋ
종영회때 찍힌 사진이 이리 떠돌고 있을 줄은..ㅋㅋ이거 어디 나왔던 기사요? 혹시 맥스무비?
종영회.... 그 기자들과 들락날락거리는 사람들, 대사치기와 따라하는 것도 모자라 잡담, 발길질 같은 울림이 느껴져서 굉장히 짜증났소. 하지만 넘넘 좋았소.ㅋㅋㅋㅋ
이제 거의 외울 지경이 된 내용이건만... 밀려오는 감동에 또 눈물 질질 흘리고 있소... ㅎㅎㅎ 웃으면서 눈물 흘리고 있는 중이오....
할머니님을 오랜만에 뵈니 너무 반갑소..아놔~~감독님의 저 포스...이래서 왕의남자가 탄생할 수 밖에 없었음을 다시 한번 느끼고 갑니다.^^*
영화계의 새 지평을 연 것은 확실하오!!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오!!
몇번의 고난끝에 성공한왕남 마음이 벅차오
하늘이 내린 영화...
오오... 맞소...!! ㅎㅎㅎ
우리... 왕남 흥행의 뇌관이라니.... 왠지 감동 적이요.. 그러니까.. 우리를 더 팔아 먹어도 좋으니까.. 해외에서도 신화를 창조 하는겁니다.. 우리들의 왕의남자~!!
마저 우리팔먹는 짓은 해도 되는데... 말야 팍팍 파시라구요^^
옳소!!!!!!!!
할머님!! 감사 감사!! 넘 기브오 우리들이야기 살~ 작 덜추어 내주시다니..... 안습 안습~~!!
정말 기사를 보며..이렇게 눈물 나고 가슴벅차오르는지 나의 일같이 느껴지는구려....왕남은 정말 잊을수없을거요.
기분 좋은 소식 잘 보고 갑니다. 구절구절이 저릿하오.
그간 왕의남자에 대한 정리를 생각해서 빚 다 갚아서 아쉬움이 없다는 말씀은 달리 해석하겠습니다.
나는 예술을 하는 게 아니다. .. 나는 예술을 하는거니까 다들 조용히 해! 하는 강압이 없어서 좋았습니다. 자유롭게 모두에게 대화를 청하는 영화. 감독님 정말 존경합니다.
아아.. 소원이 있다면 나중에 이준익 감독님을 만나뵙고 싶다는 거... ㅠㅠ
감사합니다^^
돈과 스타에 미쳐버린 깐느는 퇴락한 영화제중의 하나!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