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린 사람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입속의 검은 잎>(1989)-
해설
[개관 정리]
◆ 성격 : 비판적, 풍자적, 현실 참여적, 극적
◆ 표현 : 극적 상황(인물, 사건)을 제시하여 주제를 형상화함.
우의적 방식으로 모순되고 부정적인 현실을 비판, 고발함.
화자는 자신의 정서를 드러내지 않고 극중 사건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관찰자적 태도를 취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사회자 → 권력에 아부하는 자, 타락한 지식인
* 사회자의 행동의 변화 : '외침 → 맹세 → 흐느낌(감동)'으로 아부의 정도가
점점 심화됨.
* 사회자의 외침 → 권력자를 미화 옹호하는 말
* 사회자의 맹세 → 권력자가 사리사욕이 없는 이타적인 존재임을 강조함.
* 사회자의 흐느낌 → 권력자가 지극히 희생적인 존재임을 강조함.
*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 겸손한 체하는 그분의 모습
* 군중들(울먹
→ 이성과 비판, 분별력을 상실한 채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모습
* 신, 유령 →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권력
* 목소리 → 비판적 지식인, 각성한 민중
* 미치광이 → 건전한 비판이 수용되지 못하는 미성숙한 현실임을 단적으로 보여줌.
*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 관용적임을 과시하는 그분의 모습
*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 반복을 통해 민중들의 우매함과 권력자의 절대성이 강조됨.
*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 끝내 실체를 드러내지도 확인할 수도 없는 상태
◆ 인물의 상징성
♠ 사회자 → 권력자를 옹호하고 미화하며, 그 실체를 왜곡하며 그것에 아부하는 선동가
♠ 이분(그분) → 폭력을 통해 국민을 굴복시키는 독재자라기보다는 그럴듯한 명분과
교묘한 통치술로 대중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권력자
또는 통치자
♠ 군중들(사내들, 여인들) → 권력에 아부하는 선동가의 선동에 이성과 비판을 잃어가는
우매한 대중
♠ 미치광이(목소리) → 권력자의 교묘하고 부당한 통치술에 문제를 제기하며 비판하는
의식 있는 지식인
◆ 주제 → 지배층의 기만적인 통치 방식과 우매한 대중에 대한 비판
[시상의 흐름(짜임)]
◆ 1~10행 : 권력자에 대한 사회자의 아부와 옹호와 찬양
◆ 11~13행 : 군중의 환영을 받는 권력자
◆ 14~16행 : 권력자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비판의 '목소리'
◆ 17~22행 : 비판 정신의 실종과 우매한 대중의 승리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무비판적 현대인의 모습과 전체주의적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긴 시이다.
이 시는 우화적인 방식을 통해 지배층의 기만적인 통치 방식과 이에 현혹되어 살아가는 우매한 대중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 시에서 최고 권력자는 결코 자신의 모습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를 지지하는 존재에 의해 그의 실체는 왜곡되고 미화되며, 대중들은 이에 기꺼이 현혹되어 이성을 상실하고 만다. 이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은 미치광이로 내몰려 그 사회에서 배제된다. 이 시는 과거 독재 시절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고, 우리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지배와 자발적인 복종에 대한 풍자로도 볼 수 있다.
흥분한(홀린) 사회자와 흥분한(홀린) 군중들, 그리고 이들의 전폭적지지를 받고 있는 그분(권력자)은 분명 이 사회의 미친(홀린)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비도덕적 사회 속에서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지배 - 피지배의 교묘한 관계를 구축해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다. 이러한 비도덕적 사회 속에서도 도덕적 인간은 항상 있는 법이다. 바로 '목소리(미치광이)'의 주인공이다. 올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사회야말로 지극히 비도덕적인(미치고 홀린) 사회인 것이다.
합리적인 비판과 다양한 의견 제시가 봉쇄되는 집단의 광기 어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소개]
기형도(1960~1989) : 시인
1960. 2.16(음력)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 출생 3남 4녀중 막내로 당시 부친은 황해도에서 피난 온 후 교사를 거쳐 공무원으로 재직함. 서해안 간척사업에 실패한 부친이 유랑 후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 정착하여, 이사하게 됨.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 수해 이재민이 정착촌을 이루었던 소하리는 아직까지 도시 배후의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1985년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인 "안개"의 배경이 된다. 시흥국민학교, 신림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1979)하여 정치외교학과를 졸업(1985)함.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에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함. 1989년 3월 7일 새벽(03:30경), 가을 시집출간을 위해 준비하던 중 종로 2가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 됨. 사인은 뇌졸중.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
대학 입학 후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수업 시작한 이후 대학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영하의 바람]이 당선없는 가작으로 입선, [식목제]가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 시부문에 당선됨. 안양 근교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안양의 문학동인인 '수리'에 참여하고 동인지에 [사강리]등을 발표, 시작에 몰두 함. 대부분의 초기작이 이 시기에 씌어짐. 전역, 복학후 [겨울판화] [포도밭묘지] [폭풍의 언덕]등 다수의 작품을 쓰며, 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시작함.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됨. 이후 문예지에 [전문가][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늙은 사람][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백야][밤눈][오래된 서적][어느 푸른 저녁] 등의 시를 발표. 중앙일보에 근무하며 [위함한 가계 1969][조치원][집시의 시집][바람은 그대쪽으로][포도밭 묘지1,2][숲으로 된 성벽]등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며 문인 및 출판관련 인사들과 활발히 교유함. <시운동>동인. 1989년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함)이 발간되었고 유작으로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1990)], [기형도 전집(1999)]과 시 [입속의 검은 잎], [그날], [홀린 사람]이 발표됨.
그의 작품은 주로 유년기에 경험했던 일들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나 회상, 그리고 현대의 도시인들의 살아가는 생활을 독창적이면서도 강한 개성이 묻어 나오는 시어와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에는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 그리고 불행의 이미지가 환상적이고 일면 초현실적이며 공격적인 시인 특유의 개성적 문체와 결합하여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평가받는 독특한 느낌의 시를 이루어 내고 있다. 동일 이미지의 반복이 중첩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든지 돌연한 이미지와 갑작스런 이질적 문장의 삽입, 도치, 콤마에 의한 분리, 감정의 고조(그는 감탄사를 연발한 드문 경우의 시인이었다)등 시어 구성과 문체가 일관되게 지속된 그의 암울한 세계관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형상화 시키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유년시절 불우한 가족사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체험과 이에 대한 강렬한 심미적 각인이 시 전체에 가득한 삶에 대한 부정적 영상을 이끈 원인이자 그의 시적 모티브를 유발하고 있는 동인이며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닫고 비관적 세계로 침잔케 한 주된 이유로 이해되고 있다. 그의 시에는 현실에 대한 역사, 즉 역사적 전망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 말 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초현실적 이미지를 추구하면서도 일상의 현실을 비판한 독특한 시세계는 주목할 만 하다 하겠다.
첫댓글 선에 가려진 악을 미화하는 사회자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가을정취 만끽하면서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