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COVID-19가 국내에서 한풀 꺾이긴 했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 여러분들은 '결함이 있는 일상'을 보내고 있으실 겁니다. 네, 저도 마찬가지고요. 거기에 더해서 저는 오른발에 뼈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아서 깁스까지 하고 있는 중입니다. 4월 22일에 완전히 풀어버리는데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이 겹쳐서인지 요즘 제 머릿속에는 펜들이 더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하나 더 데려왔습니다. 뭐냐고요?
▲'아메리고 베스푸치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바로 이 분입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 득필인데 웬 초상화냐. 이번 펜의 이름이 이 분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발 콜론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상대적으로 아는 사람이 적습니다. 크리스토발 콜론의 항해에도 참여했고 선박 건조에도 해박해서 2, 3차 항해를 위한 배를 건조했다는 게 제품 설명입니다. 사족으로 제가 결제 버튼을 누르자 품절 표시가 뜨더군요. 마지막 재고였나봅니다.
이놈의 케이스는 왜 이리 거대하담?
이 모델을 포함, 저는 한정판을 두 자루 가지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이탈리아 펜이군요. 오늘 어머니가 외출한다는 점을 이용해서 어제 새벽에 주문하고 오늘 오후에 몰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한정판들이 모두 이런가요? 오로라 단테 푸르가토리오도 거대한 케이스를 자랑했는데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더합니다. 크기도 크기지만 아주 묵직했어요.
▲'뭘로 만들었길래 이렇게 무겁담?'
택배 박스를 뜯어서 열어보니 에어캡 속에 크고 검은 박스가 자리 잡았길래 꺼내서 열어 보았더니 아래 사진과 같은 모습으로 제게 인사를 건넵니다.
▲'지퍼팩이 옥의 티'
세상에, 이런 케이스는 처리 곤란입니다. 만약 이런 케이스가 있으시다면 절대 버리지 마십시오. 혹여라도 되팔게 될 때 케이스 여부가 특히나 크게 작용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케이스는 제 방 옷장 위에 올라가게 됐습니다.
머리는 무겁고 몸은 가볍다
이 펜의 캡은 목재입니다. 범선목을 사용했고 배럴의 중결링은 순은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캡탑에는 항해선을 형상화한 양각을 새겨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고 싶게끔 만듭니다. 또 배럴에는 음각도 새겼군요.
▲'한정판임을 알리는 음각'
▲'931개 한정 중 817번째 모델'
캡을 감싸고 있는 나무는 범선목입니다. 견고하고 해풍에도 강하며 내구성이 뛰어난 목재라고 하는데요. 캡이 펜 본체보다 무거워요. 필기할 땐 캡을 빼고 써야겠습니다. 또 아무래도 나무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갈라지거나 하진 않을까 좀 걱정스럽습니다.
▲'다른 펜에 비해 높은 클립'
캡의 직경이 워낙 큰데다 뱃고동을 형상화한 클립은 다른 펜보다 높이 자리 잡아서 보관함보다 높습니다. 그냥 넣어도 걸리는 느낌은 없지만 상처를 방지하기 위해 조금 기울여 수납해야겠군요.
두 가지 색상이 있었지만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두 가지 색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블루 마블, 다른 하나는 블랙이죠. 단순히 색상만 다른 것이 아니라 잉크 충전 방식까지 다릅니다. 블루 마블은 버튼식 필러를 사용하지만 블랙은 컨버터를 사용합니다. 가격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블루 마블이 상대적으로 저렴했습니다. 외관이 더 아름다운 블루 마블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버튼식 필러는 다소 의심스러워 신뢰성이 높은 컨버터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블루 마블을 리뷰한 알 수 없는 블로거는 버튼식 필러가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라 썩 내키지 않았지만 더 예뻐서 블루 마블을 선택했고 버튼식 필러의 신뢰성에 대해 의문부호를 붙였습니다.
물 위에 배를 띄우는 것 같다
델타 펜은 이게 처음이라 델타의 개성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18k M촉은 순풍을 타는 배마냥 종이 위를 경쾌하게 나아갑니다. 같은 이탈리아 펜인 오로라와는 다른 기분 좋음을 선사합니다.
▲'FACTFULNESS'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18k M촉은 단테 푸르가토리오의 18k촉과는 달리 부들부들한 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단단한 펜촉만을 써왔던 저로써는 이 펜촉에 적응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푸르가토리오의 18k 촉(좌)과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18k 촉(우)'
델타의 펜촉도 오로라의 그것 못지 않게 큽니다. 다만 델타는 미끈한 유선형에 하트 모양의 하트홀이 우아한 느낌을 주지만 오로라의 펜촉은 폭이 다소 넓고 각이 져 있는 게 역동적으로 생겼습니다. 돌체비타 오버사이즈는 149에 필적할만큼 큰 펜촉을 달고 있는데 이 한정판 모델은 그렇지 못하네요.
이제는 사라진 델타
델타라는 브랜드를 알게 된 건 2007년 무렵의 일입니다. 펜숍에 있는 오버사이즈 모델들을 보고 내 손으로 저런 것들을 제대로 쥘 수 있을까 싶었고 델타는 그다지 눈이 가는 브랜드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느 때부터 델타가 국내 펜숍에서 자리를 뺐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 때는 판매량 저주로 한국에서 철수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장의 쇠퇴로 인해 2017년에 결국 폐업했다네요. 이렇게 폐업할 줄 알았다면 델타 펜을 한 자루쯤 들이는 게 좋을 뻔했습니다. 정식 판매를 할 때에도 델타가 결코 저렴한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가격이 많이 뛰었다고 들었는데 Ebay를 보니 가격이 판매자 마음이더군요. 회사가 이미 폐업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새 것을 구하기 힘들어질테고 그만큼 판매가도 올라갈 것 같습니다.
병 따위는 펜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지 못한다
펜 보관함은 이제 자리가 거의 다 차 갑니다. 그런데 프랑스 펜을 웬만큼 사들이니 이제는 이탈리아 펜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40구가 아니라 100구짜리 보관함을 사서 책장에 둘걸 그랬어요. 몸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래도 펜을 잡겠다는 마음만큼은 그대로입니다.
뒷 이야기 하나
40구 펜 보관함이 거의 들어찼습니다. 카페 가입 전에는 5자루 미만이었던 펜이 지금은 8배 정도 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별로 얘기를 하지 않으셨지만 급증한 펜은 어머니의 감시 대상이 되어 버렸고 저는 수령지를 회사로 잡는다거나 친구나 인근 상점에 맡겨서 숨겨 오게 됐습니다. 그나마 보관함을 열어보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라고 할까요? 당분간은 자중해야겠습니다.
뒷 이야기 둘
개인적으로 돈 얘기는 잘 하지 않는 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생필품이지만 돈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다소 천박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 펜을 저는 할부로 구입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반성하고자 하는 의미입니다(일시불로 샀어도 적자가 나진 않았겠지만). 뒤가 남는 걸 싫어해서 지금까지 모든 펜은 일시불로 결제했습니다. 149, 에드슨, 세레니떼, 단테 푸르가토리오도요. 제가 미혼인데다 음주, 흡연도 하지 않고 심지어 미용실도 가지 않을만큼 외모 관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집에만 있으면 돈을 덜 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네요. 오히려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돌아보면서 회한에 빠지기도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 펜을 물색하고 현 재정 상황을 계산하고 지출을 보완할 수단을 강구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새로운 펜을 얻었다는 기묘한 성취감과 회한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껜 죄송하지만 제 생명이 끝나야 이것도 끝이 날 것 같습니다.
첫댓글 외모를 보면 닙도 엄청 단단할 것 같은데 부드럽다니 궁금하네요^^ 나무소재라는 것만도 볼때마다 잡고 싶은 펜일것 같습니다
볼때마다 흐뭇해집니다. 지금도 그 쪽으로만 눈이 가네요.
정성어린 후기 잘봤습니다. 클립이 정말 크고 아름답네요. 부들부들한 필감이라는 것도 궁금해집니다. 잘보고 갑니다.
클립이 너무 커서 똑바로 눕히지 못하고 돌려 눕혀야 합니다. 글씨 쓸 때를 보면 오로라에 비해 펜촉이 벌어지는 게 좀 더 잘 보여요.
아메리카의 기원이 되시는 분이군요.
항해사라는 점을 범선목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네요.ㅎㅎ
캡만 목재로 된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었는데,
덕분에 좋은 만년필 구경하고 갑니다.ㅎㅎ
범선목과 블랙 레진이 어우러져 고급감을 한층 더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블루 마블을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잉크 충전 방식의 문제로 포기했죠.
멋진 펜이네요.. 그리고 재미있는 후기 잘 봤습니다 ^^
긴 글임에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