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01
6월27일[연중 제1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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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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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griFtue4fQ
[서울대교구 양재모 안드레아(사목국 직장사목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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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영혼없는 로봇같은 신앙을 극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야트막하지만 산상에서 행하신 설교를 요약하면 세 가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가르침을 들었으면 실행하십시오.
당대 거짓 예언자들의 만행을 목격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저지르고 있던 악행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당시 거짓 예언자들은 ‘주님, 주님!’ 하며 입으로는 늘 그분을 찾았지만, 언행이 조금도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가운데 어떤 목자나 지도자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선포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결실과 성공을 주님께로 돌리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얼굴, 자신의 성공만을 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찾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며, 주님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거나 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삶을 산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교회는 실행 쪽으로만 과도하게 지우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도와 영적 생활과 사랑의 실천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행동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극단적 선택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업적은 속 빈 강정과도 같습니다. 연료가 없는 멋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최첨단 기술이 장착되어 있으나 영혼 없는 로봇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분석해보면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입니다.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실행은 그 다음입니다. 진지한 자세로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본질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다음 순서가 실행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 측의 응답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인간 측에 의무와 과제를 지우는 강제소집령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행 자체였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인간 측의 응답도 책임감이 있으려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 사랑으로부터 분출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인간 측의 응답은 사랑 안에 실행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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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말의 품격>
살아갈수록 점점 더 크게 느끼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말, 언어의 중요성입니다. 정말이지 말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유창하고 거침없는 말, 설득력있고 호소력 있는 말을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다른 무엇에 앞서 진실된 말, 진심이 담긴 말, 그래서 살아 숨쉬는 말, 말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이 정말 중요한 것이, 말은 곧 한 인간 존재의 인격과 삶, 영혼과 정신을 외부로 드러내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말은 한 인간 존재 안에 거처하시는 주님 현존을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생각없이 던진 말로 큰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수로 내뱉은 말로 인해 두고 두고 후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난 지방 선거 때만 해도 보십시오. 생각없이 ‘툭’ 하고 던진 말 한 마디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인생 한 방’이라고, 말 한 마디 실수한 탓에 어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쌓아온 자신의 정치 기반이 뿌리채 흔들렸습니다.
말을 시작하기에 앞서 언제나 진지하게 숙고해야겠습니다. 입에서 빠져나간 말은 이미 ‘엎지른 물’과 같습니다. 다시 주워 담을수가 없습니다.
입을 열기 전에 늘 고민해야겠습니다. 내가 하는 이 말로 인해 혹시 단 한 사람이라도 상처를 입는 것은 아닌지? 내가 하려는 이 말은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말인지?
주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에게 베푸신 여러가지 은총의 선물 가운데, 말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큰 선물입니다.
잘 다스리고, 잘 사용해서 이웃들을 치유하고, 이웃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라고 부여하신 선물이 곧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엄청나게 쏱아낸 말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숙고 작업을 한번 해보면 좋겠습니다.
언행일치가 되고 있는 말입니까? 혹시라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은 말은 아닙니까? 이웃의 입가에 미소를 돌게하는 희망의 언어입니까? 이웃을 영원한 생명으로 안내하는 구원의 도구입니까?
“사람은 홀로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다. 사람이라는 각기 다른 섬을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말이라는 교각(橋脚)이다.
말 덕분에 우리는 외롭지 않다...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은 구조가 흥미롭다.
입 구(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싸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 말은 마음을 담아낸다. 말은 마음의 주인이다.” (‘말의 품격’,이기주, 황소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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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I9gcXv1n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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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마음이 평화로울까?>
미국의 첫 번째 수도회 창설자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첫 번째로 시성이 된 분이 엘리자베스 앤 시튼입니다. 그녀는 19세에 부유한 사업가 윌리엄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고 잘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와 병마의 어려움이 그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남편의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필리치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탈리아 좋은 날씨에서 병도 고칠 겸 사업의 도움도 받을 겸 이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병자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검역소에서 몇 달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때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때 느꼈던 평화를 남편이 검역소에서 나오자마자 죽었어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필리치의 집안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모 마리아와 성체에 대한 열망이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와서 개종에 대한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마음에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면 평화로울 것 같았지만, 그러면 독실한 성공회 집안인 가족들과는 멀어져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사회적, 재정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05년 3월 14일 가톨릭교회에 입교합니다.
개종 후 엘리자베스는 사회적 배척과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를 부양해야 했고 자신의 신앙과 필요한 수입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볼티모어의 존 캐롤 대주교를 비롯한 여러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의 격려를 받아 그녀는 학교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습니다. 마치 자기 행동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딸의 죽음과 지속적인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1809년에 미국 최초의 종교 단체인 성 요셉 사랑의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시튼 수녀회로 교육사업을 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수천 명의 수녀들이 마더 시튼의 뜻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가톨릭 교구 학교 시스템의 토대를 마련하고 여러 세대의 교육자와 수녀들에게 영감을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9월 1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최초의 미국 원주민 성인으로 시성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개인적인 비극에도 신앙에 관한 깊은 탐구가 어떻게 자신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랜 평화와 도움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행동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짓는데 하나는 반석 위에, 하나는 모래 위에 짓습니다. 집이 행동입니다.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뜻에 따라 좌지우지됩니다. 여기서 뜻은 두 종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뜻은 내가 스스로 창조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나의 창조자로 인정할 것인지 두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행동의 의도가 나의 뜻인지, 내 창조자의 뜻인지에 따라 모래가 될 수도 있고 반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은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반석이 된 것입니다. 반석은 나의 죽음 뒤에도 지속되지만, 모래는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그런 행동은 아무것도 남길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뜻에 행동의 기초를 삼는다면 벌써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뜻에 기초한 행동은 내가 죽으면 끝장납니다. 그러나 더 오래가는 무엇의 뜻을 따른다면 나의 행동은 그 무언가가 지속되는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평화롭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박치기왕, 김일은 당시 먹고살기 힘들었던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자기 머리가 깨져 더는 박치기를 할 수 없을 때도 그는 국민을 위해 박치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 어리석게도 그때 알았습니다. ‘온 국민이 내 박치기 한 방에 이렇게 통쾌함을 느끼는데 내가 감히 박치기를 멈출 수 있을까. 이 한 몸 아프다고, 조금 힘들다고 어찌 못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박치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웃고 기뻐하고 행복했었다면 나 역시도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김일의 처음 박치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고 나중 박치기는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도와 뜻을 가지고 하느냐가 행위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 박치기가 국민의 뜻으로 이뤄진 다음에는 국민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그 의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먼저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다 부모의 뜻을 따라줍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양심 시스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녀의 어리광과 마음은 부모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그 행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따름이 반석처럼 오래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부모가 하느님이라면 당신을 위해 행한 뜻은 영원히 지속합니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물 한 잔 준 행위도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보다는 나는 나를 나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로 여기는지, 아니면 나의 창조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가 나에게 바라는 뜻이 있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매일, 아니 매 순간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제일 좋겠지만, 아직은 『하.사.시.』를 매일 읽으며 그 뜻 안에 머물려고 합니다. 매일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내가 느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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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상황에 대처하는 인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황을 문제(Problem)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제(Task)로 보는 겁니다. 문제는 수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 있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순위가 정해집니다. 문제를 떠올리면 긍정적이기보다는 일단 머리가 아프기 마련입니다. 과제는 능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계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초가집은 기와집으로 바뀌고, 흙길은 포장이 되고,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습니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하나씩 생겼습니다. 과제는 희망이 되고, 과제는 성취가 되고, 과제는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을 문제로 보느냐, 과제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상황은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려의 시인 원천석은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참 아름다운 글입니다. 비슷한 시조로, 길재는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글입니다. 인간사 희로애락이 참으로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꽃이 피면 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국가도 찬란한 꽃이 피면 사라지는 것이 이치라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는 이방원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 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왕조는 사라지고, 화려했던 궁궐은 사라졌지만, 우리 조상들의 멋진 풍류와 문화는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흥망성쇠를 겪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던 예언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던 슬픈 역사도 있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고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의 시대를 지내야 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비극과 고통을 ‘문제’로 생각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새롭게 일어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비극과 고통을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를 빼앗겨 유배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희망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 희망이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부활 신앙’입니다. 그 희망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희망을 준비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희망을 온몸으로 드러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문제로 생각하면 피곤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규율과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혼인법을 지켜야 하고, 금육과 금식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에는 미사참례를 해야 하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문제투성이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문제로 접근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리면 곧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과제로 생각하면 희망이 보입니다.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부귀보다 가난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과제로 접근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릴지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과제’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을 문제로 인식하는지, 과제로 인식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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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21-29: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이라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착하게 참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22-23절)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름과 능력을 빙자하여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치유나 기적을 행하는 것이 하느님과 가까이 있고,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신다. 처음에는 제대로 믿고 덕을 쌓으며 기적을 일으키고 마귀도 내쫓을 수 있었을지 모르나, 나중에는 자기를 내세우는 거짓 모습과 욕망으로 기우는 모습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면서도 진실한 믿음의 행실이 따르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가를 모래 위에 집짓기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23절) 하신다. 이 말씀은 현세의 삶과 그것이 맺는 열매와 그 안에서 덕이 얼마나 큰 힘을 미치는가를 가르치신다. 덕의 힘은 삶의 어려움에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지닌다. 그는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어떤 재앙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반석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강물은 유혹과 박해의 형태로, 꿋꿋이 서 있는 듯 보이는 사람에게까지 들이친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바닥과 기초로 모시고 있지 못하면 무너지고 만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이다.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져 모든 박해를 이겨낼 수 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며,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 유혹이 불어 닥치면 그 집은 무너진다. 사악한 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집은 모래 먼지로 가득하고 성난 물이 그 마음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이 혼탁한 죄의 강물은 그 집의 주춧돌까지 뒤흔든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서 권위를 느꼈다고 한다. 그 권위는 그분의 말씀에서 드러난 사랑 때문이었다. 참사랑에서 참된 권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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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서 산상 설교 부분에 배치합니다.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의 계명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여 주고 계십니다. 산상 설교는 참행복을 시작으로 율법의 완성에 관한 가르침과 그 밖의 여러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가르침의 결론으로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자신이 가르침을 많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들은 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참된 믿음에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천 없이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실천은 우리 믿음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실천 위에 세워진 믿음만이 더 굳건하게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몸소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만이 하게 되는 체험이 있고 그 체험 안에서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어려움과 고통이 닥칠 때 쉽게 무너집니다.
좋은 말씀은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유튜브,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묵상 글과 아름다운 글귀들을 서로 나눕니다. 이는 아름다운 일이고 우리 구원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이 남았습니다. 서로 나눈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었던 아름다운 말씀은, 나아가 참사랑의 실천으로 나누어져야 합니다. 이 실천 위에 자리 잡은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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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은 생활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1-27)
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 또는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즉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생활도 아니고, 생각만 하는 생활도 아니고, 온 삶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신앙은 생활”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인간 구원’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희망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은, 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지도 않고,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사랑’을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들’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1코린 13,2) <사랑이 없으면 신앙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3) 그렇다면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라는 22절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언을 한 것과 마귀를 쫓아낸 일과 많은 기적을 일으킨 일은 다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께서 그 일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예언이니 ‘거짓 예언’입니다. 또 마귀를 쫓아낸 일과 많은 기적을 일으킨 일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니, 그 일들은 모두 ‘속임수’, 즉 ‘가짜’입니다. 23절의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라는 말씀은, 그들이 행한 예언과 마귀를 쫓아낸 일과 기적을 일으킨 일이 모두 ‘불법’이라는 뜻인데, 그 일들은 ‘가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거짓 예언과 거짓 기적을 행하면서 감히 ‘주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4) 뒤에 이어지는 24절-27절에서는 ‘실행’이 건물의 기초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표현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뿌리’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리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고,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건강하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린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을 무너뜨리는 비, 강물, 바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말하는 ‘환난과 박해’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과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미련 없이 금방 신앙을 버립니다. 그러나 믿음과 삶이 하나인 사람, 즉 ‘신앙이 생활인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를 잘 참고 견디고, 결국 그것을 극복합니다. 여기서 각자 자기 자신이 자기 집을 짓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인생이라는 집은 주님이 아니라, 내가 짓고, 내가 삽니다.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것이지만, 그래도 내 인생은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살아 주시지 않고, 내가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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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명선 사도 요한 신부님]
<주님! 주님!>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에게 당신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주님! 주님! 하며 당신을 찾기만 한다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기도를 할 때, 예수님께서 게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39) 하고 기도하신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려운 처지나 간절한 바람이 있을 때, 자신의 개인적인 원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래서 표현으로는 “아버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바람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주님! 저는 다른 것은 잘 모릅니다. 제가 단지 원하는 것은 '당신 뜻대로 마시고 제 뜻대로 해주이소!' 이번에도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기도고 뭐고 다 그만 둘랍니더.(기도든 신앙생활이든 모두 그만 둘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협박성 거래를 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는 실천적 행동도 없이 말로만 믿음의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내 이름으로 마귀를 좋고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다고 할지 모르나 나에 대한 믿음도 가르침에 따르는 행동도 없는 너희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뜻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비바람과 폭풍우가 쳐도 안전한 반석위에 집을 짓는 현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이지만, 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비바람이 치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당신에 대해서 배워서 알고 있다거나, 당신의 이름으로 불렀고, 기적을 행한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매일의 생활 속에서 당신의 뜻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그리고 자신과 가족들 안에서, 이웃 형제들과 직장동료들 안에서, 세상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을 했느냐가 구원의 열쇠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본질이신 사랑을 찾고 실천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한 가지라도 내가 먼저 실천하는 행동을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나의 귀한 아이들아! 너의 그 모습을 통하여 나의 사랑이 드러났으니 너희에게 멋진 선물이 내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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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내 뜻대로 되기를 얼마나 많이 기도했던가?>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서울대교구 성소지에 실린 주님의 기도에 관한 내용 중의 일부다. 내 뜻대로 되기를 얼마나 많이 기도했던가?
신학생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중에 ‘만약에 아버지의 뜻이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날부터 한 달간 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신부가 너무나 되고 싶었고, 신학교에서 나온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한 달간 하느님께 울부짖었다.
그렇게 한 달간 버티다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교수 신부님이나 주교님이 ‘자네의 길은 이 길이 아니네’ 하고 말씀해 주신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느님께 말씀드리면서, 그렇지만 ‘지금은 신학교에 있으니 지금 당신의 뜻은 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알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고자 할 때 얼마나 큰 자유를 느끼게 되는지 모른다. 사실 그때까지 나를 쫓아내지는 않을까 하며 얼마나 교수 신부님들의 눈치를 보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고백을 하고 난 후, 신부님들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신부님들의 도움을 받아 사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자유로워졌다.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뜻보다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정말로 ‘하느님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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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상영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평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잘 알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부였고 농부였고 병자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양과 이리, 가시나무와 포도, 엉겅퀴와 무화과와 같은 비유로 들어 말하면 그들은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배운 학식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인도 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소위 특별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그 유별난 무엇인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는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겸허함이며 신뢰감입니다.
농부가 벌판에 씨를 뿌립니다. 그 씨앗들은 자라날 것이고 적절한 계절이 오면 반드시 싹이 틀 것이라는 것을 농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씨앗들은 반드시 싹을 틔웁니다. 농부는 기다리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계절이 오면 씨앗은 싹이 트고 열매를 맺습니다. 거기에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무에게는 속임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무로부터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장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에게는 속임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산은 정치가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닙니다. 산이나 바다로 갈때면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어느곳으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산으로부터 올까요, 바다로부터 올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장을 해제시켜도 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게 때문에 오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한 그루 나무에게로 걸어갈 때 문득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그 나무로 부터 오는 느낌이 아니라 우리 내부로부터 옵니다. 나무와 더불어 있으면 우리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고 마음편하게 한가로이 노닐 수가 있습니다. 꽃은 갑자기 우리를 습격하거나 나무는 도둑이 될 수 없으며 우리로부터 어떤것도 훔쳐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산에 갈때나 바다로 갈때나 숲으로 갈때나 나무와 함께 있을때나 우리는 경계심을 버리고 무장을 해제합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공업화나 기계화, 기술발전이 진전되지 않은 나라일수록 더욱 많은 대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따라서 더 깊이 신뢰하는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술발전이 없는 사회, 과학이 없는 시대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전 생애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소박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겸허함과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은 그토록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인류의 행복에 조금의 기여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줄어들었습니다. 기계장치로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욱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덜 필요해질수록 우리는 점점 자신이 하찮고 보잘 것 없으며 무의미한 존재인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머지않아 컴퓨터가 우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전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릴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아무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아이들까지 우리를 필요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가, 복지단체가 그들을 보살펴 줄 것입니다. 우리의 늙은 부모들조차도 이제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설 좋은 양로원들이 있어서 그들을 편안하게 모실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나 자신만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 또한 나를 필요로 합니다. 내가 없다면 상대방도, 상대방이 없다면 나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이 점점 메말라가며 믿음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연과 더불어사는 깊은 믿음의 차원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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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
예수님은 강생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초지일관하게, 당신의 사명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임을 삶을 통해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자기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 총리 지명 후 14일 만에 결국 사퇴한 분이 어느 교회의 간증에서 언급하기를, 우리 민족의 일제 식민과 6.25 전쟁이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해서 믿지 않은 국민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한국기독교협의회에서 이 사안에 대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곡해가 잡음을 일으킨 것 같다.』 하고 발표했다고 하더군요. 진정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예수님의 심령과 같은 지향이 아니라 단지 입술로만 주문을 외듯이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숙고해 볼 일입니다.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기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보다 우리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하느님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일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도의 말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끝을 맺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때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삶은 아는 것만큼 살면 족하다, 고 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문제는 대부분 알지 못해서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아는 만큼 살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앎이 머리로 아는 지식일 뿐, 몸으로 경험하고 체득된 앎이 아니기에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지는 한 마디로 머리로 아는 지식과 삶에서 나오는 지혜는 엄연히 다르다, 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일부 개신교와 가톨릭과의 신학적 논쟁 가운데 하나가 믿음과 행동의 상반된 견해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주님, 믿습니다.’고 열렬히 외쳐댑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에서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구원의 최우선 순위이지만 믿음과 동시에 주님을 섬기는 행위를 실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입으로만 주님, 주님’을 부른다고 해서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라, 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이 바로 이를 입증해 줍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꾀어야 보배’라는 속담대로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은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의 고백은 모래 위의 집짓기와 다를 바가 아니라고 오늘 복음은 적절한 비유로 강조하셨습니다. 누구의 집이 튼튼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큰비가 오면 금방 알게 되어 있습니다. 큰물이 들이닥치면 확고함과 확고하지 않음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사상누각은 큰비가그오거나 큰물이 밀어닥치면 쉽게 쓸려 내려앉고 맙니다. 이렇듯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신앙인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명심하고, 아는 만큼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다짐합시다. 몰라서 살지 못했다고 변명하지 말고 아는 만큼 실천하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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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시간 날 때마다 책 읽고 또 글도 많이 쓰시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은퇴 후의 삶이 너무나 좋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실 수 있다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서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셨습니다. 은퇴하셨지만 전혀 늙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바쁘게 움직이며 생활하는 이 형제님은 삶이 너무 재미있고 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형제님께서는 거실에서 미끄러져서 고관절 골절이 되었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거동이 불편해졌고,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운동도 또 독서도 또 밖으로 외출 나가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아는 지인이 이 형제님을 만나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1년 만에 몰라볼 정도로 폭삭 늙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시인으로 잘 알려진 사무엘 울만의 시 ‘Youth’(청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나이를 더해가는 것으로는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게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꿈도 없고 또 열정도 없다면 나이가 얼마 안 되어도 늙은이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위해 하느님 뜻에 맞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늘 청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이상과 또 지금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느님의 뜻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을 약하고 불안정한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상도 열정도 없습니다. 그저 편하고 쉬운 길만을 가려고 합니다. 조금의 시련에도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청춘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노인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상과 열정만 넘쳐난다면 충분히 청춘으로 삽니다. 이렇게 청춘을 사는 사람만이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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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석 위에 지은 집>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니 탈입니다. 입으로는‘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나는 종입니다. 그러나 종노릇 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나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의 탈을 쓰고 어찌 천국을 바라고 있는지 한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하늘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실천 없는 종교는 그림의 떡이다!”예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시작하여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종교인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허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행동에서 믿음을 봅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혜와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행동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워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종이호랑이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스승이 제자들에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우리는 말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 가운데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교부 야고보).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동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행동의 원천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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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 만나는 날에>
마태오 7,21-29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 내 말을 실행하여라, 청중의 반응)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님 만나는 날에>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 닮고픈 님을
만나는 설레는 날에
내 닮고픈 님께서
님 닮은 날 보시고
기뻐하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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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반석 위에 인생 집짓기>
“기본에 충실한, 최선을 다하는 슬기로운 삶”
성서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내용은 시편에 이어 요즘 계속되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설교입니다. 오늘로서 산상설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라, 집짓는 자들의 비유, 청중의 반응 세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집짓는 자들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내용이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다.”
어느쪽입니까? 완성형 인생 집은 없습니다. 미완성형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미완성성형 인생 집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쓰는 강론 역시 저에겐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일에 속합니다. 그러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인생 집 짓기에 최선을 다하는 슬기로운 삶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마디대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삶에 도움이 될 예화를 길다 싶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모두 오늘 우리 믿는 이들이 특히 경청해야 할 내용입니다.
“미루게 될 일과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은 부지런함의 기본이다. 부지런함이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까지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다산>
“나는 예순다섯 번째 생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는 지금 수준의 정신적 정서적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식생활을 절제하고 근력운동을 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글 쓰기를 놓지 않으려 한다. 기력이 달릴 때는 남은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젊다는 말을 되뇐다. 함께 나이먹어가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나이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말을 믿지 말자고. 어리석은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고. 젊은이들이 하는 말을 경청하자고.”<유시민>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을 묻는 질문에서 서방국가 대부분은 ‘가족’을 꼽은 데 반해, 한국은 첫째가 ‘물질적 풍요’였다. ‘인생에서 친구나 공동체적 유대가 지니는 중요성’을 묻는 질문에는 겨우 3%만 응답했고 최하위였다. 독서율을 보자.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은 1년에 책을 단 한권도 읽지 않는다는 것. 이건 충격이었다.
우리나라는 고려때까지 불교, 조선은 유학의 나라였다. 일본의 사무라이, 유럽의 기사도, 몽골과 이슬람의 정복전쟁등 거의 모든 문명이 ‘칼과 피’로 점철될 때 한반도에선 문치가 대세였다. 수천년동안 이 땅에서 삶의 최고가치는 독서였다.
세상을 바꾸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되어야 한다. 대화와 토론, 즉 로고스의 향연이 도처에 흘러넘쳐야 한다. 그것은 에로스의 강력한 동력이기도 했다. 지금은 먹방과 노래, 춤과 피지컬의 시대다. 연애 자체를 포기한 청춘이 수두룩하다. 단군 이래 청춘의 연애가 이토록 힘겨웠던 시절이 있을까? 사랑은 하룻밤의 열기가 아니라 창조와 교감의 열정에서 비롯한다. 출산은 그 절정에 속한다.
정말 중요한 건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다. 그들의 푸르른 청춘이 활짝 피어나야 한다. 청춘의 특권, 즉 ‘에로스와 로고스의 향연’을 포기한채 ‘자기만의 방’에 갇혀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건 너무 서글픈 일아닌가? 청춘이 쇠락한 시대를 중년과 노년은 또 무슨 낙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그야말로 난세다. 특히 청년들에겐 가혹한 시절이다. 이 난세를 명랑하고 슬기롭게 건너가려면? 역시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이 곧 길이다!”<고전평론가;고미숙>
참으로 한결같은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책임을 다하는, 반석 위의 인생 집을 짓는 성실하고 아름다운 분이 얼마전 카톡 메시지로 보내준 감동적인 진솔한 고백을 나눕니다.
“불교신자였던 아오스팅 씨를 세례성사를 통해 구원해달라고 만7년 묵주기도 하루에 8시간 이상씩,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기도했던 제 삼십대가 떠오릅니다. 그후 요셉수도원에서 성령받고, 통회의 눈물, 감사의 눈물을 흘리던 아오스팅씨입니다. 집에 못하나도 칠 수 없었던 남편 아오스팅씨로 거듭나면서 집을 짓는 은사를 받아 세례받고 만10년 만에 요셉수도원 성전을 지은 기적이 기도의 힘입니다.
요셉수도원 수사님들께서 사랑해 주시고 믿어주셔서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집짓는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부님이 보내주신 강론집을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묵상하며 콩나물이 자라듯이 아오스팅씨가 성숙해졌습니다. 우리 부부는 필히 요셉수도원에 감사드리고 보답을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분들 나름대로 성실히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정말 온전한 인생집 짓는 일은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단한 하느님 말씀의 실천과 한결같은 간절한 기도없이는 불완전합니다. 참 좋은 의견에 완벽한 삶에 이론인데 하느님과 기도가 빠진 삶을 보노라면 참 허전한 생각이 듭니다. 궁극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 대해 답이 없습니다.
지난 24일 화성에서의 배터리공장 화재 참사로 2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새삼 모래 위에 지어지는 집같은 위태한 가정은, 사회는, 나라는 아닌지 매사 깊이 성찰하며 점검하고 보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떠난 이들에게는 주님의 자비를, 남은 유가족들에게는 주님 친히 위로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주님,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이 짝을 이뤄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의 비위를 맞추며 살았다 해도 주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자기착각의 피상적 헛된 짝사랑일뿐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나름대로 잘 살았다 자부하는데 이와같은 주님의 반응이라면 얼마나 충격적이겠는지요! 완전히 착각이요,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 내 뜻대로 지은 인생 집이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슬기롭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어리석게도 모래위에 인생집을 짓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바로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유다 임금 여호야킨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주님의 눈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니 그대로 모래 위에 나라집을 세웠던 것이며, 하느님 응징의 도구였던 바빌론 제국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침공으로 유린되어 박살난 유다 나라입니다. 우리의 인생 집을 짓는데 참 유익한 반면교사가 되는 유다 임금 여호아킨입니다. 위기시 인생 집의 실상이 다음 복음 말씀을 통해 그대로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은 모래 위에 인생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 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과연 우리 인생집은 어디에 속하겠는지요? 유비무환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은총과 더불어 한결같은 말씀 실행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이들이 정말 슬기로운 이들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경청-묵상-기도-관상-실행”의 렉시오디비나 성독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그리스도 예수님 위에 인생 집을 짓는 마음으로 온힘과 온마음과 온정성을 다해 강론을 썼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제 간절한 소원입니다. 우리 인생 집은 영원히 현재진행형의 미완성 상태에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지침이 없이, 한결같은 열정과 정성으로 말씀을 실행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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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까지의 단계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오늘 주님 말씀은 당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뜯어보면 주님 말씀을 들어서 실천하기까지의 단계가 있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천국에 가는 사람도 있지만 못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말씀을 들어서 실천하기까지의 단계들을 생각해봤고, 그 이전의 단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니까 크게 듣는 단계와 듣기 이전의 두 단계가 있고, 그것을 더 작게 쪼개면 더 많은 단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선 듣기 이전 단계들을 보겠습니다. 무식해서 못 듣는 단계와 교만해서 못 듣는 단계가 있겠습니다.
무식해서 못 듣는 단계란 말씀의 가방끈이 짧은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가방끈이 짧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방끈이 짧은 것이며 바오로 사도가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한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의 단계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단계는 영적으로 무식한 이의 탓이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교만해서 듣지 못하는 단계이며 하느님 말씀을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냐며 무시하기에 듣지 못하는, 그래서 실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가 듣기 이전의 단계라면 다음은 들었지만
무관심해서 듣지 못하는 단계 곧 다른 관심 때문에
무관심하여 주님 말씀을 귀담아듣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우리 신자들 가운데도 이런 신자들이 제법 많습니다. 유튜브에 떠도는 글이나 말은 종일토록 읽고 들어도 주님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일절 읽지도 듣지도 않습니다.
이에 비하면 주님 말씀을 즐겨 읽고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미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대개 이런 분들일 것입니다.
그렇긴 한데 바쁜 일이 있으면 빠트리는 분들이 꽤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 말씀은 빠트리지 않고 읽고 듣는, 더 나아가 무엇보다 먼저 주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지는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것은 저의 말씀 나누기를 즐겨 읽는 분들의 경향입니다. 주중에는 읽는 분이 많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이 되면 읽는 분들이 반토막 납니다.
다음은 주님 말씀을 정말 충실히 듣기는 하는데 잘 듣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오늘 주님 말씀처럼 실천에 이르지는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것을 저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음식을 먹긴 먹었는데 삼키지 않는 것입니다. 단것만 빼먹고 뱉어버렸다고나 할까요?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들었는데 원수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영 안에서 가난하면 행복하다는 말씀은 들었는데 가난하지 않습니다. 입혀주시고 먹여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걱정하지 말라시는데 여전히 걱정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가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도무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모든 걸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셔도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아무리 주님 말씀을 들어도, 아무리 ‘주님, 주님’하고 외쳐 불러도 실제로는 천국에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래서 행복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늦게 일어나서 여기까지만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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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삶으로 믿자!>
오늘 복음(마태 7,21-29)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는 말씀과 '내 말을 실행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산상설교(山上說敎/마태5-7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믿는 바를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앎(지식)에 삶(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던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26)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으면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이런 선언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마태 7,24)
마태오 복음 7장 21절의 말씀은 청소년기 때에 저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게 했던 말씀, 곧 성소의 씨앗이 되었던 말씀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와 탐욕이라는 큰 장애물 앞에서, 믿는 바를 삶으로 살아야 하고, 앎(지식)이 삶(실천)이 되게 해야 한다는 예수님과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무거운 십자가로 다가옵니다.
'죄의 본질'은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과 실천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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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t2nkp2VjN_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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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 25)
하늘을 나는
새들도
아무 데나
그들의
둥지를 짓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집을
지어야할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말씀을
살리는 곳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말씀이
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어리석음을
닮았습니다.
말씀을 곡해하고
말씀을 저버린 삶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하느님께
데려다주는
말씀에 너무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이 없는 삶은
언제나
지혜가 없고
가장 중요한
실행을 놓치며
살게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실행이
새로 태어날 수
있는 삶의
기초가 됩니다.
말씀이 기본이고
우리의
실행이 삶을
만듭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실행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말씀을 만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삽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실행을 통하여
여물어 갑니다.
우리의 집은
반석 위에
지어지고
사람은 올바른
실행으로
무너지지 않을
지혜를 얻습니다.
말씀과 실행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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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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