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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은 30대에 비로소 봄을 맞이했다. 봄날의 그녀는 정말이지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낚싯바늘에 걸려 뭍으로 올라온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참 물을 토하곤 남자를 달래듯 술을 따른다. 시체 같던 여자가 남자의 가정사를 읊는다. 여자는 어떤 神적인 존재 같다. 놀란 남자가 달아나려 하자 그녀는 얼굴을 들이민다. 앵글은 싸늘히 얼어붙는다. 의미심장하게 웃고 아이의 혼이 깃든다. 현실로 나온 여자는 무당이 된다. 곡하듯 창을 부르고 아이를 안고 흐느낀다. 러닝타임 33분짜리 영화에서 이정현이 보인 연기다. 그녀는 신이었다가 귀신이 되고, 다시 무당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2011년에 완성한 박찬욱·박찬경 형제의 프로젝트 단편 <파란만장>으로 다시 배우 이정현이 됐다.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문소리 언니가 맡은 배역이었어요. 총 6회 촬영 중 2회를 마친 상황이었죠. 3차 촬영 직전에 언니가 임신 사실을 알았어요. 급하게 전화를 받고 2시간 만에 촬영장으로 달려갔어요. 그때 망설였다면 지금 같은 기회가 없었겠죠?”
처음부터 그랬다. 연기를 시작한 열여섯 살, 이정현은 무작정 오디션을 치렀다. 연예인이 되면 서태지를 볼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것이 <꽃잎>이었다. 연기를, 현장을 모르는 그녀에겐 버거운 작품이었다. 장선우 감독은 촬영 첫날 불같이 화를 냈다. “누가 저런 애 뽑았어”라는 고함과 함께 현장은 철수됐다. 그래도 이정현은 버텼다. 끝내 해냈다. 그것도 꽤 훌륭하게.
“머리로 유리창을 깨는 장면은 원래 CG 처리하기로 했었어요. 몇 번 연습하다 필름이 돌고 저도 모르게 세게 부딪쳤어요. 유리가 부서지고 저도 놀라 쓰러졌죠. 한참 후에 감독님이 컷을 외치고 웃으셨어요. CG 비용 아꼈다면서 좋아하셨어요.(웃음)”
이것 말고도 <꽃잎>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문성근이 던진 돌에 맞는 장면은 콘티에 없었다. 주변으로 돌이 날아오면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가는 장면이었다. 이정현은 잘못 던진 돌에 다리를 맞았다. 그래도 시선은 카메라에 고정돼 있었다. 그리고 절룩거리며 걸음을 이어갔다. 또 하나, <꽃잎>의 마지막 시퀀스는 각별하다. 촬영을 진행한 시장에 배우는 이정현 하나였다. 행인들은 그녀에게 돈을 던져주고 안쓰럽게 쳐다보며 지나친다. 이 모든 장면은 몰래 카메라 형식으로 촬영한 것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그녀는 정신 나간 거리의 소녀로 살았다.
“첫 촬영을 그렇게 접고 숙소에서 한참 울었어요.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럼 미친 아이로 살자’, 연기를 못하니까 그냥 정말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곤 미친 아이로 광주에서 살았어요. 나중엔 동네 할머니들이 집으로 데려가서 먹이고 씻기고(웃음) 제작팀 언니들이 저를 찾느라 온 마을을 뒤졌죠.”
그녀는 <꽃잎>으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에서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이름을 올린 강렬한 데뷔였다. 그런데 두 번째 선택이 묘했다. 충분히 상업 영화 주연을 맡을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작은 배역을 택했다. 선우완 감독의 <마리아와 여인숙>이었다. 이정현은 거기서 마리아 역을 맡았다. <꽃잎>의 소녀만치 아프고 어두운 캐릭터였다. 소속사의 일방적 지시였다. 촬영장에 3일을 나가곤 특별 출연에 이름을 올렸다. 몇 년 뒤 이정현이 가수로 성공을 거두자 제작사는 그녀를 주연으로 고쳐 영화를 재개봉했다.
“그때가 가장 힘든 시간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계약을 맺어 꽤나 불합리했거든요. 작품 선택은 생각도 못했고 하라면 무조건 해야했죠. 그리고 한동안 공중에 떠 있었어요. 성인도 아니고 어리지도 않은 채로 멈췄죠.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그때 한창 듣던 음악이 테크노였어요. ‘가수를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죠.”
1999년 그녀는 가수로 데뷔한다. 국내 대중음악 솔로 여가수 중 가장 강렬한 무대였다. 파열하는 기계음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음절마다 힘을 주며 그녀가 노래한다. 당시 노래를 비롯해 이정현의 롱 드레스와 부채, 손가락 마이크까지 이슈가 됐다. 그녀는 음악 차트뿐 아니라 문화를 휘어잡았다. 거기엔 어떤 메시지가 있었다. 조그마한 체구의 여자아이가 세상을 바꾸자며 미래의 음악을 불렀다. 신드롬이 일었다. 강렬함은 꽤나 오래 남았다. 다시 연기를 하기 위해 이정현은 쉼표가 필요했다.
“가수로 활동할 때의 센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것 같아요. 한동안 공포, 스릴러 장르만 들어왔어요.(웃음) 잠깐 쉬어가야겠단 생각을 했죠. 중국과 일본 활동을 결심한 건 그 이유가 가장 컸어요. 좋은 경험이었죠. 즐거웠고. 그래도 국내에서 다시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파란만장> 이후 일이 잘 풀린 것 같아요. 좋은 작품도 만날 수 있었고.”
그녀가 말하는 좋은 작품이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다. 공장 노동자 수남 역으로 그녀는 20년 만에 청룡영화상 시상식 무대를 밟았다. 이번엔 여우주연상이었다. 당시 후보론 <무뢰한>의 전도연, <차이나타운>의 김혜수, <암살>의 전지현이 이름을 올렸다. 모두 엄청난 배우였고 거대 자본이 투자된 메이저 영화였다.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발표되기 직전 그녀는 이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후보들은 제작팀과 함께 있었어요. 전 혼자 앉아 있었거든요.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참 좋다는 생각을 했죠.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이름이 호명되는데 도망가고 싶었어요. 너무 기쁘고 감사한데 그땐 숨고만 싶었어요. 청룡은 제게 특별한 곳이에요. 연기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줬고 다시 연기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곳.”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작은 영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장편연구 제작과정에서 탄생한, 순수 제작비 2억 원 규모의 독립 영화다. 이정현은 시나리오를 단숨에 읽고 출연 결정을 내렸다. 적은 출연료나 홀로 극을 끌고 가야 한다는 부담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녀는 욕심을 냈다. 안국진 감독과 수남에 대한 의견을 끊임없이 나눴다. 동화 같던 캐릭터는 점차 명확해졌다. 그녀가 연기한 수남은 동네 어귀에서 마주칠 것 같은 생생함으로 가득했다. 빌딩의 계단을 청소할 때, 주판알을 퉁길 때, 멀뚱한 표정으로 상담을 받을 때도 이정현이 아니라 수남이 보였다.
“수남은 저와 공통점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더 많이 생각한 것 같아요. 부모 없이 힘들게 자란 아이. 청각장애인 남편과 가정을 꾸린 여자. 그녀는 집을 지키기 위해 어떤 생활을 했을까? 그녀는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런 고민이 많았어요. 부담? 배역을 맡을 때 부담은 없었어요. 사실 전 돈도 필요 없고 시나리오만 좋으면 돼요. 이제껏 없던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연기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때, 전 그때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처연하다. 대한민국의 가장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이정현의 필모그래피에 담겼다.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인 <꽃잎>의 10대 소녀와 20대 미혼모를 연기한 <범죄소년>의 효승, 30대 여성 노동자의 처절함을 보여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수남까지 이정현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성장하지만 가난과 핍박, 편견의 그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스플릿>의 희진이 반가웠다. 비록 희진도 삶이 편안하진 않지만 얼굴에서 그늘을 걷어냈고 함께할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
“<스플릿>을 선택한 이유는 평범한(?) 30대 여성이란 점이었어요. 이제껏 그런 역할을 제안받은 적은 없었거든요.(웃음) 밝고 애교 많고, 진짜 이정현과 가장 비슷한 캐릭터였다고 할까요. 연기도 편하게 했어요.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고.”
올해 이정현은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로 대중과 만난다. 총제작비 300억 원, 황정민과 소지섭, 송중기가 출연하는 2017년도 최고의 기대작이다. 그녀는 여기서 유일한 여성 주연을 맡았다. 일제강점기에 군함도로 끌려간 위안부를 연기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캐릭터와는 다르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맞서 싸우는 역이다. 심지어 <군함도>에선 멜로 라인도 있다.
“류승완 감독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중 가장 선명한 캐릭터가 될 것 같아요. 감독님과 촬영 전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결과도 만족스러워요. 개인적으로도 지금까지 작품 중 가장 기대되는 작품이랄까요.”
이정현은 30대가 돼서 비로소 봄을 맞이했다. 행동이나 말투, 심지어 먹는 것까지 편안해졌다. 하루 17여 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며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던 소녀는 이제야 완연한 봄을 맞았다.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제가 10대 아이돌도 아니고 이젠 ‘와, 이정현이다’ 하며 달려드는 팬도 없거든요.(웃음) 전 편하게 다녀요. 친구를 만나거나 술을 마셔도 이젠 뭐든 편해요. 연기도 비슷해요. 제가 만약 20대에 수남을 연기했다면 지금처럼 해낼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얕게 나오지 않았을까요? 신인 때부터 전 여러 사람을 만났어요. 그때 나눈 이야기와 겪은 일들…. 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런 것이 쌓여서 단단해진 것 같아요. 30대에 가장 하고 싶은 거요? 아마도 사랑, 사랑을 많이 하고 싶어요.”
http://www.noblesse.com/home/news/magazine/detail.php?no=5317
20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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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인터뷰기사왜이제봤을까요ㅠ
인터뷰내용좋네요ㅎㅎ그동안봤던인터뷰중에 제일솔직하게했어요ㅎ내려놓는법을알아가시는건가ㅎㅎ 뭔가 껍질을깨고나오는거같아서 팬으로서 뿌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