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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셨나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2004년 결혼대비 이혼율이 47.4%라고 합니다.
대략 10명이 결혼을 하면 4.7명 꼴로 이혼을 한다는 통계로
결혼하는 부부의 거의 반수가 이혼을 한다는 놀라운 수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이혼 천국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대두된 바 있지요.
세계적인 이혼율을 살펴보면 1위인 미국이 51%이고 스웨덴이 48%
그리고 우리가 그 뒤를 이어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나 프랑스, 영국보다도 훨씬 더 높은 수치이지요.
이혼율과 더불어서 다시 재혼하는 비율 또한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결혼해서 함께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한 마디로 ‘이혼하지 말라’입니다.
쉽게 하는 이혼은 또 다른 간음이라며 어림도 없다고 말씀하시지요.
“이혼하지 말 것뿐만이 아니라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마태5,27-28)라고 하시며 마음 속 까지도 단속하시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마태5,29-30)
무척 엄하신 말씀이지요.
밖에 나가면 아름답고 멋진 여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남자들의 눈이 본능적으로 쏠리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눈을 빼버리라고 말씀하시지요.
또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을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유혹의 기회를 철저히 멀리 하라는 가르침이시지요.
‘아니 예수님이 시대를 모르셔도 한참 모르시지, 요즈음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런 옛날 말씀을 하시는가. 스트레스로 병에 걸리느니 차라리 이혼을 하고
마음대로 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지금보다도 이혼이 훨씬 더 성행했지요.
이혼장 한 장으로 이혼이 가능했던 시대였습니다.
이혼이 하고 싶으면 ‘나가라, 너에게 자유를 준다.’하고 이혼장만 써주면 됐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새로운 아내를 얻을 수가 있었지요.
또 그 당시는 여성들이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재산으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엄하게 금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 지방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고 계실 때
바리사이들이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와서 이렇게 물었었지요.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마태19,7)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마태19,8-9)
그러자 옆에서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깜짝 놀라서 예수께 한 마디를 합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19,10)
그렇게 엄하게 말씀하시니 도대체 누가 결혼을 하겠느냐는 뜻이 담겨 있지요.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마태19,11)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엄하게 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성행하던 이혼을 왜 이렇게 엄하게 금하셨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혼을 하고 있습니까?
이혼 이후의 모든 상처와 어려움은 그대로 자식들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혼을 하고 새롭게 출발해서 더 나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느냐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렵지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나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을 쉽게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연예인들이 10번 결혼하고 20번 결혼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자유롭고 좋으냐고
선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번 이혼하는 것도 지옥 같은 생활을 몇 년씩 겪어야 하는데 10번씩이나 했다니
그 속이 제대로 남아 있겠습니까?
그것은 부러워할 대상이 아니라 불쌍하게 여겨야 할 일입니다.
있는 가정을 잘 지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지요.
가정 생활은 우리 시대만 겪는 어려움이 아닙니다.
옛날에도 마찬가지로 어려웠지요.
러시아 속담 중에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결혼해서 평생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 이런 속담이 다 있겠습니까?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결혼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시대에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가 결혼을 하여 함께 평생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지켜져야 할 소중한 공간이지요.
우리 시대에 이혼율이 이렇게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모두가 불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정이 흔들리니 사회 또한 불안하고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왜 이렇게 이혼율이 급증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이혼의 사유로 첫 번째가 성격차,
두 번째가 경제적인 이유,
세 번째가 배우자의 부정 등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성격 차이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혼을 하면 함께 살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결혼이란 서로 맞춰 가는 것이지요.
서로 맞춰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미혼 남녀는 결혼 전에 충분히 배워야 합니다.
여자는 매일 일찍 일어나서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 살림을 해야 하며
또 집안 간 왕래를 거의 책임지다시피 해야 하고 더러는 직장까지 다녀야 합니다.
남자도 그 못지 않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직장에서 언제 쫓겨날지 몰라서
노심초사해야 하는 시대이지요.
그런데 이 모든 어려움에 대한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해본 적도 없고 집안 청소를 해본 적도 없으며, 집안의 대소사에 참여해 본 적도 없지요.
더군다나 싫으면 팩하고 돌아섰지 언제 참는 노력을 해봤습니까?
결혼을 하면 이러한 어려움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니 문제가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기는 원망이 다 아내와 남편에게로 쏟아지지요.
당신만 믿고 결혼했는데 왜 노예처럼 부리냐고 서로가 참지 못합니다.
음식이나 청소를 나 몰라라 하고 집안의 대소사도 한 번 안 챙겨온 젊은이들을 덥석 결혼시키고 나면
그 모든 일이 한꺼번에 스트레스로 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내할 줄 모르는 인스턴트 시대를 사는 요즘 젊은이들은 쉽게 나가떨어지지요.
거기에는 부모 책임이 큽니다.
부모가 제대로 안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사전에 충분한 연습과 준비가 필요한 대단히 어려운 인생의 한 고비입니다.
결혼하기 전부터 충분한 교육과 노력이 있어야 하지요.
심지어 운동을 배워도 적어도 몇 개월의 연습 과정이 필요합니다.
또 대학 시험이나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도 몇 년을 준비해야 하는데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결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는 왜 아무 생각없이 덜컥 해버리거나
또 그렇게 하게 만드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러니 어찌 잘 살아가겠습니까?
미리 준비시켜 주지 못한 부모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요.
그런데 결혼 생활에 있어서 많은 경험들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부모가
오히려 이혼하라고 부추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것보다 못하면 못했지 좋아질 리가 없지요.
처음의 좋은 상태에서도 그 정도로 만났는데 더 나빠진 상태에서
어찌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요.
우리의 대부분의 삶이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험난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감정적인 판단으로 쉽게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은 십중팔구 실패로 이어질 것입니다.
‘너무 보수적이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이혼하지 말라고 하면 어쩌라는 것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래도 그것이 이혼율을 줄이고 가정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지요.
시대가 변했다고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결혼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끌어주는 것이 신자로서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자녀 출산의 의무를 반드시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결혼의 첫 번째 목적은 후손을 이어가는 데에 있지요.
어떠한 사회에서도 이것은 중요한 지상 명제입니다.
어떠한 식물이나 동물에 있어서 그 결합의 목적은 종족의 보존,
즉 후손을 이어가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후손이라는 큰 열매가 맺어졌을 때 사람은 수고의 보람을 맛보게 됩니다.
밤낮 없이 일하며 애를 쓰는 것도 후손이라는 열매가 있기 때문에
기쁘게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이유로 자손을 두지 않는다면
희생의 의미가 없어지고 말 그대로 삶은 무의미해지고 말 것입니다.
자녀 번성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지요.
결혼 생활을 오래 한 어른들이 이러한 부분들을 가르쳐 주고 사전에 준비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가정이 만들어 질 수 있고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며
하느님의 뜻 안에서 나라가 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자신은 물론이요, 가정과 사회 모두를 잘 살게 만드는 바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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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 신부
죄를 끊기에 있어 단호히 실천해야 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간은 궁극적으로 무엇이 되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근원적인 물음이라 평소에 잊고 살기 쉬운 물음이라 보아집니다.
다른 생명체들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길을 잘 간다고 봅니다.
사과씨는 사과나무가 되기 위해 한결같이 살고, 복숭아씨는 복숭아나무가 되기 위해 한결같이 사는데,
사람만 유독 예측불허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이라고 다 참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간단명료한 정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참된 사람이라 함은 결국 사람을 지어내신 창조주 하느님을 닮은 자일 것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이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피조물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화 된다는 것,
이것은 믿던 믿지 않던 간에 인간 전존재에 부여되어 있는 길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모두가 하느님이 되고자하는 궁극 목적이 있지만
어떻게 그 과정을 추구해 가느냐에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와 연관됩니다.
그래서 그 길이 다 다르며 또 각자의 길에 있어서도 우여곡절이 많은 것입니다.
어떤 때는 열심히 사람으로서의 길, 즉 하느님과 일치되어 가는 길을 잘 가다가도
한 순간에 하느님과 단절되어 버리는 절벽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오랜 세월 하느님과 동떨어진 어둠의 삶을 살다가도
어느 순간 하느님께로 방향을 고정해 삶을 잘 마무리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어쨌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하느님화 되기 바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사랑을 하고 진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화 되기를 바라면서도 실상 삶은 그 반대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이것은 하느님화 되고자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는 정반대인 하느님과의 단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는데도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하느님화 되어야 하고 그 길을 가야만 행복할 수 있기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를 끊기에 있어 단호히 실천해야 함을 역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오감을 통하여 뭔가를 인식하고 자신이 인식한 방식대로 자신을 완성해가려 합니다.
자신이 인식한 방식은 기억 속에 맛으로 남아있어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지식욕, 명예욕, 재물욕, 육욕 등등 자기가 느낄 수 있고 자기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마저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화 된다는 것은 내 안에 하느님으로 가득 차 일치하는 것인데,
사람이 하느님화 되기를 바라면서도 하느님이 들어오실 수 없도록
자신의 맛을 추구하는 방식의 범주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눈을 빼어버려라.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시각, 후각, 미각, 청각, 촉각의 오각에 통하여 생겨나는 것이기에
오감이 죄를 짓는 통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 보아집니다.
나아가 우리는 자신의 인식과 기억과 의지가 자신을 하느님과 단절되도록 한다면
차라리 자신의 인식, 의지, 기억을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인식을 믿기보다 하느님을 믿고, 자신의 기억을 살피기보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의지가 자기가 하고 싶은 바를 하기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쓰일 수 있도록 해야함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이상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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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신부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다 - 마음의 죄도 NO!
어제 복음부터 산상설교의 본격적인 대당명제인 "살인하지 말라 -> 화도 내지 말라"를
선언에 이어서 오늘은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
그리고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疎薄)하지 말라"는 세 번째 대당명제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즘 성(性)을 상품화하는 사회적 풍토나, 아직 자립할 수도 없는 어린 사람과의 원조교제나,
돈만 된다면 어디나 비집고 들어서는 러브호텔 건립 등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인간은 왜 이럴까?" 하는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성에 대한 인간의 욕정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의 혼인법은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고,
일부다처제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신명 21,15)
그들은 항상 여자는 남자에게 위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였고,
경건한 자들은 여자가 다가오면 인사를 하기는커녕 아예 눈을 감아 버렸으며,
결혼한 여자가 독신 남자나 비유대인과 성적 관계를 맺으면 간음을 범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혼인한 남자가 그와 동일한 행위를 해도 간음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당시에 여자는 남자와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혼인법이 완전히 남자의 편에서부터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간음을 예방하려는 경우에도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려기 보다는
여자의 위험성을 더 강조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남의 아내를 유혹하는 남자는 자신의 혼인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혼인을 깨뜨리는 셈이 됩니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는 듯 보이는데,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같은 내용에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라는 단서가 붙습니다(5,32; 9,9).
이 단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이것이 특별한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는 말씀이 아니냐라는
오래되고 어려운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사람을 보호하는 데에
예수님 말씀의 원뜻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가정, 그리고 연약한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고,
그동안 여자에게만 지워져 있던 간음이라는 죄가 남자들에게도 적용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대당명제가 등장하는데, 이는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는 것과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하지 말라"(31-32절)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6계명은 "간음하지 말라"(출애 20,14; 신명 5,18)는 것이며,
제9계명은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출애 20,17; 신명 5,21)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간음의 시작은 어디입니까?
구약의 율법이나 오늘날 현대의 법률 모두가 "부부가 아닌 남녀간의
외적으로 성사된 성적 행위"를 간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들의 생각을 뒤집는데,
첫째 대당명제(21-26절)에서 화를 내는 것이
살인과 같은 비중을 지닌 것으로 엄하게 경고되었듯이,
둘째 대당명제에서도 내적인 "음란한 생각"이 외적인 "간음한 행위"와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여기서 음란한 생각은 "눈"(29절)으로,
간음한 행위는 "손"(30절)에 비유됨을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눈과 손은 엄연히 다른데, 예수께서는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이고,
따라서 손이 행한 외적인 범행은 마땅히 죄가 될 뿐더러,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품는 음란한 생각조차 죄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논리가 이렇다면, 세 번째 대당명제도 자동적으로 이해됩니다.
즉 음행한 경우이든, 다른 어떠한 경우이든 간에 아내에게 이혼장을 손에 쥐어 소박하게 되면,
그 버림받은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한 번 맺은 부부관계는 죽음이 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유효하다는
결혼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남자가 품는 여자에 대한 음란한 생각이 이미 여자의 혼인을 깨뜨릴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음을 경고하시고, 여성의 권리와 생활을 중시하시면서
여성의 권리와 생활이 남성의 욕망에 의해 위협받아서는 아니 됨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오직 혼인의 본질과 목적만 있을 뿐입니다.
혼인의 본질은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이며, 혼인의 목적은 부부사랑과 자녀출산입니다.
여기서 혼인본질의 단일성이란 한 남자(여자)는 한 여자(남자)만을 배우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불가해소성은 부부의 결합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것이므로
죽음이 이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세상의 어떤 힘도 이를 갈라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혼인의 본질과 목적이 이토록 숭고하다 할지라도
혼인은 하느님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인 만큼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혼인의 숭고한 본질과 목적은 인간의 자유로운 합의와 굳건한 신의에 의해 지켜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혼인에서 빚어지는 많은 문제들은 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서약"에 있는데,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겠노라 한 그 약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약속은 지켜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이죠,
혼인의 순간에 서로가 쌍방에게 주고받은 사랑과 존경과 신의의 서약이
문제해결의 실마리입니다.
이런 서약은 배우자 쌍방의 서약이기 이전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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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하느님과의 서약을 지켜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