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이달의 훈화
연중 제12주 - 연중 제15주
염철호 사도요한 신부
염철호 사도요한 신부는 부산교구 사제로 로마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부산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바오로 서간 – 신약성경의 이해’(바오로딸 2017)가 있고, 역서로는 ‘최고의 성지 안내자 신약성경’(바오로딸 2012) 등 다수가 있다.
환희의 신비 가운데 예수 탄생(3단)을 제외한 4단을 하나하나 묵상하고자 합니다.
연중 제12주간(6월 21-27일)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루카 1,26-38)
하느님께서는 누군가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 보증으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종종 약속하십니다.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백성들을 구하라고 명령하실 때도 그랬고, 기드온에게 주님 제단의 예배를 올바로 세우는 임무를 맡길 때도 그랬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루카 복음에서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건넨 인사말도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그러고 나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게 되리라고 일러주며 “두려워하지 마라”고 권고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종종 두려움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확신하지 못할 때도 많고, 그분의 일을 해 나가는데 스스로 부족함을 느낄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을 완수하는 것은 우리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각자의 달란트에 따라,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엄청난 일을 가져옵니다. 교회는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순간 마리아의 태중에 예수님이 잉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께 철저히 순종한 바로 그 순간 온 세상의 구원자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마리아가 들은 인사말, 곧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말은 단순히 마리아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약속, 곧 당신 친히 그들과 함께 머물겠다는 약속, 임마누엘 하느님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라는 인사말은 마리아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연중 제13주간(6월 28일-7월4일)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루카 1,39-45)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즉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동네는 오늘날 아인 카렘이라고 불리는 고을로 성모님이 사시던 나자렛에서는 100킬로도 더 떨어져 있는 유다 산악 지방의 고을입니다. 아무래도 아기를 잉태하고 있던 성모님으로서는 제법 어려운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성모님께서 이미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은 엘리사벳의 인사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더 나아가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두고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외칩니다. 이미 성모님의 태중에 있는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 곧 주님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 태중에도 요한이라는 아이가 잉태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는 장면은 모태 안에 아기를 가진 두 어머니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두 여인의 모태 안에 있던 두 아이의 만남이었습니다. 이는 엘리사벳의 모태 안에 있던 세례자 요한이 성모님의 모태 안에 있던 예수님을 만나서 즐거워 뛰놀았다는 엘리사벳의 말에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묵상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 16,16-17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 곧 구약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고, 예수님은 새 계약의 첫 인물입니다. 또한, 엘리사벳은 늙은 여인, 곧 구약을 상징하고, 마리아는 젊은 여인, 곧 신약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은 신약이 구약을 찾아온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알아본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태중에서 매우 즐거워 뛰놉니다.
연중 제14주간(7월 5-11일)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루카 2,22-39)
레위 12,1-8에 따르면 남자아이를 낳은 여자는 40일이 지난 뒤 자신의 부정함을 씻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물론 가난하다면 비둘기 한 쌍만 바쳐도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이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데, 아마 가난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산모가 정결례를 하는 동안 또 다른 일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탈출 13,11-16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맏이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모두 하느님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값을 하느님께 치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탈출 사건 때 이집트의 맏이들을 모조리 치시면서 이스라엘의 맏이들은 모두 살려주셨기 때문에 그들의 목숨은 하느님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맏이를 얻으면 그에 대한 값을 하느님께 치러야 했습니다.
이 값으로 대개는 자기가 사는 동네의 사제에게 성전 세겔로 5세겔만 바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성전에 가서 직접 봉헌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봉헌 사건이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사건과 연결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끝에 당신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당신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제물로 내어놓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 하여 하느님께 값을 치르는 봉헌물로 바치십니다. 시메온은 이 점을 미리 알아보고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레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시메온은 이런 운명을 지닌 아이가 메시아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기를 보자마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루카 2,29).
연중 제15주간(7월 12-18일)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루카 2,41-52)
열두 살이 되던 해 예수님은 여느 유다인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을 순례하십니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난 뒤 온 가족이 고향으로 돌아갈 즈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혼자 머무십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던 가족들은 사흘이 지나서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사흘”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잃은 지 사흘 만에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루카 복음은 예수님 탄생 장면부터 그분의 죽음을 암시한 바 있습니다. 그분은 “아마포”로 쌓인 채 무덤에 누워 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태어날 때부터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모님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 장면은 잃어버린 예수님, 곧 돌아가신 예수님이 결국 부활하리라는 것을 미리 암시합니다.
성모님이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에게 슬기로운 말들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자신을 질책하는 어머니에게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가?”라고 답합니다. 여기서 반드시 해야 할 의무를 의미하는데 사용된 그리스어 표현 ‘데이’는 아버지의 뜻과 관련해서 예수님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것들, 특히 당신이 겪어야 할 수난과 죽음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보니,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무슨 슬기로운 말들을 나누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듭니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는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성령의 이끄심 없이는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