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는 애절한 기도를 바친다.
그의 기도는 ‘죄 많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한마디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바리사이는 자신과 세리를 비교하며 기도한다.
주님 앞에서의 자랑이다.
세리는 어른의 기도를 바쳤고,
바리사이는 어린이의 기도를 바쳤다(복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나무랄 데 없는 신앙생활을 하였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자신에 대해 만족하며
죄인과 다르게 살 수 있었음에 하느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 반면, 세리는
언제나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았고,
그러한 자신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가 아닌 세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바리사이가 의인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여기시는 것일까요?
톨스토이가 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돌”이라는 짧은 단편 소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여인이 현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은 자신을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한 여인은 한평생 율법을 지키며 이렇다 할 죄를 짓지 않고
살아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현자는 먼저 첫 번째 여인에게 “울타리 밖에 나가
당신이 들 수 있는 큰 돌을 하나 찾아 가지고 오시오.” 하고,
또 다른 여인에게는 “그대는 가능한 한 많은 돌을 가져오되
작은 돌만 가져오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현자는 그 여인들에게 가지고 온 돌을
다시 가지고 가서 제자리에 놓으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은 돌이 있었던 곳을 금방 찾아내어
그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어디서 어떤 돌을 주웠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고 다시 현자에게 돌아왔습니다.
현자는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저 여인은 자신이 어디서 그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크고 무거운 돌을 쉽게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고,
그대는 어디서 그 많은 작은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거요. 죄도 마찬가지라오.”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이 자유로워지고,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데 필요한 것은 양심 성찰입니다.
양심 성찰은 우리의 결점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언제, 어떻게
우리가 잘못했는지를 의식하고 잘못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양심 성찰은 또한 하느님의 치유 능력에 우리 마음을 여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1994년 삼척에서 물에 빠진 신자들을 구하고 돌아가신
고 배문한 신부는 생전에 자주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천국에선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가 영원히 울려 퍼지고 있다.
이 땅에서 바이올린 선율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익혀야 한다.
평생 동안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 연습을 한 사람은
천국이 천국으로 느껴질 것이지만,
그 연주를 듣는 연습을 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그곳이 바로 지옥일 것이다."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 속에서 살고,
하느님 나라를 느끼고,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낙제생의 기도 / 배문한 신부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13)
세리는 가슴을 치며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생각도 못한 채 기도했다.
반면에 바리사리파 사람은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기도했다.
"오,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으며 또 이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일 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칩니다."
(루카 18,11-12)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나는 비참하게만 보인다.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고 자랑할 만한 것도 없다.
의기소침과 불안의 늪에서 헤어나고자 허우적거리며,
죄 많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칠 뿐이다.
차라리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주님, 나는 성당을 몇 개나 지었습니다.
유치원도 세우고 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또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원도 세웠습니다.
일 년에 수백 명씩 세례를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 불쌍한 환자들을 위해 내 청춘을 불태웠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욕에 이끌려 죄를 짓지도 않았고
한 번도 죄의 유혹에 빠지질 않았습니다.
나는 멋진 설교로써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고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과 삶의 의미와 기쁨을 주었습니다.
또 기도와 안수로써 많은 이들에게 치유의 은사를 내려 주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시원스레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은 너무도 반대이기 때문이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사제 생활이긴 하지만 그래도...손꼽을 것이 없다.
성당은 커녕, 화장실 하나 짓지 못했다.
혹시나 성당을 하나 지을까 하고
땅을 사고 터를 닦아 공사를 구상했을 때도 있었으나
주님께선 '네까짓 놈이 무슨 집을 짓느냐...'는 듯이 학교로 이동시켜 버리셨다.
입만 벌리면 사랑을 외치지만, 나는 막상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잘못하면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아닐까.
사제란 독신으로 사는 것이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함인데...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사랑했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했는가?
[언제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으며,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보았는가?]
(마태오 25,35-36) 하고 반성해 볼 때 한심하기만 하다.
나환자 촌에서...결핵 요양소에서... 또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틈에서
청춘을 바치는 사제나 수도자들은 얼마나 부러운 존재들인가!
강론만 해도 그렇다.
목사들처럼 신나게 소리치고 감동시키지는 못할 망정
좀더 알차고 박력 있게 할 수도 있을 텐데...
잠꼬대 같은 강론이니 딱하다.
눈이 멀어도 내가 주님을 볼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하고,
귀가 멀어도 주님의 음성은 들을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하고,
어떠한 괴로움과 슬픔도 평화를 앗아갈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찌하여 지금은 불안과 초조와 열등감에서 방황하고 있을까...
사실, 나의 신앙은 깊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눈도 코도 없고, 손도 발도 없는 나병 환자가 점자로 된 성서를,
그것도 혓바닥으로 읽으며 하느님을 만나고
얼굴에는 기쁨과 평화와 용기와 위안을 준다.
나는 왜 조그만 병고도 이기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 불안과 걱정을 주는 것일까?
나이를 먹어도 한 일이 없으니 마치 시험 답안지를 쓰지도 못했는데
시간은 다 되고 생각은 떠오르지 않을 때의 수험생처럼 당황하며,
하느님 앞에 나설 때 무엇을 했다고 말씀 드릴까 하는 생각으로 불안하다.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주님! 이제는 하루 해도 다 가고 저녁이 가까웠으니
우리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 (루카 24,29)
아무튼 사제로서는 낙제생이 아닐 수 없다.
그 위에 아무리 좋은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고,
아무리 좋은 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사람들과의 대화가 힘들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며,
글을 쓰려고 해도 생각이 안 나니
무슨 병인지는 모르나 지독한 병인 것만 같다.
좀더 엄살을 부린다면, 살만 찌고 머리는 멍청해지니
사람이 아니라 돼지가 되는 것 같다.
무관심, 무감각에다 고독까지 엄습하니...
모든 부정적인 것의 쓰레기통 같은 자신을 본다.
"주여! 이 쓰레기통에서 구해 줄 자가 누구입니까!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은 부르러 오셨고,
유능한 자를 위해 오시지 않고 무능한 자를 위해 오셨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셨으며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는 이 당신뿐입니다.
도와주소서!
나는 자신의 허무함을 압니다.
'0'이라는 숫자가 혼자서는 아무 힘이 없지만,
그 옆에 다른 숫자가 붙을 때는 '10, 20, 30...'으로 가치가 발하게 되듯,
이 무능하고 비참한 인간도 당신이 함께 하시면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삐뚤어지고 부서진 그릇이었지만
그 동안 당신의 도구로 쓰셨음을 느낍니다.
주님! 쓸모 없다고 버리지 마시옵고
당신 도구로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정도로 써 주소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기도 드릴 뿐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이 어둔 밤을 지나면
찬란한 밝은 날이 올 것이기에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일어나 기도하오니...
세리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시는 주님,
이 비천한 죄인의 푸념 섞인 기도를 들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