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국의 사람 이름이나 땅 이름을 나타내는) 한자 바로 뒤에 붙는, [ ]안의 글자 : 한국식 한자 발음
▣ 야마구치의 꽃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꽃’이 되었나
무궁화는 중국 남부가 원산지라서, (남쪽 땅인지라 한국/조선 공화국/간도/북만주/연해주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습한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일본에서도 아주 잘 자랐다. 지금도 잘 자란다. 원래 남방 기후(아열대/열대 기후 – 옮긴이)에 맞는 나무/꽃이다. 그래서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은 도시를 벗어나면 어디를 가도 무궁화를 쉽게 볼 수 있다. 원예용 정원수로 기르는 집도 흔히 볼 수 있다. 자연에서 무궁화를 보기 힘들고, 가정에서 무궁화를 거의 기르지 않는 우리나라(한국 – 옮긴이)와는 전혀(아주/완전히 – 옮긴이) 딴판이다.
일본 땅에서는 무궁화가 얼마나 잘 자랐는지, ‘가와히가시 헤키고토(河東 碧梧桐[하동 벽오동]. 서기 1873 ~ 1937년)’라는 수필가 겸 하이쿠 시인은
‘풀을 베면 무궁화가 자라는 풀밭인가(草刈れば木槿花さく草場かな).’
라는 하이쿠를 남기기도 했다. 요절한 천재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正岡 子規[정강 자규]. 서기 1867 ~ 1902년)’ 역시(또한 – 옮긴이)
‘길가에 덩굴 풀처럼 무궁화가 자라네(道ばたに蔓草まとふ木槿哉)’
라고 노래했다.
일본에는 예부터 무궁화를 미인의 얼굴에 비유하는(빗대는 – 옮긴이) ‘무궁화의 얼굴(芙蓉の顔)’이란 관용구도 있다. 그러나 무궁화는 심야부터 이른 아침까지 피기 시작해, 저녁에는 꽃을 닫아버리는 ‘하루의 꽃’이기 때문에, 이런 단명(短命. 목숨[命]이 짧음[短] - 옮긴이)의 생애를 노래한 유명 하이쿠 시인의 노래도 적지 않다.
길가의 무궁화, 말이 먹어버렸도다(道のべの 木槿は, 馬に くはれけり).
- 마쓰오 바쇼(松尾 芭蕉[송미 파초]), [서기 1644 ~ 1694년]
그것이 바로 하루살이 꽃 무궁화(それが しも 其の日暮らしぞ 花 木槿)
- 고바야시 잇사(小林 一茶[소림 일차]), [서기 1763 ~ 1828년]
흰 무궁화 꽃말은 ‘짧게 헤어졌도다.’(白 木槿 言葉 短く 別れけり)
- 이시이 로게쓰(石井 露月[석정 로월]), [서기 1873 ~ 1928년]
이처럼 무궁화는 하루살이라서 우리나라나 중국의 꽃꽂이에서는 사용되는 법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는 무궁화 축제 같은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무궁화를 화재(花材. 꽃꽂이 재료 – 옮긴이)로 사용하지(쓰지 – 옮긴이) 않는다.
그러나 유독 일본에서만은 무궁화가 다도와 연계되는 꽃꽂이 대상으로 각광을 받아서, “(꽃꽂이에 쓰이는 꽃은 – 옮긴이) 겨울은 동백(동백나무의 꽃인 동백꽃 – 옮긴이), 여름은 무궁화(冬は ツバキ, 夏は ムクゲ).”로 불릴 정도로 여름에 애용되는 화재가 되고 있다. 즉, 그들(왜인[倭人]들 – 옮긴이)에겐 무궁화가 ‘생활에서 꽃꽂이로 사용하는 일상의 꽃’이다.
무궁화가 왜 (왜국 – 옮긴이) 다도(茶道)의 핵심과 상통하는 점이 있느냐 하면, ‘무궁화 하루의 꿈(槿花 一朝の夢)’이 다도에서 말하는 ‘일기일회(一期一會. 원래는 “평생[一期]에 단 한 번[一] 만남[會]”이라는 뜻이나, 일본에서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인 기회”/“일생에 단 한 번 만나는 인연”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의 정신과 같기 때문이다.
다도의 ‘일기일회’는 (다도를 여는 사람이 그 다도에 참가한 사람을 – 옮긴이) 마치 이 세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는 마음으로 (대하며 – 옮긴이) 차(茶)를 내놓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일생에 한 번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만큼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니, 무궁화 꽃이 가지는 일생 한 번 개화의 기회, 그것은 또한 사무라이의 숙명과도 같다.
사무라이는 일생 한 번의 기회에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내던지는 존재들이다. 이 또한 무궁화가 ‘일본의 꽃’이 되는 사연이다.
바로 그래서 현대 일본의 저명한 시인 ‘아카바네 마사유키(赤羽 正行[적우 정행]. 서기 1941년 ~ )’는
‘하얀 무궁화는 충의로운 사무라이가 머무는 곳(白 木槿 忠義の 武士の 館跡)’
이라고 하이쿠를 지었다. 또 그는 시집 『 남랑화(男郞花) 』에서 “무궁화는 일본 민족의 얼로서 피고 진다.”고 영탄(詠嘆. 감탄/목소리를 길게 뽑아 깊은 마음을 읊음 – 옮긴이)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예찬되었던 일본의 꽃 무궁화가 한반도(코리아[Corea] 반도 – 옮긴이)에 접목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 1896년 11월 21일
이토 히로부미를 멘토(mentor. 스승/현명하고 성실한 조언자 – 옮긴이)로 삼고 그와 오래전부터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윤치호, 일본 이름은 ‘이토 지코(伊東 致昊[이동 치호])’는 무궁화를 <애국가> 가사(노랫말 – 옮긴이)에 넣고 ‘(근세조선의 – 옮긴이) 나라꽃’으로 (거짓으로 알리는 – 옮긴이) 작업을 했다(참고로, - 나도 한 달 전, 어느 언론사의 기사를 읽고 나서야 안 사실이지만 – 윤치호는 지금으로부터 1세기 전인 서기 1920년대 초, 자신의 날적이[‘일기(日記)’를 일컫는, 새로운 배달말이자 순수한 배달말]에 “조선[한국]은 소련의 지배를 받느니, 차라리 일본[왜국]의 식민지로 남아있는 편이 낫다!”는 말을 적은 인간이기도 하다 : 옮긴이).
● 1900년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관복에 무궁화를 수식(장식으로 수놓음 – 옮긴이)하는 <칙령 제 14호>가 제정되었으나, (서기 – 옮긴이) 1906년(광무 10년 – 지은이의 주석) 고종황제는 무궁화 꽃을 대한제국의 황실화(皇室花. 황실의 꽃/황실을 상징하는 꽃 – 옮긴이)인 오얏꽃으로 환원했다(되돌렸다 – 옮긴이).
(이는 오얏꽃이 피는 나무인 오얏나무가 한자로는 ‘이[李]’이기 때문이다. 근세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은 李를 성씨로 쓰는 전주 이씨 집안이었다. 오얏나무의 열매인 오얏은 한자로는 ‘자줏빛 복숭아’를 뜻하는 ‘자도[紫桃]’인데, 이 ‘자도’의 발음이 바뀌어서 오늘날 한국인들이 아는 ‘자두’가 되었다 : 옮긴이)
대한제국(서기 1897년 양력 10월 12일 ~ 서기 1910년 양력 8월 29일 – 지은이의 주석)의 각종 공문서에 표시하는 문장은 (무궁화가 아니라 – 옮긴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얏꽃 문장이 사용되었다(쓰였다 – 옮긴이).
● 1904년 8월 22일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오랜 조선인(대한제국 신민 – 옮긴이) 심복인 외부대신서리 윤치호가 체결한 ‘제1차 한일협약(갑진늑약 – 지은이의 주석)’으로 대한제국의 정책결정권을 상납받았다.
● 1905년 11월 17일
외부협판 윤치호가 총괄 기획하고 작성한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 지은이의 주석)’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3월 초대 조선(한국 – 옮긴이) 통감(統監. 통감부의 최고 책임자. ‘정치와 군사를 통틀어 감독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총독부의 조선 총독과 성격이 같은 자리라고 이해하면 된다 – 옮긴이)으로 취임했다.
● 1907년(이 해에 대한제국 군대의 병사/장교들이 정미의병을 만들고 의병전쟁을 일으킨다 – 옮긴이)
이토 히로부미 치하의 조선통감부는 경성(오늘날의 서울 – 옮긴이)의 백운동(청운동 서쪽 – 지은이의 주석)과 평양의 모란대 두 곳에 모범림을 설치하고, 수원, 대구, 평양 3곳에 묘포(苗圃. 모밭. ‘묘목을 기르는 밭’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를 설치해 파종하는 한편, 무궁화 묘목을 포함 1, 2년생 일본산 묘목을 옮겨와 심었다.
● 1909년 7월 5일
‘소네 아라스케(曾禰 荒助[증녜 황조]. 서기 1849 ~ 1910년)’는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조선 통감을 이어받는 연회에서 “부상(扶桑. 무궁화 나라 일본 – 지은이의 주석)과 근역(槿域. ‘무궁화 지역’ 한국 – 지은이의 주석)을 어찌 ‘다르다.’고 논하리오(扶桑槿域何論態).”라고 읊었다. 소네 통감은 통감 취임 일주일(1주 – 옮긴이) 만인 7월 12일 ‘기유각서’를 체결,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모든 실권을 소네의 권력으로 전격 탈취했다.
● 1910년 5월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3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한일합방(‘대한제국 멸망’이나 ‘근대 왜국의 대한제국 점령’이나 ‘대한제국/구한국 식민지화’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옮긴이)을 성사시키고,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이 되었고, 그 역시 조선(근대 왜군에게 점령당한 대한제국 – 옮긴이)이 무궁화 지역 즉 ‘근역(槿域)’임을 강조했다.
● 1912년 3월 26일
데라우치 총독은 (서기 – 옮긴이) 1912년 (양력 – 옮긴이) 3월 ‘태형(곤장을 치는 형벌 – 옮긴이)은 조선인(대한제국 유민 – 옮긴이)에 한한다.’는 악명 높은 ‘조선 태형령’을 공포하면서, ‘무궁화 묘목을 심는 것이 (자기들끼리 – 옮긴이) 티격태격 싸우는 조선인의 의무’라는 조선인을 비꼬고 모욕하는 시문을 남겼다(“<일제시대>는 살기 좋았다.”고 우기는 뉴라이트와 “나라도 친일했겠다.”고 떠드는 수많은 한국의 10대들에게 묻겠다. 이런데도 대일[對日] 항전기가, 서기 1910년에 시작되어서 서기 1945년에 끝난 시대가 ‘한국인이 살기 좋은 시절’이었냐? 이런데도? : 옮긴이).
● 1912년 12월
조선총독부 식산국은 총독부 관할 국유림 일부를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 등 일본 제국대학들에 연습림으로 대부(貸付. 나중에 되돌려 받기도 하고 다른 사람/기관에게 빌려주어 쓰게 함 – 옮긴이)해줬다. 도쿄제국대학에는 전라남도 구례군과 광양군의 백운산, 감토봉, 지리산 일대 총 4만 6천 685정보를 연습림으로 할당했다. 이곳에는 이듬해(서기 1913년 – 옮긴이)부터 무궁화, 금송(高野槇[고야전/고야마키 – 지은이의 주석]), 적송(赤松[아카마쓰 – 지은이의 주석]), 낙엽송(唐松[당송/가라마쓰 – 지은이의 주석]), 편백나무(檜木[회목/히노키 – 지은이의 주석]), 삼나무(杉[삼/스기 – 지은이의 주석]), 황매화 등 총 3만 3천 그루가 심어졌다.
● 1914년 3월
일제는 한국의 식물학계 일각(一角. 한 부분 → 일부 : 옮긴이)이 아직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근대 왜국의 – 옮긴이) 관변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 猛之進[중정 맹지진]. 서기 1882 ~ 1952년)으로 하여금 “전라남도 남부 지방에 무궁화 야생군락지가 존재한다.”고 발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는 1913년 봄, 조선총독부 식산국이 도쿄대학 연습림으로 불하한 전라남도 순천군과 구례군 일대에 미리 심어놓은 것이다(서기 2000년에 왜국의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가짜 돌도끼를 만들어서 미리 묻어둔 뒤, 그것을 ‘발굴’하는 척 사기를 치다가 들통난 일이 떠오르는 일이다.
근대 왜국의 학계가 이런 식으로 사기를 쳤고, 서기 21세기인 지금도 그건 마찬가진데, 이렇게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쓰는 배달민족이나 왜국의 갈마/문화를 담은 글/책/신문기사/잡지기사를 과연 세상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 왜국 학자들이 자신과 별다른 상관이 없는 나라나 지역이나 시대[예를 들면, 타완틴수유 제국의 갈마나 서아프리카 ‘모시’족의 문화나 유교가 근세 유럽의 계몽사상에 끼친 영향]는 선입견/편견/거짓 없이 정확하게 쓸지는 몰라도,
배달민족이나 이른바 ‘중화권’이나 왜국의 갈마/문화에 대해서는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거나 중요한 사항은 빼고 말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왜국 학자들의 연구결과나 책이나 논문을, 그리고 왜인들의 기행문이나 신문기사나 잡지기사를 당사자인 한국/조선 공화국이나 ‘중화권’의 ‘한족’들이나 제 3국 사람들이 만든 그것과 견주면서[또는 교차 검증하면서], 의심할 수 있는 데까지는 철저하게 의심해야 한다 - 옮긴이).
● 1914년
미국의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Florence Hedleston Crane. 서기 1887 ~ 1973년)’이 “전남 순천과 구례군 주변에 자생하는 무궁화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이것이 크레인의 착각인 까닭은, “전라남도 남부”의 “무궁화”는 서기 1913년 “조선총독부 식산국”이 “미리 심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크레인이 근대 왜국을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 옮긴이).
(서기 – 옮긴이) 1931년(이 해는 근대 왜군의 한 갈래인 관동군이 이른바 ‘만주’를 점령한 해이기도 하다 – 옮긴이) 이 무궁화를 보고 그렸다는 수채화를 실은 그림책 『 한국의 꽃 민간전래 이야기(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 』가 도쿄에서 출판됐다. 실로 간교하고 조직적인 상징조작이다.
● 1914년 ~ 2020년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어떠한 품종의 무궁화 자생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이런데도 무궁화가 ‘배달민족의 꽃’인가? 이런데도 무궁화가 ‘한국의 국화’로 불릴 자격이 있는가? 원산지가 한국이 아닌데도? - 옮긴이).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지 아래를 보자.
● 1926년 12월
제 124대 일왕(왜왕[倭王] - 옮긴이)으로 즉위한 ‘히로히토’의 쇼와(히로히토가 썼던 연호. 서기 1989년 히로히토가 죽음으로써 이 연호를 썼던 시대가 끝난다 – 옮긴이)시대 개막과 더불어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천양무궁(天壤無窮[하늘과 땅이 끝이 없음 → 일왕 영토의 무궁한(끝없는) 확장 : 지은이의 주석])의 상징으로서의 무궁화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한국/유구[琉球]/아이누 모시리/사할린 남부/미크로네시아/다롄[한자로는 ‘대련’]시/대만 – 옮긴이)에서 더욱 떠받들어진다(만약 무궁화가 왜왕의 적인 정미의병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대한 독립군과 관련 있는 꽃이었다면, 근대 왜국에서 이런 대접을 받았겠는가? - 옮긴이).
● 1928년 1월
‘하기’ 시 ‘가와카미무라(川上村[천상촌])’의 야생 무궁화군락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도대체 ‘한국의 국화’라는 “무궁화”가 왜 한국이 아니라 왜국[!]에 “야생”으로 자라나는 건가?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 독립군과 한국의 독립투사들을 증오한 근대 왜국 정부가 왜 “무궁화 군락”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건가? ‘무궁화는 한국 고유의 꽃이니 국화가 되어도 된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은 알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건가? - 옮긴이).
● 1930년
‘고쿄히가교엔’, 신주쿠, 우에노, 요오기, 히가시, ‘하마리큐 진다이(神代[신대]) 식물 공원’ 등(같은 – 옮긴이) 도쿄의 공원을 비롯한 일본 전역의 공원과 정원에 무궁화 화원을 별도로 조성하는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 1931년
대한제국의 황실화 오얏꽃을 폐지하고, 무궁화를 한국의 국화로 이식 작업을 했듯, 만주국을 건국하면서 청나라의 황실화 모란(牡丹)을 폐지하는 대신, 살구꽃을 ‘만주국의 국화’로 설정해 보급하기 시작했다(나는 이 때문에라도 만주국을 ‘청나라의 온전한 계승국가’나 ‘만주족이 자기 의지로 세워서 꾸려나간 나라’로 인정할 수 없다.
만약 청나라의 황족/왕족인 ‘아이신기로오’씨들이 정말로 ‘한족’과 중화민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세운 나라가 만주국이었다면, 그들은 만주국 땅 안에서 ‘한족[漢族]’을 모조리 내보내고, '한족'이 쓰는 글자인 한자도 버리고, 만주 문자만 쓰며, “청나라를 잇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모란을 그대로 국화로 삼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오히려 그들은 ‘오족 협화’ 운운하며 ‘한족’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비롯한 청나라의 황족/왕족들은 – 나아가 많은 만주족도 – 모란을 국화로 삼는 대신 근대 왜국 정부와 관동군이 ‘만주국의 국화’로 정한 살구꽃을 ‘국화’로 삼았고, 엄연히 ‘남의 나라 군대’인 관동군의 명령을 받으며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동해야 했다. 이게 ‘자주독립 국가’인가? '남의 문화유산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쓰는 나라이자, 괴뢰국가'가 아니고? - 옮긴이).
위와 같은 사실에서 명백하게 나타내듯, 무궁화는 일제의 꽃이다. 만약 무궁화가 진정 조선(나아가 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 – 옮긴이)의 꽃이었다면, 일제가 위와 같은 공작과 작업을 통해 애써서 무궁화를 우리나라에 억지로 식수하려(나무를 심으려 – 옮긴이) 노력할(애쓸 – 옮긴이) 이유(까닭 – 옮긴이)가 전혀(조금도 – 옮긴이) 없다.
‘조선의 얼’을 식민지 지배를 해야 할 일본이 왜 굳이 널리 알리려 애를 쓴단 말인가.
아울러 조선을 무궁화 땅, (그러니까 – 옮긴이) ‘근역’이라고 강조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일제의 날조에 의한 상징 조작에 부응해서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 옮긴이)와 그가 지원하는 관변 학술단체들은 마치 무궁화가 진짜 ‘조선의 얼’인 것처럼 또 다른 조작을 해왔다. 이는 한 치도 묵과할 수 없는 민족 반역 행위로, 반드시 처단해야 할 사안이다.
(→ 6편으로 이어집니다)
― 단기 4356년 음력 11월 7일에, 잉걸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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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