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碑(백비)
육 정숙
무채색 하늘이 침묵을 깼다. 농부들은 빗속에서 삶을 심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이 세상 씻어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던가! 목말라 타들어 가는 민초들의 신음소리가 애절했던가!
비에 씻긴 산야는 첫돌 갓 지난 아가들의 웃음소리 같다. 생결한 바람결에 곤고한 마음 헹구어 내다보니 어느덧 보탑 사 경내다. 석가 탄신일을 앞두고 안개비 속에 치장된 경내는 정적 속에서 스님들의 발걸음들이 재다. 등을 밝히고자함은 밝음을 찾자는 의미다. 정성을 다한 등 공양은 칠흑 같은 사바세계의 어둠을 씻어 내리고 찬란한 광명을 비추어 주십사 하는 간절한 서원의 표현이라 한다. 빛은 그 크기에 상관없이 우리에겐 희망이요, 광명이며, 깨달음이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두 손 모두고, 부처님의 자비가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고루 비추어 지기를 간절함으로 빌었다. 감았던 눈을 뜨니 비에 젖는 보탑사가 한 송이 연꽃으로 보시시 피어오른다.
진천군 연곡리 보련산. 이 곳 산세는 빙 둘러 싸고 있는 산봉우리들이 마치 연꽃잎을 연상케 하고 있다. 그 한 가운데 꽃술형상으로 우뚝 세워진 보탑사! 대동여지도에 연곡리 연꽃마을이 표시되어 있으며, 고려 초기 이곳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형상에 어울리는 지명을 볼 때마다, 옛 선인들의 높고 깊은 지혜에 감탄 하지 않을 수 없다. 쇠못 하나 사용 하지 않고 온전히 목조로만 지어진 보탑사 경내를 돌다보면, 거대한 돌비석이 하늘을 품고 의연히 서있다. 한자로 빼곡히 새겨 진 다른 비석들과는 달리, 새겨 놓은 획 하나 없다. 누구의 비석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유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를 백비라 한다.
사찰이 있는 곳에 부도가 있다. 부도는 승려의 유골을 봉안하기 위해 그와 인연이 깊었던 사찰에 묘탑을 세워 놓은 것이다. 부도 옆에는 거의 부도비가 세워지며 그 곳에 기록된 것으로, 승려의 행적, 다른 승려와의 관계, 당시 사회, 문화의 일면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 부도비의 형상은 비석 받침이 귀부龜趺이고 비석지붕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 하는 모습이다. 이곳에 큰 절이 있었다는 것과 현지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보탑사의 백비는 어느 고승의 부도비가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한다.
보물 404호인 이 백비는 근처 논바닥에서 현 위치로 옮겨 놓았다. 살아서 천년을 산다 하는 거북모양을 한 받침돌 위에 우뚝 서 있는 돌비석!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품고 하늘로 승천 하려는 듯, 수백 년 용트림은 먹구름 속에서 욕망의 넋두리들을 세차게 토해냈다.
오랜 세월 침묵하던 돌비석의 거친 숨결 때문인가? 돌 거북의 등 한 부분이, 살갗이 벗겨 진 것처럼 깨져 있었다. 상체기의 흔적처럼 떨어져 나간자리, 불심으로 속살까지 파고들었다는 거북등의 문양이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다. 그 것은 수 백 년 돌비석의 상념이 침묵으로 내리는 깨침의 소리이리라.
우리나라에 이처럼 비문 없는 비석이 다섯 개 정도 있다는데 그중 하나가 전남 장성 황릉 면에 있는 청백리 박 수량의 백비다. 평생을 오롯이 깨끗하게 살아 온, 그리하여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는 박 수량의 백비! 공직에서 청렴했던 그의 맑은 덕을 기리기 위해 부러 한 글자도 새기지 않았다고 한다. 수 백 년 백비의 숨결에서 시대를 넘나들며 풍겨오는 옛 사람들의 맑고 곧은 향기가 은은하게 다가온다.
빗물에 씻겨 진 보련산! 천상여인의 숨결인 듯, 보얗게 핀 물안개가 산허리를 휘감고 있다. 그 황홀함에 도취되어 작디작은 들풀들이 내 발아래서 짓이겨지는 것도 모른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이렇듯 삶 속에서 내 기분에 따라 무심코 던져놓은 한마디 말이나, 행동이 누군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 일은 없었는지. 한마디 원망도 질타도 없이 짓이겨진 채, 제 모습을 조용히 추스르는 키 낮은 풀잎들을 들여다보며 소름처럼 돋는 두려움에 진저리를 쳤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을 주절거렸던가! 목청을 돋우고 질러댔던 모든 말들은 다른 누군가를 짓밟고 그 위에 나를 세우고자 함이었다. 백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도 예사롭지 않아,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비문 없는 돌비석! 없지만 있는 듯, 있지만 없는 듯, 문자로 새겨, 일러 주지 않은 비석 앞에서 키 재기 하듯 서 있는 사람들의 마음마다, 수 백 년 돌비석의 상념은 제각각이려니. 수심이 얕을수록 크게 들리는 물소리처럼 적은 것을 크게 보이려고 기를 쓰며 까치발로 모둠 세우던 날들이 망각의 강을 거슬러와 전신의 온 감각들을 아프게 한다. 우리가 사라진 뒤에 이 세상에 영원히 남을 것들은 무엇인가? 백비는 무언으로 달려와 잠자는 내 영혼을 흔들어 깨웠다. ‘너는 이 세상에 올 때 발가벗은 몸과 우는 재주 하나만 가지고 오지 않았더냐?’ 하여, 돌아보니 이미 나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들리는가! 보이는가! 백비가 전해주는 무언의 소리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욕심도 부질없음이요 본래 있던 곳으로 갈 때는 이 세상에 아무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어느 고승의 유언이듯 비 내리는 산사! 풍경도 저녁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수 백 년 백비의 숨결인 듯 적막한 산사에 빗소리만 서늘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