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당시를 회고하는 서경석(사학61) 예비역 중장
“고려대학교는 나의 자존심 … 힘이 있어야 평화가 옵니다”
서경석(사학61) 예비역 중장
교우회보에서는 호국 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모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서경석 예비역 중장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서 교우는 베트남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투감각>을 집필했다. 모교에서 ‘손자병법’과 ‘리더십’을 주제로 오랫동안 강의했고 그 내용을 <그대, 내일의 리더에게>로 정리해 출간하기도 했다.
고대에 입학한 계기와,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면학하는 가풍이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랐어요. 일제 강점기라는 엄혹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선친께서는 연희전문에서, 어머니께서는 서울여상에서 수학하셨어요. 그런 분위기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당연했지요. 모교의 “자유·정의·진리” 교훈이 가진 큰 뜻과 호랑이가 가진 용기와 기개가 내 기질과 잘 맞는다고 생각해 고대에 입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나중에 제 두 아우 모두 모교에서 공부했어요.
역사를 잘 아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첫걸음이라 생각해 사학과에 진학했고, 졸업한 뒤에는 유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재학 시절에 고고학회에서 활동하면서 발굴과 답사를 위해 전국 각지를 누비고 다녔는데, 지금의 ‘하남 미사리 유적지’를 그때 우리가 처음 발굴했지요. 학창시절 기억 중에 가장 보람찬 기억이에요.
6월을 맞아 국가보훈부에서 한국 전쟁에 참전하신 선배님들을 기리는 사업을 준비중이라고 합니다. 선배님께서는 한국 전쟁을 어떻게 겪으셨는지요.
당시에 국민학교 3학년이었어요. 포천에 살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동란의 한복판에 있었던 거에요. 전쟁이 터지고 나서 제 기억으로는 북한군하고 그 추종 세력에 의한 납치, 감금이 빈번했습니다. 당시 금융 기관에서 일하시던 제 부친께서도 그런 일을 겪으셨어요. 북한군에게 납치당해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가던 와중에 극적으로 탈출해서 포천 너머 명성산까지 도망치셨어요. 헤어진 뒤에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던 아버지를 그곳에서 다시 만났을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북한군에 선동된 담임 선생님을 따라가 인민재판 과정을 두 눈으로 보기도 했어요. 나이가 어려 마지막 판결과정까지는 못 봤지만 박수부대가 어떤 것인지 그때 똑똑히 봤지요. 아마 어릴 적에 겪은 이러한 충격적인 경험들이 제가 가지고 있는 애국심의 기틀이 되고, 이후에 입대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님께서는 베트남전에도 참전하셨고 그때의 경험을 책으로 집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 주십시오.
소위로 임관한 뒤 상관으로부터 야전경험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들었어요. 또, 당시에 파병 군인은 1년치 봉급을 일시불로 받고 전투 수당으로 월 150달러 정도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 돈이면 남동생 둘의 등록금이 해결됐지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현실적 이유도 있지 않았나 싶어요. 26개월 동안 베트남에서 소대장, 중대장으로 복무했는데 그 시간에는 힘든 줄 몰랐습니다.
베트남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뤘지만, 푸캇산 포위 작전이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부대 인근 고지에 은닉해 있는 적군을 섬멸하는 작전이었어요. 소대별로 각개 전투를 시작했는데, 내가 지휘하는 소대는 교범에 따라 갈 지(之)자로 목표 거점에 접근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소대는 교범을 무시하고 안이하게 논둑을 따라 일렬로 구릉에 접근하다가 적군에게 노출되어 첨병과 무전병이 즉사하고 큰 피해를 입었어요. 적군을 소탕하고 보니 우리 소대는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었지요. 그날의 전투 경험이 나에게 “교범대로 하라”라는 철칙을 만들게 했습니다.
베트남전 참전 당시 모습(사진자료 제공 : 서경석 예비역 중장)
베트남과 관련된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화기 소대가 생포한 포로를 너무 가혹하게 다뤄서 군사 재판이 열릴 뻔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 61학번 동기 모임 자리에서 법대 61학번 유지담 판사가 베트남에서 있었던 그 포로 관련 재판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때 확인해 보니 그 당신 재판을 담당했던 군법무관이 바로 유지담 판사였던 거예요. 전장에서는 서로 모르다가 동기회 모임에서 알고 나서 감회에 젖었던 일화입니다.
귀국하고 나서 훗날 5공수여단장으로 부임하였을때 『전투감각』에 대해 집필했습니다. 파병 당시에 작성한 일기와 메모, 자료를 정리해서 썼는데 3년이 걸렸어요.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 재미있다고 그래요. 육군에서는 필독서로 지정됐고, 육군사관학교 도서관에서는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만큼 인기가 많다고 들었어요. 실제 전투 경험을 쓴 책은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나중에는 영어로 번역돼 미군에서도 교재로 활용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선배님께서는 모교에서 재학생들에게도 손자병법과 리더십 주제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교훈 부탁드립니다.
육군대학에서 교관으로 손자병법 강의를 했어요. 그런데 사학과 김정배 교수님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나중에 전역하면 학교에서 수업을 맡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36년 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김 교수님께서 14대 총장으로 취임하신 뒤에 그 약속대로 강단에서 후배들에게 손자병법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 중에 학생들에게 자주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작은 호텔 지배인으로 일하던 조지 볼트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숙소를 구하지 못한 노부부가 볼트의 호텔에 방문합니다. 하지만 그 호텔에도 빈 방이 없었어요. 볼트는 곤란을 겪는 노부부를 내치는 대신에 자기 방을 양보해 머무르게 했어요. 그 노부부는 훗날에 뉴욕에 객실이 1,442개나 있는 고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를 설립하고 자신들에게 친절을 베푼 조지 볼트에게 그 호텔 운영을 맡깁니다. 저는 이 일화를 통해 “사람은 스스로의 자리에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저 역시 조지 볼트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 제 본분을 다했기 때문에 중장까지 진급할 수 있었고, 모교에서 강의할 기회까지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강의준비에 참고했던 전(前) 미국 국무부장관 콜린 파월이 쓴 『실전리더십』에서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어떤 임무를 부여받건 투덜대지 않고(Never Mumble) 최선을 다했다...’ 콜린 파월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최선을 다하는 태도’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선배님의 삶에서 고려대학교는 무엇입니까?
고려대학교는 내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어요.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걸쳐 고려대학교까치 인촌 김성수 선생님께서 설립하신 학교를 10년 동안 다녔으니까요. 알다시피, 고려대학교는 우리나라 민족 자본으로 설립한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다른 대학들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바로 이러한 특수성이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자긍심의 뿌리입니다. 모교를 졸업한 뒤에, 군대에서도 그렇고 어디를 가도 “서경석”이라고 하면 누구나 “그 고려대학교 출신”이라고 했고 저는 그것이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겼어요. 단순하기는 하지만, 나의 삶에 있어서 고려대학교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고려대학교는 나의 자존심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교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36년 동안 군에서 복무했습니다. 이후에 우연치 않은 기회로 10년 동안 모교에서 강의했고, 그 뒤에 3년 간의 동티모르 대사로 외교관 생활을 했어요. 이러한 짧지 않은 삶의 경험 뒤에 제가 깨달은 것은 “힘이 있어야 평화가 온다”라는 것입니다. 현재 남한과 북한은 여전히 대치하고 있고 군사적인 긴장감이 줄어들지 않고 있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나날이 현역 입영 장병 수가 부족한 것에 대해 우려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낮은 출산율과 결혼하지 않는 세태 역시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상황일수록 슬기롭게 극복하고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경석 교우는...
약력
모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ROTC 3기로 임관하였다. 1966년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로 파병되어, 학군사관장교 최초의 소총 중대장으로 근무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충무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의 경험과 전투현장 기록을 바탕으로 『전투감각』을 집필하였다. 199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후 모교에서 ‘전쟁과 국가’, ‘지도자론’을 강의하였고, 2009~2012년 동티모르 대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군 장병을 대상으로 안보 및 전투경험을 주제로 강연하고, 현재, 네이버 블로그 「그대, 내일의 리더에게」를 운영하며 전장경험, 리더십, 손자병법 등 다양한 주제로 미래 세대와 소통하고 있다.
저서
『전투감각』 : 26개월간의 베트남전 참전기간 동안의 실전 기록. 「육군 필독서 20」에 지정된 바 있으며, 영어번역본은 미국 전투병과학교의 공식교재로 채택되었다.
『그대, 내일의 리더에게』 : 손자병법의 지(智), 신(信), 인(仁) 용(勇), 엄(嚴) 다섯 덕목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들이 갖추어야 할 리더십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