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9월 17일(금) 늦은 8시
대구대교구 제2대리구 주최 복자성당 순교자의 밤 특별강론 최홍길(레오) 신부님 축하합니다. 새로이 단장한 복자성당 성전이 아름답습니다. 공경하올 김정환 미카엘 본당신부님과 복자성당 신자 여러분들의 기도와 희생과 봉사가 참으로 컸습니다. 교구 소속 사제로서 깊은 감사와 존경과 축하를 드립니다. 금년으로 본당설정 40주년 에메날드 녹옥경축(綠玉慶祝)의 해를 맞이한 대구시 동구 신천3동 850-3번지 소재 복자성당은 대구 가톨릭교회의 자랑이요 소중한 자산입니다. 한국교회가 18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고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시복을 기리고자 교구마다 복자성당이라는 이름으로 봉헌한 성당 가운데 제일 먼저 봉헌한 성당이 바로 대구 복자성당입니다. 복자성당에 들어서면 한 때 대구주교좌 계산동성당에서 사용하던 대형 십자가와 세분 순교자의 무덤 그리고 수선탁덕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상(聖像)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복자성당을 떠올릴 때면 먼저 (남산동)보좌신부 시절 복자성당에서 주최한 복자기 배구대회에 출전하고 와서 사제관 앞에서 속상해 하며 소리내어 울던 우리 학생들이 생각납니다. 또한 매년 9월 복자성월이면 교구행사로 성대하게 복자의 밤 행사를 지내던 때가 떠오릅니다.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본당수호자로, 김 신부님을 비롯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范世亨) 주교님, 모방 나 베드로(伯多祿) 신부님, 사스탕 정 야고보(牙各伯)신부님 네 분 성인의 유해를 봉안하고 1973년 10월 19일 울산 장대벌 세분 순교자 -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 순교자 - 의 유해를 옮겨 무덤을 조성, 성역화하여 매년 순교자 무덤 앞에서 교구행사로 복자의 밤 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해 왔던 것입니다. 병인박해 당시 순교하고 -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 120위와 더불어 -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 세분은 각각 김해, 공주, 서울 태생입니다. 세분 순교자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집과 전답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느님(天主)을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정처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해야만 했던 이들 세분 순교자들은 울산 장대벌에서 한날 한시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이분들의 시신은 처형 직후 형장 근처의 강둑 아래 구덩이 속에 묻혀 있다가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 합장됐습니다. 그 후 1932년 5월 29일 감천리 묘지로 옮겨졌다가 1973년 10월 19일 비로소 이 곳 대구 복자 성당 구내로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실로 이 곳 복자성당은 앞서간 신앙선조 순교자들의 숨결과 순교혼을 느끼며 순교성인의 장한 삶과 정신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체현하는 거룩한 땅, 은총의 땅, 영광의 땅입니다.
그리스도님 안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는 1984년 103위 성인이 탄생된 이래 다시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동료순교자 123위와 한국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등 125위의 시복시성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더불어 45만 대구대교구민은 한결같은 정성과 열망으로 내년으로 다가온 교구설정 100주년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은총의 때 특별한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가슴 벅차며 은총 충만한 세월을 사는 것입니까. 일찍이 떼르뚤리아누스(Tertullianus)는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3백년 넘는 긴 세월 동안 모진 박해를 겪었지만 크리스찬 신앙이 쇠잔하거나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해자들이 박해의 칼날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더욱 더 널리, 마침내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고 확산되어 갔던 것입니다. 한국교회 역시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주고 물려준 신앙적 유산의 토대 위에 오늘의 신앙을 산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신 신앙선조 순교자들은 대체 누구십니까.그 어려운 시절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서 온 몸을 던져 신앙을 증거하신 분들입니다. 신앙과 목숨을 맞바꾼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살아생전에 이미 - 생각과 말과 행동이 - 순교자로 성인으로 사셨던 분들입니다. 신분과 벼슬을 벗어던지고 가문(家門)을 버리며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떠돌다가 초근모피(草根毛皮)하며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자리잡으신 분들입니다. 교우촌(敎友村)을 이루며 지역과 신분의 차별을 떠나 그리스도 님 안에 한 형제자매로 은총과 기쁨과 평화가운데 사셨던 분들입니다.
그리스도 님 안에 한 가족으로 형제자매로 사시는 교형자매 여러분! 근년에 들어 교회내 뜻있는 이들로부터 2백주년 이후 우리의 순교신심(殉敎信心)이 퇴색하고 실종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성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의 눈을 들어 - 그 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먼저 성인위에 올림받으신 - 1백3위 순교성인 한 분 한 분을 똑 바로 바라보며 생각해 보십시오.
1백3위 가운데 내국인이 아흔 세 분이요, 외국 불란서인이 열 분이며 남자가 쉰 여섯 분, 여자가 마흔 일곱 분입니다. 이분들을 연령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철부지 십대 소년이 베드로 유대철을 비롯하여 네 분, 이십대 청년층이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등 열 일곱 분, 삼십대가 다미아노 남명혁 회장 등 스물 한 분, 사십대가 라우렌시오 범세형 주교 등 스물 여덟 분, 오십대가 과부인 아가타 이소사 등 스물 다섯 분, 육십대 노인이 부인 막달레나 허계임 등 다섯 분, 칠십대가 마르꼬 정의배 회장 등 세 분이 됩니다.
또한 이분들의 직분과 직종도 천차만별이라고 할 것입니다. 주교가 시메온 장주교 등 세 분, 신부가 모방 정신부와 샤스땅 나신부 등 여덟 분, 회장이 가롤로 현석문 등 여덟 분이며 바오로 정하상과 같은 신학생도 있고 가롤로 조신철 같은 이는 복사를 지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요한 남종삼 같은 이는 예조참판과 승지 같은 벼슬을 지냈고 전주에서 순교한 정문호 발토로메오 같은 이는 고을 원님이었습니다. 허 바오로는 군인이었고 유 리따와 아가타 전경협은 동정궁녀였으며 이냐시오 김제준은 김대건 신부의 부친이 아닙니까. 또한 요한 박후재는 신장사였으며 아우구스티노 유진길은 회장역관이었고 요셉 장성집은 환부(鰥夫 = 홀아비)요 쁘로다시오 정국보는 악기공이었으며 가타리나 정철염은 노복(奴僕)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골롬바 김효임과 아네스 김효주 등 동정녀가 열 여덟 분이며 부인이 발바라 최영이 등 열 한 분, 과부가 아가타 김업이 등 열여섯 분이나 됩니다.
그러면 이분들은 모두 어디서 순교하였습니까. 서울 한강 백사장 새남터에서 베드로 남경문 회장 등 열 여덟 분, 서소문 밖에서 동정궁녀 루치아 박희순 등 마흔 네 분, 당고개에서 아우구스티노 박종원 회장 등 스물 세 분,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다블뤼 안주교 등 다섯 분이며 베드로 유정률 같은 이는 평양에서, 토마스 손자선은 공주에서, 그리고 전주 숲정이에서 베드로 조화서 등 일곱 분이 순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 이윤일 회장은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모두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친 이들입니다. 군문효수(軍門梟首)를 받은 이가 유스트 백신부 등 열 네 분, 교수형이 주교댁 주인 안드레아 정화경 등 여덟 분, 참수형이 루카 황석두 등 예순 두 분,옥사가 15세 소녀 발바라 이정희 등 열 한 분이며, 형벌을 받고 고문을 당하다가 장형(杖刑)을 하는 그 자리에서 숨진 장하치명(杖下致命)이 라우렌시오 한이형 회장 등 여덟 분입니다.
2백년 가까운 긴 세월을 격해 있지만 - 또한 인종이 다르고 피부가 다른 분들이 계시지만 - 같은 주님의 은총과 평화 가운데 여전히 신앙적인 믿음과 통교(通交,Communio)가 가능한 - 감정이 통하고 숨결을 느낄 수 있는 - 분들이라 할 것입니다. 사실 생각하면 신앙증거를 위하여 피흘리며 생명을 바친 이가 순교성인 1백3위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신 125위 뿐이겠습니까. 한국교회 2백년 역사 가운데 전반부 1백년 동안의 박해(迫害)와 일본의 압제 하에서는 물론이려니와 가까이 6.25 당시 숨져간 유명무명(有名無名)의 순교자들은 그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우리 보다 앞서가며 피로써 신앙을 지킨 이가 1만명인지 2만명인지 아무도 모르고 헤아릴 길 없습니다.
주 성모님의 사랑 속에 남다른 순교신심으로 오늘도 힘차게 지상여정(地上旅程)을 걷고 계신 형제자매 여러분! 한국교회는 순교신심이 두텁고 순교자의 후예(後裔)로서 우리 신앙선조들의 귀한 삶과 장한 정신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히 오늘 순교자의 밤 행사와 이 미사에 오신 분들은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신앙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정규적인 신앙공부는 물론, 전국 유명성지와 묘소를 참배하고 순례(巡禮)하며 신실한 신앙적 삶을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9월 순교자성월을 지내는 이번 한 주간도 특별한 의미와 은혜로움 가운데 지내게 된 것 같습니다. 지난 14일(화)은 성 십자가 현양축일이었고 15일(수)은 성모님의 칠고 칠락을 묵상하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이었습니다. 또한 어제는 한국인으로서 첫 사제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시고 이 곳 복자성당의 수호자이신 - 지난 1925년 7월 5일 동료 순교자 78위와 함께 복자위에 올림 받으신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순교 제16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순교자성월에 맞이하는 축일이라 더욱 은혜롭고 감사하며 의미가 깊습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사는 한 사제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신앙선조들이 가장 많이 순교한 9월 순교자성월 복자성당 ‘순교자의 밤’에 뜨거운 감동과 눈물과 감사함으로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지금부터 꼭 164년 전 순교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에게 우리의 눈길과 관심을 집중해 봅시다.
34년 전 중앙 아프리카 자이레 남쪽 나카투바라고 하는 작은 고장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곳 신자들은 스스로 흙벽돌로 정성껏 성전(聖殿)을 짓고 1976년 6월 6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교구장 가방가 주교님을 초청하여 새 성당을 봉헌하면서 멀리 한국의 순교복자 김대건 신부님을 본당수호자로 선포했습니다. 당시에는 성인위에 올림을 받지도 않으셨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을 터인데 멀리 아프리카의 소도시(小都市)에서까지 김 신부님을 그처럼 받들어 모실 정도로 성(聖) 김대건 신부님은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일찍이 지원(志園) 김구정(金九鼎) 선생은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소개하는 저서(著書)에서 김대건 신부님을 성웅(聖雄)이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김 신부님은 열다섯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고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 만리타향(萬里他鄕) 이국생활을 하며 험난한 인생여정을 헤쳐가셨습니다. 실로 만 1년 남짓 짧디 짧은 사제생활이었지만 영웅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성인의 생애(生涯)를 일별(一瞥)해 봅시다. 김 신부님은 1821년 충청도 솔뫼마을(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순교자 집안인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신부님은 소년 시절에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를 가야 했고 15세 때 프랑스인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뽑혀서 최방제 프란치스코, 최양업 토마스와 함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다시 중국대륙을 종단하면서 마카오로 유학갔습니다. 한 겨울에 서울을 떠나 이듬해 여름에야 도착했을 정도로 머나 먼 길이었습니다. 열다섯 열여섯 살 짜리 소년의 이 먼 유학길,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힘겨웠던 도정(道程)이었습니다.이로부터 그분은 철두철미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追從)하며 ‘고통에서 영광에로 죽음에서 부활승리에로’ 나아가는 믿음과 열망으로 외롭고 슬프며 목마르고 배 고프며 서럽고 억울하며 무겁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 형극(荊棘)의 길 온전히 순교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실로 성 김대건 신부님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꼭 53년 전인 지난 1957년 4월 11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경북 영천을 떠나 서울의 성신(聖神) 소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님 슬하를 떠났던 애절하고 가슴 쓰라린 그 때 그 시절 그 마음이 다시 되살아납니다. 마카오 유학 1년 반 만에 동료 최방제의 죽음을 지켜보는 슬픔을 안아야 했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자형의 밀고로 아버지가 체포돼 순교했다는 소식까지 들으시면서 사제수업을 쌓아가셨던 김대건 청년의 -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 - 단장(斷腸)의 비애를 생각해 봅니다. 1844년 12월 부제로 서품되고 잠시 귀국했다가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돼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 일행을 모시고 귀국해서 사목활동을 펴시며 1846년 6월 5일, 연평도 부조에서 다른 선교사들과 조선 입국의 길을 트려다가 체포당하셨고, 그해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희광이가 번득이는 녹쓴 칼날아래 장렬하게 참수치명(斬首致命)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카 9,58)고 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처럼 김 신부님은 집도 절도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없고 빈 몸 맨 주먹으로 작은 봇짐 하나를 짊어지신 채 당신을 찾는 곳이면 빈부귀천(貧富貴賤) 사방팔방(四方八方)을 가리지 않으시며 애오라지 순종의 길 구원의 길 목자의 길 순교의 길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님 안에 사랑하는 한 형제자매 여러분! 김대건 신부님을 생각하면 일찍이 신학교 시절에 강조되던 사제가 되기에 필수적인 3S 곧 Sanctitas(성덕). Sanitas(건강). Scientia(학식)에 대한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신부님은 부모님에 대한 효심(孝心)이 지극하신 것은 물론 교회를 사랑하고 장상(長上)에 대한 순명정신이 투철하시며 뜨거운 동포애와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셨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사랑으로 불탔던 장한 믿음과 삶과 정신으로 사제적 성덕 Sanctitas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기후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낯선 이국(異國) 땅에서 - 마카오 민란(民亂) 후에는 멀리 필리핀 롤롬보이까지, 또한 만주 땅 양관 차쿠는 물론 소팔가자와 훈춘과 의주 변문까지, 프랑스 세실 제독의 통역관 시절의 항해 길이며 사제서품 후 라파엘 호를 타고 풍란을 만나 제주도 모슬포항에 임시 기착한 거며 - 어린 시절부터 사제서품 이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수륙만리 먼 길을 넘나들어야 하셨습니다.강인한 정신과 체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Sanitas, 참으로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장한 삶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필체가 유려(流麗)한 것은 물론 조선전도(朝鮮全圖) 제작과 5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다방면으로 박학다식하여 당시 나라에서도 아까워한 선각자(先覺者)요 출중한 인물이었음은 각종 문헌과 그분의 서한에서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Scientia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계신 형제자매 여러분! 김대건 신부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오늘의 우리 사제들을 생각하고 또한 사제에 관한 이야기를 곁들이며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많은 사제들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하며 그분의 삶과 정신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작년 6월부터 금년 6월까지 한해 동안 ‘사제의 해‘를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먼저 우리의 사제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여기서 잠시 사제와 사제직(司祭職)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사제란 대체 누구입니까.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그 백성을 하느님께 인도하며 하느님 대전에 종교적 행사인 미사성제를 봉헌합니다. 인간이면서 초자연적인 일에 참여하고 인간이면서 초자연적인 생활에 불림받은 이들이며 성사집행권(聖事執行權)과 그리스도 신비체를 성화시키는 권리와 품위를 지녀가진, 하느님 나라의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존귀한 사제직분을 수행하는 존재가 아닙니까. 사제는 그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겹더라도 평생 독신으로 혼자 살면서 그 삶 전체를 철두철미 오직 한 분 스승 그리스도님을 모방하며 사는 온전한 봉사자입니다. 검은 수단이 의미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으면서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요 하느님 백성의 참 목자들입니다. 그러나 가시에 찔리면 상처가 나고 피가 나며, 날씨가 추우면 추위를 타고 감기에 걸리며, 더우면 덥다고 더위를 먹는 인간적인 약성과 조건을 그대로 지닌 채 사제적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제품을 받으면 성소(聖召)가 분명해졌다고 하며 제의(祭衣)를 입고 관(棺)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사제성소(司祭聖召)가 완결되었다고 합니다. 사제란 스스로 끊임없이 수덕생활(修德生活)을 하며 구원과 완성의 길로 나아가는 순례도상의 ‘길 가는 나그네’(Homo Viator)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서로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요 한 가족으로 사제의 부족하고 모자라는 면면(面面)과 약점을 보충하고 ‘애덕과 사랑(Caritas et Amor)’으로 이해하고 감싸며 그 소중한 삶을 옹호하고 지켜야 할 과제와 책임이 우리들 앞에 가로놓여 있다고 할 것입니다.
대구교회를 열심히 살고 계신 형제자매 여러분! 요즘과 같이 윤리도의가 어지럽고 황폐화되어가는 이 어둡고 어려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 승리를 내다보며 이 시대 참된 그리스도인,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서 -예수님의 최후와 김대건 신부님의 최후를 함께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후예인 - 금년에 서품받은 5000번째 이후 대구의 열여섯분 새 사제들은 물론 - 우리의 모든 사제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2011년 내년으로 교구설정 100주년을 맞이한 우리들 모두 참으로 주님 대전에 의합하고 은총 충만한 은총의 때를 살게 되길 간절히 열망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아뭏든 세월은 흘러 순교자들도 순교자들을 그토록 괴롭히던 박해자들도 모두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무엇이 옳고 또한 무엇이 그른지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밝혀줍니다. 여기서 참 진리를 위한 죽음과 편견과 아집과 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지상적이고 현세적인 삶을 대비하게 됩니다. 지금 그 순교자들의 후예인 우리들이 있고, 신앙자유를 누리는 이 시대 이 정황이 또한 오늘의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새로운 박해가 걸림돌이 되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여전히 일상적인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고 이웃 전교에 힘없으며 냉담자 회두(回頭)에 미약한 자신을 감히 우리의 선대(先代) 순교자의 삶에 대비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신앙과 목숨을 맞바꾸어야 하는 직접적인 피의 순교 붉은 순교<赤色殉敎>의 기회가 당장에는 주어지지 않는 듯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日常)가운데 불림받은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 신자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고난(苦難)과 역경(逆境)이 가로놓여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순교의 기회이며 내적 순교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우리의 수도자(修道者)들이 이미 천상적인 것을 위하여 지상적이고 현세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데서 철두철미(徹頭徹尾) 자신을 죽이고 푸른 순교 청색순교(靑色殉敎)를 작정한 삶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Hic et Nunc) 우리들은 흰 순교 백색순교(白色殉敎)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하느님을 ‘임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은 임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또한 하느님을 알고 난 후에 배신하면 세상에 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순교자란 복음대로 사신 분들입니다. 진리를 위해 몸 바친 이들입니다.
순교자의 후예로 사시는 형제자매 여러분! 앞서간 순교자들의 그 뜨거운 피가 순교자의 후손인 내 가슴 속에, 내 혈류 속에 맥맥히 흐르고 있지 아니합니까. 순교자 한 분 한 분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분들의 나이를 따져보고 그분들의 직업과 직분을 헤아려 그분들의 환희에 넘친 환한 최후의 얼굴을 오늘 신앙인 나의 얼굴이 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그분들의 열정이 나의 열정이 되고 그분들의 정신이 나의 정신이 되며 그분들에게 참으로 소중하였던 신앙이 나에게도 참으로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신앙적 유산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일 모레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고 또한 순교자성월을 지내는 동안 우리는 구경꾼이나 방관자가 아니라 참으로 순교자의 귀한 삶과 정신을 모범하며 다른 이가 아닌 내가 순교자요, 증거자로 남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만사를 좋게 안배하시고 섭리하시는 좋으신 주님께서는 믿음의 싸움 신전교회(神戰敎會) 투쟁교회(鬪爭敎會)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사람에게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믿음의 싸움을 잘 싸워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오"(1디모 6, 12).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2디모 4, 7 - 8 ). "너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너에게 씌워주겠다"(묵시 2, 10).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시련과 유혹과 고통을 이겨내신 김대건 신부님과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하늘나라에서 천사들과 성인성녀들과 더불어 영원한 천상복락(天上福樂)을 누리시며 틀림없이 지금 이 미사 중에 함께 하시고 후손된 우리들을 굽어보시며 기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순교자의 모후이신 고통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들과 우리나라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인 첫 사제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대구교회의 수호자 성 이윤일 요한과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들과 저희 교구의 현재와 장래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울산 장대벌 세분 순교자들를 비롯한 120위 동료 순교자들과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저희들과 특별히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과 환란과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행적가 ] 작사 작곡 : 주재용 신부(대구대교구 제4대 교구장) 사목지표 : Salus in Cruce(십자가로 구원을!)
1. 십오세 어린소년 안드레아는 모정에 싸인조국 뒤에버리고 멀고먼 이역풍토 만리타국에 십여년 오랜풍상 겪으셨도다
2. 산설고 물선저곳 마카오에서 오륙년 철학신학 두루배우고 임인년 이월경에 오문을떠나 요동에 당도하니 만주객이라
3. 변문에 몸숨기고 지내면서도 조정의 사신행렬 지날때마다 그중에 혹시교우 만나질까해 틈틈이 기우기웃 살펴보도다
4. 우연히 김방지거 만나게되어 첩첩이 쌓인정담 서로 나눌새 오호라 주교신부 치명하시고 그리던 부친까지 순교하셨네
5. 열심한 안드레아 이말듣고서 영신엔 기꺼하며 감사하시나 모친의 유리걸식 생각을하니 육정엔 뜨건눈물 옷깃적신다
6. 흉흉한 조국땅에 혼자가고저 동편을 바라보니 망망하구나 올올이 찢은편지 노를비비어 허리에 보배로이 받아지녔다
7. 압록강 깊은물은 앞길을막고 삼엄한 순라꾼은 사방살피나 민첩한 안드레아 소틈에끼어 변문을 썩나서니 고국이로다
8. 밤새껏 길걸으니 기갈심하고 혹독한 추위겹쳐 사경이건만 주막집 쫓겨나와 잘데없어서 깊은산 찬눈위에 몸을 던진다
9. 혼몽중 바삐가란 소리듣고서 이상한 저그림자 뒤를따르며 조국땅 등지고서 되돌아서는 비장한 그마음이 오죽했을까
10.매스뜰 이신부께 사실아뢰고 몽고에 머물면서 공부하던중 훈춘에 다녀오란 분부받들고 새길을 개척하려 그곳가시네
11. 십이월 중순경에 길을떠나니 쌓이고 덮힌눈이 발길막으며 만주벌 찬바람은 살을에이고 백두산 눈보라는 뼈를 녹인다
12. 경원서 밀사교유 잠간만난후 눈물로 이별하며 발길돌리니 사십일 천신만고 수포가되고 그토록 애쓴일이 허사되도다
13. 몽고에 되돌아가 부제품받고 세번째 조국땅을 찾아나설제 주교님 강복받고 변문을떠나 십여일 고생끝에 서울에오다
14. 십여년 그리웁던 모친안뵙고 상해를 목적지로 배를띄우니 광풍에 놀란물결 배를덮치나 성모님 보호입어 생명구했네
15. 상해의 김가항서 탁덕승품코 고주교 안신부를 함께모시고 강경포 고국땅에 상륙하시니 회로의 그고생은 더욱심했네
16. 이신부 영접차로 황해도가서 뜻밖에 체포되어 포청몸되니 귀국후 채일년에 옥중생활은 진실로 애석하고 원통하도다
17. 금부에 이송되어 사십공초에 죽기로 결안내니 영광이로다 새남터 형장에서 생명바치고 안성군 미리내에 안장되도다
18. 천구백 이십오년 칠월오일에 칠십구 복자함께 시복되시고 천구백 팔십사년 오월육일에 백삼위 모두함께 시성되도다
출처 : 본당주임 신부님 홈피 - http// leoch.kr |
|
첫댓글 복자성당에서 하신 신부님 특별강론을 못들어서 아쉬웠는데 홈페이지에서 발견하고 신부님의 귀한 말씀을 못들은 우리 본당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허락도 없이 퍼와서 올립니다. 신부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