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잡지에서 ‘결혼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의 내용은 딱 네 글자의 영어뿐이었습니다. “DON’T”(하지마!) 결혼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지요. 사실 왜 결혼하려는 것일까요?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생각하면서 결혼하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결혼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저희 둘 아주 행복하게 잘 살게요.” 결혼을 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고통과 시련은 생각하지 않은 채, 항상 꽃길만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꽃길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위의 잡지에서 말하는 조언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결혼만이 행복한 결혼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내 삶에 꽃길만 가득해야 하는 사람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꽃길이 아니라면서 다른 이들에게 불평불만이 가득하지요. 자신의 행복하지 못한 이유들을 이야기하면서 왜 자신에게는 그런 꽃길이 오지 않냐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고통과 시련 역시도 내 삶의 일부입니다. 피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과 시련 역시 받아들이게 된다면 어떨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힘차게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방인 여인이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면서 이 여인이 다가오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여인의 바람을 들어주려하지 않습니다. 제자나 예수님의 행동은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분명히 커다란 걸림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면서 모욕까지 줍니다. 딸이 아픈 것도 커다란 고통과 시련인데, 여기에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에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더 큰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시지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고통과 시련에 대해 한탄만 하고 불평불만을 한다고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통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행운을 철저하게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행운은 힘들게 일할수록 더 많이 따라온다(스티븐 리코크). 가나안 여인의 믿음 영화배우 박신양의 동기부여 우연히 영화배우 박신양의 러시아 유학 시절에서 경험했던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학 1년차 때 너무 힘들어서 담당 선생님을 찾아서 상담을 했답니다. “선생님, 저는 왜 이렇게 힘든가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시집 한 권을 건네 주셨습니다. 시집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지요. “당신은 왜 인생이 행복하기만 하고 전혀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할 때보다 힘들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중요한 건 힘들 때도 자신의 인생입니다. 힘들 때를 더 사랑해야 행복해집니다.” 이 말에 동기부여 받아 멋진 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힘든 시간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즐거웠을 때와 슬퍼했을 때의 배분이 어떤 것 같습니까? 즐거웠을 때가 100%이고, 슬퍼했을 때는 0%일까요? 아닙니다. 때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살펴보면 거의 50:50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즐거웠을 때만 내 인생으로 받아들이면 어떻습니까? 슬퍼하는 50%의 내 삶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즐거웠을 때나 슬퍼했을 때나 모두 나의 100%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요? 길에서 우연히 본 아이들의 손바닥 도장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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