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그 문화를 창조하고 전달하는 의사소통의 도구, 즉 말과 문자를 제대로 갖추고 있어야 발달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말과 문자를 제대로 이용할 줄 아는 민족이나 국가만이 발전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화와 경제력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문해율이 세계적으로 매우 높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모든 국민이 정보를 전달받고 전달할 수 있는 도구를 충실히 갖추고 있어서 문화를 가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글 보급 운동과 민족문화
문자에는 문화를 창조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인 한글을 국민들에게 보급하려는 노력은 훈민정음이창제된 이후부터 줄기차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한글 보급 운동을 벌여 온 것은 19세기 말부터인데, 이 무렵부터 신식 활자본이 도입되어 문헌 및 문서가 쉽게 많이 출판될 수 있었고, 또 보급하기도 쉬워져 널리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한글 보급 운동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언론계에서 한글 보급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시작한 덕택입니다. 특히 신문이 그 기능을 주로 담당하여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신문>입니다.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독립신문>의창간호1896년 4월 7일에서는 한글 보급뿐만 아니라 한글 전용 및 띄어쓰기 운동까지 같이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뎨국신문>창간호1898년 8월 10일에도, <대한매일신보> 창간호1907년 5월 23일에도 국어 국자 의식을 높이려는 노력이 나타나 있다는 것역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맹 퇴치 운동이 큰 효과를 본 것은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 때였습니다. 일본이 조선의 제국주의적 지배 질서를 영속화하기 위해서 합병 통치 이념으로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시동화一視同化, 공존공영共存共榮 등을 내세우고 그 통치방안을 실현시키기 위한 교육정책으로 민족 동화, 언어 동화, 문화 동화, 식민 동화 교육정책을 실현시키려 하였습니다. 민족과 문화는 언어와 문자에서 형성되는 것이어서 동화 정책은 주로 언어정책으로 이어져 갔고, 그것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창간 직후인 1920년부터 기사를 통하여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당시의 신문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그리고 1907년부터 1938년까지 간행된 해외 신문 <신한민보新韓民報>뿐이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내용은 <국어교육 100년사 II>윤여탁 외(2006), 서울대학교출판부의 225쪽에 실린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단, 한자로 되어 있는 기사 제목은 한글로 고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저항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그것이 곧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가 펼쳤던 문자 보급 운동 및 농촌 계몽 운동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미 민간단체에서도 문자 보급 운동이 크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의 한글 보급 운동의 실상
그 당시의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한글 보급 운동을 개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로 1927년 이후의 보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동아일보>만 조사하고 그 당시의 <조선일보>를 조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조선일보>까지 조사하면 한글 보급 운동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신문에 한자로 표기된 것은 아래 표에서 한글 옆에 한자를 같이 적었고, 한글로 표기된 것은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이 기사들에 의하면 1927년부터 시작하여 1935년까지 한글 보급 운동이 끈질기게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역별로는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한글 보급 운동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해외에서까지 한글 보급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한글 보급 운동에 앞장서서 활약한 사람들은 주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었습니다. 거의 모두가 국어학자들이었는데, 두 번 이상 강사로 활동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윤재 23회 권덕규 12회 이병기 9회 최현배 9회 백세명 6회 장지영 선생 4회 김선기 4회 신명균 4회 이희승 3회 김윤경 3회 이상춘 3회 이갑 2회 조용훈 2회 정렬모 2회 박승빈 2회
이윤재 선생은 심지어 해외의 봉천까지 가서 한글 보급 및 철자법을 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일평, 이극로, 이필수, 정인섭,정인승 선생 등도 1회씩 강사로 일하였습니다.
한글 보급 운동은 왜 일어났을까요?
그렇다면 왜 이처럼 한글 보급 운동을 하였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제강점기 때, 특히 1930년대 초부터 한민족 말살정책이 강화될 조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항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가장 빠른 길은 국문, 곧 한글을 알게 하는것이었습니다. 조선어학회가 1929년부터 한글 맞춤법 제정 운동을 전개하자 조선총독부가 이를 제지하기 위하여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1912년 제정과 '보통학교 언문 철자법 대요'1921년 제정를 강제로 시행하려 하였는데, 조선어학회는 그에 굴하지 않고 1933년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어 보급하였습니다. 애국 애족 운동을 펼치던 당대의 선각자들은 우리 민족에게 한글뿐만 아니라숫자와 셈법까지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고 절감했는데, 그중에서도 한글을 보급하는 일이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던것입니다.
언론사의 한글 보급 운동 노력
언론사에서는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해 왔습니다.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가 각각 동일한 취지의 운동을벌였습니다.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의 한글 보급 운동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는 창간 8주년 기념 사업으로 1928년 4월 1일을 기하여 '문맹 퇴치 운동'을 '글장님 없애기 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여 전국적으로 전개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 준비 작업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계획하였습니다.
① 선전 포스터의 준비
선전 포스터는 시간으로 보아 가장 생명이 길고 대중의 주목을 이끌기에 가장 편리하여서 준비한 것입니다. 이 포스터는 다음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ㄱ ㄴ부터 배우자'고 외치고 나서는 횃불을 든 사람 뒤에 수많은 '글장님'들이 감기었던 눈을 뜨고 기쁘게 따르는 형상을 그린 것입니다.
<동아일보> 1928년 3월 25일자
② <우리글 원본>이라는 교재의 인쇄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교재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③ 소년군少年軍으로 하여금 선전 시가행진 ④ 비행기에서 전단을 살포 ⑤ 인력거와 자전거에 꽂고 다닐 선전기를 만듦 ⑥ 문맹 퇴치가노래의 현상 모집
문맹 퇴치가를 현상 모집하였는데, 신문에 난 광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맹 퇴치가 현상 모집 광고<동아일보> 1928년 3월 17일자
그리고 실제로 그 1년 뒤인 1929년 2월 10일에는 최현배 선생의 '글장님을 없이자文盲打破歌'라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립니다.
글장님을 없이자文盲打破歌 崔鉉培 (1) 한 사람의 마음이 널리 퍼지며 한동안의 생각이 길이 傳하니 글ㅅ자의 보람이 정말 크도다 人類社會 華麗한 現代文明은 文字活用 發達이 낳은 것이네
(2) 生存競爭 劇烈한 二十世紀에 남과 같이 날뛰고 살아가랴면 무엇보다 첫일이 글자 알기라 눈뜨고 글 ?보는 글장님으로 競爭場裡 落伍 免치 ?하네
(3) 여보 우리 二千萬 兄弟姉妹들 世界에서 훌륭한 한글임자로 글장님이 많음은 딱한 일이다 가르치세 배호세 우리 한글을 그래야만 이 民族 살아나겠네
(4) 배호기와 읽기와 씨書고 박기에 고-ㄹ고로 다 좋은 우리 한글은 民衆敎化使命을 띄고 났도다 新文化의 基礎로 굳이 닦으며 新生活의 武器로 한끗 부리세 己巳元旦에 한글의 종 - 감메 한방우는 精誠을 다하여 이 노래를 우리 二千三百萬 同胞에게 붙치나이다
⑦ 전국 300여개 동아일보사 지분국을 총동원하여 지원 활동 ⑧ 교육, 사상, 종교계를 망라한 전국 명사들을 초빙하여 강연회 개최
그 결과로 실행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강연회 인사를 확보하였는데 1928년 4월 2일부터 개최할 예정이었습니다. 강연회 인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병옥 송내호 민태원 윤치호 최두선 안재홍 홍명희 최현배 이만규 최남선 김기전 박승빈 방정환 최규동 김미리사 권덕규등 32명<동아일보> 1928년 3월 29일자 참조 ② 1928년 3월 16일자 사고에서부터 시작하여 3월 29일까지 '글장님 없애기 운동'의 중요성을 계몽하고 이 운동의 전개 계획을 알리는 보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1928년 3월 28일 일본 경찰은 '글장님 없애기 운동'을 금지하는 통첩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너무 기가 막히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문맹 퇴치'라는 표어가 러시아로부터 왔고, 포스터에 붉은 근육의 노동자를 그려 넣은 것이 공산주의적 색채가 풍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년군을 시켜 시가행진을 하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이유도 들었습니다.그 결과로 '글장님 없애기 운동'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1935년 사이에 문자 보급 운동과 브나로드в народ, 러시아어로 '인민 속으로'라는 뜻 운동이 재개되었습니다. 그동기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준비와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은 1931년에 시작되었는데,그 해 7월 15일에 브나로드 운동의 첫 사고社告가 실렸습니다. 이것이 제1차 브나로드 운동입니다. 그 운동의 내용은 다음과같은 것이었습니다.
① 새 맞춤법에 의거한 문자 보급 운동 ② 숫자 강습 ③ 위생 강연 ④ 학술 강연
1931년 7월 21일부터 9월 20일까지 62일 동안 계몽 요원 423명이 142개처의 강습지를 돌며 강습을 실시하였습니다. 1932년에는 제2차 브나로드 운동을 실시하였습니다. 1932년 7월 18일에 서울 공회당에서 출동 대원 500여명과 각 분야의 유지들이 참석하여 이 운동의 성공을 다짐하였습니다. 이러한 문맹 퇴치 운동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이 운동의 성과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자료는 <해설, 문자 보급 운동을 통한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운동>정진석 편(1999), <문자 보급 운동 교재>LG상남언론재단, 32쪽를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거의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모두 참여하여 한글을 깨우친 것이니, 오늘날 생각해 보아도 대단한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사
조선일보사는 1929년 7월 14일부터 전국 규모의 '귀향 남녀 학생 문자 보급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를 제정하였습니다. 1929년 7월 10일자 사설을 통해 문자 보급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가장 좋은 방법으로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도록 하는 방안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은 그 당시에 조선일보사 지방부장을 맡고 있던 국어학자 장지영 선생 선생이었습니다. 그 전개 방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① 조선일보사가 교재를 준비한다. ② 중학교 학생 중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 ③ 여름방학 동안에 시골에 들어가서 글 모르는 동포들에게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에 따라 한글을 가르친다. ④ 간단한 산수를 가르쳐 계몽한다.
문자 보급 운동의 첫해인 1929년에는 409명의 학생이 참여했고, 이 중 91명은 방학이 끝난 뒤에 보고서를 보내 왔습니다. 이때 한글을 깨친 사람은 모두 2,849명이었습니다. 1930년에는 문자 보급반에 참여한 학생이 900여 명이었고, 문자를 깨우친사람이 모두 10,567명인 것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1931년에는 신춘 사업으로 춘계 문자 보급반 강좌를 열었습니다. 참가학생 수도 1,800여 명으로 늘었고 강습생만도 20,80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1932년과 1933년에는 이 운동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34년에 다시 시작하였고, 이것이 1936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