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요한 목사
작성시간 24.04.22~
요한복음 강해(308,309,310)
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70 이레(17, 18, 19)
요한복음 12:12~16절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에스라 7:7~13절
7 아닥사스다 왕 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11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의 학사인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12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13 조서하노니 우리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찌어다
아닥사스다 왕 재위 7년 때에 학사 에스라가 조서를 받게 됩니다. 에스라가 아닥사스다에게 신임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에스라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니 왕이 묻습니다. “에스라야! 왜, 얼굴에 그렇게 수심이 가득하냐?” 그러자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졌지만, 아직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도시가 정비되지 않고 성전에서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속이 상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성전만 지었지 예배를 집전할 제사장들이 없고 성전에서 수종들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온전하게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에스라가 이 말을 하자 아닥사스다 왕이 온 나라에 명령을 내립니다.
예루살렘 도시를 축성(築城)할 재료들과 기술자들과 성전에 예배할 제사장들과 수종들 레위인들을 보내라고 합니다. 그 후 13년 후인 BC 444년에 3차로 느헤미야와 나머지 사람들을 보냅니다. 1진(陣)으로 간 에스라와 2진(陣)으로 간 느헤미야가 합심해서 7 이레 즉 49년 동안 예루살렘 성을 재건합니다.
이때 엄청난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의 내용을 증거 하는 성경이 바로 ‘느헤미야’와 ‘에스라’입니다. 그러니 에스라에게 2차 포로 귀환을 허락한 때가 BC 457년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영(令)이 난 후 에스라의 주도하에 7 이레가 지난, 즉 49년 후인 408년에 예루살렘 성(城)이 완전히 중건됩니다.
이때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7 이레 동안 부흥 운동을 일으켜서 무너졌던 성전 예배를 부활시키고 율법 신앙을 회복합니다. 이렇게 되어 70 이레 중 첫 구분에 속한 7 이레는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그러면 70 이레 중 두 번째 구분인 62 이레를 살펴봅니다.
예루살렘 성이 중건되고 난 후 62 이레가 흐른다고 합니다. 62 이레가 흐르고 나면 기름 부음 받은 왕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城)이 중건된 BC 408년부터 62 이레 즉 434년이 흐르게 됩니다. 이 시기에 제국들이 메대 바사에서 헬라로 헬라에서 로마로 바뀌었습니다.
로마가 세워지면서 BC에서 AD로 기원(紀元)이 바뀝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公認)하면서 주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기원(紀元)이 바뀝니다. 기원이 바뀐 것은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주 예수 믿기 전에는 땅의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고 난 후 하늘의 사람이 된 것과 같습니다.
바뀐 기원을 서력기원(西曆紀元)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태음력(太陰曆)을 사용하였는데 기원이 바뀌면서 태양력(太陽曆)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음력(陰曆)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식 연호고 양력(陽曆)은 신약식 연호입니다. 음력은 달의 주기를 사용하고, 양력은 태양의 주기를 사용합니다.
성경은 해는 하늘을 상징하고, 달은 땅을 상징합니다. 영적인 의미로 달은 육을 상징하고, 태양은 영을 상징합니다. 달은 땅(육)의 역사를 말하고, 태양은 하늘(영)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달은 세상이라고 하고, 태양은 묵시라고 합니다. BC는 주 예수님이 오시기 전, AD는 주 예수님이 오신 후입니다.
주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구약이라고 하고, 주 예수님이 오신 후를 신약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 예수님을 기준으로 세상이 둘로 나누게 됩니다. 주 예수님이 시대를 완전히 바꾸신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때부터 구약은 땅의 역사(歷史)라고 하고, 신약은 하늘에 묵시(黙示)라고 합니다.
주 예수님이 오심으로 역사는 끝나고 묵시로 접어든 것입니다. 묵시(黙示)는 감추어진 세계라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법칙이 있습니다. 구약은 시간을 삭제하면서 갑니다. 예를 들면 1000에서 500으로 갑니다. 500에서 100으로 갑니다. 100에서 0으로 까먹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시간을 첨가하면서 갑니다.
1에서 100으로, 100에서 1000으로, 1000에서 5000으로 갈수록 불어납니다. 구약은 빼는 역사고 신약은 더하는 역사입니다. 삭제를 당한다는 것은 죽음 곧 소멸을 말하고 더한다는 것은 영생으로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고 의미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 신앙은 끝이 죽음입니다.
망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었더라!”, “죽었더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 신앙은 영생입니다. 다 주 안에서 살았더라고 합니다. 구약을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율법 신앙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 신앙은 반드시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신약은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반드시 영생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옛 언약인 율법 신앙은 갈수록 심령이 황폐해지지만 새 언약인 은혜 신앙은 갈수록 심령이 살아나고 황홀해집니다. 율법 신앙은 자기 행함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에 육신의 쇠함에 따라서 점점 더 의욕이 상실됩니다.
신앙이 짐스러워집니다. 젊어서 근력이 있을 때는 열심과 충성도 내고 합니다. 하지만 기운이 빠져 보면 그때는 자기 몸뚱이 하나 챙기기 바쁩니다. 그러니 자기 몸으로 행해야 하는 율법 신앙은 점점 골골해져서 마지막에는 소망이 없고 죽음에 가두어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은혜 신앙은 예수의 피 뿌림으로 거저 주어지는 용서로 살기 때문에 살아갈수록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자기 근력이 떨어질수록 주 예수님 품에 안길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이것이 주 예수님의 안과 주 예수님의 밖의 차이입니다.
다른 말로 역사에 속한 사람과 묵시에 속한 사람의 차이라는 말입니다. 묵시와 역사에 대해서는 잠시 뒤 70 이레의 끝을 살펴볼 때 더 살펴볼 것입니다. 다시 62 이레를 추적해 봅니다. 7 이레가 BC 408년에 끝이 났다고 했으니 그러면 BC 408년부터는 62 이레가 시작됩니다.
62 이레는 62주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62 × 7 = 434년이 됩니다. 그렇다면 7 이레의 끝인 408년에서 62 이레가 지나면 434년이 됩니다. 그러면 408년에서 434년을 빼면 마이너스 -26이 됩니다. 62 이레 기간 중 기원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62 이레의 끝은 AD 26년이 되는 것입니다.
마이너스 -26은 기원후의 년도입니다. 그래서 62 이레의 끝인 434년은 AD 26년이 됩니다. 주 예수님 오신지, 26년이 되었습니다. 이 년도가 왜, 중요하냐면 이때가 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는 사건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AD 26년은 주 예수님이 공생애가 시작하는 때입니다.
이때가 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하시면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하실 때입니다. 성경은 주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를 주 예수님이 30세 때라고 합니다.
세상의 서력기원(西曆紀元)으로는 주 예수님이 주 후 26년에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 예수님이 30세 때 요단강에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4년이라는 오차가 생깁니다. 이는 서력기원(西曆紀元)을 주 예수님 탄생 기점으로 맞추지 않아서입니다.
로마시 창건 기념일에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紀元前)과 기원후(紀元後)를 나누는 것은 주 예수님이 오시기 전(前)과 오시고 난 후(後)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4년의 오차를 두고 나누어졌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면 주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를 기준으로 서력기원(西曆紀元)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4년 후를 서력기원의 시작으로 삼은 것은 로마시 창립 기념일을 기준으로 잡아 놓았습니다. 그 당시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된 후 526년에 로마 황제 유스틴이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에게 주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을 바꾸라고 합니다.
그런데 디오니스우스 엑시구우스가 로마의 창건일을 기원이 바뀐 기점으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로마시 창건일이 주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난 다음 4년 후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 탄생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4년이 지난 로마시 창립 기념일을 기준으로 서력기원을 시작점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기원은 주 예수님이 실제로 탄생하신 것보다 4년이 늦습니다. 지금이 주 후 2024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면 2028년입니다. 4년이 늦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계산을 하면 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때가 정확히 30세 때가 맞고 70 이레 중 69 이레가 되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니엘이 계시를 받을 때 예루살렘 성(城)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를 기점으로 7 이레와 62 이레가 지나서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예언이 지금 주 예수님이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면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아니 아까는 주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入城)을 정점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30세 때이고 예루살렘 입성하는 때는 33세 때이니 3년의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어느 것을 기름 부음 받은 기점으로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게 됩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것은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다고 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는 것을 말합니다. 주 예수님은 왕으로 두 번 인정받았습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로 받고 또 한 번은 사람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왕으로 인정받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때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왕이란 것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69 이레의 기점은 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이 맞는 것이 됩니다. 그럼 예루살렘 입성 때는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는 역사(歷史)와 묵시(黙示)의 차이 때문입니다. 묵시 세계는 흐름이 없습니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항상 오늘입니다. 주 예수님은 30세 때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써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묵시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묵시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은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미 역사 속에 주 예수님은 죽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는 물에서 올라오니 하늘로부터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임했는데 이는 성령으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이제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새로운 사람인 묵시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후로는 주 예수님의 소속이 바뀝니다.
역사 속에 있던 목수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매시야로서의 주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는 주 예수님은 묵시에 속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난 이후의 주 예수님이 살았던 역사적인 세월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3년을 살아도 하루이고 십 년을 살아도 하루입니다. 왜냐하면, 묵시의 세계는 영생의 세계라서 시간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이는 묵시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생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나중에 죽어서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사람으로 이미 거듭났습니다. 오늘 죽어도 천당에 가고 20년 후에 죽어도 천당에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역사에 속한 몸뚱이는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굴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가서 자기를 보았습니다. 이미 자신은 천국에 가 있습니다. 그러니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안이기에 묵시적인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 예수님도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써 묵시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묵시적 존재에게는 시간이 진행되지 않고 항상 오늘입니다. 그러면 주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은 구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주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역사적으로 죽었습니다. 세례는 죽음이니 주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 속에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이 담겨 있습니다.
3년 후에 일어나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요단강에서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죄수가 사형선고를 받으면 이미 죽은 목숨인 것과 같습니다. 집행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주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동시에 물에서 올라오실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님은 이미 왕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성도에게 적용하면 우리도 주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미 성도는 영생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이미 영생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죽어야 할 육신이라는 몸뚱이를 가지고 정한 때까지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영생을 품고 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영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때부터 묵시적인 존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묵시적 존재는 역사 밖에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이는 묵시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묵시적 존재가 되면 역사의 의미는 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물리적인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 안에 있기에 70년을 살다가 죽든지 지금 죽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순간 주 예수님은 역사에 속한 생애는 끝입니다.
그리고 역사와 상관없는 묵시적 생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3년 공생애는 시간적인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님이 공생애 3년 후에 예루살렘 성(城)을 입성하는 것은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가름 부음을 받는 시간과 한 묶음 속에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제발 이해되시길 바랍니다. 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야 됨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루살렘 입성은 백성들로부터 메시야 됨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똑같은 의미로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제 70 이레 중에 마지막 구분인 1 이레를 살펴봅니다.
마지막 1 이레입니다. 7 이레는 예루살렘 성(城)이 중건되는 것으로 성취가 되었고, 62 이레는 주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면 69 이레가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70 이레 중 마지막 1 이레가 남았는데 마지막 1 이레는 언제 시작이 됩니까?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