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현대불교문학상 시조부문 수상-고정국
<이월의 숲>
빙점을 치르고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저들
부채꼴 탑을 쌓는 나목들 관습에 따라
제몫의 하늘을 섬기는
잔뼈들이 보인다.
한 곳에 이르기 위해
길 아홉을 버려야 하는
뼈뿐인 잡목 숲은 그대 영혼의 사원이었네
선 채로 참선을 마친
팔다리가 눈부셔.
눈은 뜨지 않았어도
이월은 참 귀가 밝아
겨울과 봄 사이 뽀얀 빛이 감도는,
"바스락' 은말한 처소에
한 쌍 새를 앉힌다.
<독짓는 늙은이처럼>
물 불 마다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땅만큼 하늘만큼 우여곡절을 다스려온
부처님 이목구비의 옹기 한 점 뵙습니다.
만삭의 항아리를 밤새도록 쓰다듬으며
뜨거운 열 손가락 지문까지 물려받은
또 한 점 검붉은 살갗이 독신처럼 늙습니다.
당신의 손바닥엔 바보들만 산다지요
목 짧은 토우土偶들의 분절 없는 아우성 속에
늦도록 옹기를 굽는 조선 노을이 서럽습니다.
<신발 한쪽>
한 운명을 싣고 돌아온 또 하나 운명이 멎다
닻줄조차 반납해버린 무 톤 급 전마선 한 척
하반신 물속에 둔 채
돌을 베고 누워있다.
폐선 밑바닥에 바다 한쪽이 들어와 산다
그 바다 한가운데 하늘 한쪽이 내려와 살고
열아홉 어부의 딸 같은
낮달 잠시 머물다 간다.
세상에 피를 바치고 세상 밖으로 버려진 것들
노을 녘 바닷길을 저벅저벅 걸어 나왔을
잡부의 신발 한쪽이
폐선처럼
마르고 있었다.
<동시조>
1) 소나기 잠깐사이
소나기 잠깐 사이 초승달이 놀러왔다
소나기 잠깐 사이 귀뚜라미 놀러왔다
참깨 꽃 방울소리가 달 쪽에서 들렸다.
2) 배고픈 호랑이
노형동 우리 집은 공항에서 가까워요
아침 일곱 시면 첫 비행기 뜨는 소리
"으르렁" 배고픈 호랑이 문 밖에 와 울어요.
3) 까치
까치가 많은 동네 사람 살기 좋은 동네
까치 소리 많은 동네 친구들이 많은 동네
엊그제 이사 온 까치가 내 이름을 묻네요.
<부처와 은행나무>
나무도 성불成佛한다는
시월 상달 운문사雲門寺 가면
일제히 날개를 접은
수 천 수만의
나비
나비
부처가 맨발로 내려와
대웅전 마당을
쓸고
있었네.
-시조 부문 수상 소감-
수상소감 쓰는 게 작품보다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정녕 글 쓰는 자로서의 자질, 시가 무엇이며, 시인이란 또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정답을 스스로에게 확신시켜주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시인은 자유를 추구한다. 나는 시를 쓰면서도 자유보다 행복 쪽에 눈길 두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자유나 행복 이 녀석들은 다가가면 다가가는 만큼 그 반대편으로 사람을 몰아세운다. 變즉通이라 할까. 窮즉通이라 할까 <글>은 곧 <길>이라는 사실..., 창작과정의 크고 작은 절망의 벽은 그때만다 나로 하여금 새로운 길을 모색케 했다.
삶 중에서 가장 큰 절망이 죽음이라면 가장 큰 환희는 탄생이 아니던가. 그렇다, 자유의 중심에 행복이, 행복 중심에 사랑이, 사랑 중심에 암수가, 암수의 중심에 씨앗이, 그 씨앗의 중심에 비로소 생명 또는 작품의 모티브가 존재한다는 걸 글 쓰는 과정을 통해 깨닫는다. 마침내 3장6구12음보라는 시조의 견고함 속에서 더 큰 자유와 행복과 생명을 찾는 길! 이야말로 타 장르에 비교되지 않는 시적 성취감이며 희열이었다고 잘라 말하고 싶다.
수상작 [이월의 숲]에 담긴 내 무의식의 정체가 '잉태으 정령'임을 족집게처럼 확인시켜주신 심사위원님께 삼가 경의를 표한다. 더구나 이 아득한 오지의 농사꾼에에게 과분한 영광을 주신 <불교문예>에도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하여 나는 이번 수상의 이유를 자신은 물론 이웃의 자유와 행복과 생명을 억압하는 내적 외적 대상에 時調라는 진검으로 과감히 맞서라는 또 다른 주문으로 받아들인다.
고정국:1947년 서귀포시 위미에서 출생.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서울은 가짜다], [백록을 기다리며], 등 5권의 시집과 제주 사투리 서사 시조집[지만울단 장쿨레기], 산문집 [고개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조사助詞에게 길을 묻다] 등이 있음. 중앙시조대상신인상, 우심작품상, 이호우문학상 등 수상. 월간<시조갤러리> 발행인.
-심사평-
시조 미학의 완숙한 경지
이근배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가는 시의 봉우리 위에서 시조의 횃불이 오르고 있다. 열 일곱 번째를 맞는 현대불교문학상에서도 시조가 중심에서 받쳐 들고 상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음을 읽는다.
지난 한 해 동안 넓은 시조의 밭을 경작해 온 시인들 가운데서도 독창적 시세계를 새롭게 보인 작품들을 대상으로 예심에서 올라온 후보작들은 그 우열을 가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거듭 읽고 토론을 거친 끝에 고정국 시인의 [이월의 숲] 외 4편을 수상작으로 내세우는데 합의를 보았다. 고정국 시인은 등단 이후 스물 네 해 동안 오로지 시조의 정형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시적 상승을 이룩한 위에 최근에 더욱 경지를 새롭게 열어가는 창작활동의 전성기를 내뿜는 열기가 뜨겁다.
수상작 [이월의 숲]은 몸을 얼리는 추위를 이겨내고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을 깊은 통찰력과 따뜻한 감성으로 장엄한 부활을 연출한다. "제몫의 하늘을 섬기는/ 잔뼈들이 보인다" "선채로 참선을 마친/ 팔 다리가 눈부셔" "바스락, 은밀한 처소에/ 한 쌍 새를 앉힌다"의 종장에서 이 시인이 개척한 시조미학의 완성도를 확인해 준다.
이것은 시조의 틀에 구속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로운 발상과 가락을 얻어서 자유시의 그것보다 더 자유롭게 시를 생산해 내고 있음이다. 의도적으로 "영혼의 사원", "참선을 마친" 같은 시어를 구사한 것은 아닐지나 한국시의 원류가 되는 저 불가적 시가인 향가의 한 뿌리와도 맞닿아서 올해의 수상작으로 빛을 더해준다.
첫댓글 선생님! 축하축하드려요. "참 귀가 밝'은 작품들과 수상소감, 심사평 정갈하게 읽습니다. ---대구에서 박희정 드림
진검의 정수를 감히 느낄 수야 없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뭉클뭉클 거리는 어휘들의 장관을 봅니다. '그대들이 저의 스승' 이라는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