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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느림의 미학 282 사금파리의 무덤 <화야산 755m>
홍진후 추천 0 조회 104 18.05.28 22:3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2015.  5.  27.  07;00

울안에 핀 수수꽃다리꽃의 암향(暗香)이 코를 간지른다.

출입문을 열고나서다 담벼락에 붙어 활짝 핀 장미꽃에 코를 대본다.

 

어느 향(香)이 좋을까?

가시를 내밀고 은은한 향을 뿜으며 화려하게 핀 장미꽃에 코를 대고 라일락과 향기를

저울질 하는 속물근성을 감출 수가 없다.

 

장미꽃이 울타리를 메웠다.

골목길은 초여름 빛이 농염하고 부드럽게 부는 바람과 꽃에서 뿜는 냄새는 향기롭다.

 

반가운 마음에 장미꽃을 만지려 손을 내밀다 주춤한다.

나무와 풀은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혹한을 이겨냈는데, 나는 이 꽃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 문득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길을 걸으며 며칠 전 34살의 나이로 사망한 조카사위가 생각난다.

모진 게 사람의 목숨으로만 알았는데 쉽게 거둬지는 것도 사람의 목숨이구나.


패혈증(敗血症)이 그렇게도 무서운 병인가?

미생물의 감염으로 주요 장기에 장애를 가져와 저혈압이 동반되며 쇼크사 하는데,

Sepsis, septicemia로 불과 36시간 만에 폐가 녹아 사망을 했다.

 

이 좋은 봄날에 천붕지파(天崩地破)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게 뭔지를 가족들이 체험을 했지.

 

2년 전 예식장에 들어서면서 로비에 앉아있던 안사돈을 처음 보며 나도 모르게 느껴지던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왔다.

 

내가 점쟁이가 아니니 길(吉), 흉(兇), 화(禍), 복(福), 회(悔), 인(吝)을 점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아무 일 없이 잘 살았으면 하고 빌었는데, 조카사위가 느닷없이 패혈증으로

우려했던 흉사(兇事)가 생겨 당황을 했지.

 

 

소망이 이뤄지는 길(吉)과 실패의 흉(兇)이라,

회(悔)는 흉함이 예상되지만 중간에 뉘우치면 길(吉)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인(吝)이라 함은 길(吉)할 수 있는데 처신을 잘못하면 흉(兇)이 되기에

문상(問喪)을 마치고 공주땅을 벗어나며 묘한 회한(悔恨)에 잠시 몸서리를 쳤지.


사람은 자기가 풀 수 있는 문제만을 설정할 뿐이다.

그날 느꼈던 묘한 감정을 전파하여 조심을 시켰어야 하는데, 경사(慶事)에 초를 치고

싶지 않아 그냥 묻었다가 이제 와서 회한(悔恨)을 느끼니 나 역시 답을 찾지 못하는

초로(初老)의 인생에 불과하구나.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아기가 없기에 금방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새 출발하기를 원하니 너무 이기적인 걸까?

나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나의 이기심만 생각하니 언제나 수양이 제대로 될까.

 

비운다는 거 참 웃기는 이야기이다.

그냥 즐기다 가면 되는 인생이라고 판단하는 어른으로서 내가 제 역할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생(異生)의 행복, 내생(來生)의 행복 그다음엔 궁극(極)의 행복인가?

해답은 모두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08;30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시간을 싣고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이 아름답다.

오랜만에 북한강변을 달린다.

깊고 푸른 한강은 세상 모든 푸른 것들의 고향인가 보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리움과 희망은 무엇일까 잠시 상념에 젖는다.

 

오랜 시간 사람을 품고, 세월과 역사를 품은 북한강,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강(江)과 손이라도 잡은 거 같이 나란히 흐른다.

낚시에 빠져 포니 승용차 트렁크에 낚시가방을 싣고 퇴근길에 밤낚시를 하던 곳을

지난다.

 

왜 그리 살생(殺生)을 하였을까.

조금만 더 내려가면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곳이지.

오래 바라보아도 강물은 말이 없고, 말이 없으니 더 많은 것을 전하는가 보다.

 

강둑 아래로 내려가 흘러가는 강물에 몸을 헹구면 흘러간 세월에 더께 낀 마음도 헹궈질까.

강가에는 능수버들이 긴 머리채를 풀어 흔들고 바람조차 슬렁슬렁 지난다.

 

 

스치는 바람에 작은 밭 청보리가 일렁인다.

청보리밭 가운데에는 '노고지리'가 쌍쌍이 짝을 지어 사랑을 나누려나?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뻐꾸기가 멋진 노래라도 부르면 귀를 기울일 텐데,

 

꿩꿩!!!

꿩 서너 마리가 일제히 둔탁한 소리를 지르면 이에 질세라 메추라기, 종다리가

푸득 날아오르겠지.

 

사랑과 산란, 포란과 포육이 이뤄지는 청보리밭.

입하(入夏)가 지났으니 오월 햇볕과 부드러운 미풍(微風)을 맞아 한 달 후면 까칠한

수염을 기른 보리알이 영글겠지.

 

잠시 눈을 감자 내 유년기(幼年期)의 장면이 파노라마가 되어 떠오른다.

총싸움놀이를 하다 숨고, 술래잡기를 하다 숨고, 자치기를 하다 보리밭으로 날아가면

주우러 들어갔다가 까만 깜부기에 옷이 새까맣게 되어 어머니에게 혼나기도 했던

청보리밭.

내 유년기 고향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쌀보다 보리가 더 많이 섞인 보리밥, 아니 보리밥에 쌀이 약간

섞인 보리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열심히 씹어도 목구멍으로 넘길 때는 그냥 삼켜지지 않고 까끌까끌 목젖을 찌르기에

보리밥 보다는 조가 섞인 조밥을 더 좋아했었지.

 

내가 기억하기론 설날이 지나 5월까지가 보릿고개의 고비였지.

6월 하지(夏至)경 보리를 타작할 때까지 식량이 떨어진 집에서는 여유가 있는 집에서  

장리쌀을 빌려다 연명하기도 했던 보릿고개.

결코 넘지 못할 것 같던 보릿고개는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의 처절한 아픔이었다.

 

당시 장리(長利)쌀을 빌리면 추수 때 한배 반으로 갚아야 했으니 50%가 넘는 엄청난

고리(高利)라 가난이 대물림되는 빈곤의 악순환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6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고 정동환 선생님은 공부를 못하는 친구들에게 콩과 보리도 분간

못하는'숙맥(菽麥)'이라 부르며 보리와 콩의 사연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

즉 "옳고 그름, 공(公)과 사(私)를 구분 못하는 사람을 숙맥이라고 한다"라고 말했었지.

순식간에 내 기억은 타임머신을 타고 먼 옛날로 돌아간다.

 

삼회리로 접어들며 수십 년 세월이 내려앉은 집의 담벼락이 정겹고,

후진하기 힘든 막다른 골목에서 주인이 넉넉한 마음씨를 보여주는 전원주택의 주차장에서

'으아리'를 만난다.


09;00

좌우로 머리를 꼿꼿하게 고추 세운 봉우리들,

화야산은 오늘 나에게 너그러울까?

봉우리들이 초록으로 싸여 너울춤을 춘다.

 

습기가 없는 건조한 바람과 따가운 햇살에 반팔 옷을 입어 노출된 팔뚝이 따갑다.


5월의 바람이 계곡을 어루만진다.

소박한 골짜기까지 스며들었던 봄의 향기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숲은 여름을 향해

급히 달려간다.

 

하루하루가 달라지게 녹색으로 변하는 저 숲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칠고 날카로운 계곡에서 졸졸거리며 흐르는 물소리가 귀를 간 지르고, 눈길 닿는 곳마다

그림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단풍나무와 참나무가 잎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산자락은 금세 초록으로 물들었고,

수도권에서 야생화가 많이 피기로 유명한 화야산은 오늘 어떤 꽃을 보여줄까 궁금하다.

 

눈이 다 녹기 전에 피었던 복수초, 바람꽃, 괭이밥, 처녀치마를 볼 수 있을까,

검단산에서 만났던 앉은부처를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세월 지난 뒤에 찾아와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고 없는 꽃을 그리워하는 나에게

어떤 꽃이 반길까.

 

매화의 암향(暗香)이 끝나기도 전에 벚꽃이 피었다가 일제히 사라지고,

진달래도 사라진 시공간(時空間)에 연둣빛이 들어서더니 어느새 초록이 꽉 찼다.

 

슬쩍 스치고 지나간 것만 같다.

흐드러지게 폈던 산벚꽃을 대신한 때죽나무꽃이 눈발처럼 바람에 날린다.

 

쪽동백꽃잎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무들은 스치는 바람에 어깨를 들썩인다.

계절은 쉴 새 없이 흐르고 시간이 앞 다퉈 줄달음치는 화야산 숲 속, 

 

찬란한 봄과 초여름을 어찌 회색으로만 채우랴.

눈을 들어보니 세상은 환한 빛으로 둘러싸이고 온천지에 초록이 흘러넘친다.

 

큰 바위 아래로 서슬퍼런 물이 담겨있다.

잠시 바라보니 어지럽던 심사가 진정이 된다.

인자요수(仁者樂水)라고 했던가.

 

한 폭의 그림같이 작은 폭포는 쉴 새 없이 소에 물을 담고,

담겼던 물은 풍요로우면서 사납지 않게 아래로 흘러내린다.


많은 물이 있어야 할 계곡물이 이어지는 봄가뭄으로 졸졸거리지만,

이 물은 나 스스로 가진 행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물에 비치는 내 모습은 어떨까.

 

치유란 나를 제대로 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건데,

아카시 흰꽃잎과 때죽나무 흰꽃잎이 물에 떨어져 빙글빙글 돈다.

화려했던 꽃의 향연이 끝나자 낙화(落花)되어 물에 몸을 던져 물에도 향기가 스며들게 하니

꽃은 져도 꽃이구나.

 

                    <          낙화(落花)

 

                       하늘과 지상에서 떠나려 하는

                       봄의 신(神)을 보내지 않으려

                       몸으로 저항하는 건지,

                       배웅하고자 뿌리는 향인지

                       숲의 향기와 아우러진 낙화는 물에도

                       향을 뿌린다.

 

                       비가 내리면 피었다가

                       바람 불면 떨어지는 게

                       꽃의 인생이라,

 

                       꾀꼬리 우는 숲 속

                       물 위를 빙글빙글 돌며 

                       쓸쓸히 사라져가고,

                      

                       황혼 빛이 깃든 노추(老湫)의 눈은

                       허망하게 꽃을 뒤쫓으니

 

                       사람들의 삶에도 끝이 있듯이

                       꽃에도 끝이 있구나.                                   석천   >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2m도 되지 않는 짧은 다리지만 몸이 휘청거린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에 비친 풍경을 눈에 담는다.

그동안의 기억으로는 화야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여기이리라.

 

거대한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에도 시간의 지문이 새겨졌을까?


           <            시간의 지문

 

                   백송(栢松)의 굵은 허리에는

                   시간이 지문처럼 새겨져 있다.

                  

                   아침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산,

                   시간과 거리를 따질 이유가 없는 산.

 

                   복잡하게 짊어지고 온 삶의 더께를

                   내려놓고 가려면 자기를 따라오라고

                   새들이 앞장을 선다.                              석천   > 


활엽수림이 끝나기 무섭게 침엽수림이 울창하다.

소나무와 전나무를 닮은 일본잎갈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껴든다.


어찌 보면 '일본잎갈나무'는 우리나라를 망치고 오욕(汚辱)한 문화의 상징일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나라의 숱한 문화재와 물자를 강탈해갔고, 징병 징용 위안부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더니,

심지어는 전쟁에 쓰기 위해 소나무도 베어 가고 그 자리에 심은 것이 바로 낙엽송이라

불리는 일본잎갈나무이다.

 

오욕(汚辱)의 역사는 이 깊은 골짜기까지 문신처럼 새겨졌다.  

 

계절이 깊어가고 세월이 익어간다.

길가는 풀로 덮이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분주하다.

숲은 서서히 암청(暗靑)으로 바뀌고 '검은등지빠귀'가 이상한 소리를 낸다.


거대한 활엽수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예사롭지 않게 하늘을 찌른다.

거대한 나무들이 용이라도 된 듯이 비상을 꿈꾸는 걸까?

 

과거에는 사기막골로 불릴 정도로 제법 큰길이었는데, 나무와 풀로 뒤덮인 산길엔 역사의

흔적이 쓸쓸히 사라졌다.


상수원 보호를 위한 철망을 지나 국수나무꽃이 흐드러진 모퉁이를 돌아 빼곡한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나타났던 다람쥐가 숲으로 자취를 감춘다.

여기저기서 날뛰던 청설모도 머리를 감췄고 느릿느릿 걷던 나도 발걸음을 재게 놀린다. 

 

여기가 사금파리의 무덤이구나.

뚜벅뚜벅 걷는 내 발걸음 소리가 반향을 일으킨다.

숲 속을 하나씩 들춰보는 즐거움 속에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내 마음은 설렌다.

 

꽃에다 눈을 맞출까 아님 나무와 이야기를 할까?

잠시 후 나타난 뻥 뚫린 공간에 시간까지 얹어서 바라본다.

 

수채화 같은 풍경을 보여주는 살가운 아침의 숲은 화란춘성(花爛春城) 만화방창(萬和方暢)이라

세태에 지친 내 몸을 달래준다.

 

여기쯤이던가,

뱀이 있어 스틱으로 감아 숲 속으로 내던졌는데, 문득 먼 옛날 보았던 '사금파리의 무덤'이라는

TV드라마가 생각난다.

 

KBS TV문학관이라는 프로였지.

일본 강점기 시절 일본의 도굴꾼을 따라 다니던 주인공이 자아(自我)를 찾아 도자기를

만들지만 구운 도자기기 마음에 안 든다며 전부 깨부순다.

오랜 시간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부수는 건 욕심을 내려놓은 걸까?

아님 예술가로서 좋은 작품을 하나라도 더 건지고 싶은 욕심일까.

 

긴 잠에 빠진 무덤의 고요(孤寥)!

사금파리 무덤의 적막(寂寞) 사이로 바람이 정적(靜寂)을 깨며 나에게 묻는다.

 

                <       생의 진리

  

                     너는 떠도는 생(生)의 진리(眞理)를 아는가.

                     너는 산에서 넓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무엇을 깨달았는가.

 

                     나는 산을 지키는 나무가 아니다.

                     또한 창공을 나는 새도 아니다.

                     산길을 밟으며 오르내리는 도인(道人)도 아니다.

 

                     나는 앞장서서 발걸음을 인도하는

                     다람쥐 청설모를 따라

                     이름 모를 야생화의 여린 꽃잎을 바라보며

                     산을 오르는 평범한 삶의 인생일 뿐이라,            

 

                     등짝에 짊어진 배낭을 내려놓고

                     산과 친구 되어

                     산의 편안한 품에 안겨

                     삶을 노래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라네.                                          석천> 

 

예전부터 도자기에 관한 책이나 영화, 드라마는 많았지.

최민식이 열연하던 '장승업의 취화선', 일본의 도예가 심수관의 가문을 모델로 한 '그, 불,'

그리고 탈렌트 김동진이 열연하던 '사금파리의 무덤'이었던가?

내가 본 책을 기억해본다.

 

도자기를 굽던 가마는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예술의 혼을 불사르던 곳이지.

주인공이 술에 취해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털을 휘날리며 수없이 깨부수는 광기를 부리던 곳.

부서진 도자기의 무덤인 사금파리의 무덤이 시간의 무덤이 되었구나.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축소된 긴 계곡 속 어디선가 도공(陶工)의 슬피 우는 소리가

내 마음을 울린다.

 

사금파리의 무덤이 풀에 가려졌기에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는 걸까?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씩 튀어나와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몇 해 전만 해도 가마터와 집 축대의 흔적이 보이더니 아에 흔적이 사라졌다.

터 위에 쌓였던 사금파리는 분명 역사와 도공의 아픔일 텐데 소리도 없이 사라졌으니

문득 터의 4가지 론(論)을 이야기하던 '임천고치'가 생각난다.

"그냥 지나칠 곳(可行者), 한번 바라볼 만한 곳(可望者), 자적할 만한 곳(可遊者),

살 만한 곳(可居者)"였지?

 

숲의 여백은 바로 삶의 여백(餘白)이다.

"뻐~꾹 뻐~꾹" 뻐꾸기 울음소리가 늘상 듣던 소리와 달리 조금 특이하다.

보통 들리는 울음보다 조금 낮아 숲의 여백을 울리며

"홀딱 벗고 홀딱 벗고"로 들리더니 "어쩔씨고 어쩔씨고"로 들리기도 한다.

 

검은등뻐꾸기가 우니 보리이삭이 여물어 거둘 때가 되었나 보다.

입하(入夏)가 20여 일이나 지났다고 보릿고개를 넘긴 검은등뻐꾸기가 기쁨의

노래를 부르니 이게 바로 삶의 여백(餘白)이지.


이름이 사기막골이라면 주막 터도 어디엔가 있을  텐데 숲엔 정적만 감돈다.

중학생 때부터 대폿집을 들락거릴 정도로 막걸리를 좋아한 나의 근성은 지금도 변함없이

주막거리를 찾으니 이 버릇이 언제나 고쳐지려나.


터는 간 곳없고 바람소리뿐이다.

여기저기 돌아봐도,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행여 자취를 찾을 수 있을까 두리번거리다가

지나간 날들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봄은 이미 저만치 떠나고 푹푹 찌는 초여름의 한낮,

'노루귀' '처녀치마'가 행여 나를 기다릴까,

꽃이 핀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행여 나를 기다릴까, 가슴 속에 담았던 꽃 한 송이 피워낼까?

 

급한 마음 잠시 접어두자고 마음속으로 약속을 하건만 어느새 내 발걸음은 빨라진다.

한적(閑寂)한 산길을 걸으며 사색을 즐겨야 하는데 좌우로 눈이 돌아가니 차분하게

사색을 즐기기엔 글렀다.

 

09;35

고동산(古同山 600m) 갈림길이 나온다.

 

몇 년 만에 다시 들린 화야산,

서서히 시간여행을 하며 흘러간 시간에 마음을 헹군다.

 

지금껏 오른 산길은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편안하고, 맑은 물속에 물고기가 있을까

잠시 들여다본다.

 

사방에 핀 꽃,

꽃피는 계절에 어느 꽃인들 그립지 않고 무엇인들 소중하지 않으랴.

'조개나물'의 연보랏빛이 잠시 녹색을 지운다.

 

조금 가파른 산길이 나온다.

내 발걸음 소리에 놀랐는지 새 한 마리 후드득 날아오른다.

 

미안한 마음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변하는 숲을 바라보며 마음이 가벼워지더니 금세 가슴이 평온해진다.

 

문득 돌아보니 올라온 산길이 저 아래 세상을 향해 줄달음쳐 내려간다.

절벽을 끼고 오르는 길은 천상의 오솔길이다.

 

아래를 지긋이 내려다보니 숲이 말을 걸어와 내 안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알 거도 같고 모를 거 같기도 한데 그저 허상(虛像)의 틀을 깨고 자아(自我)를 찾으라 한다.

내가 자아를 찾으면 허상의 껍질을 벗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걸까?

 

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꿈틀거린다.

참다운 나를 찾는 빠른 길은 나를 잊어버리는 것이지.

그동안 나 자신에게 집착하고, 내 생활에만 집착하였으니 참다운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인생은 영원하지 않고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에 불과하니 집착을 버리자.


잠시 걸음을 멈춘다.

걸음 빠른 종승에겐 한달음의 길이지만 결코 짧거나 쉬운 길은 아니다.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고광나무, 산딸나무 꽃의 향기가 폐부에 깊숙이 들어온다.


등판은 이미 다 젖었고, 팬티도 땀으로 젖기 시작한다.

땀을 흘린 만큼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니, 비워진 자리엔 살아야 할 힘이 가득 들어서는

모양이다.

 

10;43

허리를 펴기 힘들 정도인 된비알에서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모양의 '천남성'이 고개를 내민다.

 

육산답지 않은 너덜길이 머리를 숙이게 하고, 혹시 바위라도 굴러 떨어질 거 같은 분위기에

잠시 긴장을 한다.

 

각시투구꽃의 꽃봉오리는 아직 열리지 않아 혹시 핀 꽃이 있나 주변을 살핀다.

 

금년 봄엔 꿩의 바람꽃과 개별꽃, 현호색, 봄맞이꽃만 만났던가.

해발 600m 가 넘는 곳에서 '노랑괴불주머니'를 만난다.

 

10;54

거대한 나무가 눈앞을 가린다.

나무 위 둥지를 한없이 부러워했던 나의 어린 동심(童心),

시골집 연못가에 거대한 느티나무가 있었지.

 

방학 때는 늘 느티나무 위에 올라가 둥지를 틀고 놀다가 해질녘에 집에 들어오면

공부 안한다고 어머니에게 꾸중도 많이 들었는데,

커다란 나무를 보니 동심으로 돌아가 다시 둥지를 틀고 싶다.

 

바람처럼 살고 싶다.

새처럼 살고 싶다.

 

유년(幼年)의 추억 속에 남아 있던 한 편의 기억,

오래 전에 자신을 잃어버린 내가 나무 위에서 꿈틀거리는 중이다.

 

정상을 600m 남기고 길은 점점 가팔라진다.

사위는 고요 속에 잠기고,

코에 땅에 닿을 거 같이 가파른 산길에서 '민백미꽃'을 발견한다.

땅바닥을 향해 몸을 잔뜩 수그리고 오르는데 대한 자연의 보답인 모양이다.


적막 속에 내 몸은 점점 작아진다.

1cm 도 안 되는 '민백미꽃'을 바라보며, 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 내가 미미한 존재임을

알게 되고, 꽃을 찍으며 내 가슴은 희열(喜悅)로 충만하기 시작한다.

 

당초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오르다 발견했으니, 버려야 채워지는 게 자연의 이치인

모양이다.

 

민백미꽃은 한방과 민간에서 부인병, 중풍, 이뇨, 부종 등에 쓰인다고 알려졌다.

 

11;20

가파른 길을 오르며 숨이 가빠질 무렵 화야산 정상(754.9m)에 도착한다. 

겹겹능선의 바다에서 중미산과 대부산, 소구니산, 유명산의 봉우리가 우뚝 솟았다.

 

흰 구름 한 조각이 흐른다.

생(生)과 멸(滅), 사(死)는 무엇일까,

삶은 무엇이고 멸의 이치는 무엇일까.

 

흐르는 구름을 보면서 조금은 알 수 있을 거 같다.

생(生)은 멸(滅)이다.

여름이 육(育)라면 가을은 멸(滅)이지.

 

침잠(沈潛)에 빠졌던 겨울 숲,

가을은 멸(滅)을 준비하고, 휴(休)라는 겨울의 과정을 거쳐 생(生)을 주도하는

봄도 이제 저만치 물러갔으니 지금은 육(育)라는 여름이다.

 

긴 숨을 내쉬고 사방을 둘러보니 저 아래 세상이 엎드려 있다.

속 깊은 골짜기는 묵묵히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들이 빠르게

사라진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고 이곳의 시간과 아래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12;40

화야산은 특이하게 벼 화(禾), 어조사 야(也)자를 쓴다.

벼와 관련이 있는 산인가?

 

벼와 산은 어울리지 않는데, 벼가 잘되는 산(山)이라고?

이 산꼭대기에서 볍씨가 나왔다는 전설을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산에서의 감상을 툭툭 털고 이젠 사람 사는 곳으로 내려간다.

아직 짝을 찾지 못한 멧비둘기의 '구구'대는 울음소리가 유난히 촉촉하다.

 

14;20

급하게 흐르던 계곡물이 소(沼)을 지나며 느려진다.

물이 느려지니 시간 역시 느리게 흐르고 내 발걸음도 느려진다.


화야산의 작은 폭포나 소(沼), 담(潭), 계곡의 덩치 큰 바위는 근교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이다.

그러나 인적이 드믄 숲의 진경(眞景) 속에 머무는 나는 산의 일부가 된다.

 

새소리와 바위를 스쳐 흐르는 물소리, 초록의 바다가 된 숲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여름 꿈을 꾸었나 보다.


 

14;40

라디오에서는 성완종의 뇌물사건 수사내용이 흘러나온다.

망자(亡者)가 총리를 낙마 시키고 세상을 뒤집어놨지만,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이라, 쥐새끼 한 마리라도 잡을 수 있으려나.

 

주는 사람이 나쁜가, 아님 받는 사람이 더 나쁜가,

받고 청탁을 들어주는 사람이 나쁜가,

받고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 더 나쁜가?

 

나는 아리송하기만 한데,

주뢰설(舟賂說)을 쓴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 선생은 어떻게 판단을 할까.

 

인간은 어머니에게 배우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돕는다.

이런 이타적(利他的) 본능이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는 왜 없는 걸까?

 

최근 일본의 연구진이 '쥐 공감(共感)능력' 실험에서 쥐도 눈앞의 먹이보다는

물에 빠진 동료를 먼저 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를 했다.

 

쥐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먹이로 준 초콜릿의 유혹을 물리치고 물에 빠진 동료 쪽의

문을 먼저 열었다고 한다.

 

사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모른 체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면 '짐승 같은 사람' 또는 '쥐새끼

같은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쥐를 포함한 짐승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데 사람은 곧잘 하니 참 묘한 일이다.

 

                                               2015.  5.  27.  화야산에서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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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8.06.23 12:33

    첫댓글 송산중학교 14회카페에
    올린단것이 ,총동문카페로
    잘못올림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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