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부 두 개의 분단정부(9) – 남북연석회의(2)
[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69)
북행길에 오른 김구, 38선을 넘는 ‘역사적 찰라’의 순간
1948년 4월 19일 임정주석 김구의 숙소인 경교장(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은 김구의 북행을 반대하는 시위군중으로 북적댔다. 새벽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군중은 날이 밝자 500여명으로 늘어났다. 군중들은 ‘김구 선생 북행 결사 반대’를 외쳤다. 이 같은 군중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구는 9시경 북행을 위해 승용차에 올랐다. 그러자 시위 군중들이 차 앞에 몰려들어 몸을 던져 가로 막으며 외쳤다.
“선생님, 기어코 가시려거든 저희들을 죽이고 가십시오.”
김구 선생의 북행을 저지하기 위해 경교장 앞에 모인 우익청년과 학생들.
남북협상을 지지했던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의 임정계 인사였던 유림조차도 북행만은 안 된다고 목청을 높였다. 김구는 하는 수 없이 2층 거실로 다시 올라갔다. 잠시 후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낸 김구는 사자후를 토했다.
“나는 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70여년이 되었다. 더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여러분은 아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 이로 가면 조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군중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김구가 외쳤다.
“누가 뭐라 해도 좋다. 북한의 공산당이 나를 미워하고 스탈린의 대변자들이 나를 시베리아로 끌고 가도 좋다. 북한의 빨갱이도 김일성도 다 우리들과 같은 조상의 피와 뼈를 가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이북의 우리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봐야 한다.”
그래도 군중의 ‘시위 사슬’이 풀리지 않자 김구 일행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경교장 뒷길을 이용하기로 한 것. 2층 방안 부인들은 김구의 맏며느리 안미생의 방에 데려오고, 뒤뜰의 군중들은 경관을 시켜 앞뜰로 모이게 했다. 운전기사에게는 승용차 중 고장이 나서 수리를 보냈던 다른 차를 고쳐 뒷담 밑에다 세워놓게 했다. 오후 2시경 김구, 비서 선우진, 아들 김신 세 사람이 뒷담을 넘어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승용차는 북으로 북으로 내달렸다. 김구 일행은 해가 질 무렵인 6시 45분경 38선상의 여현에 도착했다.(주1)
38선 앞에 선 김구 임시정부 주석.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북행길에 오른 김구의 모습을 조선통신의 유중열 기자는 ‘역사적 찰나’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조선통신>의 유중렬 기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특종 취재기를 남겼다. 그는 영문 경고문이 완연한 38선상에 선 백범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역사적 찰나’라고 이름 붙였다.
“북으로 북으로 개성으로부터 여현까지 30리길. 김구가 탄 서울 2253호 자동차를 쫓아서 달리는 트럭의 느린 속도가 끝내 안타까웠다. … 여현 38선 경찰지서 앞에 닿은 것이 6시 40분. 자동차는 여기서 비로소 머물렀다. 왼편에 영식 신(信)군, 그리고 바른편에 선우진(鮮于鎭)군. 단 두 사람이 수행하는 역사적 38선 길에 오른 김구씨는 달려간 기자의 출현에 놀란 듯 ‘아니! 어떻게들 오셨소?’하며 자못 의아한 기색이다. …
경찰서에서 형식적인 기록을 한 다음 차는 38선상에 섰다. ‘이것이 바로 38선이다.’ 경계선 일보 직전 3개년 풍상에 글씨조차 흐릿한 고목 앞에서 씨의 근엄한 표정으로 혁명가 김구씨는 기어코 38선을 넘었다. 때는 6시 45분. 너웃너웃 저물어 가는 황혼 속에 한발 넘어서면 멀리 바라다보이는 곳이여. 역 정거장 녹슨 철길 위에 오지도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 ‘시그널’의 붉은 등불이 눈물 속에 아롱거린다. …
고요한 38선에 스미는 듯 어둠의 장막이 내려왔다. 이북 마을에 등불이 반짝인다. 달이 뜨고 하늘에 별도 반짝인다. 기어코 이루어질지어다. 남북회담 성공을 상징하는 희망의 별인가. 김구씨가 떠난 하늘 아래로 별은 반짝인다.”(주2)
38선상의 김구. 좌로부터 비서 선우진, 독립운동가 정이형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 김구, 김신, 류중렬 기자.
유중열 기자의 감상적이면서도 비장미가 넘치는 문장은 사람의 심경을 울린다. 김구의 심정을 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잘 표현주고 있다.
이날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직전 출발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평양행 결의를 다졌다.
“…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수많은 동지 동포 중에는 나의 실패를 위하여 과도히 염려하는 분도 있고, 나의 성공을 위하여 또한 과도한 기대를 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이번 길에 실패가 있다면 그것은 전 민족의 실패일 것이요, 성공이 있다 하여도 그것은 전 민족의 성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 개인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길에는 도리어 성공만 있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애국자 중에는 사사로운 자기 이익만 도모하려다 전 민족의 실패를 초래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 따라서 남쪽에서 단선 단정을 결사반대하던 우리가 북에 가서 단정 단선과 유사한 어떤 형태를 표명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있는 한 완전한 기우가 되리라는 것도 단언하여 둔다.”(주3)
1947년 무렵 삼청장에서 찍은 우사 김규식 직계 가족 사진(출처=한겨레, 2018.4.17일자)
김구가 북행길에 오른 그날 저녁 홍명희도 바로 북행길에 나섰다. 김구와 달리 마지막까지 북행길을 두고 고심했던 김규식도 다음날 남북연석회에 참석하기 위새 서울을 떠났다. 김구가 반대하는 군중을 피해 뒷문으로 비밀리에 북행길에 오른 것과는 달리 김규식 일행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배려로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장도에 올랐다. 김규식은 4월 21일 최동오, 박건웅, 김붕준, 원세훈 등 민족자주연맹 대표 및 수행원 등과 함께 11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네 명의 종로서 경찰관이 탄 지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쏜살같이 서울을 빠져 나갔다. 김규식 일행은 정오쯤 개성을 지나 오후 1시쯤 38선상의 여현에 도착건국실천양성소 청년들과 38경비대의 환송을 받았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등 남쪽의 주요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남북연석회의의 막이 오른 상태였다.
남북대표자 연석회의 진행 및 결정서 채택
남북연석회의는 4월 19일 예비회담과 4월 19일, 21〜23일 4일간의 본회담으로 진행되었다. 예비회담은 4월 19일 오전 11시 모란봉극장에서 김두봉의 사회로 열렸다. 회의에는 북한 대표, 민전 산하 남한 대표, 정당협의회의 중도좌파 대표 등 모두 31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사회자인 김두봉은 김구·김규식이 아직 참석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고, 김일성은 남북대표자연석회의 의제로 ‘4대원칙’을 제시하였다. 김일성의 4대원칙은 1)유엔임시위원단 부정, 유엔총회와 소총회 결정 무효화, 2)단정 단선 반대, 3)소미 양군의 즉시 동시 철퇴 실현, 4)양군 철퇴 후 조선인민의 자주성 위에서 일반적·평등적·직접적 비밀투표로 통일정부 수립할 것 등이었다. 김일성의 ‘4대원칙’의 특징은 “각당 각파의 다양한 의견을 통일하기 위해 전민족적 행동을 반제구국투쟁에 집중시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는 반미·반유엔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으로써 김구·김규식 등 남쪽 민족주의자들의 입장과는 일정하게 차이가 있었다.(주4)
남북연석회의가 1949년 4월 19일 개막되었다.(사진=통일뉴스)
남북대표자연석회의 본회의는 4월 19일 오후 6시 46개 단체 대표 54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어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주석단 28명과 대표자격심사위원회·서기부·문헌편찬위원회 등을 선출하였고, 김일성의 사회로 조선 정치정세 및 남한단선과 단정반대 투쟁대책을 회의 안건으로 채택하였으며, 각 단체의 축사와 축전 발표가 있었다. 김두봉, 허헌, 최용건, 백남운, 김달현, 김원봉, 유영준 등이 당과 단체를 대표하여 축사를 했고, 12,311통의 축문과 43,235통의 축전이 소개되었다. 또한 회의에서는 김구·김규식·홍명희 등 남한 민족주의자들의 북행 소식을 듣고 하루 휴회를 결정하였다.(주5)
4월 20일 김구와 홍명희 등이 평양에 도착했고, 김일성과 김두봉은 김구를 예방했다. 이때 김구는 연석회의 주석단에 참석할 의사가 없다면서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을 요구하였다. 김두봉은 남쪽에서 미군이 철수할 것 같은지 물었고, 김구는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김구는 북의 헌법을 두고 단독정부 수립이 아니냐고 말했고, 김두봉이 뱃속의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 예단하는 것과 같다고 맞받았다. 첫 회동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북한측은 김구와 그 측근들이 연석회의를 방해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주6)
1948년 초까지도 북쪽 곳곳에는 이승만과 김구를 비난하는 벽보가 홍수를 이뤘다. 김구·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내자 북측은 2월부터 김구 비난 벽보를 제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주7) 이런 상황에서 북측은 김구와 김규식을 맞이하면서 적지 않은 무례를 범했다. 38선을 넘은 김구를 세 시간 동안이나 기다리게 했으며, 청년들이 김구 앞에서 “반동분자를 옹호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에 김구가 “점심도 못 먹은 사람을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다음날 38선을 넘은 김규식 일행의 짐보따리를 사복차림의 보안서원이 검색하자 김규식은 “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고 레닌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며 대노했다.(주8) 김구와 김규식의 북조선에 대한 첫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북측도 김구와 김규식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4월 21일 남북연석회의가 속개되었으나 김구와 김규식, 홍명희 등 남한의 민족지도자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회의에서는 주영하의 ‘대표자 자격심사위원회 보고’에 이어 김일성이 ‘북조선 정치정세’를, 백남운과 박헌영이 ‘남조선 정치정세’를 각각 보고하였다. 같은 날 김구와 김일성은 단독회담을 가졌다. 김일성이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왜 왔느냐고 물었고, 김구는 정치범 석방, 38선 철폐 등을 해결하러 왔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김구는 여전히 북한이 대표자연석회의를 통해 정권수립을 기도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주9) 또한 김두봉은 홍명희와 회담했는데, 홍명희는 북측이 유엔을 비난하고 소련의 양군 철퇴안을 지지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주10)
김구-김일성, 홍명희-김두봉의 개별접촉을 통해서도 명확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남측 민족주의자들은 남북요인회담에 기대를 걸고 소극적이지만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4월 22일 남측 지도자들이 대부분 연석회의에 참석했으나 김규식은 여전히 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날 김일성이 김규식을 인사차 방문했을 때 김규식은 남측 인사가 불참한 가운데 회의를 진행한 것, 미국을 ‘미 제국주의’라고 부르는 것, 대표단 입북 때 무례하게 행동한 것을 항의하였고, 남북지도자회담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주11)
4월 22일 김구,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홍명희, 원세훈, 김붕준, 최동오, 윤기섭, 신숙, 송남헌 등이 회의에 참석했다. 김일성의 제의로 김구,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등 4명이 주석단에 보선되었으며, 김구·조소앙·홍명희·이극로가 축사를 하였다. 홍명희와 엄항섭은 결정서 기초위원으로 보선되었다. 김구는 축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도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민족의 유일한 최대 과업은 통일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통일독립을 방해하는 최대 장애는 소위 단정 단선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들의 공동한 투쟁목표는 단정 단선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현재 조국을 분열하고 민족을 멸망하게 하는 단선 단정을 반대할 뿐 아니라,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방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주12)
남북연석회의에 참석, 연설하는 김구. 김구와 달리 김규식은 회의장에는 끝까지 참석하지 않았다.
홍명희는 “내가 살고 있는 남조선에서는 우리 민족과 강토를 분열시키며 동족상살(相殺)의 불행을 야기할 단선단정이 강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있어서 이제 우리가 나아갈 길은 민족자결의 길, 그것밖에 없습니다. 통일정부 전취의 단계에 들어선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민족은 통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족자결을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은 사상·주의 여하를 불구하고 우리 민족을 단결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번 연석회의가 갖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라는 요지의 축사를 하였다.(주13)
김구 등 남측 민족주의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연석회의 모습. 주석 앞줄 왼쪽부터 홍명희, 김일성, 김두봉, 김구, 조완구(추정).
남북대표자연석회의 4일째인 4월 23일 회의는 남측 인민공화당 김원봉의 사회로 열렸는데, 홍명희가 기초위원을 대표하여 낭독한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결정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오후에는 남로당 대표인 허헌이 ‘남한 단선과 단정 반대투쟁 대책’을 보고하고 ‘남조선단독선거 반대투쟁전국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격문(「전 조선동포에게 격함」)문과 「미소 양국에 보내는 요청서」를 채택하였다. 이 세 문건 가운데 ‘결정서’가 가장 중요했는데, 이는 김일성·박헌영·백남운 등의 남북한 정치정세 보고와 이에 대한 토론을 바탕으로 했다. 결정서 초안 작성위원회는 북로당의 주영하, 김책, 고혁, 기석복, 남로당의 허헌, 박헌영, 조일명, 박승원, 근로인민당의 백남운, 사회민주당의 여운홍, 민족자주연맹의 권태양,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한국독립당의 엄항섭 등 15명으로 구성되었으나 결정서 초안 작성을 주도한 것은 김일성, 박헌영, 백남운 등의 보고자와 고혁, 기석복 등 좌익이었다.(주14)
‘결정서’는 “남조선에서는 우리 조국을 분열하여 예속화하려는 미국의 반동정책을 지지하여 우리 민족과 조국을 팔아먹는 이승만·김성수 등 내국노들이 발호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우리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그들과 야합한 민족반역자 친일파들의 음흉한 배족망국적 시도를 반대하며, 소위 ‘유엔조선위원단’의 기만적 단선 희극을 반대하여 궐기한 남북 조선 인민의 반항을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한 가장 정당한 애국적 구국투쟁이라고 인정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좌익이 미국과 남한단정세력을 과격하게 규탄하는 것에 대해 남한 민족주의 대표들이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기초위원인 홍명희가 소극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통과되었고, 본회의에서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주15) 김구·김규식 등 남한 민족주의자들로서는 그 내용이 당혹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앞으로 있을 남북 지도자회담을 기대하면서 소극적으로 동의, 소속단체의 이름으로 서명했다.(주16)
남북연석회의 때 서명하는 김규식.
4김회담 등 남북정치지도자 회담 개최
4월 24일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남측 대표들은 북측이 자랑하는 산업시설인 황해제철소를 시찰했고, 연석회의 종료를 기념하는 종합공연을 관람했다. 다음날은 30여만 관중이 참가한 ‘남북연석회의지지 평양시민대회’를 참관했는데 이 자리에서 홍명희는 박헌영·최용건·이영 등과 함께 축사를 했다. 시민대회가 끝난 뒤에는 김일성이 주최하는 초대연이 열렸다.(주17) 한편, 공연에 이어 참가 군중의 시가행진이 벌어졌는데 김구·김규식은 김일성·김두봉과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날 김구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서울에선 시민대회를 하면서 미국 대통령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일이 없는데 평양에선 어째서 스탈린 초상을 들고 만세를 외치는 행진을 하는가, 친소적인 인상이 들어 기분이 언짢다”고 지적했다. 허가이 등 소련파들이 김구의 ‘반소분자’적 행동이 문제라며 발끈했으나 다른 간부들이 “김구가 민족자주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지도자여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야 한다”고 해서 무마되었다.(주18)
1948년 4월 25일 남북연석회의 개최 축하 평양 시민대회 모습(사진=미디어한국학)
4월 26일부터 4김회담, 15인 남북지도자협의회 등 남북 요인들의 공식·비공식 회동이 수차례 열렸다. 남북대표연석회의 이후 있었던 남북 지도자들간의 회동과 회담은 아래 <표>와 같다.
<표> 남북연석회의 시기 남북지도자들의 회동과 회담(주19)
날짜
모의 명칭과 성격
참석자
4.24
황해 제철소 시찰
남측 대표 200여명
연석회의 종료기념 종합 공연, 공연 후 김두봉 초청 요담
김일성·김두봉·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완구 등
4.25
연석회의지지 시민대회
34만의 군중시위
대회 후 김일성 주최 초대연
김일성·김구·김규식·홍명희·허헌 등
4.26
제1차 4김 회담
김일성·김두봉·김구·김규식
남북지도자 연회: 지도자협의회 필요성 제기
북로당 대표 및 백남운·홍명희·조소앙·엄항섭 등
4.27
남북지도자협의회
남북요인 15인
4.28
김규식-김일성 개별회담
김규식, 지도자회담 의제 제의
4.29
김구, 주영하에 문제 제기
김구, 지도자협의회 인원 구성에 대해 문제 제기
4.30
제2차 4김 회담
김일성·김두봉·김구·김규식
남북지도자협의회
남북요인 15인
5.1
5.1절 경축 시민대회
인민군 열병식과 37만의 시민 행진
대회 후 남북지도자 회동
김일성·김구·김규식·홍명희·허헌 등
5.2
쑥섬 회동(야유회)
남북요인 15인, 성시백
5.3
비공식 개별회담(작별인사)
김일성-김구, 김일성-김규식 회담
5.5
김구·김규식 등 남한 귀환
한독당, 민족자주연맹 대표들
5.6
비공식 개별회담
김일성-홍명희 회담
5월 1일에는 5.1절(메이데이) 경축 시민대회가 열려 남북연석회의 참가자들이 인민군 열병식과 30여만명의 시위행진을 관람했다. 5월 2일에는 남북지도자협의회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송별회를 겸한 야유회가 대동강 쑥섬에서 열렸다. 북한은 1990년대 이후 이 쑥섬을 대대적으로 단장해 12m 높이의 ‘통일전선탑’을 세우고, 회의장소였던 원두막을 복원하고, 회의 때 사용했던 돗자리를 유리집 속에 보관했다.(주20) 이와 같은 각종 행사들은 남북연석회의 참가자들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4김회담과 지도자협의회의 원만한 진행에 일조하였다.(주21)
북한이 남북연석회의를 기념에 쑥섬에 세운 통일전선탑(사진=통일뉴스)
쑥섬에 남북연석회의 당시 대표자들이 모여 앉아 회의를 했던 돗자리(왼쪽)와 휴식을 즐긴 원두막(오른쪽)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사진=통일뉴스)
당시 남한은 2.7투쟁, 4.3제주봉기 등으로 심각한 혼란 상태였으나 북한은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등 이른바 ‘민주개혁’과 인민경제계획 등으로 빠르게 발전, 변화하였다. 북한은 이러한 북한의 발전상을 여러 모로 선전하였고 남한 정치인들과 기자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남북대표자연석회의 내내 소극적이었던 김규식 또한 황해제철소를 참관한 직후 4월 25일 남북요인 초대연에서 남북의 현격한 차이를 언급하였다.(주22)
김구 일행을 안내하는 김일성. 뒤쪽 김구 비서 선우진, 조소앙이 보인다.
4월 26일 남북지도자 회담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지도자들 사이에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지만, 정치적 문제에서는 여전히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남북한, 좌우익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는 지도자협의회 구성 비율을 두고 김구는 강력히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남한 대표 9인을 모두 민족주의계로 하고 남한의 좌익은 배제하거나 북한 대표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논란 끝에 김구의 제안은 대부분 받아들여져 북측 대표를 반(4명)으로 축소하여 15인 지도자협의회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남한 민족주의자로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이극로, 김붕준, 조완구, 엄항섭 등 8인이, 남한 좌익인사로 허헌, 박헌영, 백남운, 김원봉 등 4인이, 북측인사로 김두봉, 김일성, 최용건, 주영하 등 4인이 결정되었다. 좌우 비율을 맞춘 셈이었다. 15인 남북지도자협의회는 주영하가 마련한 북측 초안을 기초로 충분한 토론과 수정을 거쳐 ‘남북통일에 대한 남북지도자의 공동성명’을 완성했다. 이 성명서는 4인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15인 협의회의 승인을 거쳐 각 정당·사회단체 공동명의로 발표하기로 하였다. 그에 따라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공식 서명한 뒤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1948.4.30.)로 발표되었다.(주23)
이 성명서의 4개항 합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로부터 외국 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은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은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여 자기 군대를 조선으로부터 철퇴시킴으로써 조선 독립을 실제로 허여하여야 할 것이다.
2.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는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한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인민의 지망(志望)에 배치되는 어떠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3. 외국 군대가 철거한 후 제정당들의 공동명의로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당과 정치·경제·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임시정부는 일반적·직접적·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 입법기관을 선거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며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4. 천만여 명 이상을 망라한 남조선 제정당·사회단체들이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느니 만큼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다만 기만에 불과한 선거가 될 뿐이다.(주24)
‘공동성명서’에서 가장 예민하고 논란이 됐던 문제는 미소 양군의 철수를 다룬 1항과 북의 남침문제를 다룬 2항이었다. 1항을 보면,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강력히 비난하던 북한이 김구·김규식의 평화적 외교원칙을 수용하는 양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항은 당시 우익과 대중 일부에 유포되었던 ‘북의 남침설’과 ‘우익인사 숙청설’에 대한 응답이 들어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공동성명서’의 내용은 1947년 이후 남한 민족주의자들이 누차 주장한 바 있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4월 23일 발표된 ‘결정서’와 ‘격문’에 비해 훨씬 온건하고 합리적이었다. 송남헌은 공동성명서도 북측이 주도했다고 했지만, 백범을 수행했던 김우전은 남측 의견이 많이 반영된 ‘쌍무적 공동성명서’라고 밝혔다. 북측의 일방적인 주장이 관철된 것이 아니라 남북이 합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에서 공통점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동성명서’는 5월 1일 평양방송을 통해 발표되었고, 남한 신문에는 5월 3일자로 발표되었다. 남북연석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남한의 정당·사회단체들은 좌우를 불문하고 전반적으로 지지하였다.(주25)
5.10단선은 막지 못했으나 통일운동의 신단계로 규정
남북연석회의 동안 김구는 회의에만 참석한 것이 아니라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북쪽의 진면목을 보려고 노력했다. 백범의 평양 탐방을 안내한 사람은 청년 시절 계몽운동 동지이자 한때 결혼을 약속했던 도산 안창호의 누이동생 안신호였다. 당시 백범은 73세, 안신호는 65세의 노인들이었다. 4월 26일 백범과 안신호는 대보산 숭태산장을 찾았다. 1932년 4월 29일의 윤봉길의거로 백범은 도피길을 떠났으나 사전에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도산은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도산은 2년 반의 감옥살이 끝에 가출옥하여 평양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해 옥고로 상한 몸을 돌보았다. 백범과 도산은 이후 만나지 못했으니, 백범으로서는 감회가 남다른 곳이 아닐 수 없었다.(주26)
오래 전 혼인을 약속했었던 안창호의 누이동생 안신호의 안내로 대보산 영천암을 방문한 김구.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때 을밀대 앞에서 기념촬영. 왼쪽부터 김구비서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공식 일정이 끝나고 5월 3일 김구와 김규식은 작별 인사를 겸해서 각각 김일성과 단독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남한의 단선을 반대할 것이니 북한도 단독 정부를 세워서는 안된다”, “동족간에 피를 흘리는 내전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구는 “북측이 송전 문제를 반드시 지키고 조만식의 월남도 소련군과 협의해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김일성은 공동성명서와 관련해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마련하는데 김구의 역할이 컸던 점에 사의를 표하고, 요구사항을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김일성은 1985년 8월 일본 잡지 『세계』와의 회견에서 당시 김구와 주고받은 속 얘기를 틀어놓았는데, “과수원이나 하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내고 싶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다. 특히 백범기념사업회 등이 강하게 반발했고, 남측의 많은 인사들이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 ‘백범에 대한 모독’, ‘북한의 선전 술책’이라고 비판했다. 김일성은 김규식과도 만났는데, 김규식은 ‘5개항의 선행조건과 내란방지’ 등에 대해 강조했다고 한다.(주27)
김구·김규식 일행은 원래 열차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남쪽에서 38선을 넘어 올라간 ‘반공테러리스트’들이 열차를 폭파하려던 계획이 발각돼 자동차로 귀환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 노동당 부부장 출신의 박병엽에 따르면 이들은 대부분 38선을 넘다가 체포되었지만, 일부는 평양까지 잠입해 시내에 “연석회의는 공산주의자들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삐라를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일부 체포된 연석회의 방해공작대를 심문한 결과, 서울로 귀환하는 특별열차를 폭파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 계획을 바꾼 것이라고 한다. 김구와 김규식은 5월 4일 아침 8시경 두 대의 승용차로 귀경길에 올랐고, 사리원 부근의 정방산성에서 점심을 먹고 계정에 도착, 하룻밤을 묵고 5일 서울에 도착했다. 연석회의 후 박헌영, 허헌, 김원봉 외에도 홍명희, 백남운, 이극로 등이 북에 남았다.(주28)
남북연석회의 참석 후 자동차로 귀경길에 오른 김구, 김규식 일행이 사리원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쉬고 있다.
김구와 김규식 등은 통일정부를 위해 역사적인 북행길을 결단했으나 5.10단선은 저지하지 못했다. 남북연석회의 참석자들 앞에는 강력한 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은 연석회의 공동성명서에 대한 ‘반박성명’과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민전 산하 좌익정당과 중도좌파에 대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5.10선거를 분쇄하자”는 연석회의 ‘결정서’와 ‘격문’을 문제 삼아 “살인·방화 교사 예비죄”로 체포령을 내려 무차별적인 체포, 탄압을 가하였다. 그러나 우익 민족주의자인 김구와 김규식에 대해서는 소련과 공산당의 모략에 빠져 연석회의에 참가, 서명했다며 공산주의의 음모와 모략에 초점을 맞추어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미군정은 이와 함께 김구와 김규식에게 선거 참가를 종용했으나 두 사람은 단호히 거부했다.
2000년 6월 손을 맞잡은 남북정상(사진=통일뉴스).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의 기본정신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및 남북정치지도자회담에서 씨앗이 뿌려졌다.
서울에 도착한 뒤 5월 6일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공동성명에서 “주의와 당파를 초월한 민족적 단결”과 “자주적·민주적 통일조국 건설”이 불가능하지 않다며, 남북연석회의를 ‘독립운동의 신(新)발전’으로 규정했다.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서는 우리 민족도 세계의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번 행동으로서 증명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신발전이며 우리에게 큰 서광을 주는 바이다. … 우리 민족통일의 기초를 존정(尊定)할 수 있게 하였으며, 자주적·민주적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였으며, 외력의 간섭만 없으면 우리도 평화로운 국가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이니, 우리가 이것으로써 만족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거두어진 성과를 가지고 최후의 성공을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애국 동포 전체가 일치하게 노력하는 데 있을 뿐이다. …”(주29)
남북연석회의에 대해서는 사람들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고, 실제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남북연석회의는 평화적으로 통일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념을 넘어선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이 유일한 길이란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가 있다. 현실적으로 5.10단선을 막지 못했고 나아가 남과 북에 두 개의 분단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저지하지도 못했지만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풀기 위한 첫 걸음을 디뎠다. 남북연석회의는 남북이 대화를 통해 통일을 향해 나아가고자 시도한 첫 출발점이었으며, 7.4남북공동성명(1972), 남북기본합의서(1991), 그리고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성명으로 이어지는 민족 화해의 기원, 씨앗이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