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C.S. 루이스”라 불리는 ‘팀 켈러’ 목사님의 책으로 부제처럼,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역사 사이의 줄 잇기’에 대한 내용으로 300페이지 이상의 분량으로 조금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아주 실제적으로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의 영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소제목들만으로도 도전이 된다.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
행복하고 싶다면, 주님처럼 일하고 주님처럼 쉬라!
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일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수단이다!
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이다!
자신만을 위하지 말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라!
복음의 관점에서 일을 이해한다!
회사 신우회에 참석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말라!
이건 세상 일이고 저건 하나님의 일이라는 이분법을 배격하라!
높은 보수나 칭찬을 위해 일하지 말라!
구원의 확신을 가슴에 새기고 열정을 품고 일하라! 등 책의 소제목 몇 개만 읽어도 책의 내용이 은혜와 도전으로 와닿는다.
책의 주요내용이다.
복음은 내가 무얼 하든 하나님이 돌보시고 귀 기울여 주신다고 또렷이 가르친다. 기대했던 방식으로 응답하시지 않을 수도 있다. 주님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므로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성공이든 실패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의 일부다. 힘과 끈기를 얻을 수 있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말하고, 일하고, 이끄는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 완벽한 모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라는 뜻이다.
인간의 일이란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라 소명이라는 관념을 회복하는 것이 해체된 사회를 살리는 소망의 끈이 될 수 있다.
자기완성의 도구이자 자아실현의 수단이라는 노동관은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듯, 개인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 사회 자체를 붕괴시킨다.
일을 소명으로 보는 시각의 근원은 성경에 있다.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을 비롯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사나 목회자 같은 이른바 ‘성직’뿐만 아니라 ‘세속적’이라고 부르는 일들을 포함해 노동이란 노동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부르짖었다.
루터교 신학의 원류는 모든 노동의 존엄성을 크게 강조한다. 일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류를 보살피고 먹이고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하며 필요를 채우시는 도구라고 본다. 루터교 전통에 따르면, 일을 하는 순간 인간은 ‘하나님의 손가락’, 즉 하나님의 사랑을 주위에 전하는 일꾼이 된다. 이런 사상은 일의 목적을 생계 해결에서 이웃 사랑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입에 풀칠을 하자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시킨다.
아브라함 카이퍼처럼 칼뱅주의, 또는 개혁주의의 전통을 따르는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일의 또 다른 측면을 부각시킨다. 피조물을 보살필 뿐만 아니라 방향을 정하고 틀을 잡는 게 일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개혁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노동의 목적은 하나님을 높이고 인류를 번성케 하는 문화를 창출하는 데 있다. 크리스천은 이웃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본성과 인류를 번성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가르침을 준다. 무슨 일이든지 반드시 이런 인식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노동은 기독교 ‘세계관’을 좇아야 한다는 뜻이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은 미술, 실상은 모든 일에 대해 기독교적인 통찰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달란트와 은사를 주셔서 인류를 염두에 두고 의도하셨던 일들을 사람들이 서로 도와 해내게 하셨다고 믿었다.
다들 무언가를 성취하기를 꿈꾸지만 한편으로는 그걸 온전히 이룰 힘이 없음을 깨닫는다. 누구나 잊혀 가기보다 성공해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름하는 건 인간의 몫이 아니다. 땅 위의 삶이 전부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언젠가 태양이 소멸될 때 남김없이 타 버릴테고 그 동안의 기억도 깡그리 스러지고 말 것이다. 모두가 잊힐 수밖에 없다.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든, 얼마나 땀 흘려 가며 애썼든 그야말로 ‘제로’가 돼 버린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현재의 삶 밑바닥에, 또는 그 너머에 참다운 실재가 있는 게 분명하다. 이생에서 끝나는 게 아니므로, 주님의 부르심에 답하기 위해 애쓰는 선한 수고는 지극히 단순하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하나가 영원무궁한 가치를 갖는다. 그게 바로 기독교 신앙이 주는 약속이다.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이 고쳐 주실 미래의 새 세상이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걸 부분적으로나마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는 작업이다.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마음에 새긴다면 평생 나뭇잎 한두 장 그리는 데 그친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않으며, 만족스럽고 기쁘게 일할 것이다. 성공에 도취되어 으스대거나 이런저런 차질에 흔들릴 까닭도 없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마음에 새긴다면’이란 전제가 붙는다. 톨킨이 기독교 신앙에서 위로와 자유를 찾고 다시 작품을 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일을 하자면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성경이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알아야 한다.
왜 일하고 싶어 하는가?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데 일이 꼭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왜 그토록 일하기가 어려운가? (어째서 열매가 없고, 무의미하고, 까다롭기 일쑤인가?)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발판으로 난관을 이겨 내고 노동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PART 1 일,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
CHAPTER 1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 행복하고 싶다면 주님처럼 일하고 주님처럼 쉬라
성경은 입을 떼자마자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노동이 얼마나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창세기는 첫 장부터 멜라카란 표현을 써 가며 거듭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 낸다. 멜라카는 인간의 노동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의 어원이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하늘과 땅을 짓는 걸 포함한 말할 수 없이 거룩한 신의 행위를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건 정말 뜻밖이다”
그처럼 태초에 하나님은 일하셨다. 뒤늦게 추가된 필요악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가 아니라 창조주가 그리신 밑그림이었다.
하나님은 일하실 뿐만 아니라 일꾼들에게 그 일을 맡기기도 하신다.
피조 세계에 아직 손이 닿지 않아 차츰 가꿔 가야 할 여지를 남기셔서 인류가 노동을 통해 그 빗장을 열어 가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세우는 사람들’을 통해 집을 지으신다. 마르틴 루터가 지적하듯,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먹이신다는 말씀은 농부와 다른 일꾼들의 수고를 통해 인류에게 먹을거리를 베풀어 주신다는 뜻이다.
창세기가 전해 주는 일은 낙원의 일부라는 진리는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다.
일은 무위도식하는 황금시대가 지난 뒤에 역사에 끼어든 재앙이 아니다. 주님이 인생을 염두에 두고 마련하신 완벽한 설계의 일부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장 17절)는 독생자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일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창조주께서 낙원에 일을 두셨다는 사실은 노동을 필요악이나 심지어 징계쯤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기겁할 만큼 놀라운 진리다. 일을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류에 끼어든 상함과 저주의 결과물로 보아선 안 된다.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
일은 영혼을 고치는 약이 아니라 영양을 공급하는 밥이다.
“일을 보는 기독교적인 관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이의 능력을 최대로 표현하는 게 곧...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 도로시 세이어즈
자유는 구속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올바른, 다시 말해서 자신과 세계의 본질에 부합되는 한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 얻을 수 있다.
성경은 오직 노동만이 인간의 중요한 활동이며 쉼은 필요악으로 여기는(휴식의 가치를 일을 계속하도록 ‘배터리를 재충전하는’ 행위쯤으로 엄격하게 제한하는) 반대쪽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준다.
주님이 굳이 쉬지 않아도 기력이 떨어지지 않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하루를 비우셨다(창세기 2장 1절 ~ 3절).
삶에는 일만 필요한 게 아니다. 일이 없으면 의미 있는 삶을 살수 없지만 일만이 삶의 유일한 의미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설령 교회 사역일지라도 하나님과 대적하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셈이다. 삶의 으뜸가는 토대는 주님과의 관계다.
20세기에 활동했던 독일의 가톨릭 철학자 요제프 피퍼는 ‘여가, 문화의 기반’이란 유명한 논문을 썼다. 글쓴이는 여기서 여가란 그저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나 눈앞의 쓰임새를 떠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묵상하고 즐길 수 있는 정신적, 영적 태도라고 주장한다. 서구 문화에서 흔히 보듯, 일을 앞세우는 태도는 만사를 효용, 가치, 속도 등을 기준으로 인생의 가치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하고 평범한, 더 나아가 엄밀히 말해 유용하지는 않지만 즐거움을 선사하는 인생의 국면들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놀랍게도 무뚝뚝하기로 정평이 난 종교개혁가 장 칼뱅도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
“하나님이 오로지 필요(영양)를 채우시려고 음식을 지으셨겠는가? 즐겁고 유쾌한 기분을 위해서는 아니겠는가? 옷을 주신 목적 또한 필요(보호)에 그치지 않고 단정함과 품위를 지키게 하시려는 게 아니겠는가? 풀과 나무, 과일들 역시 다양한 용도를 넘어 아름다운 생김새와 상쾌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꼭 필요한 쓰임새와 별개로 매력적인 구석들을 넣어 만물을 만드신 것이다”
일을 정기적으로 멈춘 뒤 예배하고(‘여가, 문화의 기반’에서 피퍼는 이를 중요한 활동으로 꼽았다) 세상을(노동의 열매들을 포함해서) 찬찬히 들여다보고 즐기는 시간을 갖지 않는 한,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체득할 수 없다.
일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일하도록 지음 받았고 일을 통해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삶이 통째로 일에 빨려 들어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그 한계를 존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과 쉼의 균형을 잡는 신학적인 기초를 견고하게 다지는 작업이야말로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출발점이다.
CHAPTER 2 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신들이 일을 시키려고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을 축복으로 보지 않았다. 일의 가치는 평가 절하되었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드리아노 틸케르의 말처럼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저주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업 상태(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능력이 되는)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의 첫 번째 요건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개중에는 노예가 되도록 태어난 인간이 존재한다는 대단히 유명한 말을 남겼다. 더러는 수준 높은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하므로 열심히 일해서, 재능 있고 총명한 이들이 자유로이 명예로운 삶과 문화를 추구하도록 보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인들은 발끈해서 분통을 터트릴 얘기지만, 문자적인 노예 개념은 사라졌다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이면에 숨은 마음가짐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왕성하게 작용하고 있다.
일은 필연적으로 악하다는 인식부터가 그렇다.
이러한 사안들에 관한 성경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손으로 하던, 머리로 하든 일이란 일은 죄다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증표로 인식한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람만이 일, 곧 직무를 맡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식물과 짐승은 그저 “충만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따름인데 유독 인간은 명확하게 일을 부여받았다. 정복하고 지배하며 세상을 다스리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할 일을 구체적으로 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며 일종의 부섭정(vice regent)으로서 나머지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창조주가 인간을 지으시며 기대하신 가장 큰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일은 하나님이 친히 행하셨고 인간이 주님을 대신해서 하는 행위이기에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일 자체가 존엄할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일이 고귀하다.
목회자이자 작가인 필립 젠센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자, 왕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정의롭고 고상한 정치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 땅에 임하신 하나님은 어떠셨는가? 목수로 오셨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정원사였으며 신약에서는 목수였다. 주님이 일에 부여하신 엄청난 존엄을 담아내지 못할 만큼 하찮은 일은 없다. 몸으로 하는 단순한 노동도 신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활동과 조금도 다름없이 ‘하나님의 일’이다.
물질과 영혼이 영원토록 통합된 상태로 함께 사는 꿈을 제시하는 종교는 오로지 기독교뿐이다.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지음 받았으며 지위나 급여와 상관없이 일은 인류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개척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신과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문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CHAPTER 3 일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수단이다! 일터에서 주님의 매뉴얼을 따라 야심차게 일해라.
창조주는 한 마디 말씀으로도 수많은 주거지에 인간이 득실거리게 만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인류에게 사회를 발전시키고 세워 가는 걸로 일을 삼게 하신 것이다.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에는 폭력적인 의도가 눈곱만큼도 섞여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건 청지기나 대리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문화를 의미하는 영어 ‘Culture’는 경작(cultivation)의 개념에 뿌리를 둔 단어다.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 사역을 통해 땅을 정복하셨던 것처럼 거룩한 자녀들도 주님의 대리인으로서 정복하는 일을 계속하며 확장해 가라고 명령하신다.
“오래도록 변치 않는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자” 명품 잼을 만들어 판매하는, 제임스 투펜키언이 신앙을 기반으로 잡은 일생의 목표다.
그리고 세상을 빚으시고 충만하게 채우신 뒤에 피조물들을 돌아보시고 “참 좋구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크게 깨우친 제임스는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하나님은 허접하게 만들지 않으셨어! 나도 그럴 거야!”
창세기 2장 19절~20절에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 짓는 작업은 창조 과정에 동참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던 것에 비춰 보면 짐승들에게도 얼마든지 이름을 붙이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창조 사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인간을 동참시키셨다.
사역자들이 비즈니스 역시 문화를 만들고 피조 세계를 가꿔가는 방식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을 갖지 않는다면 교인들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이런 노동관은 야심을 품고 앞서 나가는 이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대다수 직장인들에게도 비전과 의미를 준다. 날마다 피조세계를 가꿔 나가는 건 누가나 감당해야 할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창조주께서 일하신 패턴을 좆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존엄성이 떨어지는 일상사도 없고, 주님이 보여 주신 유형과 한계를 초월하는 대형 거래나 공공정책 사업도 없다.
CHAPTER 4 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이다! 자신만을 위하지 말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라.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섬기라는 부르심을 통해 일의 목적을 분명히 하셨는지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직업을 선택하기에 앞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얼 해야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 이어야 한다.
루터는 고린도전서 7장에 등장하는 ‘부르심’이란 단어를 ‘직업’을 의미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해서 소명에 관한 전통적인 시각을 견지하던 중세교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세교회는 교회가 지상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교회를 위해 교회 안에서 행하는 직무이어야만 하나님을 위한 일의 요건을 갖출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로지 수도사와 신부, 또는 수녀가 되지 않고는 부름을 받아 주님을 섬길 길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흔히 그걸 ‘신령한 직분’ (spiritual estate)이라고 불렀으며 그밖에 다른 이들이 하는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노동은 천박하지만 불가피한 일로 보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육체노동을 대하는 태도와 별 차이가 없는 관념이었다.
루터는 논문까지 써 가며 그런 사고방식을 강력하게 공격했다.
‘교황, 주교, 신부, 수도사들을 ‘신령한 직분’으로 칭하면서 왕족, 귀족, 장인, 농부들을 ‘세속의 신분’이라고 부르는 건 모두 지어낸 소리(허구)다. 철저한 기만이요 위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도 거기에 주눅들 이유가 없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진정으로 신령한 직분을 가졌으며 직무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터는 “하나님이 크리스천들을 너나없이 동등하게 일로 부르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편 147편 주석에서 그 까닭을 설명한다. 먼저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성을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는 13절을 살핀다. 그리곤 하나님이 어떻게 성읍의 안전과 안녕을 보장하는 문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시는지 묻고 스스로 답을 내놓는다.
‘본문에 등장하는 ’빗장‘이라는 표현은 대장장이가 만드는 쇠막대기로만이 아니라... 선량한 정부, 잘 정비된 도시의 법률들, 정연한 질서... 그리고 지혜로운 통치자처럼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성읍을 안전하게 지키시는가? 법을 만드는 의원들, 경찰관들, 정부에서 일하는 관리들과 정치가들을 통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주님은 친히 부르신 이들의 노동을 도구 삼아 시민들의 필요를 채우신다.
오늘날 하나님은 어떻게 “살아 있는 피조물의 온갖 소원을 만족스럽게 이루어”(시편 145편 16절) 주시는가? 농부와 빵 굽는 기술자 구멍가게 주인과 웹사이트 프로그래머, 트럭 운전기사를 포함해서 식탁에 음식이 도착할 때까지 힘을 보태는 이들 모두를 통해서가 아니겠는가?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굳이 인간이 쟁기질을 하고 씨앗을 뿌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쉬 낟알과 과일을 주실 수 있지만 그러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까닭을 금방 알아들을 수 있도록 루터는 예를 들어 설명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녀들의 소원을 무엇이든 다 들어주길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책임질 줄 아는 인간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아들딸들에게 일을 시킨다. 직접 하면 더 잘할 수 있지만 자식들이 성숙해지도록 돕는 쪽을 택한다... 루터는 똑같은 이유에서 하나님도 거룩한 자녀들이 행하는 일을 통해 역사하신다고 결론짓는다.
‘하나님을 좇기 위해 우리가 하는(밭에서, 정원에서, 시내에서, 집에서, 전쟁터에서, 정부에서, 아니면 다른 어느 곳에선가) 일은 하나같이 어린아이가 하는 짓 같아서 밭에서, 집에서, 그밖에 어디서든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이 친히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가면인 셈이어서 주님은 뒤에 숨은 채로 사실상 모든 일을 다 하신다
심지어 결혼한 이들의 성적인 관계까지도 루터는 같은 패턴으로 설명했다. 하나님은 번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자녀를 주실 수도 있었다. “주님은 남자와 여자 없이도 자녀를 갖게 하실 능력을 가지셨지만 그러길 원치 않으신다. 대신에 남녀가 연합하게 하셨다. 마치 인간의 공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가면을 쓰고 하신 일이다”
소박하기 초라하기 그지없는 시골 농장의 소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루터가 설파하다시피, “하나님은 소젖 짜는 여자아이의 일을 통해 친히 우유를 내고 계신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칭의 교리(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의 으뜸가는 신학적 토대다)야말로 크리스천의 노동관 형성에 한층 더 깊은 영향을 주었다.
리 하디는 이렇게 적었다. “루터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수도사들이 서원을 하고 세상과 격리된 가혹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는 신앙적인 의식과 규범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열심히 사역한다 해도 자신의 삶은 주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에서 제힘으로 이룬 선한 공로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저 유명한 깨달음을 얻는다.
루터는 오랜 세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붙들고 씨름했다. “수도사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인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한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지냈다. 보상이 될 만한 행위(종교적 노력)를 해서 주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는 얘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사납고 쓰라린 심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가르치는 로마서 1장 16절~17절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당시 심경을 루터는 이렇게 전한다.
‘비로소 ’하나님의 의‘란, 의인은 주님의 선물, 다시 말해 믿음으로 산다는 뜻이란 사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거듭나서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들어갔음을 여기서 절감한 것이다. 성경 전체가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마지막 문장에서 보듯, 저마다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일의 의미를 바라보는 시각을 포함해서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결정적 요소라면 교회에서 목회하는 교직자들과 그 밖의 일을 하는 이들 사이에 늘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데 터럭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다른 노동보다 조금도 우월할 게 없다.
단순 노동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와 고상해 보이는 일거리를 부러워하는 마음가짐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제 일은 종류와 상관없이 인류를 값없이 구하신 하나님과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 된 까닭이다.
그러기에 루터는 크리스천들에 관해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비록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의 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다”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 주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능숙한 사역’이다. 하나님이 일을 주신 목적이 인간 공동체를 섬기게 하는 데 있다면, 그 뜻을 받드는 으뜸가는 길은 주어진 과업을 끝낼 뿐만 아니라 제대로 해내는 것이다.
극적인 본보기를 한 토막 소개하고 싶다. 1989년 2월 24일, 뉴질랜드로 가는 유나이티드에어라인 항공기가 호놀룰루 공항을 이륙했다. 그런데 이 보잉 747기가 2만 2천 피트 상공에 이르렀을 즈음, 화물칸 앞문이 뜯겨 나가면서 항공기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순식간에 승객 아홉 명이 허공으로 빨려나가 목숨을 잃었다. 흩날리는 파편에 손상을 입은 오른쪽 엔진 두 개가 멈춰 버렸다. 착륙이 가능한 지점까지 도달하려면 2백 킬로미터 남짓 더 날아가야 했다. 기장 데이비드 크로닌은 온갖 지혜와 38년에 걸친 비행 경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닌 기장은 승무원들의 기억에 길이 남을 만큼 매끄럽게 항공기를 착륙시켜 승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항공 전문가들은 그날 착륙에 ‘기적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어느 기자가 크로닌에게 화물칸 문짝이 날아가는 순간,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들더냐고 물었다. 기장은 말했다. “승객들을 위해 잠깐 기도하고 곧바로 일에 집중했습니다”
루터교회 지도자이자 비즈니스맨인 윌리엄 딜은 이 감동적인 예화를 들려주며 핵심을 짚는다. “평신도들이 스스로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주일 아침에 하는 일과 주중에 하는 일을 연결시키지 못한 채 일종의 이중생활을 이어 가는 비극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일상생활 중에 하는 바로 그 활동들이 곧 영적인 일이며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게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움직이시는 하나님과 이어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영성은... ‘일이 곧 기도’라고 속삭일 것이다”
딜은 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저마다 제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걸 첫 손에 꼽았다.
‘유나이티드에어라인 811편이 곤경에 빠졌을 당시, 코로닌은 승객들한테 꼭 필요한 대단한 은사, 즉 오랜 경험과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다. 재난을 코앞에 둔 이들에게는 기장이 동료들과 얼마나 사이좋게 지내는지, 또는 어떻게 다른 이들과 신앙을 나누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결정적인 문제는 파일럿으로서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기체를 안전하게 조종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갖췄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하나님이 현재 진행중인 창조 과정에 동참하는 게 크리스천의 사명이라고 할 때, 그 사역을 떠받치는 기반은 ’능숙함‘이 되어야 한다. 각자 가진 달란트를 최대한 노련하고 능숙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능숙함은 가장 기초가 되는 자질이다. 그러다 보면 부와 명예가 따라오기도 하지만 그게 최종 목표는 아니다’
남을 돕는 일이 아니더라도 모든 노동은 본질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다. 크리스천은 굳이 직접 목회를 하거나 비영리 자선단체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스스로 하는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장 칼뱅은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주어진 세상의 그 어떤 일도 너무 지저분하고 천해서 빛이 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눈에는 한없이 소중하게 비쳐질 것”이라고 했다. 이 종교개혁가가 ‘그를 통해 부르심에 순종하도록’이란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하라.
칼뱅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여된 일을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자 선물로 보고 있다.
‘불의 전차 Chariot of Fire’에서 주인공 에릭 리델의 아버지는 선교사답게 아들을 타이른다. “완벽하게 해내기만 한다면, 감자 껍질 벗기는 일로도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단다!”
하루하루 하는 일은 무엇이 됐든지 간에 결국 친히 부르시고 준비시켜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다. 존 콜트레인은 명반으로 꼽히는 ‘지극한 사랑 A Love Supreme’에 붙인 멋진 해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앨범은 주님께 드리는 소박한 제물이다. 마음으로든, 입술로든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리려는 몸짓이다. 주님, 선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들을 두루 도우시며 힘을 주소서!’
PART 2 일, 끝없이 추락하다
CHAPTER 5 아무리 일해도 열매가 없다! 밤낮없이 매달려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버겁다.
성경이 제시하는 해석의 핵심은 ‘죄’, 곧 인류가 창조주에게 반역했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개념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에 빠진(이어서 온 인류를 오염시킨) 타락 사건은 지금까지 두고두고 재앙이 되었다.
세상의 구조 전체가 완전히 어그러졌지만 ‘일’ 만큼 속속들이 그 파장에 노출된 영역도 없을 것이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시면서,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특별히 정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째서 그 나무가 그토록 중요했던 걸까? 어쩌면 나무 자체는 별 의미가 없었을지 모른다. 나무나 열매에 무슨 신비하거나 비범한 힘이 있었던 건 아니란 뜻이다. 그건 그저 시험이었다. 창조주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르셨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너희는 내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가 날 믿고 사랑한다면 순종해야 한다”
사실 이 부분에는 자자손손 간직하도록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온갖 계명들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인류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삶의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삼으며, 상대가 주님이시기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말씀에 순종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명령에 거역하는 순간, 아담과 하와는 교묘한 거짓말로 불순종을 부추긴 뱀의 말대로 하나님처럼 되었다.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얼 하는 게 옳고 그른지 직접 결정할 권리를 거머쥐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처럼 된 건 인류에게 참혹한 재난이었다.
물에서 쓰도록 만들어진 배가 그 설계에서 벗어나면 망가지고 쓸모가 없어지듯, 인류는 제힘으로 권위의 근원이 되기로 작정하자마자 참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사랑하는 걸 으뜸으로 삼고 살도록 지음받았으며 거기에 충실해야만 비로소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같은 처지에서 누구라도 저질렀음직한, 그리고 오늘날 저마다의 삶 가운데서 지속하고 있는 바로 그 잘못을 범했을 따름이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지적했듯, 세상은 지금 온통 ‘허무에 굴복한’ 상태다.
육신의 죽음은 인생의 모든 국면에 스며든 포괄적인 죽음과 부패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계속해서 창세기 3장을 읽어 보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기가 무섭게 아담과 하와의 내면에 수치심과 죄책감, 깨어지는 아픔이 찾아들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서구문화는 죄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되짚어 볼 생각조차 않으면서 그 불안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만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유년기의 경험이 쓸데없는 수치심이나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감정을 빚어낸다고 해석한다. 갖가지 즐길 거리들은 잠시나마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선행은 스스로 착한 사람이란 정체성을 갖게 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본질적인 요인으로 지목한다.
철학자 알 윌터스는 이렇게 정리한다. “아담과 하와가 죄에 빠진 건 개인적인 불순종 행위 수준에 그치지 않으며 피조 세계 전반에 재앙이나 다름없는 사건이라는 게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죄의 파장은 피조물 전체에 두루 미친다... 창조주께서 친히 지으신 멋진 작품들이 이제는 주님을 거역하는 터전으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신학자 W.R. 포레스트는 “영어의 ‘labor’(분만, 노동)이나 ‘travail’(산통, 노고)에서 보는 것처럼, 임신과 일을 똑같은 단어로 설명하는 언어권이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탁월한 경작 기법을 마스터해도 가뭄이나 홍수, 전쟁이 닥쳐서 수확이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대다수는 일생을 투자해도 목표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한다. 멀리서 보기에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야심을 이루기보다 좌절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백이면 백,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자주 실망하고 낙담한다.
이전 세대는 환경 탓에 성경이 창조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노동관을 가졌던 반면, 다음 세대는 타락에 관한 말씀이 주는 가르침에 비해 더 순진하고 이상적인 의식을 소유한 듯하다.
직업을 선택하면서 품었던 큰 포부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분야를 잘못 선택했다든지, 그쪽으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든지, 죽는 날까지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완벽한 일거리를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아무에게도 보탬이 되지 못하는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하게 제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한다손 쳐도 일터에서 주기적으로 좌절을 경험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과거의 낙원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미래의 천국에도 일이 존재할 게 틀림없다. 하나님 자신이 거기서 기쁨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라도 다른 이들의 삶에 유익을 끼치며 무한한 기쁨과 만족을 얻는 건 물론이고 말할 수 없이 능숙한 솜씨로 그 작업을 해낼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친히 지으신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소망과 깊은 위안을 찾고, 온몸을 던져 일하며 열매를 구할 때마다 가시덤불이 자라나는 이 땅의 현실에 무릎 꿇지 않을 힘을 얻는다. 아울러 이생에서 하는 일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노동의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또한 온전할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CHAPTER 6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 그저 성공의 쳇바퀴를 따라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
이곳 세상에 속한 그 무엇도 의미 있는 삶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일과 성공, 사랑과 쾌락, 또는 지혜와 지식으로 삶의 이유를 삼는다면 존재가 불안정해지고 조그만 충격에도 쉬 부서질 것이다. 환경은 삶의 토대를 늘 위협하며 죽음은 필연적으로 저마다 소중히 여기는 자산들을 깡그리 휩쓸어 가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실존적으로 의지하는 자세야말로 흔들림 없고 목적이 분명한 인생의 전제 조건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세상의 뭇 철학들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인생의 공허함을 절감한 끝에 하나님의 초월적인 독특성에 눈을 돌린 것이다.
전도서의 철학자는 온갖 어려운 고비들을 넘어 소망하던 일을 남김없이 이뤄 낸 몇 안 되는 인물이 된다 할지라도, 영원히 값어치가 변하지 않는 열매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에 모두 헛수고라고 단언한다.
‘해 아래 있는’ 존재와 업적은, 심지어 문명 그 자체까지도 끝내 잊히게 마련이며 그 영향력 또한 완전히 사라지는 법이다 (전도서 1장 3절 ~ 11절).
한마디로 말해, 일을 해서 큰 성공을 거두어도 ‘해 아래서’ 사는 삶이란 전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노동을 통해 세상을 섬기는 방법에 관해 개인적으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일할 필요가 있음을 또렷이 보여 줄 따름이다.
단순히 일하는 차원을 넘어 피조 세계를 보살피는 인류의 능력을 확대해 가는 데 노동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지금 하는 일을 가능한 한 더 낫고, 더 깊고, 더 깔끔하고, 더 노련하며, 더 고상하게 처리하는 방식을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을 갈고 닦는 데 힘을 쏟겠다는 건 꽤 훌륭한 목표다.
‘공동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거기에 머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노동자들은 ‘일 자체에 기여해야’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일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몫’이며 거기서 얻는 만족이야말로 흡족한 삶의 필수 요건이다.
전도서의 철학자는 타락한 세상을 사는 동안 일에서 얻는 만족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임을 인정하면서 섬세한 균형을 통해 그 은혜를 추구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고생스러운 노동 없이 누리는 평온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평안이 없는 수고도 마찬가지다. 일과 평온은 둘 다 필요하다.
살면서 어떻게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느냐 하는 문제는 성경이 다루는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다.
돈을 덜 버는 한이 있더라도(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CHAPTER 7 탐욕의 수단으로 변질되다! 고생해서 이만큼 일구었는데 이걸 포기할 수는 없어!
‘선물로 받은 은사를 관리하는 행복한 작업’에서 ‘자존감의 허상을 세우는 신경증적인 반응’으로 일이 변질되는 과정을 창세기 1장 ~ 11장만큼 또렷이 보여 주는 곳도 없다.
창세기 4장에서 기술은 권력을 쌓는 도구가 되고, 11장에 이르면 마침내 바벨탑을 세우는 유명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탑을 짓는 이들이 무얼 위해 움직이는지, 오늘날 대다수 노동자들이 어떤 포부를 가지고 어디를 바라보며 일하는지 4절은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노동의 동기는 바뀌지 않았다. 권력과 명예, 만사를 제 뜻대로 통제할 권한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허세마저도 극도의 불안감을 선명하게 노출할 뿐이다. 인류는 업적을 남겨 ‘이름을 날릴’ 심산으로 도시를 가꿨지만 이름이 결여되어 있다는 건 곧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음을 반증한다.
바벨탑은 자신을 넘어 창조주 안에 토대를 두지 않는 한, 집단적인(사회나 단체, 또는 운동의) 노력으로 무얼 만들든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그분의 울타리 밖에 세워진 사회는 실망을 안겨 줄 수밖에 없는 대상을 우상으로 삼겨 마련이다.
“반쯤 짓다가 무너져 버린 도시, 바벨은 인간이 그런 속성을 보여 주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한 기념비다” 데렉 키드너
‘교만은 본래 경쟁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본질적으로 경쟁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교만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만 가지고는 기뻐하지 않으며, 옆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야 비로소 행복해한다’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중에서.
인간과 세상이 망가지고 깨어졌음을 인정한다면 제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꾸준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한쪽을 콕 찍어서 이웃을 섬길 뜻을 품고 일하는 ‘좋은 사람’으로 규정하고 다른 한편을 가리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제 한 몸만 생각하는 ‘나쁜 인간’으로 단정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너나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이기적인 DNA와 경쟁을 추구하는 교만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셨는지 저마다 다른 입장에서 기록한 세 권의 책을 주셔서 얼마나 다양한 이들을 사용하시는지 한눈에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우선, 에스라서는 목회자, 또는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에 관한 책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익혀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토대로 삶의 틀을 다시 잡아야 했다. 두 번째는 느헤미야서로 탁월한 관리 능력을 발휘해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안정을 되찾아서 경제활동과 시민 생활이 활발해지도록 이끌었던 도시 설계자요 개발 전문가의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에스더서는 극심한 부정과 맞서는 시민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인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님은 이들 모두를 사용하셨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대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에스더 4장 13절 ~ 14절
한마디로, 에스더가 궁궐 생활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면 모든 걸 상실할지 모르지만, 대궐의 삶을 잃어버릴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어김없이 모든 걸 다 빼앗길 것이라는 경고다.
모르드개는 희망의 메시지로 말을 맺는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14절) 이는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한마디다.
“수중에 넣은 영향력과 자격증, 돈을 풀어 남들을 섬기지 않는다면, 왕궁은 곧 감옥이 될 겁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름을 얻었습니다. 받은 게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면 늘 더 많은 걸 갈구하는 탓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가진 걸 활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왕궁에서 확보한 자리를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내던질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대궐이 여러분을 소유할 것입니다” 라틴아메리카 출신 목회자.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인류가 누리는 모든 혜택을 주셨으며, 지금도 매 순간 삶을 지속할 수 있게 뒷받침해 주시므로 무엇 하나 주님의 은택이 아닌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게 자신의 소유인 양, 소견에 옳은 대로 쓰면서 제 이름을 내는 데 골몰한다.
영원한 궁전에서 한없는 아름다움과 영광에 둘러싸여 사셨지만 그 모두를 버려둔 채 자원해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빌립보서 2장은 목숨을 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명으로 대가를 치르신 분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한다.
에스더를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화살표로 본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표본이 되는 스승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개인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신 구세주로 인식한다면 저마다 자신이 주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에스더서 주석을 쓴 케어런 잡스는 에스더를 ‘왕후’로 부른 사례가 모두 14차례 있는데, 그 가운데 13번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고백 이후에 등장한다고 말한다.
에스더가 큰 사람이 된 건 스스로 이름을 떨치려 애쓴 결과가 아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되려고 발버둥 칠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던 분을 섬길 때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
CHAPTER 8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되다! 인생이 통째로 일에 빨려 들어가 망가지다.
피조물 가운데 무언가를 가져다가 ‘절하기’ 시작하면, 다시 말해서 사랑하고 섬기며 참 하나님보다 더 큰 의미를 둔다면 결국 대체물이나 모조품을 예배하는 셈이 된다. 실질적으로 우상을 떠받드는 건 마음이므로, ‘모양을 본떠서’ 만든다는 말을 꼭 물리적인 차원에 한정해서 해석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영적이고 심리적인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지배권과 안전, 의미와 만족, 아름다움 따위를 제공해 줄 다른 무언가의 형상을 만들고 신앙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좋은 것’으로 ‘궁극적이고 영원한 대상’을 삼는다는 뜻이다.
루터는 피조물 가운데 무언가가 단 한 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바라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신앙이 없는 이들도 저마다의 삶을 뒷받침해 준다고 믿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능력 같은 것들을 ‘신’으로 모시고 숭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생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거나 아니면 다른 무엇에게 그 자리를 내주거나 둘 중 하나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만 ‘구원’을 찾는 대상, 곧 신이 있다. 주님은 그 밖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으셨다.
루터는 우상을 세우는 마음가짐과 제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는 자세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깨달았다.
루터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합리화하거나 의로움을 입증하려 한다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종교인들은 윤리적 덕성이나 예배 행위, 사역 따위에서 ‘사랑과 은혜, 선의’를 구하는 반면, 세상 사람들을 권력을 손에 넣거나 큰 기쁨을 누리는 데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기본적으로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거짓 신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상은 침투력뿐 아니라 파괴력 또한 막강하다. 십계명이 우상숭배 금지 규정에서 시작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루터의 주장에 따르면, 첫 번째 계명만 잘 지키면 나머지 계명들을 어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올바르지 않은 일(몰인정한 행동, 부정직한 말, 깨뜨려 버린 약속, 자기중심적인 태도)들은 어김없이 마음 속 깊은 데 자리 잡은 확신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결정적으로 삶의 행복과 의미를 좌우하는 요소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상숭배는 마음을 지배하는 힘이 있으므로 행동 또한 통제한다.
우상을 발판으로 소망을 품으면 늘 자신에게 속삭일 수밖에 없다. “이러저러한 것만 손에 넣으면 만사에 자리가 잡힐 거야. 그때쯤에는 정말 값진 인생이란 생각이 들겠지”
과거와 현재의 전통문화들은 주로 전승과 종교를 통해 체득하는 윤리적 절대 기준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한다.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남이야 어찌 되든 자신의 종족이나 국가의 이해를 앞세우는 성향은 죄에 물든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우주적 불안정’(cosmic insecurity)에 뿌리가 있다고 보았다. 불안한 탓에 인종이란 이슈를 택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고 강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다른 인종을 낮춰 보아야 자신이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문화는 사회적인 안정과 공익을 우상으로 삼고 개인의 권익을 뒷전으로 친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5백여 년 전에 서구사회에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과학이 발전하고 계몽주의라는 철학 사조가 힘을 얻으면서 현대 사회는 종교니, 부족이니, 전통이니 하는 우상들을 끌어내리는 대신 이성과 경험, 개인의 자유 따위를 세계관 전반을 지배할 궁극적 가치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이성’이라는 현대적 가치에는 몇 가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과학과 기술의 중단 없는 전진을 통해 구현되는’ 진보라는 이상이다. 현대인들은 “과학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행복한 시대가 가까워지며 역사와 정치가 올바른 궤도를 찾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받아들였다.
충분한 시간만 주면 과학이 그동안 제기된 모든 질문에 답안을 내놓고 온갖 문제들 또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게 현대인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현대 문화는 고대의 지혜나 종교적인 권위자들의 계시 따위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심령의 위안’이 필요할 때뿐이다.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과학적인 방법으로 찾아낸 인간의 이성이 필요할 따름이다.
인간 이성에 대한 이처럼 절대적인 새 소망은 개인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흐름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현대사회는 더 이상 세상을 모두가 반드시 따라야 할 진리가 결합된 도덕적 표준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보지 않는다. 도리어 저마다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할 개인의 권리보다 더 고귀한 기준은 없다고 주장한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잘못이라고는 누군가가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행위가 전부다.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 도덕률이라든지 개인의 행복을 뛰어넘는 고상한 동기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선택’과 감정을 신성하고 거룩하게 여기게 만든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개인이 우주의 중심이며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저마다의 이해와 꿈을 접어두고 하나님이나 가족, 이웃 같은 더 고상한 동기를 좇아 헌신하는 데서 개인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관심사와 욕구보다 더 큰 동기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삶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역할도 크게 바꿔 놓았다. 일은 이제 자신을 규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전통문화는 누구에게나 자연이나 관습이 부여해 준 사회 계층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가정마다 ‘고유한 지위’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시각은 저마다의 달란트와 포부, 열매 맺는 인생을 가꾸기 위한 열심 따위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현대사회는 자율적인 인간의 가치를 지나치게 크게 평가한다.
니체는 세계대전의 공포가 세계를 휩쓸기 훨씬 전부터 과학이 반드시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사상(신흥종교의 사이비 신앙)은 우상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 과학은 단지 대상이 무언지를 알려 줄 뿐,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고도 했다.
니체는 이성과 과학이라는 현대의 우상뿐만 아니라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는 새로운 윤리도 두들겨 댔다.
니체는 묻는다. “어디에 기초를 두어야 하는가?” 절대적인 윤리 기준이 없다면 어떻게 개인은 독단적으로 그런 표준을 세우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인간도 곰팡이나 자갈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공정의 산물이라면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게 대접받아 마땅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몹시 심란하기는 하지만, 니체의 주장은 핵심을 짚고 있으며 19세기에 벌어진 갖가지 재난들과 잔혹 행위는 그 판단이 정확했음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서구사회에는 과학이나 진보니 인간의 자유니 하는 요소들에 대한 현대적 낙관주의의 해묵은 잔재와 더불어, 기독교를 비롯한 전통적인 세계관의 잠재적인 영향력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20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영화나 소설들은 보건과 교육, 과학지식, 사회적 화합이 끊임없이 진보하는 인간 사회를 자주 그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영화와 소설이 비관적인 쪽으로 흘러가며 갖가지 반이상향적인 결과들을 묘사한다.
하이데거와 닥스뿐만 아니라 자크 엘룰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들은 과학기술과 불확실성, 시장이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우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아무도 인류의 보편적인 ‘목적’이나 목표 따위를 주장하거나 거기에 동조할 수 없으므로 가진 건 오로지 ‘수단’이나 기술뿐이다. 건전한 인생이나 바람직한 인간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없으므로 저마다 권력을 소유하려는 개인적인 경쟁만 남는다. 기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게 되어 있다. 과학의 앞길을 안내하고 한계를 지어 줄 더 고상한 이상이나 윤리적 가치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2008년 경기후퇴와 그 후유증을 겪는 시기에 드러난 금융 회사들의 광범위한 기만과 사기, 또는 이기적 형태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목적 없는 수단’이란 우상이 낳은 가장 확연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예일 대학 철학과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교수는 ‘행복한 삶’의 기준을 두고 현대 문화는 ‘잘 되어 가는 것’으로 정의하는 반면, 고대 문화는 성품과 용기, 겸손, 사랑, 정의 따위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잘 사는(경험적인 즐거움이 가득한) 것’으로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케팅과 홍보 일을 하는 이들로서는 상품이 멋지게 작동할 뿐만 아니라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선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PART 3 일과 영성, 복음의 날개를 달다
CHAPTER 9 복음의 관점으로 일을 이해하다! 회사 신우회에 참석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말라.
어느 집단이나 문화든 저마다 선호하는 세상의 스토리(거대한 질문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으로 널리 인정받는 답변들이 포함된)와 그 드라마를 한껏 고조시키는 우상들이 있다. 레슬리 스티븐슨의 대표적인 저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 자기 이론’은 인류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었던 걸출한 사상가들이 주창한 인간 본질을 바라보는 유력한 시각들을 열거한다.
플라톤은 주로 육신과 그 연약함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판단했다. 마르크스는 불공정한 경제구조를 들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욕구와 양심 사이의 무의식적인 갈등을 지적했다. 사르트르는 객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디에도 구속받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스키너는 애초부터 인간은 전적으로 환경의 지배를 받게 마련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점을 거론했다. 반면에 콘래드 로렌츠는 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태생적인 공격성 탓이라고 했다. 하나하나가 인류 사회에 어떤 이상이 있으며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다루는 완벽한 스토리들이다.
세계관을 수용하지 않는 이들조차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삶의 의미가 있으며 그 작동 원리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본질을 다룬 스티븐슨의 책에서 지은이는 말한다. “하나님이 교제하기 위해 인간을 만드셨다면, 그리고 인간이 주님을 외면하고 거룩한 관계를 깨트렸다면, 오로지 하나님만이 인간을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성경적인 세계관은 독특하게도 인류의 본질과 문제, 구원을 관계적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어 그 관계를 망가뜨렸다. 그러므로 구원과 은혜를 통해 옛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독특한지 새삼 놀랍다. 오직 크리스천의 세계관만이 세상의 일부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 자체를 문제로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죄는 온 천하를 총체적으로 감염시켰으므로 세상은 영웅과 악당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인간은 분명 전자가 아니라 후자 쪽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크리스천의 스토리라인, 또는 세계관은 창조(계획), 타락(문제), 구원과 회복(해결책)으로 압축할 수 있다.
온 세상은 죄에 빠져 있다. 이편이 저편보다 덜하거나 더하달 게 없다. 예를 들어, 감정과 열정은 믿을 수 없고 이성은 신뢰가 간다? 육신은 나쁘고 영혼은 선하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상 세계는 세속적이고 영적인 영역은 선하다? 어느 것도 참말이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을 제외한 그밖에 스토리라인들은 무언가를 악당, 심하게는 악마로 만들어 죄의 역할을 대체하기 위해 이런 식의 논리들을 채택하고 있다.
온 세상은 구원을 받고 회복될 것이다. 예수님은 영혼과 육신, 이성과 감정, 인간과 자연을 모두 구속하신다. 구제 불능이란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자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복음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기업에는 확연히 구별되는 비전이 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고객들을 섬기고, 적대적인 관계와 착취가 없으며, 생산물의 탁월함과 품질을 대단히 강조하고, 설령 수익이 줄어들지라도 조직의 현장에서 일상적인 기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윤리적인 환경이 갖춰져 있게 마련이다. 복음적인 세계관을 좇는 비즈니스에서 이윤은 수많은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건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눈치를 보며 동료들과 빈둥거리지 않는 선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수준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세계관에 담긴 의미, 그리고 일하는 삶 전반과 손길이 미치는 조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곰곰이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
아이비리그 학교들을 처음 세운 설립자들은 “구원의 증표는 높은 자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본 인간은 한없이 낮고 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겸손한 자각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자비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엄격한 청교도들’이었음을 지적한다.
오늘날 누구도 제힘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으며 부와 재능과 권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라는 크리스천의 사상은 현대 문화 속에서 전반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신 ‘능력주의의 어두운 속성’이 활개를 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창조주께서는 몸을 지으셨고 장차 부활시키실 것이다. 육신의 중요성이 거기에 있다. 친히 몸을 속량하신 (로마서 8장 23절) 하나님은 최고의 의사다. 그런 점만 놓고 보자면 ‘의료’는 지극히 고귀한 소명이다. 하지만 주님은 육체만 보살피시지 않는다. 영혼도 지으시고 구속하셨다. 따라서 크리스천 의료인은 전인적인 인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신앙은 환자의 육신을 보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애와 독창성을 발휘해 치료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누가 봐도 기독교적인 활동을 하는 경우에만 복음적인 세계관이 작동한다고 믿는 건 심각한 오류다. 오히려 복음을 눈에 쓰고 세상을 ‘내다볼’ 안경쯤으로 여기는 게 더 진실에 가깝다.
CHAPTER 10 일에 대한 이원론을 배격하다! 이건 세상 일이고 저건 하나님 일이라는 이분법을 배격하라.
유대인 공동체는 뉴욕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병원과 의료 혜택을 확장하고, 예술과 문화센터들을 만들고, 노인들을 보살피며, 젊은이들을 길러 내는 탄탄한 사회를 이끌었다. 성경의 유산과 신앙에 기대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가서 6장 8절)에 헌신했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역사하셨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일은 섭리를 이뤄 가시는 창조주의 주요한 도구다. 그것이 바로 인간 세상을 유지해 가는 주님의 방식이다.
크리스천의 노동은 거룩한 창조 사역의 연장이다.
크리스천의 노동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으로 이웃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이들을 위해 탁월하게 일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섭리, 또는 예비하심이라는 일의 또 다른 측면은 어째서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인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구덩이를 메우는 크리스천들만의 독특한 방법을 식별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며 (창세기 1장 26절~28절) 주님이 누구에게나 일하는 데 필요한 달란트와 재주를 주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이들이 큰일, 더 나아가 크리스천들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해내는 걸 놀라워할 이유가 없다.
물론,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과는 다른 내면의 동기를 가지고 일을 해야 하며, 이는 자질과 정신, 정직성에 명확한 차이를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천 근로자들이 주님을 모르는 이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비행기 엔진을 제작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측면에서만 일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살필 줄 모른다면, 은연중에 성경이 가르치는 일의 개념과 원리가 노동자 계층과는 별 상관이 없는 걸로 여기는 꼴이 된다.
그러므로 일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섭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보는 성경의 노동관은 대단히 중요하다. 크리스천의 세계관이 가진 차별성에 집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엘리트주의와 파벌주의를 제어해 주는 까닭이다.
인간이 하는 그야말로 모든 일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다면,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진입한 셈이다.
시편 19편은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무언의 메시지’와 성경을 통해 크리스천들에게 주신 계시, 그리고 그걸 신뢰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구별하고 있다. 로마서 1장과 2장은 인간이라면 누구든 하나님에 대한 원초적인 지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특히 로마서 2장 14~15절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적혀 있다고 했다. 모두가 정직, 정의, 사랑, 황금률 따위가 미리 장착된 양심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울러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이 존재하며, 자신은 창조주의 피조물이고, 인류는 반드시 그분을 섬겨야 하며,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 그리고 이웃들과 관계를 맺으라고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경작은 문화 형서의 전형이다. 따라서 학문이 발전하고,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고,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 혁신적으로 개선되고, 과학기술이나 경영과 행정이 진보하는 건 그저 하나님이 ‘창조의 책장을 열어 진리를 보여 주신’ 결과일 뿐이다.
왜곡되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도 얼마간의 불꽃들이 어렴풋이 타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광채는 지독한 무지에 가로막혀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은 둔해질 대로 둔해진 탓에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는 일에 얼마나 무능해졌는지 모른다.
이원론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이런 관점을 가진 이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의 손에서 이뤄진 일에도 늘 죄가 일으킨 왜곡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일반 은총도 제법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기 일쑤다. 아울러 공공연히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크리스천이 하는 일 또한 죄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뒤틀릴 수 있다는 점도 쉽게 지나쳐 버린다.
이원론의 대척점에 신앙과 일의 통합이 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의 문화와 직업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죄에 대한 관념과 시각이 두터워지면 누가 봐도 기독교적이라고 할 만한 일마저도 우상 숭배로 변질될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음을 틈틈이 떠올리게 된다. 일반 은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명백히 세상의 일과 문화라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요소가 항상 깃들어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올바른 신앙이 이끌어갈 정점에 섰다고 볼만큼 선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릇된 신념이 끌어갈 가장 낮은 바닥에 이르렀을 만큼 악한 게 아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의 일을 하든지 양쪽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서 그 문화와 표현들을 비판적으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쪽짜리 진리를 알아보고 우상을 배격하는 법을 배우는 한편, 삶의 모든 국면에서 정의와 지혜, 진리와 아름다움의 흔적들을 만끽하는 비결을 익힐 힘이 생긴다. 문화에 참여하는 길과 관련된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받아들인 크리스천이라면, 동료와 이웃들이 하는 일의 이면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길을 누구보다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CHAPTER 11 일을 하는 동기가 바뀌다! 높은 보수나 칭찬을 위해 일하지 말라.
크리스천은 일정 부분 희생을 치르고라도 부도덕한 행동에 맞설 만한 토양을 갖추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기독교 신앙의 스토리라인은 그 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윤리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데 있어서, 크리스천들은 손익 계산이라는 실용적인 접근 방식보다는 훨씬 단단한 토대를 가진 셈이다. 크리스천들은 솔직하고, 따뜻하며, 너그러워야 한다. 보상을 바라서가 아리나 (손익분석에 뿌리를 둔 윤리는 일반적으로 대가를 기대한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설계를 감안할 때, 그렇게 하는 게 옳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서슴없이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악인들과 달리”, 불이익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바로 ‘의인’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반 은총’은 크리스천 직장인과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동료들 사이에 공통점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과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도 함께 공부하고 전문지식을 공유하며, 해당 분야에서 이룬 진전을 서로 알아보고 신앙과 상관없이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에게 갈채를 보낼 수 있다. 힘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능숙하고, 부지런하며,L 노련하고, 훈련된 일꾼이 되는 건 누구에게나 대단히 중요하다. 골로새서 3장 22절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며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크리스천이라면, 업무의 질과 성실한 태도로 동료들의 존경을 얻으려 노력할 것이다. 누가 보든 말든 늘 책임을 다하며 투명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가져서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행동하는’ 본본기가 된다는 뜻이다.
크리스천들은 주변 사람들과 구별되는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은근히) 도덕적인 나침반과 복음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 신앙은 다른 세계관에서 볼 수 없는 중요한 자원들을 제공하므로 일터에서 그대로 살아 내기만 하면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고대 문화 역시 어느 정도까지는 사랑을 말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상태를 용서하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그 개념의 정의를 끌어올렸다. 복수를 미덕으로 여기는 수치 문화권이나 명예 문화권에 사는 이들로서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가르침이다.
크리스천에게 사랑은 으뜸가는 삶의 의미다. 심지어 서로 잘 알고 사랑하는 세 위격이 한 분 하나님을 이룬다는 삼위일체 교리조차도 사랑을 기반으로 한 관계가 모든 실재의 구성 요소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사랑과 경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가운데서 이미 누리셨던 사랑과 기쁨, 존경과 영광을 나누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던 것이다.
인간들 가운데는 애초부터 노예가 되도록 태어난 이들이 있는데, 이는 이성적 사고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도 거기에 근거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대 철학자는 주장한다. “자연은 자유민과 노예의 몸을 구별할 것이다. 한쪽은 노예 노동에 적합하도록 강건하게 만들고 다른 한쪽은 곧바르게 만든다. 이는 (노예의) 일에는 쓸모가 없지만 전쟁과 평화 양쪽에 필요한 기술들로서 정치적인 삶에 유용하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반면, 다른 이들은 노예일 수밖에 없으며 후자에게는 종이라는 신분이 편리하고 타당하다”
이와는 지극히 대조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이렇게 썼다.
‘자신의 공로로 판단한다면 대다수(인간은) 더할 나위 없이 무가치하다. 그러나 여기서 성경은 인간 그 자체의 공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영광과 사랑을 돌리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라고 가르치라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한 방식으로 도움을 준다... 인간은 누군가를 향해 ’비열하고 쓸데없는 자‘ 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그분의 아름다운 형상을 입은 자‘로 드러내 보이신다. 그자를 섬길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면, 하나님은 늘 그러하시듯, 그이를 주님의 자리엔 앉히셔서 우리가 주님과 하나로 연합함으로써 누리는 크고도 많은 은혜를 깨달을 수 있게 하신다. 눈꼽만큼이나마 애써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말하려는가? 하지만 그이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하나님의 형상은 자신과 소유 전부를 바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무개는 나랑 전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이 당하신 일은 합당했는가?... 잊지 말라. 인간의 악한 의도를 볼 게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사랑하고 끌어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인격에 대한 독특한 정의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는 존재)와 전례가 없는 사랑 개념 (세상의 기원이며 목적이고 숙명)을 기반으로 기독교 신앙은 사상사와 문화 발전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인권 의식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다는 기독교 신앙을 토양으로 성장했다.
시장의 압박과 관행 탓에 효율을 기준으로 삶의 모든 국면을 분석해서 합리화하려는 현대인들의 의지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인간’은 도움을 줄 만한 ‘연줄’이 되었고 고객은 ‘밥줄과 지갑’, 직원은 임무를 수행하는 ‘자원’으로 변했다.
이편이 저편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하는 경제와 달리, 신학은 인간이란 너나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한 점 덜하고 더한 것 없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성경말씀에 따르면, 지혜는 단순히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윤리 기준을 따르는 수준을 넘어, 도덕률이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 인생사의 80퍼센트에 이르는 영역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알려 준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사도행전 15장 28절). 다시 말해,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 고민하고 검토한 끝에, 성령님께 맡기겠다는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성령님은 옆구리를 살짝 찌른다든지 마음에 무슨 힌트 같은 걸 줘서 투자가치가 높은 주식을 짚어 주시는 따위의 마법 같은 방식으로 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생생하고 선명하게 부각시켜서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내적 질서와 자비, 겸손, 담대함, 만족, 용기를 심어 주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요소들이 지혜를 키워서 직업적으로든 인격적으로든 갈수록 더 나은 결정을 내리게 이끌어 간다.
바울 시대의 노예는 인종을 근거로 삼지도 않았고 평생 지속되는 경우도 몹시 드물었다. 오히려 고용계약을 맺고 노예에 버금가는 상태에 있는 노동자 쪽에 가깝다... 노예의 소유주들에게도 일꾼들을 오만하게 다루지 말고 두려움을 품고 대하라고 했다면 오늘날 고용주들은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종들조차 일에서 만족과 의미를 찾아야 마땅하다면 요즘 세상의 직장인들은 어떠하겠는가?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 (에베소서 6장 5절~9절)의 핵심은 영적일 뿐 아니라 심리학적이기도 하다. 사도는 고용주든 고용인이든 의식하는 대상을 바꾸라고 주문한다. 누가 일하는 걸 지켜보는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결국 누구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일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주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존경하며 직접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를 집에 모신다고 상상해 보라. 소문만 듣고도 머리가 조아려지는 터라 그 앞에서는 더더구나 함부로 처신하지 못하며, 그분의 요청과 소원을 모두 채워 드리고 싶어서 안달할 것이다. 일터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기억하는 마음가짐도 그러해야 한다.
바울의 편지에 언급된 종들이 하나같이 크리스천 주인을 섬기고 있다거나, 주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가정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들로서는 수하에 부리는 이들이 “그리스도께 하듯이” 일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종들이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주인은 주로 두려움을 심어 주는 방식에 의존해서 동기를 부여하지 말라는 게 본문의 주문이다.
계급의 차이 따위는 하나님께 눈꼽만큼도 중요치 않으므로, 계급의식이 인간들 사이에 격차를 내서는 안 된다.
크리스천은 인정사정없다는 소릴 들어서는 안 된다. 반듯하고 따뜻하며 이웃에게 헌신적이란 평판을 얻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기꺼이 용서하며 화해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절절하게 느껴져야 한다. 앙갚음하거나 신앙이 깊은 체하거나 악의를 품는 기색이 없어야 한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가 떠맡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나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힘닿는 데까지 남들의 짐을 지고 싶어하는 겁니다”
아울러, 크리스천은 너그럽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크리스천은 또한 난관과 실패 앞에서도 평온하고 침착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는 인격적인 품성을 개발하는 데 복음의 자원을 끌어다 쓰고 있는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성경은 절대로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통화는 오로지 예수님뿐이므로 주님을 보물로 삼아야 진정한 부자이며, 하늘이 무너져도 변치 않는 지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직분뿐이므로 그분을 구세주로 모셔야 참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크리스천은 편협한 종파주의자처럼 비쳐지면 안 된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똑같이 존중하고 대우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과 그 형상을 좇아 지음받은 인간의 존재는 삶 자체가 관계적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는 점점 더 강력한 힘으로 인간관계의 친밀함과 상호 책임성을 말살해 나간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새내기들은 해당 분야나 작업 환경에 광범위한 변화를 주도할 만한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되짚어 보고 고민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 더 큰 권한과 영향력을 가졌을 때 (특히, 새로운 회사를 세우거나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 소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핵심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일을 깊이 생각하고 살피지 않는 한, 이런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가오는 기회를 포착해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늘 준비하고 있으라. 하나님이 언젠가는 문을 열어 주시리라는 소망을 품고 일하라.
CHAPTER 12 새로운 능력으로 일하다! 구원의 확신을 가슴에 새기고 열정을 품고 일하라.
예수님의 부름을 받자마자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나셨던 제자들은 (누가복음 5장 11절), 훗날 다시 생선 만지는 일을 계속했다. 바울 역시, 복음 전도자로 일하면서도 장막 짓는 일을 놓지 않았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세속적인 일’을 그만두거나 열심과 열의를 낮추지 않았다. 영구적으로 바뀐 게 있다면 일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뿐이었다.
주님은 물고기 잡는 일을 하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의도적으로 또 다른 종류의 고기를 잡는 일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그물이 터지도록 물고기를 잡아 올릴 참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질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상황이었던 셈이다.
하나님이 새로운 기회를 주시려고 직접 찾아오셔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일에 휘둘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해태는 흔히 ‘나태’로 번역되는데, 도로시 세이어즈는 올바른 풀이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게으름 (나태라는 단어에 담긴 통상적인 뜻)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학자이기도 했던 작가는 해태란 ‘무엇이 내게 보탬이 될까?’만 생각하는 손익분석에 이끌리는 삶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해태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고, 어디서도 목적을 찾지 못하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죽어야 할 까닭도 없기에 그저 살아 있을 따름인 죄다. 오래 전부터 인류는 이 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몰랐던 게 있다면 그게 윤리적인 죄라는 점뿐일 것이다”
세이어즈는 이어서 해태의 속성을 지닌 (자신의 필요와 안위, 관심을 충족시키려는 열정만을 좇아 사는) 이들은 조금도 게을러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 이런 유형은 쉴 새 없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공허한 심령의 죄’인 해태는 마음의 빗장을 열어서 온갖 죄들이 삶을 이끌어 가게 만든다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현대 문화는 절대반지처럼 작동한다. 특히, 제 잇속만 차리는 인간의 죄스러운 본성을 분출시킨다. 날이면 날마다, 무수히 많은 경로를 통해 옳으니 그르니 말할 자격이 있는 존재는 없다고, 곧 선택권을 가진 자아보다 더 높은 표준이나 권위는 없다고 속삭인다. 저마다 가진 의식과 욕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복종해야 할 대상도 없고, 개인의 행복보다 앞세워야 할 가치 같은 것도 없고, 자유를 희생해서 지켜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열정의 참뜻은 자신의 자유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해 보라).
사실, ‘산 제물’이란 어구는 특별한 의도가 깃든 역설이다. 제물이란 단어 자체가 이미 죽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는 메시지를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섬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리듬을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는 뜻을 그렇게 풀었을 따름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정이다.
로마서는 12장 전체를 할애해서 소상히 설명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산 제물의 실상을 정확하게 짚어 주는 구절이 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로마서 12장 11절).
주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셨으므로 굳이 자신을 입증할 이유가 없다. 목숨을 내놓는 희생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든지 활기차게 살 길이 열렸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종살이에서 풀려난 사건을 재연하는 날로 그려 보이신다. 주님이 인간이라기보다 바로가 만든 벽돌 생산 시스템의 작업 단위 취급을 받던 그분의 백성을 어떻게 건져 내셨는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거룩한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면, 누구든 노예 신세다. 개중에는 자진해서 노예가 되는 이들까지 있다. 안식일을 지키는 습관을 들일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자신의 마음이나 물질주의에 물든 현대 문화, 노동력을 착취하는 조직, 또는 그 모든 것들에 휘둘릴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일종의 해방 선언이다.
사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의 참뜻은 예수님을 찬양하며, 따라 가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쉼을 누리는 이들을 가리킨다. 저마다 제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잊지 말라. 창세기 2장 1절~3절에 따르면, 창조주는 세상을 지으시는 일을 다 마치셨으므로 일에서 손을 떼고 쉬실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그리스도를 통해 끝났으므로 크리스천들은 마음 편히 안식할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 안에서 ‘쉼 이면의 또 다른 쉼’을 누린다. 영혼의 단잠을 자는 셈이다. 심령이 숙면을 이루지 못하면 무얼 해도 만족이 없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어떤 인상을 주고 있는지 고민하기를 집어치우지 않는 한, 남들한테 결코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까지 독창성에 집착하는 이들은 그 누구도 독창적이 될 수 없다... 자신을 버리라. 참다운 자아를 찾을 것이다” C. S. 루이스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보자면, 스스로 어떻게 창조된 존재인지를 돌아보는 성찰이야말로 부르심을 찾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은사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며 창조주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요구를 일삼는 상사와 은사를 활용할 방도가 없는 지루한 일들에 시달린다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하나님이 정확히 알고 계시며 맡겨 주신 일을 충실히 해내는 게 주님을 섬기는 과정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스도, 그리고 주님이 보장해 주시는 미래 세계에 소망을 둔다면, 다시 말해 예수님의 쉬운 멍에를 멘다면, 자유로운 심령으로 일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크고 작음을 떠나 하나님이 일을 통해 주시는 성공과 성취를 있는 그대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로 부르신 이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거대도시에 살면서 시험에 직면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업무를 요구받을 때 하나님이 정하고 보내신 자리에 있다는 확신, 한 마디로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는 건 든든한 자원이 된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을 빌자면,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부르짖지 않으시는 영역은 인간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돌아가셔야 했던 건 인류의 죄 때문이다. 리디머의 신앙과 노동사역은 죄를 더 철저하게 인식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더 깊이 경험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도록 돕고 싶어 한다. 구원받았음에 감사하는 삶이 자기 의에 기대어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인생보다 훨씬 행복하다.
주님이 주신 자질과 재능에 힘입어 남다른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동시에 복음적인 자원을 갖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보다 더 뛰어난 열매를 거두고 빛나는 성적을 올리는 이들도 볼 줄 알아야 한다. 일반 은총에 대한 이해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교회는 교육의 기능만 감당하면 그만이라는 통념에 젖어 있었다. 잘 가르치면 교인들이 나가서 그대로 적용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성인 학습 전문가들은 새로운 사상을 듣고 (준비), 동료들과 토론하며 검토하고 (연결), 시뮬레이션하거나 실제 상황에 적용하지 않으면 (동기 부여)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난 일터와 현장에서 활동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기대어 제각기 자신의 동기를 붙들고 씨름하며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길 바라는 소망을 잃지 않았다. 다들 순전한 마음을 품고 다른 크리스천들이 지식과 행동, 양면에 걸쳐 성장하도록 돕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런 모습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머물게 하신 이 도시의 수많은 시민들 앞에 복음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일과 영성 – 팀 켈러|작성자 박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