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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20년 이상의 도배사 4인이 한 팀을 이뤄 도배작업을 하고 있다. 시공 현장에 따라서 팀원들도 그때그때 달라지고 벽지의 종류와 작업방식에 따라 시공시간도 매번 달라진다. 이날은 175㎡ 방 5개짜리 아파트 시공이 하루종일 진행됐다. |
지난 시절 우리 서민들에게 유일한 인테리어였던 도배! 낡고 오래돼 둘러보면 한숨부터 나오던 옛집도 도배장이의 손길 한 번 거쳐가면 깨끗하고 훤한 새집처럼 변하곤 했다.
건축현장 일 중에서 비가 와도 할 수 있는, 자칭 ‘노가다의 꽃’!
오토바이를 타고 도배하러 가다가 신호 대기 중에 같은 도배사를 만나면 ‘오늘은 어데 바르러 가능교?’ 하는 게 그들만의 인사였다. 세월이 흘러 이젠 오토바이로는 출근이 힘들 만큼 도배 장비가 많아졌지만 출근길 그들의 인사만은 여전하다.
“오늘은 어데 바르러 가능교?”
◆ 캐리어 끌고 다니는 도배사의 출근길
아침 8시, 달성군 다사읍의 신축 아파트 현장. 승합차 문을 열자 풀통이며 사다리, 풀 바르는 기계, 캐리어까지 짐이 한 보따리다.
“아니, 어디 여행 가십니까? 이 캐리어는 뭔데요?”
“장비통입니다, 장비통. 하도 장비가 많아서 웬만한 장비통으론 감당이 안돼요. 끌고 다니면 편하기도 하고….”
경력 24년의 이경수 도배사(53)가 분주하게 짐을 옮기면서 말한다. 도배는 풀하고 벽지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남들은 부푼 마음으로 여행 갈 때나 챙기는 캐리어를 매일 아침 공사현장으로 끌고 출근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 사이 이경수씨의 드림팀이 속속 현장에 도착했다. 등산복 차림의 윤장수씨(46), 군복 바지의 김기학씨(56), 역시 군복무늬 티셔츠를 입은 김철삼씨(56)까지 다들 도배 경력 20년 이상의 강한 내공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도배하는 사람들은 ‘몇 시, 어디까지 모여라’ 하면 현장으로 바로 출근하니까 따로 사무실이 필요 없어요. 주로 거래하는 인테리어 업체나 지물포에서 연락이 오면 현장 규모에 따라서 그때그때 팀이 꾸려집니다. 오늘은 와~ 기술자들만 다 모였네.”
분양하기 전 아파트 도배를 주로 맡아 하는 김철삼씨는 오늘 같은 개인 가정집 도배가 훨씬 까다롭다고 한다. 아파트 한 동을 도배하면 물량은 많아도 구조가 다 똑같은 데다 헌 벽지를 떼어낼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개인 가정집은 한 집 한 집 구조와 현장 상황이 다를뿐더러 방방마다 벽지의 종류도 다르다. 벽지의 재질이 달라지면 풀 농도도 달라져야 한다. 당연히 고급 기술자가 붙어야 하고 일당도 차이가 난다.
◆ 밑작업만 반나절, 4인1조 환상의 팀워크
방 5개짜리 53평 아파트.
집 구조를 파악한 뒤 역할을 나누고 나자 제일 먼저 원래 있던 벽지를 뜯어내기 시작한다. 죽죽, 북북. 거침이 없다.
“스트레스 받았을 때는 벽지 뜯어 재끼는 게 최고라! 옛날 벽지는 뜯을라 카면 쪼가리 쪼가리로 떨어져서 보통 힘든 게 아니었는데, 요새는 벽지가 좋아서 한 쪽씩 고대로 뜯어지잖아요.”
김기학씨가 벽지 뜯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사이, 김철삼씨는 방방마다 돌아다니며 스위치와 콘센트 커버, 천장의 전등을 떼어낸다.
“이걸 다 떼어내고 이 안까지 새 벽지를 발라줘야 마감이 깨끗해지거든요.”
그러고 보니 딴 방에선 윤장수씨가 드레스룸의 옷걸이를 일일이 분해하고 있다. 일단 천장과 벽면에 붙어 있는 것들은 다 떼어내야 완벽한 도배가 가능한 것이다.
“도배 할라면 별 거 별 거 다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편, 이경수씨는 풀 바르는 기계 조립이 한창이다.
“옛날엔 일일이 붓질해서 풀을 발랐는데, 이 기계 나오고 일 참 편해졌습니다.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값이 비싸서 거금 450만원을 투자했는데, 그래도 본전 싹 다 뽑았죠.”
새 도배지를 롤에 끼우고 길이를 입력하면 기계가 알아서 원하는 길이만큼 자동으로 풀칠을 해준다. 이대로 벽에 갖다 붙이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웬걸, 풀 다 바른 도배지를 다시 차곡차곡 접고 있다.
“풀이 겉면에 묻지 않도록 요령있게 접어서 비닐봉지에 한동안 넣어둬야 합니다. 숙성이라고 할까? 그러면 벽지가 녹아서 흐물흐물해지거든요. 이래야 벽지가 마르면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겁니다.”
벽지 하나 바르는 데도 숙성과정이 필요하다니! 도배를 종이에 풀 발라서 갖다 붙이는 정도로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별말 없이도 착착 알아서 움직이며 환상의 팀워크를 자랑하는 그들도 도배 전 밑작업에만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바탕이 옳게 돼야 옳은 도배가 된다는 것이다.
◆ 도배, 그 섬세한 예술의 세계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렸던 미켈란젤로. 그는 4년 동안 천장화를 그린 후 허리는 활처럼 휘어 굽고, 다리는 절뚝거리며, 눈은 물체를 위로 치켜들어야만 보이는 엄청난 후유증을 앓았다고 한다. 물론 그림과 도배는 다른 문제긴 해도 천장에 벽지를 붙이는 일 역시 만만찮아 보였다. 이런 일을 20년 넘게 해온 그들은 어떨까.
“처음엔 다음 날 아침에 고개를 들지도 못했어요. 목이 아파서. 그런데 한 20년 하다 보니까 그것도 만성이 되는지 하루 종일 쳐다봐도 목이 안 아파요. 오히려 벽면 바르는 게 더 어렵습니다. 천장은 첫 폭만 잘 맞추면 쉽게 나가는데, 벽은 무늬를 맞춰야 하니까” 차라리 무늬가 크고 선명한 것은 맞추기라도 쉽다. 엠보싱 처리가 되어있는 단색 벽지는 얼핏 봐선 무늬가 잘 안 보이니까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다.
어디 그뿐일까.
“이음새 처리한 걸 보면 도배사 실력이 딱 보이죠. 일반 싼 벽지는 이음새를 1㎝ 정도 덮어서 바르잖아요? 요새는 겹치는 거 없이 정확하게 맞물리거든요. 자칫 틈새가 벌어지지 않도록 바르는 게 기술력이죠.”
게다가 벽면 바탕이 거칠고 울퉁불퉁할 때는 벽면을 바로잡기 위해 먼저 부직포 시공을 하기도 한다. 부직포로 거친 면을 감싸 바르고 그 위에 벽지를 발라야 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부직포를 벽면과 살짝 띄워줘야 벽의 자잘한 모래 알갱이나 거친 면이 벽지에 드러나지 않는다.
벽지가 울어도 안되고, 무늬가 안 맞아도 안되고, 벽면이 울퉁불퉁 해도 안되고 벽지 가장자리가 일어나도 안되고… 안되는 것이 왜 이리 많은지. 게다가 도배지의 종류에 따라 풀의 농도가 달라질 뿐 아니라 접착제의 종류도 달라진다. 벽지를 문지를 때 쓰는 헤나마저 벽지에 따라 두께가 달라진다니, 도배사의 설명을 듣다 보면 ‘에이, 도배 못해먹겠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여행용 캐리어를 장비통으로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이 어찌나 자연스럽게 이뤄지는지 그들은 그냥 ‘슥슥’ 바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오후 6시가 다 돼서야 오늘의 도배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일하면 도배사의 일당은 최대 17만원. 깨끗하게 변한 집 풍경을 휘 둘러볼 때 느끼는 보람은 덤이라고 했다.
집에 오니 문득, 우리 집 벽지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글=이은임 방송작가 sophia9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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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깨끗하게 하려면 도배 전에 천장과 벽면에 붙은 전등과 스위치, 콘센트를 다 떼어내야 한다. 그 안까지 도배지를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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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풀 바르는 기계가 도입되면서 도배사의 작업속도가 한결 빨라졌다. 도배지를 롤째 기계 봉에 끼우고 길이를 입력하면 기계가 자동으로 풀을 바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