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으로 나타난 구댐 그리고 그뒤에 신댐의모습
운암댐(구댐의 모습)
구댐의 운암시우담비(雲岩時雨潭碑)
취수구(이 수로로 칠보발전소와 연결된다)
예전에 기차길을 놓아 자제를 싫어 날렀던 기차 터널
섬진강 옥정호에는 두개의 댐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댐이라고 불리는 운암댐과 그리고 신댐이라고 불리는 섬진강다목적댐이지요. 정읍 산내와 임실군에 수몰민의 아픔을 있게 만든 댐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 두댐에 대해 이야기를 할려합니다. 신댐은 많은 분들이 자주 보시는 지금에 댐입니다. 많은 저수량으로 댐의 15개수문을 열고 방류하는걸 보면 참 장관 아닐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댐 운암댐이라고 불리는 구댐 정말 그모습을 보기가 힘이 듭니다 신댐이 축조되고 나서 옥정호 밑에 저수량이 올라가서 거의 그모습을 보여주지 않죠 가끔 갈수기때 기념비인 운암사우담비만을 보여줄뿐입니다. 요즘에 무척심한 가뭄인가봅니다. 산내에 구댐이 그모습을 서서히 들어낼정도이니 말이죠.
구댐은 동진강유역에 안정적인 수리시설의 필요를 느낀 조선총독부는 1917년 판전(坂田)과 지전(池田)을 동진평야에 파견해 현지조사를 시시했습니다. 같은해6월에 다시 일본인 판출기사와 전라북도지사를 비롯한 정읍군수들이 현지조사 끝으로 동진강의 상류에 저수지를 축조하려 했으나 그수량이 적어 (5~6억 入方) 1만4천여 정보를 관개(灌槪)하기가 어려운 실정이 었습니다. 그리하여 항공조사를 실시한 결과 동진평야와 전혀 유역을 달리하는 섬진강의 수원을 동진평야로 돌릴수 있는다는 가능성을 발견해 냈습니다. 섬진강은 진안군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81Km지점에서 순창군의 추령천과 합류됩니다. 이합류지점의 4Km 하류지점인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 배소와 산내면 종성리 황토리 사이에 하상고(河床高)지점에 25.7m 높이의 둑을 막는다는것이었습니다. 이당시 동진평야에는 1천 정보 이상의 대지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 남조선수력전기주식회사를 비롯한 5개회사 5명의 일본인 지주가 있었으며 한국인 중소지주가 다수 있었지만 일본인 지주들이 주촉이 되어 수리조합을 창설키로 합의가 되어 1919년 12월 일본인들은 현지 실사조사에 착수 하였습니다. 수몰예상지구인 임실군 운암면 주민들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으며 실제로 주동자 10명이 구속되는 사태에 이르렀으나 설득하여 무마되고 말았습니다.
수리조합 추진위원회는 산내면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1920년2월 토목기술의 권위자인 일본인 공학박사를 기토장(技土長)으로 초빙하여 조사측량을 완료하였으나 일부 대지주의 부담에 대한 이견이 달라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동진평야는 자연에 의지하는 원시농업이어서 해마다 한해와 홍수의 천재를 되풀이 하였는데 1924년 대한발은 호남평야를 황무지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인 지주들은 다시 회합을 갖고 수리시설을 위한 수리조함 설립운동을 폈습니다. 그리하여 1925년 5월 동양척식회사 이리지점장을 위원장으로 한 창립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러 운암제 공사를 1925년 11월1일 기공하여 1927년 준공하게 되었습니다.
신댐은 건설동기는 농업용수의 관계보다는 발전에 있었습니다. 운암제의 수원은 남조선수력전기주식회의 운암발전소의 발전용수인 동시에 동진토지개량조합의 농용수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전과 동진수조간에 용수계약을 맺어 있어 남전측은 동진수조에 용수대금을 지불하며 또한 용수시기도 제한을 받지 않을수 없었는데 1938~1939년까지 극심한 가뭄으로 일시 발전을 중단하게 되어 1939년 10월26일에는 발전 제한수위가 40척2촌에서 53척3촌으로 높이가 제한하게되자 남전측은 독자적으로 하류에 신댐을 계획하게 된것입니다. 1941년12월15일 남전과 동진수조간에 협정서가 이루어지고 다음 1942년부터 공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운암제에서 2.4Km하류지점에 높이 64m의 제언을 막는 공사였는데 2차세계대전으로 1994년9월에 공사는 중단되고 8.15광복을 맞게되었습니다. 1948년8월에 재착공 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공사는 중단되고 19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거 건설부주관으로 1961년8월에 섬진댐은 3차로 재 착공되어 1965년 12월20일 착공 25년만에 준공하게 되었습니다.
발전소로는 운암발전소와 칠보발전소 두곳이 있는데 운암발전소(정읍시 산외면 종산리)는 1931년10월에 준공되어 발전을 하다가 1982년12월 도수로인 압력터널이 붕괴되는등 노후화로 54년동안 542,349kw의 발전을 하고 1925년 2월1일부로 폐쇄되었습니다. 칠보발전소(칠보면 시산리행단)는 산내면 능교리 용암마을 취수구를 두고 발전소까지 직경3.4 길이 6.215m의 도수터널을 해발 60m지점에 뚫었으며 1945년4월에 준공되어 지금까지 청정에너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지만 섬진강의 댐은 수몰민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섬진댐공사로 인한 수몰민의 이주 대책은 댐공사 준공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것이 원칙이지만 섬진댐만은 예외 였습니다.
완공 당시 수몰민은 2천7백86세대 정부는 이 가운데 생계형편이 여의치 않은 2천3백59세대에 대한 이주를 댐완공 이전에 추진하였습니다. 정부는 1968년까지 이들 주민들을 계화도 간척지와 동진 폐유지 반월 폐염전등에 개답공사를 완료하고 집단 이주시키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수몰 패해민들의 이주가 채 이뤄지기도 전에 댐광사가 착공되고 당시 집단 이주 예정 지였던 계화도 등은 댐이 완공된 후 10년에서 15년 지난 뒤에서야 완공이 되고 결국 오갈데 없는 수몰민들은 호구지책으로 농지분배증서를 헐값에 처분하고 댐주변으로 되돌아와 생계를 일구기 다반사 였습니다. 미처 이주하지못한 대부분 수몰민들은 여름 장마철의 급격히 불어난 수위에 밀려 이삿짐을 옮길 겨를도 없이 생필품만을 챙겨 홍수위선위 산중턱에 국유지에 토담을 짖고 거처를 마련하고 정부가 약속한 계화도 간척사업 완공시기인 1968년만 기다리며 산지를 개간해 조와 수수 감자 고구마등으로 호구 하면서 간척공사가 완공되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1968년 되던해 계화도 간척공사는 중단되버렸고 농경지가 됐어야할 땅 대신 바닷물만 출렁거리는 망망대해가 수몰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주계획이던 수몰민 1천9백52세대 가운데 이주를 통해서 정착한 사람은 고작 3백12세대에 불과 했습니다. 댐이 완공된지 15년이나 흘러 버린 1980년에 대답공사가 완료됐으니 웃지 못할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와중에 수몰민들은 피해보상금으로 받았던 보상금을 생활비로 탕진하고 가구당 1ha이상 이주대책으로 발급됐던 농지분배증을 고작 쌀 2~5가마에도 공공연히 매매가 이루어졌습니다. 계화도 간척공사가 완공돼 계화간척지 농지 분배증 소지자 신고를 받아본 결과 80%가 전매자로 드러난것을 보면 정부의 허술한 이주정책이 얼마나 엉뚱한 결과를 초래 했는지 짐작할수 있을것입니다.
지금도 옥정호의 맑은 호수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고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속에는 수몰민의 아픔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 땅에서 다시는 이런 아픔이 일어 나지 않기를......
-펌글- |
첫댓글 왠지 가슴 찡하네요~~
잘읽었습니다
구경 잘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