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꿈꾸는 고장, 파주를 찾아서/전성훈
2018년 마지막 문화탐방 인문학 기행은 경기도 파주다. 파주로 가는 아침, 집을 나서자 짙은 안개가 동네를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깊어가는 가을을 맞이하는 철없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아름답게 단풍이 물들어 뭇사람의 가슴을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뜨렸던 가로수의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먼저 떨어진 은행잎들은 사람들의 발에 무참히 밟혀 추하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 은행잎들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찡하고 울컥했다.
파주하면 떠오르는 역사 유적지나 문화재 등은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유적지나 문화재 대신 파주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조선왕조 선조 시대 사람들이다. 첫 번째는 선조 임금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의 부끄럽고 창피한 피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수행원도 별로 없이 초라한 행색으로 임진나루터를 건넜다는 선조 임금의 모습을 그려본다. 임진강을 건너 장단을 지나 저 멀리 의주까지 피난 간 선조 임금, 좋게 말해서 피난이요 몽진(蒙塵)이지 사실은 백성을 내팽개친 도피 행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율곡 이이 선생이다. 일찍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며 국가의 백년대계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선비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선생. 나이 50도 안 되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이 선생은 임진왜란 화를 피했다. 율곡 선생이 오래 생존해서 국란을 담당하는 지도자 역할을 했다면 백성들의 고초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세 번째는 조선 선비 사회 풍류객 백호 임제이다. 선조 임금 시절 임지인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파주 바로 위 판문점에 있는 조선 제일의 명기라 불렸던 황진이 묘소를 찾았던 기인 임제. 후세 사람으로 죽은 기생의 묘소를 찾은 그의 특이한 행동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야인 신분으로 황진이 묘소를 찾았다면 기이하지만 멋있는 사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공직자 신분으로 임지에 부임하는 도중에 기생의 묘지를 찾았던 행동은 공직자의 임무를 망각한 행위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틀림없이 요즘 유행하는 국민청원 대상이 되었을 것 같다.
통일대교 밑으로 임진강이 흐른다. 임진강은 함경도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북한지역을 흐르고 흘러 이곳을 지나 교하를 거쳐 서해로 나아간다. 통일대교를 지나면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작동되지 않는다. 분단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통일대교를 건너 민통선으로 들어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있다. 통일대교 검문소에서 신분 확인을 위해 비무장 헌병이 버스에 승차하여 사전에 신청한 자료를 근거로 신분증과 얼굴을 대조한다. 검색은 까다롭지 않고 간단하게 끝났다. 남북관계 진전으로 요즈음은 검색이 예전에 비하여 무척 수월해졌다고 파주 문화해설사가 귀뜸해주었다. 처음 들어가 보는 문산 파주지역 민통선은 안개가 끼어 차창 밖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없어 유감이었다. 비가 내려 탐방순서를 변경하여 한국동란으로 인한 민족의 비극의 현장인 도라산역과 도라산 전망대를 먼저 찾았다. 도라산역은 남북 합의로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시작된 경의선 복원사업으로 남쪽의 최북단에 신설된 철도역이다. 도라산역 안에는 우리나라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의 파안대소하는 모습의 사진과 남북정상과 부인들이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 여러 장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된 사진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끓어올랐다. 도라산 전망대에서 망원경을 통해서 보는 북한지역도 안개로 인하여 선명하게 볼 수 없었다. 외국인 일행이 신기한 듯이 망원을 통해서 북측지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북한지역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도라산 전망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제3땅굴 현장을 방문했다. 땅굴에 들어가면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옛날 군대생활을 철책선에서 하였고 강원도 철원의 제2땅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 개인 오후에는 걷기가 수월하여 덕진산성과 동의보감의 저자 허균 선생의 묘 그리고 율곡 이이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덕진산성(德津山城)은 민통선 안에 있어서 최근까지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곳으로 고구려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알려진 곳이다. 야트막한 야산(해발 86m)이지만 주변에는 산이 없고 임진강과 넓은 평지뿐이다. 덕진산성에서 임진강의 유일한 섬 ‘초평도’를 볼 수 있다. DMZ안에 고요히 앉아 있는 섬, 초평도, 서해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 작용으로 이곳의 강물은 흙탕물처럼 시커멓다. 겨울철에는 바닷물 영향으로 강물이 제대로 얼지 못하고 유빙이 둥둥 떠돌아다닌다고 한다.
도라산역에서 남북정상의 사진을 보며 불편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남북의 통일,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통일을 염원한다. 하지만 통일에 대한 생각과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순진한 마음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통일은 대박이다’, ‘통일만이 살길이다’고 선동하며 합리적 사고를 토대로 하지 않고 정략적으로 국민의 시선을 감성적으로 끌어들이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일부 어떤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우리 국민은 ‘북한의 의한, 북한식의 통일’은 바라지 않는다. 통일은 최소한 남한의 자유민주체재와 시장경제를 인정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남북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지내려면 안전정치가 필요하다.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한 전쟁억제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한반도의 통일을 지향하는 방식과 절차에 대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충분한 국민적 검토와 합의를 거쳐야 한다. 아울러 반드시 국제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야하는 게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이다.
“ 어리석은 자는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라고 피천득 선생은 말했다. 겨울의 문턱인 입동, 가을은 속절없이 깊어간다. 수많은 새들과 야생동물과 야생화의 천국, 70년 가까이 인간의 발길을 거부한 비무장지대, DMZ는 분단의 비극 덕분에 인간의 발길이 끈긴 지구상 유일한 천연환경 보고이자 비극적인 분단 역사의 아이러니한 선물이다. 조금은 비감한 느낌 속에 가을비를 맞으며 걸었던 미래를 향해 꿈꾸는 파주 지역 민통선 인문학 기행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값진 여정이었다. (2018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