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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의미와 찬양사역자의 자세
1. 개 요
음악으로 표현되는 찬양은 세상의 음악과 같이 선율, 화성, 리듬이란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양자가 확실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것은, 찬양은 그것을 받으시는 확실한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선율, 화성, 리듬은 찬양의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본질은 바로 말씀이다. 그러므로 찬양은 본질적인 것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상식적인 것이지만 의외로 찬양사역자에게 크게 부족한 개념인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본고는 찬양의 성서적 의미를 고찰함과 아울러 음악이 영적 원수가 영혼을 지배하는 큰 무기로 사용되고 있음을 짚어보고, 올바른 찬양 지식 위에 찬양사역자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 찬양의 성서적 의미
1) 찬양의 대상
세상 음악은 눈에 보이는 사람, 즉 자신이나 타인을 위해 존재하고 연주되는 것이지만, 찬양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을 분명히 듣고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분만을 위해 존재하고 연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찬송은 사람들의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1) 이것은 찬양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비록 교회에서 연주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이 간과되는 한 그것은 더 이상 찬양일 수 없다.
찬양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행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세레나데를 부르고 운동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팀을 위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세상만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찬양할 수 없다. 사람들은 즐거울 때 노래하고 기쁠 때 소리를 지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크리스천은 오히려 핍박 받을 때 그리고 세상에서 괴로울 때 더 찬양할 수 있다. 이는 그 순간이 영원한 것이 아니며 자기의 삶이 하나님의 손 위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고, 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움직이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고 오직 그분만을 높이는 행위가 찬양이다.
2) 찬양과 성도의 의무
하나님은 인간 창조의 목적에 대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사 43:21)’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목적에 대해서도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고 말씀하셨다. 찬양은 성도의 취미생활이나 성가대의 전유물이 아니며, 단순히 예배 순서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라고 말한다(시 33:1).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찬양의 대상이시고,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함이 본분인 것이다.2)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찬양을 명령하셨다(시 150:1).3) 찬양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 23)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찬송이 없는 삶은 자신의 직무를 잃어버린 불순종하는 삶이다.
3) 찬양과 하나님의 처소
찬양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을 만든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치유가 있고 이적이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심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죄수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크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했다. 그때 나타난 이적은 찬양의 결과가 어떤지 우리로 잘 알게 해준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6). 모압과 암몬이 쳐들어왔을 때 그 큰 군대 앞에서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택한 방법은 찬송하며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대하 20장).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찬양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믿음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찬양은 하나님의 처소를 만들며, 하나님의 임재는 이적을 경험하게 한다. 즉 찬양은 어떠한 환경이든지 자신의 환경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방법이 되며, 하나님께서 그 환경에 임재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것으로 변하게 하시는 것이다.4)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영혼이 잘 되는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찬송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며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있기에 범사가 잘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된다. 시편 67편 5-7절에는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때 땅이 그 소산을 내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찬양과 영적인 무기
찬양은 원수를 대적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사울이 악신에 의해 괴롭힘을 당할 때, 다윗의 찬양으로 악신이 떠나고 상쾌하게 나았다(삼상 16:23). 찬양하는 자였던 다윗이 위대한 용사였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한 손엔 수금을, 다른 한 손엔 병기를 잡고 있었던 다윗은 전쟁의 승패가 칼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칼보다 찬양을 더 위력 있는 무기로 여겼다. 그 다윗을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다(행 13:22).
찬양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능이다.5) 예수는 ‘권능’과 ‘찬미’를 동일한 의미로 연결하여 말씀하셨다. 즉 시편 8편 2절에는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라고 하였고, 마태복음 21장 16절에는 ‘어린 아기와 젖먹이의 입으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적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시편 149편 9절에는 “성도들이 영광중에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praise)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들은 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도의 입술에 찬양이 있을 때 그 수중에는 원수를 물리칠 수 있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복하여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는 우리를 피할 것(약 4:7)이라고 기록된 말씀처럼 어떠한 환경에서든 찬양은 마귀를 대적하는 큰 무기가 되며 그 무기를 보는 순간 마귀는 물러갈 것이다.
결국 찬양은 우리에게 주어진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다. 이 일에 관해 사도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 찬양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에 대한 축하를 누리게 해 준다. 전쟁은 이미 하나님이 승리하셨고, 우리의 찬양은 이미 이겨놓은 승리의 축하 속에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6)
5) 찬양과 말씀의 도구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노래를 지어 하나님을 위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신 31:19-22). 그 노래가 이스라엘 자손 앞에 ‘증인처럼 될 것’이라고 하셨다. 증인이란 본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인데 노래가 증인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은 모세의 의견이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임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찬양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곡조를 붙여서 외우는 것이 더 쉽게 암기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성경교육에 있어서 찬양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찬양은 음악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음악은 찬양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음악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그 음악에 담겨진 진정한 믿음의 고백을 듣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찬양은 곡보다 가사가 훨씬 중요하며, 아무리 곡이 훌륭하더라도 가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았거나 어긋난다면 이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올바른 찬송의 정의는 곡과 가사를 잘 익힌 후에 그 가사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자기의 신앙을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7)
6) 찬양과 경배의 방법
찬양은 소리로 표현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성경에 200회 이상 사용된 ‘찬양’이란 말은 약 12개의 상이한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관련되어 있다. 이중 ‘할랄’이란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99번이나 사용됨으로써 찬양의 뜻으로는 가장 많이 쓰인 것으로, ‘칭찬하다, 자랑하다, 축하하다’ 등의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을 뜻하는 ‘야’와 함께 찬양을 뜻하는 핵심 단어가 되었다.8)
또 ‘야다’는 찬양으로 번역된 것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이 쓰인 것으로 ‘두 손을 들어 경배하다, 두 손을 치켜 올리다, 하나님께 감사하다’라는 의미다. 시편에는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시 63:4)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2)라고 기록함으로 손을 드는 행위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찬양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 중 ‘바락’은 ‘무릎을 꿇다, 송축하다, 경의를 표하다’란 의미이며, 성경에 50회 이상 사용된 ‘테힐라’는 ‘할랄’에서 파생된 것으로 ‘노래하다, 칭찬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고, 특히 노래하는 것을 수반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주로 시편에서만 사용된 ‘자마르’는 ‘악기의 줄을 퉁기다, 노래하다, 찬양하다’의 뜻으로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토다’는 ‘감사, 감사예물을 드리기 위해 손을 내밀다’는 뜻이며, 시편 50편 23절에서 볼 수 있듯 아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해 믿음으로 드려지는 감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샤바흐’는 ‘외치다, 큰 소리로 말하다, 칭찬하다’라는 뜻으로 성경에 ‘찬양’으로 번역되었으며 이 밖에 ‘손뼉치다’라는 뜻의 ‘마하’, ‘춤’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마홀,’ ‘메홀라,’ ‘카라르’, 또 ‘기뻐 뛰다’는 의미의 ‘알라즈’ 등이 성경에 ‘찬양’을 의미하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찬양’은 음악으로만 표현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목소리, 악기, 박수 등과 같은 청각적인 것,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것, 손을 드는 것, 춤과 같은 시각적인 것 등 다양하게 능동적 개방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즉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9)
3. 영적 음악의 역기능
1) 영적인 음악
흔히 사람들은 음악을 ‘영적 음악, 인격적 음악, 육체적 음악’으로 나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하건대 모든 음악은 영적이다. 음악은 사람의 의지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 음악의 메시지와 내용들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 이는 음악이 영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10)
수학자요 자연 과학자요 또한 음악가였던 피타고라스는 음악을 리듬, 선율, 화성의 세 요소로 분리하고 리듬은 육신에, 선율은 감정과 정신에, 화성은 영적인 것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또한 세상 음악을 위해 살다가 결국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영적인 것이다. 누구든지 음악으로 사람을 마취시킬 수 있다. 음악이 사람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까지 이르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주입시킬 수 있다. 즉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어 약하게 한 다음 그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설교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들은 이 힘에 반응하게 된다.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다. 이것이 ‘음악의 힘’이다. 그리고 이 음악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이용하고 있는 것이 원수 마귀다.11)
2) 음악과 원수 마귀
마귀는 타락하기 이전에 찬양을 담당했던 천사였다(겔 28:13, 사 14:11).
그는 하늘에서 음악의 대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을 담당하던 천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에서 눈을 돌려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총명에 초점을 맞추면서 교만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 자신이 경배받기를 탐하기 시작했다. 이에 하늘에서 쫓겨난 마귀는 이 세상에서 세속 음악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과 이간시키고 하나님 대신 자신을 경배하도록 속이고 있는 것이다.12)
음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귀는 이 음악의 힘을 이용하여 대중문화를 통해 자신의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으며 많은 젊은 영혼들을 지배하고 있다. 또한 교회 내에서도 묘하게 변질된 찬양을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기회를 막고 있으며 자신도 모르는 새 자아도취에 빠져 찬양의 참된 의미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하나님이 없는 음악을 하는 자들에 대해 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찌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 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욥 21:12-15). 그것이 어떤 장르이건 하나님이 없는 음악은 원수에게 속한 것이며 원수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원수는 음악을 통해 자기의 원하는 바를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어 주고 그것이 그 사람의 생각인양 착각하게 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세상 음악을 완전히 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다.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세상 음악은 우리 귀에 계속 들려올 것이다. 그래서 찬양과 찬양사역자가 중요하다. 영적으로 분별하고 합당한 찬양을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4. 바람직한 찬양 사역자
찬양은 인도자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고 어떤 곡을 하든지 그 날 찬양의 성공 여부가 찬양 인도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때 불리는 찬양이 어떤 장르인가보다 찬양 인도자가 바른 신앙을 갖고 올바른 찬양을 하는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을 찬송함에 있어서 음악적인 완성도보다 찬송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 선택된 레위인에게 찬양을 맡겼던 것도 찬양으로 사역하는 자들이 깊이 유념해야 할 바다. 가사를 쓰는 사람, 작곡 편곡을 하는 사람, 악기로 반주를 하는 사람, 지휘를 하는 사람, 목소리로 찬양하는 사람 등 찬양 사역자가 많으나 여기서는 특히 찬양 인도자를 중심으로 말하고자 한다.
1) 거룩하고 영적인 자
찬양 인도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난 개인적 체험이 있어야 하며 침례를 받은 자라야 한다. 찬양은 그 자체가 예배요 생명과 능력이며 목적이다. 찬양 인도자는 회중을 이러한 찬양 가운데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깊은 사정은 하나님의 영만이 아시기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찬양 인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 물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자여야 한다. 또한 찬양 인도자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겸손한 자라야 한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며, 자기를 높이려 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시고 드러나시도록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라야 능력 있는 찬양 인도자가 될 수 있다.
찬양사역은 성령사역이다. 찬양의 겉모습은 음악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비중이 영적인 면이다.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10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찬양사역자는 늘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그 생활이 기도와 말씀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속적인 성경 공부와 집중적인 기도 훈련이 필요하다.13) 무화과 나무가 감람열매를 맺을 수 없고, 포도 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다(약 3:12)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것이 마땅치 않다(약 3:10)고도 하셨다. 생활이 거룩한 자에게서 거룩하고 영적인 음악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2) 음악적 재능과 찬양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는 자
찬양의 음악적 비중이 적다해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 없다.14) 찬양사역자는 사역에 적절한 음악적 교육이 되어 있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최고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릴 의무가 있다. 찬양사역자는 찬양사역을 위한 훈련에 늘 성실하게 임해야 할 것이며 더 좋은 것으로 드릴 수 있도록 자신을 발전시키는 일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 찬양은 받으시는 확실한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이 바뀐다면 그것은 절대로 찬양이 될 수 없다. 가사와 곡조가 다 거룩한 것이라 해도 그때만큼은 더 이상 찬양이 아닌 것이다. 찬양 인도자는 이 대상을 가장 확실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때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는 결코 자신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나타내는 곳이 아니며, 찬양 사역자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펼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의 신앙까지 파괴하도록 원수에게 사용되어지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너의 찬송을 부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나의 찬송을 부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사 43:21).15)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 이는 하나님 위에 자신이 올라가는 결과가 되는 셈이다. 교회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연주회 장소가 아니다.
또한 찬양 인도자가 자기의 취향에 맞는 장르나 음색 등을 고집한다면 그것도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찬송’이 아니라 ‘자신의 찬송’일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씀하셨듯 자신의 찬송으로 사역하는 찬양 인도자는 이와 같은 결과를 얻게 된다. 선생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약 3:1)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3)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
찬양사역자는 교회와 예배에 있어서 찬양과 찬양자의 위치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찬양의 핵심은 음악에 있지 않고 말씀에 있다. 음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대한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배에 있어서 말씀선포를 제치고 찬양이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열정보다 음악 자체에 대한 열정이 앞서도 안 된다. 찬양을 통해 회중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옥토가 되게 하는 것 또한 찬양의 큰 역할이다.
그래서 겸손함은 찬양 인도자에게 참으로 중요한 덕목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뿐 아니라 목회자 앞에서, 또한 회중 앞에서의 겸손함은 찬양 인도자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찬양사역자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내가 제일 잘 한다,’ 그리고 ‘내가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헤만은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무엘의 손자였지만 다윗이 그를 정치적으로 권력이 없는 찬양하는 자로 임명했을 때 겸손하게 순종했고, 끝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때로 아삽이 그보다 더 먼저 언급되기도 했으나 불만을 갖지 않았고 찬양하는 자로서 그 직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겸손한 찬양 사역자였다. 모든 찬양 사역자는 이 모습을 멘토로 가져야 한다.
4) 영적 분별력이 있으나 편견은 없는 자
찬양 사역자는 선곡에 있어서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편견이 없어야 한다. 선곡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사’16)다. 먼저 찬양의 가사가 과연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그 가사가 과연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는지도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17) 그 다음 중요한 것은 선율이다. 선율은 가사를 실어 나르는 수레와 같다.18) 선율이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혹은 음울하여 쓰인 가사로 찬양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을 막는다면 그것은 적당하지 않은 찬양이다. 또한 지나치게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화성과 리듬은 회중으로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그것 역시 적당하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천편일률적으로 단순한 찬양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새 노래로 찬양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굳어진 마음으로 인해 자신의 경험만을 고집하는 것도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의 양식은 계속 변하고 발전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구조가 발전하기 때문이다. 개신교에서 부르는 찬송의 대부분은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불리던 찬송들이다. 20세기에 들어서 팝 음악에 영향을 받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찬송을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찬양이 경박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 찬양에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 어렵다. 반대로 많은 젊은 세대는 그들의 음악 경험과 동떨어진 19세기 음악으로 감동 받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찬양이 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수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성경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양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당시 부르던 찬송이 대부분 너무 느리고 형식적이어서 밝고 힘차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나 작사에만 재능이 있었을 뿐 작곡을 하진 못했다. 그는 6500여의 찬송시를 작사했고 그중 16곡이 우리나라 찬송에 들어있다. 그런데 그 많은 찬송시에 붙일 곡이 없어 찰스 웨슬리는 당시 널리 불리던 민요나 가요까지 사용했다. 세상에서 사용되던 음악이 찬양사역자의 손에 의해 사람들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찬양으로 사용되어졌다는 사실은 음악 장르 때문에 새로운 찬양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많은 아쉬움이 있다. 하나님을 높이는 메시지에 맞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곡이 수반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음악의 장르는 어느 하나로 고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5. 결 론
원수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중심적인 찬양보다 음악의 아름다움과 분위기에 취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여야 한다. 찬양의 핵심은 음악에 있지 않고 말씀에 있다. 음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대한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찬양은 오직 그 분만을 높이는 행위다. 그럴 때 치유가 있고 이적이 나타나며 원수를 대적하는 강력한 무기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모든 음악은 영적이다. 음악은 잠재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 음악의 메시지와 내용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 음악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들은 이 힘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마귀는 음악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이 음악의 힘을 이용하여 교회 내에서까지 영혼들을 지배하려 한다. 하나님이 없는 음악은 원수에게 속한 것이며 원수의 무기가 된다. 그래서 찬양 인도자가 바른 신앙을 갖고 올바른 찬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찬송함에 있어서 음악적인 완성도보다 찬송하는 사람의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다.
찬양사역은 성령사역이다. 찬양의 겉모습은 음악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비중이 영적인 면이다. 그러므로 찬양인도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난 개인적 체험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과 교회 앞에 한없이 겸손한 자라야 한다. 늘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활이 기도와 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 생활이 거룩한 자에게서 거룩하고 영적인 음악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음악은 사람의 영을 살리는 음악이다. 오순절 운동의 쇠퇴원인 중 하나가 기도와 말씀을 초월한 과도한 복음성가의 사용이었다는 사실을 주지하자. 이는 복음성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의 문제였다. 오늘날 역시 교회의 찬양이 진리의 말씀에 의한 영적 회복을 통해 온전해지며 부흥될 필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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