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훑는다. 우수수 낙엽도 떨어진다. 우울한 건가? 아니면 가을 운치가 너무 아름다워 차라리 고독을 즐기는 것인가? 청아하게 맑고 푸르른 가을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다. 이 가을, 추억 한 자락을 새기고 싶다. 주섬주섬 봇짐을 챙겨 든다. 백양사의 애기 단풍을 보러 가야지. 전남 장성의 대표적인 명소 백양사. 애기 단풍이 온 산을 홍엽으로 물들일 때, 이곳을 들러 본 적이 있는가? 인근의 내장사만큼 진입로의 단풍숲이 길진 않지만 자생하는 단풍나무가 많다. 수령 오래된 단풍나무는 해마다 이맘때면 형형색색으로 이파리를 물들인다.
난전, 인파가 줄줄한 북두교를 잇는 도로
늘 차로 휑하니 달려가 버리고 마는 백양사. 그곳을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서기 위해서 배낭을 메고 한걸음 발길을 옮겨본다. 여행객들이 주로 차로 스쳐 지나가버리고 마는, 북하면 소재지 버스 정류장이 트레킹 시작점이다. 차가 다니는 아스팔트 도로는 경사도가 없어 가파름은 전혀 없다. 거기에 개울 건너에 있는 식당촌의 어수선함을 느끼지 않아도 좋은 길이라는 것.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광호텔을 지나면서는 차량 통행은 일방 길로 바뀌게 된다. 가을 행락철 빼고는 걷는 사람은 드물다. 차를 세우는 사람은 없으니 스쳐 지나치고 마는 길인 게다. 그래도 여름철에는 수량이 불어난 개울물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을 것이다. 초가을에는 꽃무릇 향연이 펼쳐지고, 지금은 단풍이 들어 만추의 여정을 한껏 자아내고 있다. 가을뿐이겠는가? 겨울철 가로수에는 아름다운 설화가 피었을 때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릿하게 한걸음 다가서는 길에서는 등산의 힘겨움보다는 고즈넉한 길목의 한적함에 폭 빠져들게 한다. 이내 북두교를 만나고 다시 번잡한 속세로 들어서 듯, 길은 합류점이 된다. 넓은 아스팔트 길 옆으로 수령 오래된 단풍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준다. 매표소부터는 일반 여행객들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야 한다. 여행객이나 등산객들이 한데 어우러져 느린 걸음으로 백양사 일주문을 향해 들어간다. 일주문의 ‘백암산 고불총림 백양사’라는 현판을 바라본다. 일주문을 지나면 번잡한 속가를 벗어나 불교 세계로 발길을 옮기는 것. 정말 그렇다면 뜨거울 대로 뜨거워진 머리는 식혀질 것이다.
백양사 연못과 쌍계루 물밑까지 단풍색이 잠겨
길 왼편으로 길게 개울이 이어지고 우측에는 울창한 숲이다. 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153호) 군락지다. 빽빽한 숲은 한낮에도 어둠침침할 정도. 무념무상 천천히 걷는다. 백양사 박물관에서야 백암산(741m)이 모습을 보여준다. 큰 돌에는 ‘조선8경 국립공원, 백암산 백양사’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그렇다. 백암산은 조선시대부터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했다. 노령산맥이 남서쪽으로 뻗다가 호남평야에서 솟아오른 백암산은 국립공원내장산 남부에 속한다. 산봉우리 부근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이 넓게 펼쳐지고 주변은 단풍으로 뒤덮여 있다. 절로 탄성이 쏟아지는 비경이다. 이 가을 풍경을 놓친 사람들은 얼마나 후회할까? 사진가들은 연못 주변에 모여 사진 찍기에 여념 없다. 자리를 비껴 단풍숲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른 아침인데도 좌판은 부산스럽다. 헛개나무 열매차를 주전자에 끓여내는 사람, 긴 가래떡에 참기름 발라 구워내는 사람, 뜨끈한 국물이 속을 개운하게 해주는 어묵탕 등등. 아름다운 풍치에 반하고 사람들의 몸짓에서 생동감을 얻는다. 일광정이라는 정자를 지나면 왼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다. 또 다른 색깔의 백암산이 펼쳐진다. 물 위를 떠도는 핏빛 단풍잎과 백암산이 어우러지면서 절묘한 풍경화를 만들어낸다. 그곳에 내가 서 있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사찰을 앞에 두면서는 눈은 더 시려진다. 쌍계루를 앞에 두고 돌다리를 만들어 또 다른 큰 연못이 되었다. 백양사 입구 운문암 계곡과 천진암 계곡이 합류되는 지점. 쌍계류 정자 뒤로 멋진 백암산이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춘다. 연못과 쌍계루, 백암산 기암과 단풍이 어우러진 풍광은 그냥 카메라 셔터만 눌러도 달력 한 페이지를 만들 수 있다. 이곳에 내가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은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진다.
백양사 만추 정취에 빠지고 다연원의 향긋한 솔잎차에 취하고
사찰로 다가서면서 연못에 물골을 잇는 홍교를 만난다. 다리 밑에는 무수하게 많은 낙엽이 떨어져 켜켜이 쌓여 있다. 그 풍광에 취해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드물다. 홍교를 건너면 이내 경내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632)에 세워진 천년고찰로 백양사라는 이름은 환양선사가 설법을 할 때 흰 양이 듣고 깨우침을 얻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다. 긴 세월 지난 만큼 경내에 문화재도 많다. 극락보전(지방문화재 제32호)은 조선 중기 건축물로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또 대웅전(지방문화재 제43호)은 1917년 건축되었다. 사천왕문(지방문화재 제44호)은 1945년 복원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 사천왕을 모신 건물로 익공식과 주심포식을 사용한 절충식 건축물이다. 사천왕상은 소조상으로 불교예술의 극치며 사찰문화재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소요대사 부도(도유형문화재 제56호)는 1650년대에 조성되었다. 소요대사 부도 외 만암당, 묵담당, 지백당, 영월당, 벽허당, 무가당, 서운당, 석파당, 봉하당, 석산당 등 15기의 부도와 금해대선사, 화운선사, 학산선사, 양악선사, 연담당선사, 대종정만암대종사사리탑비 등 12개의 불탑이 어우러져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관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잠시 절집만 들러보고 다연원이라는 찻집에서 그윽한 다향에 취해보고 여행을 마치는 사람이 부지기수.
백학봉 바로 아래 약사암에서 단풍든 산세에 폭 빠져, 나오는 길 잃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여행의 막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아쉽고 미흡한 일이다. 백양사의 진면목을 보려면 산 중턱에 자리한 약사암에 올라야 하고 절집 뒤켠의 백학봉까지 꼭 발품을 팔아야 한다는 점이다. 오르는 길목 왼편에는 백암산의 대표적인 나무인 비자나무숲. 조금 지나면 1603년과 현종 3년인 1662년에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특별히 제사를 올렸다는 국기단이 있다. 특별히 눈여겨보지 않은 그곳에도 가을철이면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을 들인다. 조금 더 오르면 이내 찻길이 끝나고 약사암으로 가는 팻말이 있다. 500m가 채 안 되는 표시지만 구불구불 산허리를 몇 구비 돌아서고 흠뻑 땀을 흘려내야만 만날 수 있는 거리다. 넓은 마당에 오래되지 않은 듯한 당우 한 채. 유서 깊은 백양사의 부속암자겠지만 특별한 문화재도 자료도 없다. 절집 앞마당으로 나서서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백양사가 한눈에 잡힌다. 조금만 발품을 팔아도 이렇게 아름다운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이곳까지 올랐으니 영천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다. 계단을 타고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한다. 석굴에 올라가면 석상이 내려다보고 옆으로는 영천수가 고여 있다. 석간수는 매우 맑아 약수로 이용하고 구멍에서는 쌀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서 백학봉까지는 700m 거리. 거리는 짧지만 경사가 심해서 숨이 막히지만 조금 더 올라가봐야 한다. 백학봉을 바로 눈앞에 두고 거대한 기암이 있는 평평한 공간을 만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약사암에서 느낀 것보다 훨씬 더 시원하다. 백암산의 넓디넓은 품속에 안겨 기쁨을 만끽한 하루. 아. 돌아갈 곳을 잊게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싶다.
여행 안내
*위치 전남 장성군 북하면 북하리 산행 코스:북하면 버스정류장->백양관광호텔(0.3km)->북두교(0.6km)->백양사 매표소(1km)->백양사 박물관(0.8km)->일광정(0.3km)->백양사 쌍계루(0.4km)->백양사(0.1km)->약사암(0.8km) 총거리:4.2km 찾아가는 방법:자가용 이용객들은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IC에서 1번 국도~남창지구~장성호~백양사 입구에서 좌회전. 대중교통은 버스나 기차를 이용하면 된다. 기차는 호남선을 타고 백양사역에 하차, 마을 앞 사거리에 버스터미널. 백양사에 가는 버스 1시간 간격으로 운행. 20분 정도 소요. 용산~장성역행 기차를 이용하면 장성터미널에서 버스 이용.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며 40분 소요. 또는 강남 호남고속터미널에서 장성, 광주행 버스 이용. 터미널에서 백양사행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기차 정보는(1544-7788, 1588-7788, www.korail.com) 버스 문의는 장성터미널(061-393-2660), 사거리터미널(061-392-8900) 그 밖에 궁금한 점은 군청지역경제과(061-390-7366). 백양사(061-392-7502, www.baekyangsa.org).
*추천 별미집 백양사 오르는 길목에 음식점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정읍식당(061-392-7427, 061-392-9367), 대성산채(061-392-7565)는 산채류가 괜찮다. 그 외 장성호 미락단지 쪽에는 초야식당(061-393-0734, 메기찜ㅤㅉㅗㄲ장어요리)을 비롯하여 여럿 있다. 풍미회관(061-393-7744, 한정식)도 소문난 맛집이다. 읍내에는 양송식당 (061-393-9325, 생태탕ㅤㅉㅗㄲ호박찌개), 국일반점(061-394-8970, 중식), 한우큰마당(061-395-1212, 한우), 성산가든(061-393-1890, 우족탕), 장삼식당(061-393-2003, 추어탕ㅤㅉㅗㄲ비빔밥) 등이 괜찮다.
*숙박 정보 백양사 관광호텔(061-392-2114), 은혜가족호텔(061-392-7200)이나 백양산장(061-392-7500), 백운각(061-392-7531) 등 사하촌 밑에 여러 민박집들이 있다. 인근의 가인마을(북하면 약수리)은 전형적인 시골마을로 6개 정도의 민박동이 있다. 그 외에 방장산휴양림(061-394-5523)이나 장성 읍내의 모텔을 이용하면 된다. 장성 읍내에 센트럴스파(061-392-2202, 영천리)라는 24시 찜질방이 있다.
*주변 볼거리 백양사가 있는 북하면 일원은 감 주생산지이기 때문. 오래전부터 곶감을 깎아 오던 곳이지만 이제는 생산농가가 감소되면서 그 수량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곳에서 곶감으로 이용하는 감 종류는 먹감. 감 껍질에 먹물이 배어 있는 토종감이다. 백양사 들어가는 초입 우측으로 들어가면 중평마을. 마을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농가에서는 집에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소규모로 감을 깎아 집 한켠에 매달아 놓는다. 명절 때 제수용이나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간식거리를 만드는 일이다. 몇 집들은 제법 수량을 많이 한다. 특히 이곳에서는 곶감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감 매다는 꼭지가 새롭다. 예전에는 나무 꼬챙이에 10개씩 끼워 널었는데 구멍 난 부근에 곰팡이가 생기기도 해서 새롭게 개발된 것이다. 이곳 중평마을 외에도 멀지 않은 성암리 용동마을에도 생산량이 많다. 구입은 백양영농조합법인(061-392-7410, 061-392-1668)이나 곶감작목반에 문의하면 된다.
그 외 영화마을로 알려진 금곡마을이나 축령산산림욕장(061-471-2184, 축령산 영암국유림 관리사무소), 필암서원(061-390-7528), 홍길동 생가(061-390-7527)가 지척. 남창계곡, 입암산성도 좋고 장성호(북하면 쌍웅리)에서 낚시를 즐겨도 된다.
글·사진 / 이신화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