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산실, 경북 “산과 강, 바다가 글을 쓰게 했다” 문인수 편 <상>
영남일보 2010년 7월 5일 11면 특집
향수(鄕愁)는 향수(香水)보다 진하다
문인수(시인)
성주(星州)가 내 고향이다. 현재 내가 사는 이곳, 대구시 만촌1동에서 차를 몰아 50여분이면 너끈하게 가닿는 지척.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대장1리 630번지가 내 본적지 주소이다. 방올음산이 내려다보는 이 ‘번지’ 위에 아직도 나의 본가(생가)가 있다. 그 집은 “소잔등 둥두렷한 등성이 넘어 불쑥이//해 떠오르(필자의 시, ‘아버지’ 부분)”던 아버지의 집이요, “여름날 저녁 칼국수 반죽을 밀”면서 “둥글게 둥글게 어둠을 밀어내면/달무리만하게 놓이던(필자의 시, ‘칼국수’ 부분)” 흰 땅, 거기 지어진 어머니의 집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 그 품이며 그늘의 너비가 바로 내 고향이다. 그렇듯 우선 내 어린 시절의 발길이 미쳤던 ‘영역’으로만 그 범위를 좁혀 잡은 고향’, 초전면(草田面) 면소재지 대마(大馬;대장리). 바로 이 마을에서 나는 나고 자랐다. 나의 유년기는 오롯이 이곳에 안겨 있었다. 면소재지라고 하지만 1950년대의 농촌이란 궁벽하기는 마찬가지. 그런 시골 아이에겐 당연히 저의 눈에 들어오는 반경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나 가끔씩, 무엇인가 까닭 없이 서러울 땐 날 불러내는 듯한 ‘바깥’을 느끼곤 했다. 설렘 반, 두려움 반. 그것은 야릇한 자극이었다. 50리 밖 왜관 쪽에서 꼬리 길게 넘어오던 아득한 기적 소리와, 그리고 저 먼 하늘 아래 고래등같이 나타나 푸릇푸릇 거대하게 일렁이던 가야산의 원경이 그것이었는데, 그 미지의 바깥세상이 훗날 나의 남루한 ‘타관객지’가 된 것 같다.
농촌인구가 나라 전체 인구의 8할이 넘던 시절. 가난이 죽을 쑤던 그때의 아이들은 그러나 ‘공부’에 찌들 일 없어 명랑했다.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며 구김살 없이 놀았고, 잔대뿌리며 삘기며 산딸기며 뭐든 저 알아서 군입을 다셨다. 나도 그 ‘야생의 아이들’ 속에서 혹은 소 먹이고 꼴 뜯으며 초‧중등학교(초전국민학교, 성주중학교)를 마쳤다. 그때, 시오리길 성주읍내로 넘어가는 대티고개(필자의 시, ‘대티고개’ ‘밤길’ 등), 60리 밖 김천 방면으로 넘어가는 신거릿재(필자의 시, ‘신거릿재’ ‘봉선화’ ‘방올음산 이야기’ 등), 백리 길 대구 방면으로 넘어가는 달암치재(필자의 시, ‘달암치재’)도 알게 되었다. 당시 내게는 먼, 험한 이 길들이 말하자면 내가 만난 세상 모든 길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고향, 이 아름다운 길 위의 고개들이 또한 내 삶의 여러 고비를, 세상과의 온갖 불화를 예고한 것이었을까. 그렇게 ‘견강부회’ 말해 본다면, 글쎄, 열 예닐곱 살에서 스무 살 무렵까지 나는 그리도 싸움질이 하고 싶었다. 동네 패거리와 함께 장날이나 단오날, 혹은 사월초파일, 그리고 학교운동회 날이면 잔치(행사)가 벌어진 장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공연히 낯선 ‘놈들’을 집적거리고 다녔다. 특히 사월 초파일이면 해마다 어김없이 이웃 면 지역 ‘선석사(월항면 인촌리 217)’엘 몰려 올라가 꼭 한 판씩 붙곤 했다.
“사월 초파일이면 이 절에 왔습니다./사람 구경 싸움 구경 왔는데요. 아니, 여차하면 나도 한 판 붙고 싶어 왔었지요. 놈의 이마를 돌로 찍었습니다. 대웅전 뒤 산그늘 아래 한참 숨었다가 그 환한 두려움 밖으로 달아났었지요.//사십여 년 만에 이 절에 다시 왔습니다./흰 불두화 커다란 대가리가 뭉게뭉게 멀쩡합니다./작은 날벌레들 무수히 들락거리고요,/뭉게뭉게 자꾸 웃습니다.(필자의 시, ‘선석사’ 전문)”
그 기간에, 그러니까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62년. 성주농업고등학교에서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아버지를 졸라 대구의 대구고등학교로 전학을 해버렸다.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질투가 ‘쟁취’한 길. 그것이 나의 최초, ‘출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일이 내 ‘잘 못 든 길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이후, 이십대 중‧후반까지 나는 자주 어깨가 처져 고향으로 돌아오곤 했다. 청춘! 그 어디에서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떠돌던 타관객지(필자의 시, ‘빗소리는 길다’)를 고향에다 헌옷처럼 벗어 처박아놓고 대책 없이 빈둥거린 그런 세월이 있었다. 그 지리멸렬한 날들을 지금도 고향에 가면 아버지‧어머니의 번듯한 집, 이제는 허물어져 가는 그 옛집(필자의 시, ‘머위’ ‘칼국수’ 등)이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향은 역시 ‘육친’ 같은 것. 나는 몇 해 전 서해 전라도 쪽의 변산반도 일대를 여행하던 중 고향 땅 ‘성주’를 만난 적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먼 데서 ‘성주참외를 봤다’는 것이다.
“변산반도 위도 선착장, 배에서 내리다가 봤다. 한 사내가 든 짐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피피끈으로 묶은 마분지 박스에 커다랗게 찍힌 ‘성주참외’란 글자 도안이 그랬다. 가득 담긴 참외가 당장 투시처럼 옹지종기 떠올랐다. 생산지 표시가 또 ‘초전면’으로 돼있는 게 아닌가, 더욱 반가웠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이 여기서 어디냐. 전라도, 서해 멀리 흘러들어와 고향 땅 참외를 보다니, 격포에서 나랑 한 배를 탔던 거다. 단박, 이 섬하고 뭔 한 촌수 생긴 것 같았다. 나는 금세 금쪽 같은 애착이 갔다. 누구네 농사일까, 혹시 동장형님? 배다리들 용수형님? 친구 전병규? 문상곤씨? 미처 생산자 농민 이름은 못 봤다. 사내는 어느 새 포구마을 골목길로 뒤뚱뒤뚱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속으로 “잘 살아라.” 뜬금없이 뇌까리고, 혼자 씨익 웃었다. 이 어인 의인(擬人)? 섬을 뜰 때, 배 뜰 때, 노오란, 향기 달콤한, 엉덩이가 어여쁜 그런 석별도 있었다. (필자의 시, ‘성주참외를 봤다’ 전문)”
고향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 하지 않는가. 거기다 참외라니, 참외는 까마귀와 같은 그런 밉상도 아니다. 아주 곱상이다. 참외 주산지 성주, ‘성주참외’가 바야흐로 전국 생산량의 60%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성주의 들녘을 온통 뒤덮은 비닐하우스의 바다. 뭐, 그 같은 ‘자랑’은 이 글에선 사족이다. 다만 반가웠다는 것이다. 나의 현 거주지, 대구에서 보는 성주참외는 그야 예사다. 그런데, 몇 백 리 밖 생판 객지에서 본 성주참외는 단박 ‘의인화’되는 그 무엇, 말하자면 머잖은 촌수의 ‘조카’라도 만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어느 시대는 ‘촌놈’들이 걸핏하면 주눅 든 때도 있었다. 그랬지만 요새는 오히려 시골을 고향으로 두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자리에서 궁할 때가 있는 것이다. 고향의 ‘전형’은 어떤 풍경인가. 그 것은 바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일 것이다. 첩첩 산골일수록 아름답고 애틋한 곳, 그 고향을 그리는 데는 또한 역시 ‘천리타향’이나 ‘이역만리 타국 땅’이 제격인 법이다. 그래, 향수(鄕愁)는 향수(香水)보다 진하다. 변산반도에서 ‘상봉’한 성주참외의 고운 빛깔, 그 ‘향기’에 자극 받아 잠자던 ‘애향심’이라도 깨어난 걸까. 나는 그 무렵 내친김에 참외농사‧농민을 주제로 한 ‘성주찬가’라는 노랫말(?)도 썼고, 고향 땅 성주를 열고 들어가는 ‘고목열쇠(졸시)’ 삼아 성주읍 경산리에 자리한 ‘성박숲’에 대한 시도 썼다.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성주읍성의 위엄을 고목의 눈으로 처연히 바라보는 내용이다.
“성 밖엔 숲이 있었다. 그 언제 읍성은 허물어지고/허물어져 이미 자취 없지만/숲은 남아 지금도/사람들은 성 밖 나가는 거고, 성 밖 숲 가는 거다.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왕버들 숲엔 /오래 된 기억처럼 나이테처럼 고목들이 껴안은 험준한 읍성이 그대로 있다. …중략… 성밖숲에 해지고, 나무도 늙어 그런지/더 어두워지는 기미가, 성문 닫히는 소리가 많이 굼뜨다.(필자의 시, ‘성밖숲’ 부분)”
성밖숲은 성주군의 중요 국가지정문화재 중의 하나다. 옛 성주읍성 밖에 인위적으로 조성한 숲으로 300~500년 생 왕버들 노거수 56주가 남아 우거져 있다. 이 고목의 숲은 조선시대 선조들의 풍수지리 사상과 자연관을 오랜 세월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성밖숲, 그 그늘 아래엔 현재도 성주 군민들은 각종 문화행사를 펼치고, 휴식하고, 운동도 하는 등 정신문화의 재현 공간으로, 쉼터로, 체육공원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주의 옛 왕국을 신라로 잡기보다는 자꾸 가야국에다 그 뿌리를 두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는 성주의 옛 왕국, 가야국 ‘출신’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음악가’ 우륵(于勒)을 마음에 모시게 된다. 그런데, 왜 가야이며, 왜 우륵인가. 내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그 것은 단지 가야금, 가얏고에 대한 매혹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가실왕의 명이 있긴 했지만, 아무튼 전란의 세월에다 열 두 줄 현을 메워 천상의 소리를 ‘발명’해 낸, 그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영혼을 깊이 울리게 한 우륵, 그의 가야금! 나중에 신라로 망명한 우륵의 행적을 더듬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저 가얏고의 선율에 취하면 될 것이다. 정치적‧역사적으로 가야국은 멸했으나 가야의 그 소리는 결코 멸하지 않을 터. 어릴 적, 고향 땅 성주 초전에서 바라본 가야산의 원경은 말했다시피 하늘 아래 거대하게 나타난 푸른 고래등 같았다. 지금, 거기에다 덧붙여 상상을 해본다면, 그 푸른 고래등은 한 척의 커다란 배일 수도 있겠다 싶다. “가야국은 어디로 갔나?//다만 망망대해라는 슬픔,(필자의 시, ‘가야금’ 부분)” 그래, 그 배는 수평선 너머 먼 바다로 나아가 한 채의 둥근 섬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망하지 않을 푸른 소리의 섬으로, 영원한 제국으로 어디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 또한 그리하여 가야국, 사라진 그 영화는 두 번 다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사라지지 않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저 아름다운 가야금의 선율이요, 그것을 듣는 이의 감동이라는 것이다. 지난 시대의 부와 권력이 지금 어디에 남아 있는가? 사람의 ‘짓’ 중에 마침내 남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가야금, 그 소리는 지금도 우리 곁에 ‘현역’으로 남아 절묘하다. 이 ‘심금’이야말로 바로 가본 적도 ‘그때’, 그 옛날 내 고향의 소리요, 영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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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산실, 경북 “산과 강, 바다가 글을 쓰게 했다” 문인수 편<하>
‘영남일보’ 2010년 7월 12일자 11면 특집
그 푸른 종, 방올음산을 찾아서
문인수(시인)
고향이란 내 아버지‧어머니의 다른 이름이다.아니, 무엇보다 내 유년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그 어린 시절만이 순전히 고향에 있었기 때문이요, 아직도 그 산천에 잘 놀고 있기 때문이다.(필자의 시 ‘전쟁놀이’ 등) 그러니까, 그때의 영혼 속에 기록되고, 거기 선명하게 인화된 것들만이 진정한 고향의 모습인 것이다. 바로 그 면면을 ‘현실’로 그려내는 작업이 말하자면 내 고향관련 ‘문학’인 것 같다. 나는 그러나 고향의 어떤 ‘장소’를 쓰기보다는 ‘고향사람’들을, 그들의 ‘삶’을, 그 ‘이야기’를 주로 써온 것 같다. 나는 머리 굵어진 다음엔 제대로 고향에 묻혀 살지 않았다. 고향 가까이에선, 혹은 막상 고향에 들어가 보면 웬걸, 고향이 없다. 사람들도, 아파트들도, 온갖 놀라운 ‘발전’들이 모두 ‘객지’의 모습이다. 그리고 누가 고향 가까이서, 또는 고향에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리. 아니다. 그래도 고향은 그리운 법. ‘故鄕’이라는 뜻글자가 이미 다 말하고 있듯이 그것은 그리움의 대상, 그저 옛날의 그곳만이 고향이요, 어릴 적의 산천, 그 고장만이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곳’이라기보다는 ‘그때’가 고향이다. 그래, 그리움이 돌아보는 ‘그곳’은 사실 ‘그때’가 아름다운 것이다.
고향! 거기에는 지난 시대의 인간모독적인 가난도 있고(필자의 시, ‘보리밥’ ‘학질’ 등), 억눌린 무지몽매도 있고(필자의 시 ‘모과’ ‘四月’ 등), 그걸 견딘 사람의 바닥도 있고, 6.25전쟁(필자의 시, ‘단감나무 이야기’ ‘담쟁이 넝쿨 이야기’ ‘봄, 1952년’ 등)이나 온갖 자연재해(필자의 시, ‘산불’ ‘장마’ ‘가뭄’ 등)로 인한 지옥과 같은 농투성이들의 세월도 있고, 서글픈 이농현상(필자의 시, ‘분향하고 싶다’ 등)도 있다. 그런데, 유년의 기억에 든 그것들은 어째 모두 아름다운가. 제대로 먹지 못해 깡마른 어른들, 그래서 또한 배가 바가지처럼 부푼 아이들, 어제도 오늘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밥은 먹었느냐는 인사들, 떠돌이 거지들이며 각설이패며 장꾼들, 보부상들, 머슴들이 아직도 내 어린 날의 뇌리엔 그대로 있다. 좀 모자란 듯 선하게 웃으며 여전히 ‘거기’ 살고 있는 것이다(필자의 시, ‘내가 그를 묻었다’ ‘모과’ 등). 그래서 내 걱정 없던 시절의 고향 땅은 용서랄 것도 없는 용서, 화해랄 것도 없는 화해의 나라이다. 고향이라는 나라, ‘그곳’이 바로 내 그리움이 돌아다보는 아름다운 ‘그때’인 것이다.
“농촌 들녘을 지나는데 춥고 배고프다./저 노인네 시린 저녁이 내 속에서/등 달 듯 등 달 듯 불을 놓는다./꽃 같은 불쪽으로 빈 들판이 몰린다./거지들 거뭇거뭇 둘러앉는 것 같다./발싸개 벗어 말리며 언 발 녹이며/구운 논두렁도 맛있겠다./그 뱃속 깊은 데 실낱 같은 도랑물 소리,/참 남루한, 어두운 기억을 돌아오는데도 피를 맑히는/이땅의 신(神)이옵신 그리움이여.(필자의 시, ‘정월’ 전문)”
유년의 영혼이 돌아보는 곳, 그래서 나는 그 고향의 범위를 초전면 일대로 좁혀 잡는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하고, 절실하고, 자세하다고 쓴 적 있다. 그래야 내 어린 날의 눈은 가야산의 원경이, 다른 지역이나 다른 각도에서는 푸른 고래등 같은 모양이 아니라, 아연 크고 거친 이빨의 톱날 같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오직 거대 단봉으로만 급하게 치솟아 있다는 사실을 몰라도 되는 것이다. 그 전혀 다른 양상의 ‘바깥세계’를 지금의 화자(話者)인 그 아이의 ‘그때’는 아직 몰라도 된다는 것이다. 다만 나는 내 유년의 최고봉인 방올음산(해발, 782미터)이 내 고향을 온전히 품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방올음산(해발, 782m)은 내 고향 초전면의 최북단 용봉리에 우뚝 솟아 있다. 이두식 표기로써 ‘方兀音山’인데, 신새벽이면 이 산이 널리 울어 백성들의 잠을 깨우는 방대한 종소리가 났다는 전설이 있다. ‘종’을 왜 ‘방울(방올)’로 줄여 표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방올음산의 위용은 지금도 삼각형의 거대한 푸른 종 하나가 하늘에 걸린 듯한 그런 뚜렷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 그래서 관공서엔 이 산의 이름이 영산(鈴山), 현령산(懸鈴山) 등으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시집 두 권,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와 ‘홰치는 산’엔 주로 고향관련 시들을 실었다. 모두 합쳐 백 편에 가까울 것이다. 특히, ‘홰치는 산’은 전권이 아예 ‘고향’이다. 이 시집을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고유명사가 바로 방올음산이다. 숱한 시편에서 이 방올음산이 배경처럼, 촌장처럼 나타나 고향을 직접 말하거나 상징한다. 이 시집 표제작 ‘홰치는 산’이야말로 방올음산이 단연 ‘주역’이다. 방올음산에다가 아침노을(붉새)을 커다란 날개처럼 걸쳐 시뻘겋게 홰치는 수탉 이미지를 펼쳤고, 그 장관의 방올음산을 다시 아버지에게 활활 입혀본 시이다.
“방올음산은 북벽으로 서있다./그 등덜미 시퍼렇게 얼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겨우내 묵묵히 버티고 선/산/아버지, 엄동의 산협에 들어갔다./쩌렁쩌렁 참나무 장작 찍어낸 아버지,/흰내(白川) 그 긴 물머리 몰고 온 것일까./첫 새벽, 홰치는 소리 들었다./집 뒤 동구 둑 위에 아버지 우뚝 서 있고/여명 속에서 그렇게 방올음산 꼭대기 솟아올라/아, 붉새 아래로 천천히 어둠 가라앉을 때/그러니까, 이제 막 커다랗게 날개 접어내리며/수탉, 마당으로 내려서고/봄, 연두들녘 물안개 벗으며 눕다.”(필자의 시, 홰치는 산 전문)”
방올음산은 성주군 내에서는 꽤 큰 산 축에 든다. 50년대~60년대 초, 무연탄이 농촌 가정에 제대로 공급되기 전까지, 성주군민 중 상당 수 가구가 이 산에서도 땔감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봄철 저녁 답이면 푸나무를 잔뜩 실은 소달구지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읍내 쪽으로 내려갔다. 그때, 소머리며 길마 위에, 혹은 나뭇짐 위에 덤으로 붉게 꽂혀있던 참꽃 다발이, 그 여유가 참 환했다. 가난하고도 고된 삶 속에서도 어떤 ‘헌화’의 마음(필자의 시, ‘참꽃’ ‘부처’)이, 그 속정이 소와 함께 덜컹거리는 비포장 황토 자갈길에 달구지를 끄는 힘이 됐으리라. 이처럼, 옛날의 고향 사람들이 생활의 일부를 기대고 있던 방올음산의 위엄이 어린 날의 내 눈엔 어떤 신성(神性)으로 다가왔던 것(필자의 시, ‘방올음산’ ‘방올음산 이야기’) 같다. 그러나 이 엄청난 방올음산이 최근 고향에서, 바로 내 고향 마을 초전면 소재지에서 없어진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연인 즉 이러하다. 대구의 몇 몇 원로 국문학자들이 마음을 모은 ‘향토문학연구회’에서 내 시에 뻔질나게 나오는 방올음산을 찾아 초전엘 들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웬걸, 면소재지 동네 주민들이나, 면사무소 직원들 중 그 누구도 방올음산의 존재 자체를 아예 깜깜, 모르더라는 것. 나는 기가 막혔다. 동네 어디서나, 그래, 면사무소 마당에서도 빤히, 시펴렇게 올려다 보이는 그 방올음산을 모르다니. 고향 땅을, 고향 사람들을 지켜온 산. 내 시의 ‘우두머리’인 방올음산이 고향 땅에서 ‘실종’된 것이었다. 나는 ‘어이없음!’을, 그 억울한(?) 심정을 억누르고 곰곰이, ‘방올산이 홰치고 날아가버린 연유’를 생각해 봤다. 그랬다. 무엇보다 몇 몇 토박이 늙은이들 외엔 면소재지 전체 주민들 대다수가 타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라는 것. 또한 그 옛날엔 뉘집 아버지나 삼촌이, 혹은 뉘집 아들이나, 뉘집 딸, 뉘집 조카들이 면사무소에 ‘철밥통’으로 붙박였으나, 지금은 잦은 인사이동으로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타지 출신 공무원들이라는 것. 그러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방올음산이야 모를 수도 있겠구나, 아니, 당연히 그럴 수밖엔 없겠다 싶었다. 그런데, 방올음산의 ‘입장’으로선 오히려 ‘해방’인 셈이다. 이제는 벌채·벌목 당할 일도 없지 않은가. 산으로 돌아간 산, 방올음산. 그렇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산 이름을 잊었다고 해서 내 어린 날의 영혼이, 내 글쓰기가 그 산에 못 기댈 바는 아니라는 것이다. 방올음산은 이제 내겐 전설이요, 신비다. 필요하다면 내 시는 이제 그쪽으로 길을 터 다시 방올음산을 찾아 나서면 될 것이다.
방올음산이 거느린 고향이 없었더라도 나는 시를 썼을까. 그것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유‧소년기에 각인된 고향이야말로 내 시의 근본 토양이요, 발원지가 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초전초등학교 4학년 때 문예반 담당 선생님의 황홀한 칭찬 한 마디가 ‘고래’가 아닌 못된 아이 하나를 춤추게 했고, 그때 얻어걸린 존재감이 바야흐로 글이랍시고 쓰게 된 동기가 됐고, 그 ‘싹수’가 머리 굵어 객지를 떠돈 시기에도 옹이처럼 박혀 빠져나가지 않았던 것. 그것으로 결국 ‘늦깎이 시인’이 되긴 했다. 또한 그것은 바로 스스로 위로받을 수 있었던 아름다운 배경, 즉 ‘고향이라는 거름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닥치는 대로 작파하고, 사방팔방 저를 방기하던 그런 세월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내려놓지 못했던 것이 바로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었고, 그것이 바로 나의 ‘배꼽’(필자의 시)이었던 것 같다. 새삼 또 돌아보니, 고향에 ‘태’를 댄 내 어린 날의 꼬부랑길이 비리게 꼼지락거리는 것이다.
“곤충채집 할 때였다./물잠자리, 길앞잡이가 길을 내는 것이었다./그 길에 취해 가면 오 리 길 안쪽에/내 하나 고개 하나 있다./고개 아래 뻐꾹뻐꾹 마을이 나온다./그렇게 어느 날 장갓마을까지 간 적 있다./장갓마을엔 누님이/날 업어 키운 큰누님 시집살이 하고 있었는데/삶은 강냉이랑 실컷 얻어먹고/집에 와서 으스대며 마구 자랑했다./전화도 없던 시절,/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느그 누부야 눈에 눈물 빼러 갔더냐며/어머니한테 몽당빗자루로 맞았다./다시는 그런 길,/그리움이 내는 길 가보지 못했다.(필자의 시, ‘눈물’ 전문)”
본능이었을까, 그 어린 날에도 나는 자발·자동으로 “그리움이 내는 길”을 짐승의 새끼처럼 따라나설 줄 알았던 것 같다. 그 길 더듬기가 바로 나의 시인 것 같다.
-영남일보 2010년 7월 12일자
첫댓글 이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문시인님에 대해 더 정감이 갑니다 그런데 문시인님은 패거리와 한 판 붙는 싸움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같아요 물론 싸우게 되면 얻어 터졌을 것 같은 생각만 떠 오르네요.
내일 직접 물어보십시오
잘 보셨을 수도...아닐 수도...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