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성경은 어떻게 번역되어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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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성경번역사 개관 -
2011년은 우리나라 성경이 완역되어 우리 손에 주어진지 100주년이 되는 해인 동시에 흠정역성경(King James Version)이 역간된 지 400주년이 된다.이때를 기념하여 이 논문에서는 한글성경번역사를 간단히 정리하였다. 성경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때는 1816년 9월 5일이었고, 성경의 일부인 주기도문이 처음 번역된 때는 1932년 7월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의 성경번역은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처음 역간되었고, 1887년에는 로스역 신약성 경이 「예수셩교젼서」라는 이름으로 역간된 일이 있고,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 1884년 「신약성서마가전」(新約聖書馬可傳)을 시작으로 복음서와 사도행 전이 「현토 한한 신약성서」(縣吐 漢韓 新約聖書)라는 이름으로 역간된 바 있다.
국내에서의 성경번역으로는 사역본 성경이 발행되기도 했으나 1900년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수정작업을 거쳐 1906년 성경번 역자회가 공인한 공인역본 「신약젼서」로 출판되었다. 이 성경이 1938년 「개역 신약성서」가 출판되기 까지 한국교회 강단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공인본 신약성 경이었다. 1900년 이후 구약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되어 1910년 4월 2일 번역을 완료하였고, 1911년 신구약 구약성경이 합본되어 「성경젼서」라는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의 개역작업이 이루어졌고, 1938년에는 「성경개역」이 출판되 었다. 이 공인역 개정 성경이 1952년과 1956년 새로운 맞춤범에 따라 일부 수정되었고, 1961년에는 815개소의 자구수정을 거쳤는데, 이 「성경전서 개역한 글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하는 성경이 되었다.
해방 후 성경 새번역 작업이 이루어져 1967년 12월 15일에는 신약이 완역되어「신약전서 새번역」이 간행되었다. 또 신구교 간의 공동번역 작업을 시도하여1977년 부활절을 기해 「성서」라는 이름에 부제로 ‘공동번역’이라는 표제를 붙인 소위 공동번역성서가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되었다. 이 성경에서 신약은1971년에 번역된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개역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불리는 쉬운성경이 출판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글 개역성경의 개정작업이 이루어 져, 1995년 11월에는 개역개정판 신약이 출판되었고, 1997년 6월에는 구약개역이 완료되었다. 약 6개월간의 의견수렴과 감수의 과정을 거쳐 1998년 8월 31일 「성경전서개역 개정판」을 발행했다. 이 개역개정판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강단용으로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교단이나 교회가 적지 않았다. 대한성서공회는 교계의 여론을 반영하여 2000년 새로운 개역개정판(2판)을, 2003년에 제3판을 발행했다.
지금까지 성경번역과 반포사업은 1895년에 창립된 대한성서공회가 주관하거 나 주도해 왔으나 개역 개정판의 발행을 시점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고신, 개혁, 고려 등 보수적인 107개 교단은 ‘한국성경공회’(The Korean Society of the Holy Bible)를 창립하고, 1952년판 개역성경을 대본으로 부분적인 수정을 하여 1997년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성경」을 출판했으나 대한성성공회 가 의이를 제기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한국성경공회는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여 2007년 「하나님의 말씀, 바른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교회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다. 한국에서 성경은 한글의 보급과 문맹 타파와 계몽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금년 2011년은 우리나라 성경이 완역되어 우리 손에 주어진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시에 영어성경의 왕좌로 불린 흠정역성경(King James Version)이 역간된 지 4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국에서의 성경완역을 기념하여 여러 행사가 준비되기도 하지만 이런 기회에 우리나라말로 성경이 번역된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뜻 깊은 일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한글성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에 의해 번역되었는가를 정리해 두고자 한다.
1. 한국에 소개되는 성경
그렇다면 언제 어떤 경로로 한국에 성경이 전래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충남 서천군의 마량진은 한국에서 첫 성경 도래지로 알려져 있다. 영국 정부로 부터 조선 서해안 해도(海圖)를 작성하라는 명을 받은 영국의 해안 탐사선 알레스트(Alceste)호와 리라(Lyla)호가 순조 16년(1816년) 9월 5일,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의 마량진(갈곶)에 상육했을 때 함장 머레이 맥스웰(Murry Maxwell)과 바질 홀(Basil Hall) 대령이 마량진 첨사(僉使) 조대복과 현감(縣 監) 이승렬에게 화려한 장정의 책 한 권을 선물했는데,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최초로 성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경은 영어성경이 분명하지만 흠정역 성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는 한국을 방문한 첫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가 내한하기 8년 전이었다.
그 후에는 중국어 성경이 한국에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신천성서(神天聖書)」라는 최초의 한문성경이 출간되었는데, 이 성경은 중국에서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영국의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이 중심 이 되어 번역한 성경이었다. 귀츨라프도 이 성경 번역에 일조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1) 분명치 않다. 이 한문성경은 1818-1813년에 발간되었으나 귀츨라프 가 중국 선교사로 일한 때는 1831년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츨라프가 영국에서 모리슨을 만난 이후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1823년 화란선 교회(The 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소속 선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볼때모리슨의이성경번역에도움을주었을가능성도있다.
어떻든 한자문화권에서는 곽실렵(郭實獵)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귀츨라프는1832년 7월 동인도회사의 통역 겸 선의(船醫), 선목(船牧)으로 영국 상선‘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까지 오게 되었다. 그가 산동반도를 거쳐 황해도를 가로질러 서해안 장산곶(長山串), 녹도(鹿島),불모도(不毛島)를 거쳐 충남 보령시 오천면의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한 날은 7월 25일이었다.
이 때 그는 홍주목사 이민회 등 조선 관리들에게 조선국 왕에게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선물을 보냈다. 선물은 한문으로 번역된 두 권의 성경과 전도책자로 추정되는 26종의 도리서(道理書), 그리고 만원경 등인데, 이를 순조왕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했다. 그는 조정의 회신을 기다리는17일동안(7, 25-8, 11) 고대도 내항에 체류하면서 주민들에게 한문성경과 전도 문서를 배포했는데, 그 성경이 「신천성서」였을 것이다. 이 때 귀츨라프는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는데, 비록 단편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이었다. 모리슨의 한문 구약성경(1859)는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때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1865년과 1866년 어간 런던선교회 제레마인 토마스((Rev. 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는 두 차례의 조선 방문하고 약 4개월간 조선 영토에 체류했는데, 그의 방한 목적이 성경보급을 통한 선교개척이었다. 그가 순교하기 전 한국인에게 성경을 배포햇는데, 그것은 중국어 성경이었다. 윌리암슨으로부터 지원 받은 “많은 양의 책들”을 전파하 고자 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한다. 그가 조선인에게 분배한 책이 어떤 중국어 성경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양선에 의하면 장사포(場沙浦)에서는 홍신길(洪信吉)소년이, 속호정에서는 김영섭(金永 燮)과 김종권(金宗權)이, 만경대에서는 최치량(崔致良)이 한문성경을 받았 는데, 후일 그들은 강서와 평양교회 설립자가 되었고, 토마스를 죽이려했던 박춘권(朴春權)은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다고 한다. 또 성경을 받아 벽지로 사용했던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평양장대현교회의터가되었다고말한다.2)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토마스 목사에게 성경을 받아 간 한 사람의 조카가 이영태인데, 그가 후일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레이놀즈(W. D. Reynolds)와 함께 성경번역사업에 동참했다고 한다.3)성경이 우리 말로 번역되기 전에 이렇게 성경이 한국에 소개된 것이다. 그 외에도 북중국에 주제하던 영국선교사 윌리암슨은 남만주 고려문에서 조선인 들에게 성경을 배포한 일이 있고, 1868년에는 북중국 주제 미국인 선교사 마티어가 대동강 하류 연안에서 조선인에게 성경을 배포한 일이 있다.4)

1) 원용국, 「성경형상의 역사」(성광문화사, 1979), 216.
2) 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기독교문사, 1971), 48.
3) 한영세, 편, 「한국성서 찬송가 100년」(기독교문사, 1987), 12.
4) 원용국, 217.

2. 국외에서의 성경 번역
2.1 만주에서의 성경 번역
비록 우리나라에 입국하지는 못했으나 국외에서 한국어 성경번역에 기여한 인물은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 1837-1905)와 존 로스(John Ross, 羅約翰, 1841-1915)였다.
스코틀랜드연합 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했는데,메킨타이어는 1871년에, 존 로스는 1872년에 중국에 파송되었다. 이들은 조선에 입국할 수는 없었으나 조선에 대한 영적 부담을 느끼고 조선어 성경번 역을 의도하게 된다. 이들은 한국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김진기(金鎭基), 이성하(李成夏), 백홍준(白鴻俊) 등 의주청년들 과 접촉하게 된다.
이들 조선청년들은 신앙을 갖게 되었고, 1879년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로스는 1877년부터 이응찬으로 도움을 받으며 한글 성경 번역을 시작하였다. 1879년 로스의 안식년 기간 중에는 매킨타이어가 이 일을 계속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최초로 한국어 성경이 출판되었는데,그것이 1882년 3월 24일 출판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5월 12일 출판된「예수셩교 요안복음젼셔」였다.
두 복음서는 3천권씩 인쇄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서 장은 구별되었으나 절(節) 표시나 구분이 없고,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느님, 쥬(主), 예수, 키리스토 등 하나님 칭호 전이나 후에는 반드시 여백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번역본에서 하나님 을 ‘하느님’으로, 그리스도를 ‘키리스토’로, 요한을 ‘요안’로, 세례를 ‘밥팀 네’로 표기한 점도 흥미롭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이어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이, 1884년에는 사도행전이 출판되었는데 이때는 5천권씩 인쇄되었다. 1885년에는 로마인서 와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이 역간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성 경이 완역되었다. 이 성경이 순 한글로 번역된 「예수셩교젼셔」인데, 보통「로스역 성경」(Ross Version)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것이 한글어로 된 최초의 신약전서였다.
위에서 언급한 의주청년들 외에도 서상륜(徐相崙), 이익세(李 益世), 최성균(崔成均)등이 번역에 관여했다. 성경 번역 작업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의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고, 봉천 의 문광셔원에서 출판되었다.
이때의 한글성경 번역 방법에는 다소 불완전한 점이 없지 않았다. 이응찬 등 한국인 조력자들은, 중국에서 1864년 간행된 한문 신약성경 「신약전서문리」(新約全書 文理)을 읽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과 흠정역(KJV), 그리고 흠정역을 개역한 영어개역성경(English Revised Version) 등을 참고로 검토한 후 역문을 결정하는 방식을 취했다.말하자면 한문 신약성경이 대본(臺本)으로, 헬라어성경과 영어성경은 준 대본(準臺本)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 번역본은 축자적 번역이라기보다는 의미의 동등성을 중시했다. 또 이 번역본에서는 한문 투의 어휘가 적고 구어체 가 많이 사용되었으나, 서북방언 등 토착방언이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신약성경이 국내에서 1900년「신약젼셔」가 출판되기까지 유일한 한국어 신약성경 번역본이었고, 그 이후 한글성경 번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5) 한글성경 번역에 기여한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공헌을 고려하여 마삼락(Samuel H. Moffett)는 이들을 한국의 위클리프(Wycliffes of Korea)라고 불렀다.
5) 1882년 번역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로스와 그 동료 한국인들에 의해 한만(韓滿)국경지대인 서간도에 배포되어 개종자가 생겨나 100명의 한국인들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이만열, 기독교 수용사, 40). 또 번역과 출판에 협력했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에 의해 의주를 거쳐 이북지방에 비밀히 보급되었다. 한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각 1천 권은 일본 요꼬하마 주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톰슨(J. A. Thomson)에게 보내졌고, 톰슨 은 일본인 매서인을 통해 이 책을 부산과 대구 등 경상도 일원에 보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규, 「부산지방 기독교 전래사」(도서출판 글마당, 2001), 25-28
2.2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
만주 뉴좡(牛莊)에서 한글성경이 번역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이수정(李 樹廷, c. 1842-c. 1877)에 의해서 성경번역이 시도되었다. 지금의 외교통상부 에 해당하는 통리외무아문(統理外務衙門)의 협판(協辦)이었던 이수정은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민비를 보호해 준 공로에 대한 고종황제의 배려로,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의 비공식 수행원 신분으로 일본에 가게 되었다.
그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가 1882년 9월 28일이었다. 그는 곧장 친구인 안종수(安宗洙)의 소개로 농정(農政)의 권위자였던 쯔다 센(津田 仙, 1837-1908)을 찾아 갔고 그를 통해 농학은 물론 기독교 신앙을 배우게 된다.6)그로부터 3개월 후인 1882년 12월 25일부터 야스까와(安川亭)목사가 담임하 고 있던 쓰키지(築地)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신앙은 급속하게 성장하여 1883년 4월 29일 주일에는 동경의 로개쥬쵸(露月町)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Knox)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일본에서 세례 받은 첫한국인이된것이다. 세례받은그는1883년말에는7, 8명의한국인 수세자를 얻음으로서 일본에서 최초의 한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특히 그는 녹스 선교사 등의 도움을 받으며 성경연구에 진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enry Loomis)로부터 한국 어 성경 번역을 제의받은 그는 야스까와 목사의 도움으로 한문성경을 대본으 로 번역을 시작했다. 그래서 「신약성서마가전」(新約聖書馬可傳, 1884년)을 시작으로 마태전(馬太傳), 누가전(路加傳), 요한전(約翰傳), 그리고 사 도행전(使徒行傳) 등을 번역하였는데, 이렇게 번역한 성경이 「현토 한한 신약성서」(縣吐 漢韓 新約聖書)였다. 이 책은 1887년 요코하마의 ‘대영 및 외국성서공회’를 통해 출간했는데 이 번역본은 신약성경 전서가 아니라 복음서와 사도행전 만으로 엮어진 성경이었고, 완전한 번역본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한문에 토(吐, 口訣)를 단 성경이었다. 한문에 익숙한 조선인들이 쉽게 읽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수정은 진정한 의미의 번역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가 번역한 첫 책은 마가복음인데, 부피가 작고 내용이 간결했기 때문에 이 책부터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 번역본은 1885년 2월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 라는 이름으로 요꼬하마에서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간행되었다. 초판은 1천부를 인쇄하였는데, 그해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라가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입국할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 마가복음 번역본이었다.
이수정은 한문으 로 된 마가복음(上海和漢聖譯書)를 주 대본으로 하되 일본어, 영어,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대조하면서 번역 하였다고 한다. 이 번역본에서는 만주에서 번역된 「예수셩교젼셔」와는 달리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였고 고유명사 표기가 원어에 가깝고 한문투의 용어가 많다. 이수정은 하나님 칭호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했는데, 한문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상제’(上帝)로,일본어 성경에서는 ‘가미’(神)로 번역하였으나, 그는 ‘천주’(天主)로 번역 하였다. ‘천주’는 천주교도들에 의해 이미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세례’는 ‘밥테슈마’로, 그리스도는‘크리슈도스’로 각각 음역하여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이 번역본은 가능한 순 한글역을 지향하되 지식인들의 편리를 위해 중요한 단어는 한자로 표기하고 한글로 토를 달았다. 이렇게 번역된 마가복음서를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라고 한 것은 유교와 불교계통의 서적의 한글역을 ‘언’라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수정 역의 마가복음은 1882년 만주에서 간행된 누가복음 번역본에 이어 한글로 번역, 간행된 두 번째 한글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수정은 계속하여 마태, 누구복음서도 완역했으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이수정의 1885년판 마가복음 번역본은 1887년 언더우드, 아펜젤러,그리고 한국인 송덕조 등의 공역으로 개정되어 요꼬하마에서 재출간되었다.7)
6 ) 쯔다 센의 인물, 활동, 농업정책, 그리고 이수정과의 접촉과 한국에 준 영향 등에 대해서 는 金文吉, 「津田 仙と朝鮮, 朝鮮キリスト敎受容と新農業政策」(東京: 世界思想社, 2003)을 참고할 것.
7) 이수정은 일본에서 성경번역 외에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일본에는 이미 미국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또 한국은 개항한 이후였으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더 이상 지체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883년과 1884년에 녹스목사의 이름으로 “조선의 사정”(Condition of Korea)이라는 서한 형식의 글을「세계선교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발표하였다. 이 글이 흔히 ‘그리 스도의 종 리쥬테’(A Servant of Christ Rijutei)의 호소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수정은 이 글에서 “혹시 미국의 선교단체가 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 로 전도자를 보내시겠지만 미국의 선교사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한국 선교를 간절하게 호소하기도 했다. 이 글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라의 내한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그가 1886년 귀국하여 국내에서는 활동하지 못했으나 한국 에서의 복음화를 위한 예비적 사명을 감당했다는 점에서 그의 입신과 수세, 그리고 성 경번역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선교사들은 그를 한국의 마게도냐인(A Macedoonian from Corea)이라고 불렀다.

3. 국내에서의 성경 번역
3.1 몇 가지 사역본(私譯本)8)
해외에서 은밀하게 성경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876년에는 개항하게 되고 일본에 이어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韓美修好通商條約)하게 되자 서양인의 입국이 가능해 졌다. 이러한 변화의 길목에서 중국과 일본에 파견되어 일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과 일본의 이수정은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884년 이래로 미국의 북장로교(1884), 북감리 회(1885), 호주장로교(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교(1892), 미국 남감리교(1896), 캐나다 장로교회(1898)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공인성경이 없는 상태 에서 내한한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성경번역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런 현실에서 1887년 2월 7일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들, 곧 언더우드, 아펜젤러,알렌, 스트랜톤, 그리고 헤론은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언더우드와 아펜 젤러를 번역책임자로 임명했다. 그 첫 작품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7년 펴낸 「마가의 젼복음셔 언」였다. 그러나 이 책은 제목이 암시하듯이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를 개역한 것이었다. 한글성경이 없는 상태에서 잠정적으로 이 책을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에이책을수정하게된것이다.
이외에는성경번역작업이위원회 차원에서 추진되지 못했고 도리어 성경번역은 사역(私譯)의 차원에서 시도되었다. 그것이 아펜젤러가 1890년 간행한 「보라달로마인셔(保羅達羅馬人書」와 1892년 간행한 「마태복음젼」, 1892년에 게일이 펴낸 「도젼」과 펜윅(M. C. Fenwick)이 펴낸 「요한복음젼」이다.
이런 상황에서 1890년 영국성서공회는 한국성서위원회에 만주에서 번역된 로스역 성경의 수정판을 낼 것을 요청했다. 한국의 시급한 현실에서 수정본이 보다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아펜젤러가 로스역 누가복음을 수정했 는데, 이것이 1890년에 나온 「누가복음전」이다.
그러나 성서번역위원회는 이런 수정본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완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이 일을 위임했다.그러나 이 일이 지연되었고 후에는 언더우드 대신 게일이, 아펜젤러 대신 스크랜톤이 이 일을 추진하여 1892년 1월 20일 마태복음서가 번역되어 「마태 복음전」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기존성경의 수정본이 아닌 국내에 서 번역된 첫 한국어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30만부 간행되었다.
8) 3.1항에서 3.4.항까지의 내용은 박창환, 「성경의 형성사」(대한기독교서회, 1969), 99-108, 원용국, 「성경형상의 역사」, 215-230, 그리고 한영세, 편, 「한국성서 찬송가 100년」(기독교문사, 1987)에 수록된 이덕주, “한글성경 번역사 개관,” 18-55를 참고하였음.
3.2 성경번역자회의 조직과 신약성경 번역 작업
한국어 성경번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는 1893년 5월에 조직된 상임성서 실행위원회였다. 영국성서공회 만주지부 책임자였던 켄 무어(A. Kenmure)의 내한을 계기로 성경번역을 새로운 차원에서 검토하게 되었다. 사역이나 수정 본은 한계가 있으므로 보다 완전한 번역본을 위해서는 새로운 기구가 필요하 다고 본 것이다.
이런 필요에 부응하여 1893년 한글성경 번역 사업을 관장할‘상임성경실행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가 조직되 었고, 그 휘하에 이 일을 실행할 구체적인 번역 위원회인 ‘성경번역자회’(The Board of Official Translators)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때 선임된 위원으로는 언더우드, 게일(J. S. Gale)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스크랜톤(W. B. Scranton) 등이었고, 성공회의 트롤로프(M. N. Trollope)는 개인자격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1895년에는 미국남장로교회의 레이놀즈(W. D. Reynolds)가 추가로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에서 언더우드는 위원장으로, 스크랜 튼은 서기로 선출되었다. 성경번역의 시도와 함께 1895년 성서공회가 설립된 것은 커다란 발전이었다.
성경번역은, 각 위원들은 분배된 신약의 책들을 독자적으로 번역하되 그리 스어 성경과 영어개역성경(Revised Version)을 대본으로 번역하되 한국인 조사들은 한문성경과 일본어 성경을 준 대본으로 참고하여 선교사들을 돕고,선교사들은 한국인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번역을 완성하면 다른 번역자 들에게 보내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다시 원번역자들에게 보내 검토하게 한 후 전체 번역자들이 참가하는 번역자회에서 토론과 표결을 거처 번역자회 에서 통과된 대본을 시안본(Tentative edition of the board)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이런 번역과정이 얼마나 충실하게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결과로 1895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간행되 었는데, 마태복음 외에는 개인역에 가까웠다. 번역절차를 거쳐 위원회의 공인 시안본으로 제작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 다. 마태복음은 아펜젤러가 1892년 번역한 마태복음전을 번역자회가 시안본 으로 승인한 것이지만 마가복음(아펜젤러), 요한복음(게일), 사도행전(게일)은 개인역본이었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