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남희의 수필 세계
- 촉촉한 인정과 서정의 불꽃 -
권대근
(수필비평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며
수필가인 소암 스님은 수필을 일러 ‘정의 문학’이라 했다. 정이란 인간의 영혼이 응결된 심성의 꽃이다. 맑은 영혼을 드러내는 투박한 그릇이요, 풋풋한 향기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인간애, 그것이 없는 수필은 이미 수필이 아니다. 인간학의 명제에 바로 답하지 못하는 작품은 이미 수필로써 실패한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도 이웃 사람과의 따스한 교감을 수필의 소재로 더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삶의 현장에서 유난히도 사람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증거다. 그녀는 수필을 통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정임을 말하고 있는 휴머니스트 작가다. 수필의 핵심은 원시의 정, 바로 수필의 향기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이 매력적 요소라면, 향기는 절대적 요소다.
정의 문학으로 불리는 수필의 향기는 외부의 번득임이 아니라 내부의 번득임이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유남희는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정을 수필이라는 따스한 동네우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고 있는 사람이다. 오래 전에 불교에 귀의하여 불심으로 세상의 그늘을 투시하는 자비심의 수행인으로 오늘도 성실하게 자기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정진하는 구도자적인 여인이다. 유남희는 일찍이 「문학시대」로 등단하여 문인이 되었지만 문단활동보다는 유아교육에 전심을 바쳐오고 있는 우리 시대 보기 드문 교육자다. 집과 가까운 K 대학원의 심리학과에 합격통지서를 받고도 전공 분야를 좀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어 굳이 먼 거리의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유아교육학과에 적을 두었던 분이다. 아이들을 위한 창작동화집으로 「생애를 빛낸 박덩굴」을 발간했고, 「우리 아이 이런 행동 어떻게 할까요」라는 교육도서를 낸 현직 유치원 원장이고. 「선한 님께서 다가오는 소리」라는 시집을 펴낸 바 있는 시인이자 수필가다. 그녀의 시가 사물의 허상과 진상, 세계의 이편과 저편 사이를 탐색하는 인식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녀의 수필은 자연의 빛깔과 인정의 향기가 서정이 되어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정감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글은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과 인연의 소중함을, 모성과 그리움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축복된 일이라고 느낀다. 녹녹치 않는 삶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 때문이다. 유치원에서 아이들로부터 내 영혼을 구제 받은 축복에서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만남에서 나는 인생의 기쁨과 희망과 절망과 서러움을 맛보아야했다. 무엇보다도 내 어머니, 정녕 한시도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내 어머니로부터 여성의 숨막힌 그리움과 뼈아픈 고뇌를 알았고 신앙과 연관하여 마음으로 만나는 스님들과 보살님들로부터 하루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미래를 배웠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만난 여인에게서까지 정말 이만큼 살다보니 사는 것은 거창하게 소리치거나 어깨에 힘주는 것이 아니라 참 사소하고 사소한 것들이 인간을 따습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는 작가의 말은 이 수필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녀 수필의 주제적 지향성은 크게 네 범주로 나뉜다. 첫째 범주는 유남희 수필의 거대한 물줄기로써 이웃 사람들과의 만남과 인연의 소중함에서 얻은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글이다.
<거지 성자>, <수녀님의 사랑>, <향기로운 가족>, <다시 젊은 엄마가 되고 싶은 그대에게>, <할아버지의 훈장>, <사서함으로 보내는 편지>, <인연으로 하여 1, 2>, <머저리의 변>, <한국을 빛낸 여성합창단>등의 작품이며, 두 번째 부류는 모성적 그리움과 진한 가족 사랑을 담고 있는 글들로 <어떤 회향>, <야, 어마 냄새다>, <인생은 한바탕 연극이다>, <요즘 아이들>, <살며 사랑하며>, <배냇저고리>, <누구네 집에서 자요> 등이며, 세 번째 군으로 묶을 수 있는 것으로는 자연 사랑과 식물성적인 서정의 노래다. <설중 매화>, <가을이 가기 전에>, <낙동강이 보이는 집>, <아스파라거스도 꽃이 피나요>, <환경에 적응하기>, <거꾸로 보는 세상의 재미> 등의 작품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질주하고 있는 변화에 대한 일종의 불안감을 표출한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유남희의 수필적 특성은 깊은 불교적 신앙심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육애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밤의 불청객>, <서설 내리는 창가에서>, <애기 왕사님>, <삼사순례>, <낮은 자리>, <능이를 만나다>, <새벽시장>, <페인트 칠을 하는 여자>, <과적 운행> 등의 작품은 종교 생활과 교육 활동에 관련된 일화를 소재로 쓴 수필들이다.
II. 유남희의 수필 세계
1. 일상에서 꽃피우는 인연의 소중함, 정의 노래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할 수 있는 글이다. 수필의 이러한 고유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렸을 때 그 글은 향기를 지닐 수 있다. 수필을 인간학이라 부르는 소이도 수필의 내용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유남희의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웃의 인연과 만남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인간애의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인연의 소중함과 만남의 축복이다. 유남희가 인정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강한 불교적 신심과 자비심이 원천으로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유남희의 <향기로운 가족>은 현실 속에서 보기 드문 훈훈한 인정을 펼쳐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접하고, 그 인정의 넉넉함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면 가져야 할 인간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때서야 남편이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 이 멋진 봄날에 만찬을 함께 합시다.‘하고 제안을 했다. 그런데 어느새 모두 차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손을 내저으며 아닙니더. 괜찮습니더했다. 나는 당황하여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식구들을 향해 앞으로 달려갔다.그냥 가시면 안 됩니다!
그 때 그 타이탄 트럭 유리창 안에 매달린 염주알이 눈에 들어왔다.그렇구나, 불보살이었구나!봄 날 시골 정취에 취하여 인생의 경고장 하나를 받은 나는 다시금 얼굴이 붉어졌다. 꽃이 아무리 곱기로서니 이렇듯 고마운 사람들의 정에 비할 수가 있을까? 아들딸 그리고 식구들이 모두 나서서 곤경에 처한 남을 도우는 이들의 모습.
아빠가 이리저리 끙끙 차를 들여다보며 애썼고, 엄마도 따라와서 함께 힘을 더해 주었다. 그 광경을 아이들도 숨소리까지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나 남을 도우는 것이 몸에 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그 아이들이 바라본 부모들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백 마디의 말보다 값진 산 교육이 아닐까.
활짝 웃으며 괜찮습니더하며 얼굴을 붉히던 그 가족들이 돌아오는 하늘의 보름달 속에 밝게 비치고 있었다.
- <향기로운 가족> 중에서 -
위의 작품은 가족과 함께 전원 주택지를 둘러보러 근교로 나갔다가 차 바퀴 두 개가 밭둑에 빠지게 되었는데, 지나가던 차의 구조를 받았던 경험을 수필로 쓴 글이다. 작가는 이 수필의 제목을 ‘향기로운 가족’이라고 정하고, 서두 첫 마디를 ‘봄꽃보다 아름다운 어느 가족을 만나게 되었다’라고 적었다. 시골집 뜰과 밭둑마다 은사리 꽃이 지천으로 피어 줄줄이 꽃 너울을 흔들며 잔잔한 몸짓을 하는 풍경을 눈이 시리도록 보았던 것이다‘는 도입부 단락의 보조 문장이 ’봄꽃보다 아름다운‘의 의미를 짐작케 한다. 인정을 베푼 경험의 기억보다 인정을 받은 흔적은 남기는 일은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우리 기억의 한 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인정의 샘물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아주 목적 없이 도로를 누비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그 바쁜 와중에서 온 가족들이 둑에 빠진 차를 구하기 위해 고분군투하는 모습의 실체화는 인정을 잃어버린 시대, 우리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아이들이 바라본 부모들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백 마디의 말보다 값진 산 교육의 본보기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자꾸 강조해주고 싶었다.” 그렇다. 작가는 등불이어야 한다. 작가의 이 말은 사회적 책무의 완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연하장을 썼다. 「선생님은 여전히 늙지 않으시는 군요,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지금처럼 사신다면 늘 젊은 엄마처럼 사실 줄 믿습니다.」 라고. 시간의 틈새를 내어놓지 않으시는 분. 선생님은 굳이 주택을 고집하며 작은 정원에 온갖것들을 기르고 있다. 푸성귀며 우리 풀꽃에서 작은 연못까지 만들어 놓고 갖가지 연꽃에서 시프레스. 물안개 등을 키워 항아리 뚜껑마다 분양을 해서 찾은 이마다 한 포기씩 들려 보내는 분이라서 그 마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을 늙을 시간이 없는 분이다. 그림 그리기에다 사진 찍기 등은 프로의 경지다. 틈틈이 글을 쓰시더니 지난 해에는 영남여성 백일장에서 입선까지 하셨다.
어찌 그분을 늙는다고 할까, 아직도 열정을 쏟아 부을 곳이 넘쳐나는 분, 그분을 대하면 늘 새벽 이슬을 먹고 막 피어나는 꽃잎 같은 싱싱함이 덤으로 전이되어 옴을 느낀다. 시너지 효과 같은 그 젊음 삶을 우리에게 오래오래 보여주소서!
- <다시 젊은 엄마가 되고 싶은 그대에게> 중에서 -
수필은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의 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진솔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J 선생님으로부터 손수 그린 묵화 엽서를 받고 느낀 심정과 그분의 살아온 삶의 향기를 독자에게 전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글, 그림, 사진 등의 예술 방면에 심취해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작가는 ‘어찌 그분을 늙는다고 할까, 아직도 열정을 쏟아 부을 곳이 넘쳐나는 분, 그분을 대하면 늘 새벽 이슬을 먹고 막 피어나는 꽃잎 같은 싱싱함이 덤으로 전이되어 옴을 느낀다.’는 바로 이 대목이 있어서 문학적 향취가 풍겨나는 것이다. 문학의 감동이란 결국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그것이 연상과 상상의 작용으로 이미지화 될 때, 문학적 감동이 찾아드는 것이다. ‘이슬을 먹고 막 피어나는 꽃잎’은 남보다 외롭고 힘들었던 과거를 간직하면서도 매사에 검소하며 겸손한 자세로 작은 일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에 비유할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작은 일에 감사하는 태도에 아무리 뻣뻣한 사람도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는 J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주제의식을 구체화한 좋은 본보기다.
나는 M동의 그 형님을 통해 나의 지난 날을 되돌아 보곤 한다. 팔남매의 맏며느리로서 벅찬 바람을 헤쳐온 그 세월들, 여덟 남매 키우시느라 고생하셨던 시어머님도 일흔 고개를 못 넘기고 돌아가셨고 그 후 10여 년 외로운 시아버님을 모셨지만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좀 더 잘 해드렸더라면 하는 후회로 마음이 아려온다. 이래서 주자십회(朱子十悔) 첫머리에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 라는 명언을 우리들에게 던져 주셨던가! M동 형님, 더도 덜도 말고 부디 있는 그대로 좋은 며느리로서 숱한 사연들 가슴에 묻고 오래 사이소.
- <할아버지의 훈장> 중에서 -
앞의 작품에 등장한 인물이 J 선생님이었다면, 위 작품에 등장한 인물은 K 형님이다. 난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연장자인 K 형님이라는 분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4대가 함께 사는 다복한 가정에서 시부모님을 두 분이나 모시고 사는 분이다. 이 수필이 주는 가치는 등불로서의 교훈적인 가치 말고도 유머가 있다는 점이다. 유머는 수필의 오미 중에서 하나로써 읽는 재미를 준다. 며느리에게 큰 실수를 하고도 권위를 내세워 회피하기보다는 사과를 마다않는 할아버지와 그런 엉뚱한 일을 일삼는 시아버지의 훈장 탄 일에 대해 모임의 회원들에게 자랑하며 기분 좋아하는 K 형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슴이 찡하게 울려오도록 그려내는 솜씨가 대단해 보인다. 이 수필의 백미는 마지막 결구 문단에 있는 자기 성찰 부분이다. 수필은 성찰의 문학이다. 가장 독자의 공감을 받는 부분이 성찰의 자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자기 아닌 다른 인물을 묘사하더라도 전개부 마지막 쯤에 가서는 자기에게 필발을 겨누어야 좋은 수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처럼 유남희는 득실거리는 사회의 군중 속에서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이웃의 미덕이나 미담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네 개의 부류로 나누어지는 수필적 특성이지만 주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어려움 속에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돕고 사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을 기억해 놓는 일만 해도 가치로운 일이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유남희의 수필이 주는 첫인상은 눈물겨운 따스함이다.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 교육대학원 유아교육과의 키가 자그마한 수녀님의 헌신적인 사랑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항상 누덕누덕 기운 옷에 커다란 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살았던 거지 할아버지 최귀동 노인도 등장한다. <거지 성자>란 작품 속에는 꽃동네의 안내장이 보이지 않으면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자 어머니를 보채는 교육청 모 장학사의 중학생 아들도 보이고 꽃동네를 일군 오웅진 신부도 보인다.
인생무상을 되씹으며 쓸쓸히 하산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도선사의 산사 위까지 등산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하더군요. 그때도 물통을 지고 들고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가을산을 내려오는 길바닥에 떨어진 낙엽에는 「나 이제 한 세상 잘 살다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귀거래사가 적혀 있는 듯 했습니다.
보살님은 다행이 부처님 품으로 귀의했으니 그 또한 소중한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잘 간직하여 간절한 원을 차근차근 이루어 가도록 빌어 드리고 싶네요. 보살님은 자동차 정비 기술에서 원예 기술까지 익혔다고 들었어요. 보살님이 왜 이리도 기다려질까요. 출소하거든 우리 꽃밭에 예쁜 꽃들이 철철이 이어져 피고 질 수 있게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어요.
- <사서함으로 보내는 편지> 중에서 -
위 인용문은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났듯이 영어의 몸이 되어 있는 이 보살에게 보내는 서간체 수필이다. 작가는 도선사에 들러 사찰의 길목에 적혀 있는 ‘자비스런 마음 앞에 적이 어디 있을 것이며, 하늘 아래 한 뿌리 아닌 생명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적힌 둘 기둥을 보고 서 있을 때, 마침 해가 지려는데, 이 모습을 본 작가는 ‘벙긋 미소 지으며 산 너머로 슬그머니 떠나려는 석양의 붉은 미소를 보았다’고 적고 있다. 부처님의 품으로 귀의했다는 이유로 소중한 인연으로 영어의 몸이 된 이 보살을 감싸 안는 작가의 모습에 우리는 경의를 표하게 된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최상의 지혜는 정의 교류가 아닐 수 없다. 정감이 흐르지 않는 인간 관계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유남희 수필가는 따뜻한 불심의 소유자로 누구보다도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는 자비심을 가졌으며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의 미소를 통해 부처님에 귀의한 이 보살의 평화로운 마음의 정경을 상상하도록 배려한 문학적 장치는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는 점이라 하겠다.
“뭐가 터졌어.”
가슴이 덜컹했다. 아 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저 여자도 여자구나 라는 생각에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아팠다. 일단 목욕시킬 일은 포기해야만 했다. 슈퍼에 들러 생리대를 사고 그리고 그녀에게 줄 팬티며 옷가지를 챙겼다.
그리고 그녀를 태우고 내가 다니는 사찰로 갔다. 머리도 감기고 옷을 갈아 입혔더니 하얀 티 셔츠를 입은 모습이 딴 사람 같았다. 그렇게 만난 그녀는 나를 언니라 부르며 마치 신데렐라 마냥 변하여 부처님 품안에서 안식을 얻어가고 있었다. 항상 웃는 탓으로 신도들에게 사랑을 받는 그녀가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녀는 마치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연꽃인지도 모른다. 나를 잠시 정화시켜주는 보통 여자로 변해가는 그녀를 바라볼 때 마다 인연은 자꾸 눈물을 흘리게 한다.
- <인연으로 하여 1> 중에서 -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에 비유된다. 수필은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 <인연으로 하여 1>은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다. 거지 여인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로 큰 감동을 준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거지인 듯한 여인을 사찰에 보내 새 삶을 찾아준 작가의 훈훈한 인간애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불심이 강하다 해도 거리의 버려진 사람과의 인연을 맺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역할이든 희생과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맑은 마음 속에 목련을 피워낼 수 있는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 것에 우리는 안도할 수밖에 없다. 새까만 얼굴에 철지난 옷을 입고 있는 거지 여인을 그녀는 정의 향기를 흘려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 같은 여인으로 만들어 놓은 데서 우리는 성자의 모습을 본다.
유남희의 수필은 <머저리의 변>에서 알 수 있듯이 정으로 짜여진 천이다. 그녀는 연속극을 보다가도 가슴 아픈 장면이 나오면 참지 못하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다. 이런 자신을 보고, 팔푼이가 아닌가 자학하기도 하며, 어려운 이웃에 무관심한 현실에 혼자 가슴 아파하는 자신을 머저리라 자인하며 자기 일이 아니면 외면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비정함에 대해 그녀는 ‘무관심한 죄, 이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개탄한다. 술 취한 젊은이를 위한 작가의 한마디는 그녀가 무정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이유 있는 항변이다. 유남희는 다양한 인간 관계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 인연을 소중하게 감싸 안고 아름다운 인생이란 한 필의 비단을 짜고 있는 직녀인 것이다. 건조한 현대적 인간 관계를 사랑의 빛깔로 채색하면서 그 위에 신록의 향유를 발라 부드럽게 하는 그녀는 성자적 삶의 태도는 마땅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우쭐거려도 현학적인 언변으로 뽐내도 안 된다. 마음을 열고 이웃과 호흡하며 맺은 인연을 삽화로 엮어 그려가는 정스민 글들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인 것이다.
2. 눈물보다 끈적한 모정의 향기, 그리움의 미학
모성과 그리움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여성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이하여 파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움은 언어적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모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모성 체험과 같은 자녀와의 관계성은 여성의 도덕적 인식을 구성하는 요체다. 여성에게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모성성을 요구하는 어머니라는 위치가 가장 확실하게 그녀를 확실한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의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위치는 가정이며 여성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유희남은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손녀들을 둔 할머니로서의 전통적 지위와 역할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모정의 원리가 뜨겁게 솟구친다.
늦게 결혼한 큰딸이 뚱뚱보 배를 안고 내려왔다. 때마침 작은 딸도 일본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하여 조용하던 우리 집은 마치 성시를 이루듯이 활기를 찾았다. 큰딸 출산을 앞두고 염려되는 바가 컸지만 내색할 수가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난산으로 온 가족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다행히 유능한 의사를 만나 수술을 하지 않고 자연분만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모성의 무서운 힘이 어떤 것인가를 새삼 실감했다.
의사는 새 생명에게 대단히 죄스럽지만 산모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아기를 살릴 것인가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때 어쩔 줄을 몰라하며 당황하는 사위는 산모를 택하겠다고 했다.
그 순간의 이 애미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그러나 하늘의 도우심으로 길고 긴 사투 끝에 드디어 두 생명이 다 살아났다.
- <야, 엄마 냄새다> 중에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정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현대인들은 자식들에게 능력되면 대학까지 보내주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불편 없이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부모만이 베풀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유희남은 이런 진리를 작품을 통해 잘 보여준다. 두 달 간격으로 두 공주를 안겨준 딸애들의 딸들을 맞이하여 이 방 저 방 눕혀 놓고 유난히 무더운 여름을 보내면서도 행복해 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모정의 신비함이다. 어머니로서 딸과 소녀들 간에 오고가는 사랑의 화음을 들으면서 감동을 만끽한다. ‘야, 엄마 냄새다’하는 손녀들의 엄마 사랑을 들고도 뭉클한 감동에 젖는 것은 그녀의 자식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혈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아이가 어느 새 커버려 짧아 진 소매 끝으로 작은 두 주먹이 나와서 제 콧등을 할퀴고 눈을 비벼대는 그 배냇저고리의 짧아진 소매 끝에 어머니는 다시 천을 덧대 주셨다. 그 옷으로 둘째, 세째, 네째까지 입다 보니 젖에 절여져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나는 그 작고 작은 배냇저고리를 옷을 버리지 못한다. 네 아이들을 맞이한 그 소중한 옷을 락스에 삶고 뽀얗게 씻어 가제로 싸서 아직도 장롱 서랍 제일 소중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가제천 배냇저고리를 펼쳐놓고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 본다. 우리 아이들 사 남매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게 한, 한 땀 한 땀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그 옷을 통해 나는 당신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던 가를 가슴 아프게 느끼고 있다. 소매 끝에 날개를 달고 있는 작고 작은 배냇저고리를 통해 4남매의 어린시절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아련한 그때의 나의 행복과 함께.
- <배냇저고리> 중에서 -
어머니의 사랑만큼 고귀한 것도 이 세상에는 없다.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연민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공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일 수 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유희남의 수필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맛에는 이웃 사람들과의 인연의 소중함뿐만 아니라 진한 모성의 향기도 있다. 작가는 ‘하얀 가제로 겹겹이 싸서 장롱 맨 구석에 감추어 둔 배냇저고리를 펼쳐 본다. 친정 어머니가 첫째가 태어나면 입힐 요량으로 만든 옷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배냇저고리를 화두로 해서 어머니의 고통스럽고 한 많은 삶을 들려주고자 한다. 짙은 그늘로 드리워져 있었던 친정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그리움이 되어 퍼져나간다. 이러한 정서는 ’나는 가끔 가제천의 그 옷을 펼쳐놓고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 보곤 한다‘는 진술에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옷을 입고 잘 자라준 아이들의 옷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장롱 맨 구석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눈물을 삼키며 어머니의 사랑과 처절한 삶을 반추하고 있다. 어느 자식이든 모든 인간에게 그리움의 대상은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뱃속은 모든 이들의 영원한 본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 가는 열차를 탔다. 경부선 상행열차, 숱한 세월 동안 설레임을 안고 어머니를 뵈러갈 때마다 나를 싣어주던 그 열차 시간 속을 헤치고 달려가 어머니와의 만남을 제공해 주었다. 때론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부딪쳐 도피하듯 어머니를 찾으면 어머니의 그 고결한 모습에 머리가 숙여졌다. 어머니는 언제나 연륜의 직감으로 말씀하셨다.
“얘야, 내 걱정말고 너희 시어른들 잘 모시고 남편 위하고 참고 살아야 한다........”
멀어져 가는 딸의 모습이 가물가물 안보일 때까지 속 눈물을 흘리시며 울고 계셨던 어머니 였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가 어언 몇 해였던가. 그렇게도 나를 들뜨게 했던 이 열차 타기는 시들해졌고 고향 간이역은 예전처럼 정다워 보이지 않았다. 애써 드나들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여겨질 즈음 그 할머님 마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달리는 차창을 스쳐 결 고운 은행잎이 노랑나비 되어 폴폴 날리고 있었다. 그 위로 하얀 구름 한 조각 머뭇거리며 할머니의 하얀 영상을 떠올려 주고는 사라진다.
- <어떤 회향> 중에서 -
유희남의 수필에서 어머니는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느낄 때, 달려가는 피안의 세계였다. 자신을 생전에 끔찍이 아껴주었던 한 할머니의 부음을 받고 친정 어머니를 애틋하게 기억하며 그리움으로 가득찬 심사를 유감없이 토로하고 있는 작품이다. 누구에게나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어머니다. 출가외인인 여성에게 더욱 어머니의 품은 안락한 둥지와 같다. 여성 작가의 글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부곡도 더러 보이는데, 유희남의 글에서는 유독 ‘어머니’에 대한 기억만이 선연하다. 그것은 어머니가 그녀의 가슴 안에 뚜렷한 사랑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고향에 어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작가의 어머니는 멀어져 가는 딸의 모습이 가물가물 안 보일 때까지 속 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셨던 분이기 때문이고, “얘야, 내 걱정 말고 너희 시어른들 잘 모시고 남편 위하고 잘해라”고 말씀하셨던 그분에 대한 고마움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인간사에서 절실한 관심사와 문학적 주제는 사랑과 죽음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전자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삶의 온기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후자는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든 다가올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코스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모든 이들이 기뻐하고 축하해 준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들었던 이가 세상을 떠날 때면 슬퍼하며 통곡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한 대기업가의 자살에 대한 비극성이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왜 사람은 죽으며, 사람이 죽으면 슬피 우는 까닭이 무엇일까? 왜 그렇게 오랫동안 애통해 하며 지내야 했을까? 다윗 왕도 아들 압살롬을 잃었을 때 머리에 재를 얹으며 성루에 올라 심히 통곡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평생 사랑하고 정들었던 사람이 죽었을 때 애통해 함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생과 수고로 얼룩진 삶이었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한 번 죽으면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인간적인 정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사람이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겪게 되는 것은 이별의 예감과 그것으로 받는 충격의 아픔이다.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인연의 끈을 하나 하나 내려놓으면서 작가 역시 조금씩 아픔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 아픔만큼 성숙해지기에 이러한 과정은 남은 자의 영혼을 살찌게도 한다. 유희남은 장롱에서 빳빳한 지폐 한 장 손에 쥐어 준 기억을 마지막으로 남겨주고 떠난 어느 할머니를 애도하는 시를 작품의 마지막에 장식했다. 이름하여 ‘마지막 배웅’이다. 첫 연은, “솜털처럼 가벼워진 몸/ 새처럼 날아 가셨는가/ 잠자리 날개를 달고/ 하늘 끝까지 올라 가셨는가”하면서 노인의 천국행을 기원하고, 마지막 연은, “살아 생전 내 손 꼭 잡고/ 사랑한다 사랑한단 말을/ 지긋이 띄운 미소로만 되뇌이시던/ 피 한 방울 썩히지 않은/ 물망초 같은 할머니”라고 자신을 사랑했던 고인의 모습을 반추하며 그리워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떠나 보내는 일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시련이다. 만남의 끝에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이 존재할 수박에 없고, 그것을 운명으로 수용해서 보편화하지만 생각하면 야속하게 느껴져 가슴에 거센 물살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혈연의 끊어짐이 그러하다. 시인이기에 더욱 절절한 시구는 눈물에 젖은 절규다.
나는 문득 양산 통도사(梁山 通道寺) 조실 큰스님 경봉 대종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너거 연극 한번 잘 해 봐라, 연극 말이다.” 90을 바라보는 그 노안(老顔)에 어린애 같은 미소를 띄우시며 가지런한 흰 이빨을 보이시면서 하시던 말씀.그렇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각자 짜여진 각본을 받아들고 나와 한바탕 연극을 하고 가는 것이다. 그 연극의 줄거리는 기쁨일 수도, 슬픔일 수도, 괴로움일 수도 있는 것. 그렇지만 열심히 자기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기를 잘 못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각기 다른 연극들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5월에 돌아가신 우리 아저씨는 공무원 박봉생활에 흔해빠진 관광여행 한 번 못 가보셨다며 자랑삼아 ‘나 이제 퇴직하면 영감 할멈 둘이 구경 다닐 것이다.’ 하시더니, 자기 연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펑크내고 말았다.
- <인생은 한바탕 연극이다> 중에서 -
어쨌든 인간의 죽음이란 최대의 난제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또한 죽음을 이긴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유남희 수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죽음에 대한 사고와 감성이 유례없이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당수의 작품에서 죽음에 대한 관심이 팽배된 나머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지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수필에서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대 문학은 죽음의 고찰에서 비롯되었으며 현 세기의 문학 세대를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바로 죽음의 사실에 반응하는 그 방법 여하에 있다고 한 루이스의 지적이 우리 수필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중되고 있는 셈이다.
정신적으로 안주할 수 있는 과거와 약속된 미래에의 가능성으로부터 단절되어 버릴 때 일반적으로 죽음의 의식은 싹을 틔우게 된다. 지올코우스키는 현대문학의 차원에서 죽음이 현저해진 요인은 바로 사회적인 붕괴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격렬해진다고 보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면서 신념의 갈등과 마주치게 되면 죽음의 의식은 개개의 인간 정신에 불안하게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삶이 끝나면 어찌 되는가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나 인생에서의 죽음이 특수한 관계성이므로 어느 누구도 어느 곳에도 시원한 답변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이 눈앞에서 전개된다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삶에 마지막 종말로서의 죽음이 살아남은 자의 현실적인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유난히 정이 많은 작가에게 있어 죽음은 유난히 아픈 기억이 되어 뇌리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누구 집에서 자죠?>는 넷이나 되는 손녀들의 재롱을 받아 주느라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행복하게 사는 일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영악한 요즘 아이들 봐주기가 싶지 않다는 푸념이 엄살 같게 느껴질 정도로 손자 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전통적인 한국의 할머니를 연상케 한다. <살며 사랑하며>는 조카인 미영이에 얽힌 이야기를 화소로 해서 가족간에 우애를 바탕으로 서로 돕고 의지하는 생활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새해 이른 아침이면 모여든 가족들의 넉넉해진 미소와 따뜻한 마음씨에 안도하는 큰엄마로서의 위치는 항상 아랫사람들 걱정이다. 살아가는 얘기로 떠들썩하다가 가족들이 떠나가면 썰렁함을 느끼는 작가는 동서들에게 유난히 신경을 많이 쓴다. <요즘 아이들>은 영악한 외손녀 둘의 옛날 같지 않은 모습에 놀라며, 세상이 변하고 아이들이 의식 수준이 어른을 능가할 정도로 높아졌는데도, 아직도 아이들을 아이로만 보려는 어른들의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수필이다. 아이가 들어가면서도 변화를 따르지 못하면 어른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작가 나름의 인식이 주제의식으로 처리된 수필이다.
3. 자연 사랑과 식물성적인 고향의 노래
유남희 수필군에서 자연 친화를 통해 환경보호를 주장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은 작가로서의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서 작가의 시야가 밖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삭막한 콘크리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의 마음 속에는 떠나고자하는 심리와 함께 자연에 대한 동경이 싹트게 마련인 것이다. 더욱이 생활이 윤택해 지면서 가족의 여가 생활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면서 많은 도시인에게 이웃과 같이 자연은 가장 가까운 벗으로 자리 매김되는 것이 상례다. 자연과 멀어져 있는 생활 공간은 자연스럽게 작가를 자연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소품들은 어쩌면 남편과 자식이 빠져 나간 사이의 시공의 공백을 메워주는 매개로 안성맞춤이기에 주부 작가들은 외출의 결과로 얻은 자연과의 교감을 꽃이나 나무, 바람 등을 소재로 해서 수필화했다고 볼 수 있다. 건설과 개발, 주거 안정과 생활의 편리라는 미명 하에 잘리고 파헤쳐지고 있는 산허리의 아우성을 듣고 자연을 보호하자며 머리띠를 메고 투쟁하는 주민들과 공사를 강행하려는 건설업자들의 실랑이를 신문이나 TV에서 자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주부작가들은 수필 속에 작가의식을 심으려고 자연의 파괴문제를 터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정에 취해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여성수필에 대한 비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겠다.
나는 목련 나무를 쓰다듬으며 귀엣말을 했다. ‘너는 이제 대학으로 가거라. 우리 작은 아이들이 올려다보기에 너희들은 너무 키가 크다. 그 곳에 가면 키 큰 젊은이들이 너의 그 고고한 자태를 보고 반가워 할 거야.’ 나는 그렇게 미리 이별을 알려 주었다.
나무도 옮길 때는 귓속말이라도 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 주는 것이 인간이 자연에게 할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도 가시처럼 걸려있는 그 장미꽃들의 거취 문제로 고민 중이다. 그렇다고 S아파트에 가서 그 벽오동 심은 뜻을 거두고 옮기라고 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고 학교는 학교대로 그 느티나무를 심은 뜻이 있을 터이니 대학에 가서 왜 벽오동이 있는데 느티나무를 또 심었느냐고 시비를 할 입장도 아니다.
- <환경에 적응하기> 중에서 -
자연은 삶의 근원이며 인간이 마지막으로 귀착해야 할 영원한 요람이다. 유남희는 위 작품을 통해 환경을 잘 가꾸고 보존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옮겨가는 나무에 쏟는 애정이 엄마나 강한지 귓속말에 다 드러난다. 서구에서는 주로 자연을 도전과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했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자연을 어디까지나 신뢰와 조화의 대상으로 답아 들려 왔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은 한마디로 질서의 융합체다. 선명한 지향점을 향해 나름의 운행을 반복하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 안에는 단순한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는 실천덕목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절대자인 주체가 불완전한 인간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유남희의 수필적 지향이 일상의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자연의 숨소리와 그의 맥박, 의도를 점철해 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수필의 문학성을 더하는 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드디어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보라빛이 돌더니 이내 연녹색의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 푸른빛으로 바뀌어 가고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그런데 산이 활발한 움직임으로 봄을 맞이하는 어느 날 새벽, 천둥번개가 치는 듯한 괴성이 들려왔다. 잠을 깨어 부신 눈으로 내다본 뒷산에는 우지끈 나무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영문을 알고 보니 옆 산을 깎아 20층 아파트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건 말도 안돼. 내 창문 옆 그 좋은 산언덕을 깎다니 이건 사기야.’ 나는 허탈한 상태로 주저앉고 싶었다. 내 가슴 한켠이 깎여져 나가는 아픔 같은 것이었다. 나무들이 쓰러지며 제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른 듯도 했다. 남편은 투덜대며 억울해 하는 나에게 답답하다는 투로 ‘어쩌겠어. 자기 땅에 공사를 한다는데.’ 라고 역시 억울한 속을 체념으로 나타냈고, 나는
‘저렇게 작은 땅에 허가를 내줘요? 가파른 산에 곧 산사태라도 날 것 같은데.’ 라고 남편을 향해 괜한 울화를 터트렸다. 그랬다. 남편 말대로 자기 땅에 공사하는 걸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무엇에 된통 속아버린 느낌은 좀처럼 삭힐 수가 없었다.
- <낙동강이 보이는 집> 중에서 -
위 수필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말하는 수필이다. 작가는 자연을 고향의식으로 수용하는 성숙한 의식을 들어 내보인다. 한 가지 사물을 사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보여 주는 정취 속에서 자연의 외경을 느끼며, 자연이 신의 섭리를 따르고 있음을 파악하고 자연 순응적 삶을 추구 하려는 사상이 녹아 있는 작품들은 하나 같이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고향이고, 또 인간이 돌아가야 할 최후의 안식처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자연관을 보이는 것은 인생에 대한 연륜과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건강의 필요성이 중대됨으로 인해서 시작하고 있는 약수터 산책이나 등산 같은 건강 유지책의 일환이 자연 친화적 삶을 더욱 조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노자가 보는 무위자연의 세계가 유남희 수필의 주제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남희의 작품 중에는 인간이 고향을 망가뜨리는 일이 있을 수 없듯이 인간의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환경보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글이 여기저기 많이 보이는 것이다.
이맘 때쯤 누렇게 잘 익은 벼이삭 사이 논둑으로 툭툭 튀는 콩깍지를 밟아가며 우리는 천방지축으로 해지는 줄 모르고 들을 헤매며 메뚜기 잡는다고 뒤따르다 앞서가는 친구가 ‘뱀이다-’하고 소리치면 기겁하여 도망치곤 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만 같다. 그리곤 뱀은 일자로만 달린다며 꼬불꼬불 다리를 꼬아 팔자로 뛰면서 소리를 질러대며 뒤돌아보면 어느새 뱀은 간 곳 없고 새끼줄이 늘어져 있었다. 그것에 놀란 개구쟁이들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웃는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했다.
- <가을이 가기 전에> 중에서 -
고향에 대한 작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한 작가의 출생이나 성장에 대한 개인사적인 사실만이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진짜 돌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애향적인 소재의 발견은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 유남희 수필에서 발견되는 고향을 소재로 하는 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작가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다. 오랜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땅을 시집이라는 이름으로 등지게 됨으로서 그 기억들이 고향을 환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에 대한 완고할 정도의 애정이며,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라고 볼 수 있다. 유남희 글에는 서정이 갈려 있다. 현실이 각박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짙은 그리움의 향기가 서려 있다.
유남희 역시 어느 여성 작가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바라고 소망하는 곳에 평생을 젖어 살 수 없기에 그녀도 '고향 마을이 누구에겐들 설레지 않으랴만, 지붕마다 빨간 고추가 탐스럽게 널려 있고, 그 옆으로 보름달 같은 박덩이가 보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풍성하고 마음도 넉넉했고 옹기종기 작은 초가지붕들의 낮은 담장 사이 정감이 오가는 평화로움 그대로였다. 잘 살아 보자는 새마을 사업으로 다른 하나는 얻었지만 아쉽게도 우리들의 맥을 이어온 정취는 자취를 감추고 울긋불긋한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로 둘러친 담 벽은 이웃을 차단했고 바람이 사이사이로 솔솔 불어오는 싸리 문 역시 철 대문으로 꼭꼭 닫힌 시골이 되고 말았다'고 하면서 예전과 달리 낯선 곳으로 변해버린 시골의 풍경과 세태에 대한 서글픈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애향적 정열은 가정사의 단조로움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가슴에 지니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은 한다. 고향은 그러한 의미에서 유남희에게는 위안의 장소다. 이 작품에는 유난히 고향에 대한 향수가 짙게 서려 있다.
4. 신앙심으로 꽃피우는 삶과 교육애
수필의 주제는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수필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올바르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수필가는 워드워즈가 말한 "모든 시인은 교사다"라는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수필은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시킴으로써 바른 인생의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즉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모색이 있어야 한다. 더 이상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사실에 머물러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좋은 수필이 못된다. 유남희는 독실한 불교 신자다. 불가의 가르침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아 구도자적인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다.
그 후부터 벌써 3개월째. 그러나 죽을 정도가 아니니 미련하게 병원 한번 가지 않고 그냥 살고 있다. 수영, 등산, 헬스를 권하지만 나에게 그런 여유가 있을까? 귀부인들께서 서로 얼굴들을 마주보고 눈을 끔벅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야~, 마 우리가 행복한 줄이나 알제이.”
자기네들의 위치와 행복도를 재인식하는 계기를 마련 해 준 것은 완전 파김치가 된 내 처지였던 것이다.
“맞아, 직장과 가정을 원만히 병행해야 한다는 것은 힘든일이야. 이제 몸도 돌봐야지” 그들은 입을 모아 나를 위로했다.
나도 이제 짊어졌던 짐을 하나 둘 서서히 풀어놓을 때가 된 것 같다. 그들과 헤어져 오는 길목에 그날따라 이리 저리 뒹굴고 있는 벽오동 잎이 눈에 자꾸 밟혔다.
- <과적운행> 중에서 -
유남희 원장은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 아이들과 같이 하는 교육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한 여러 모임들을 정리하고 있는 중에 시 지정 시범 유치원 운영이라는 과제를 받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수필이다. 그녀는 일을 비워내는 과정에 있었지만 아이들의 인성 교육에 관계된 교육적 사업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소신을 가진 유남희는 염산으로 해야 하는 화장실 청소도 교사들에게 위험하다고 해서 직접 자신이 할 정도로 일선 교사들을 아끼는 분이다. 몸이 상할 정도로 유아 교육에 전념하다보니,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볼 겨를이 없다는 작가의 말, 교육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되새겨 볼 말이다.
조그만 사자 등에 개구쟁이 아이들은 달랑 올라앉아 좋아했고 나도 그것이 내 즐거움인냥 덩달아 기뻐했지만 사자는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거기다 비바람과 햇빛에 퇴색되면 아무 페인트나 옷을 입히는 것으로도 기분 좋았다.
페인트도 성분이 각각 다르다는 것은 그 후에서야 알았다. 유성과 수성, 내부와 외부에 바르는 것이 다 다르지만, 공사 때하고 남는 것만 있으면 아까워 붓질을 했더니 수성 위에다 유성은 뭉개어지고 들떠 일어나기도 했다. 신나를 섞어야 할 유성에 물을 섞기도 했고 수성에 유성을 부어 보면서 이제는 제법 페인트에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손때가 묻거나 물감이 묻은 자국만 페인트 통을 들고 붓질을 했다. 그러니 늘 산뜻해져서 아이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언제나 아이들보다 더 즐거워진다. 또한 우리 두 기사 아저씨가 틈틈이 잔손질을 해주신다. 벌려 놓기만 한 내 일감을 늘 마무리해 주는 셈이다.
- <페인트 칠하는 여자> 중에서 -
이 작품은 작가의 따뜻한 감정이 대상과 상호 삼투되어 동일시를 이루고 작품 속에 자기를 용해시켜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공감과 감동을 주고 있는 수필이다. 무엇보다도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수필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아이들을 보는 작가의 눈이 사랑으로 그윽하다.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서 사자 구조물 등에 페인트 칠을 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인생에는 소중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생명의 본질은 사랑의 실천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외면한 삶은 겉으로 보아 화려하고 찬란한 것일지라도 항상 비어있고 시장한 것일 수밖에 없다. 사랑이 결핍된 삶은 겉으로 보아 그것이 성공한 듯이 보이는 것일지라도 결과적으로 패배요, 헛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랑에의 지향이나 그 실천 의지가 없는 인생은 실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토록 귀한 것이 사랑이기에 그것이 결핍된 삶은 비참한 것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수필적 화자가 갖는 내면의 아름다움이다.
수필은 정의 문학이다. 무엇보다도 수필가가 가져야 할 것은 따뜻한 정서다. 아이들은, 아동들은 무엇으로 자라는가. 부모 또는 교사의 사랑으로 자란다. 유남희는 가슴을 활짝 열고 아이들 받아들여 뜨겁게 사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은 사랑이라고 하면 흔히 감성의 일, 혹은 감정의 표출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아름답게 승화된 감정도 사랑의 정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사랑은 충동적이며 찰나적인 욕구와는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다. 사랑은 감성과 지성과 이성과 의지, 이 모두를 배합하여야 이룩할 수 있는 전인적 결단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아이들을 향한 교사의 정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수필은 정의 문학이라는 명제에 비추어보면, 주제 지향성 면에서 이 수필의 가치는 충족되고도 남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사랑으로 가득 차있다.
분명 우리말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더욱 내가 놀란 것은 수행원이 문을 열고 나를 부르기 전에 벌써 애기 왕사님이 맨발로 나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뜻밖에 놀라운 광경에 몸둘 바를 몰랐다. 나는 급히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무릎 키로 앉았다. 뒤쫓아 온 왕사님은 숨을 할딱이며 내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크고 맑은 눈으로 내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무슨 말을 서로 할 것인가……, 조그마한 손으로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있던 엄마를 만난 듯이 내 두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두 팔로 나를 껴안고 짧은 팔로 내 등을 다독여 주는 것이었다. 그럴 때는 마치 엄마가 애기를 품어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아니 부처님께서 나를 위로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를 끌어안은 어린 왕사님의 콩닥콩닥 뛰는 가슴의 맥박소리가 내 심장에 전해져 왔다.
나는 알 수 없는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나와 왕사님은 말은 통할 수는 없지만 눈으로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계속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는 천천히 들고 있던 호신경을 손에 꼭 쥐어드렸다.
- <애기 왕사님> 중에서 -
위의 작품은 티벳의 링린포체 왕사를 친견하게 된 과정을 감격적으로 그리고 있는 수필이다. 서울 친척 결혼식에 갈 차표까지 예약해 놓고도 이를 물리치고 일곱 살 어린 왕사를 친견하기 위해 제주까지 달려가는 것은 얼마나 신앙심이 깊은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오직 부처님 앞에만 서면 한없는 환희와 기쁨과 슬픔을 토해내고 싶어 했던 작가는 이와 같은 왕사의 친견을 부처님의 자비라고 굳게 믿는다. 그날의 감격을 삶의 깊은 고뇌를 뛰어넘는 계기로 삼는 유남희는 이 수필의 마지막에 ‘왕사님과의 잊지 못할 만남을 통해 간절한 화두를 하나 간직하게 된 것은 우연만이 아님을 나는 믿고 있다’고 적고 있다.
숙업(宿業)으로 이루어져온 내 업연(業緣)을 이제야 조금은 알 듯도 하다. 늘 바쁜 환경에 휩쓸려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습성. 어찌 전생의 과거를 모를 리 있나마는 차지한 이 자리가 늘 내 자리 같지 않아 편치 못했던 지난 날들이었다. 올해는 공부를 한답시고 하안거에 등록은 했으나 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잡다한 일 때문에 철야 정진에 번번이 빠져 버리지 않았던가.
이번 동절기에는 단단히 각오를 하고 열 나흘 입제일에 그래도 일생일대의 원을 세워둔 터였다. 12월 2일 교사불자회의 삼사순례 법회에 꼭 동참을 독려해오신 박 교장 선생님의 간절한 부탁도 있었지만 일요일에는 주변의 한적한 암자를 돌기로 하여 이번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 <삼사 순례> 중에서 -
삼사순례는 1970년대 후반 무렵 대덕 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불명을 얻었던 다솔사를 거쳐, 와룡산 백천사와 고성 옥천사를 순례하는 삼사순례 법회를 통해 백팔번뇌로 무디어진 영혼을 일깨우고자하는 작가의 염원이 담겨진 수필이다. 부처님 앞에 서면 항상 좋은 교사로서의 길을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사찰’은 삶의 동반자일 수밖에 없고, ‘부처님’은 지혜의 등불이 아닐 수 없다. 불교적인 인생관에서 출발하는 ‘인연’의 소중함을 간직한 채 ‘자기를 낮추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고 여기는 작가이기에 깨달음의 행보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III. 나오며
이상으로 유남희 수필 세계를 비교적 소상하게 살펴보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 수필들은 불교적 신앙심의 흔적이 가득하였으나 종교적인 무거운 주제로 독자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식이나 관념의 노래라기보다는 일상의 소중한 체험에서 인연을 건져낸 글이기에 그녀의 수필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향기가 풍긴다는 게 강점이다. 유남희의 수필의 특징은 도입부부터 평온하다. 자연의 서정이 물결치는가 하면 인정의 넉넉한 품이 있어 좋다. 그냥 스쳐 지나는 인연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만남의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삶에서 영원의 여운을 느끼게 한다. 인연을 향한 불심은 자기 존재의 성찰과 인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완성에 이르는 구도의 길에서 찬연한 꽃을 피우고 있다. 모든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불교적 인생관과 선의 경지는 그녀의 수필을 포근한 어머니의 치마폭처럼 따스하게 한다.
수필집 「인연은 눈물을 흘린다」는 그녀의 처녀 수필집이다. 처녀 수필집이라는 깃발을 당당히 들고 수필의 길에 나섰으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좋은 인연을 발견하는 데 전념하기를 당부하고 싶다. 처녀 수필집으로 이만한 품격을 갖춘 것은 그만큼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수필은 수필적인 생활에서 찾아지는 법이다. 사람들과 인연의 소중함을 그려내는 휴머니즘 수필에서부터 불교적 신심이 물씬 풍기는 사찰순례 수필까지 다양한 세계를 확보하고 있는 그녀의 수필 영토를 작가적 삶에 연계시켜보면 그녀의 인생관과 삶의 철학이 그대로 드러난다. 신앙인으로 작가로서 또 교육자로서 그리고 모범적인 주부로서 누구보다도 깨어있는 자세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가족사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작가의식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등 그녀는 수필의 사회적 역할에도 배려를 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수필은 완성의 문학은 아니다. 어쩌면 완성을 향해 가기 위해 우리는 수필을 쓰는지도 모른다. 주제적 장르로써 수필은 무엇보다도 주제의 내면화를 요구한다. 유남희는 수필의 제목을 제재로 정하고, 수필의 결미를 여운적으로 처리함으로써 본격수필이 요구하는 작품 외적 조건을 나름대로 충족시키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모자람이 없다. 가족을 다루면서도 가족사적인 문제에 머물러만 있지 않고 시선을 공동체적인 삶에 겨눔으로써 언제나 가난한 이웃의 그늘을 포착한다. 인연의 법칙으로 이웃에 그리움을 흘리는 일이나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는 작가이기에 우리는 그녀의 다음 작품에 더 기대를 걸 수가 있는 것이다. 유남희 수필가가 걷는 인생의 길은 구도의 길이니만큼 더욱 더 문학성을 갖춘 작품을 써내리라 확신해 본다. 본격수필의 잣대를 들이대면 속아내어야 할 작품들도 더러 눈에 보이지만 첫 수필집으로 이만한 맵시를 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쪼록 이 수필집 발간을 계기로 해서 더 큰 작가로 성장하길 바란다.
*저작권은 권대근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