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검사 필요 없다
이연희
"아이고, 야들아, 밤에 잘 잤나? 안 춥더나?“(")
"누군데?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데?“(")
(혼잣말처럼 들리는지 친구가 묻는다.)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같이 다닌 절친 셋이 가을 여행을 떠났다. 자주 가던 동해를 뒤로하고 이번에는 서해 쪽으로 가기로 했다.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바다를 보고 산림욕도 하자. 덤으로 해 지는 것도 즐기기로 의견을 모았다. 장태산 자연휴양림을 숙소로 정하고 대전의 맛집과 가까운 바다도 검색했다. 무창포 바닷가와 변산반도와 세종시까지 접수할 예정이었다.
서울 친구가 차를 가져오기로 했다. 우리는 각자 대구와 경주서 출발해서 대전역에서 만났다. 맛집 찾아 민생고와 카페인을 해결하고 느긋하게 휴양림에 도착했다. 한 시간 정도 휴양림(을) 산책을 하고 들어가자마자 셋은 지구를 등에 짊어졌다. 방바닥은 따스하고 공기는 시원해서 우리 같은 해 (햇)늙은이 지내기에 딱 좋았다. 무슨 (오만) 얘기가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왔다. (※ 남편 흉보는 얘기를 약간만 곁들였으면 좋겠네요.)밤에 잠은 푹 자질 못했지만(,) 기분은 최상이어서 여고 시절 수학여행 온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연회색 커튼을 친 듯한 거실 창문을 열고 신선한 아침 공기를 받아들였다. 9월 말인데 산속 공기가 꽤 차서 정신이 번쩍 난다. 나무 데크에 흔치 않은 삼색 고양이 두 마리가 조신하게 졸고 있다. 문 여는 소리가 나도 말을 걸어도 눈 감고 꿈쩍 않고 있다. 휴양림에 오는 사람들이 귀여워해서인지 내가 가까이 가도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두고 온 우리 집 뚱보 양이 두 녀석이 생각났다.
"쯧쯧쯧"
새끼 고양이가 귀여워 쪼그리고 앉아 손을 내밀며 아는 척을 했다. 꼬맹이가 쪼르르 오더니 반갑다고 내 손을 치며 '아옹'거린다. 귀여워서 덥석 안고 와서 놀고 싶었다. 아무도 깎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발톱이 꽤 길어 찍힌 부분이 (없어 꽤 긴 발톱에 긁힌 손등이) 따갑다.
(아침밥 먹고 남은) 밥상에 놓인 오징어볶음과 쇠고기 장조림의 양념을 깨끗이 씻었다. (헹궈 냈다.) 동물은 맵고 짠 음식을 먹으면 신장에 부담을 줘 해롭다. 씻은(담백해진) 음식을 김 포장 용기에 담아 데크에 내줬다. (쪽으로 밀었다. 양이) 모녀가 급히 오더니 어미는 곧 뒤로 물러난다. 꽁무니에 남성 상징인 (샅에) 땅콩이 없으니 여성이(며 어미가) 분명하다. 어미는 새끼가 배불리 마음껏 먹으라고 멀찌감치 내다 앉는다. 덩치가 커서(큰 만큼) 배가 더 고플 텐데. 어미야 그러거나 말거나 새끼 양이는 고개 처박고 먹기 바쁘다. 오랜만에 포식하는데 다른 건 생각할 여유가 없지.
자식에게 양보하는 어미 고양이를 보니 가슴이 찡하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모정이 아니고 뭐겠나.
"얘들아, 너네는 유전자 검사가 필요 없겠다. 확실히 모녀 사이 맞네."
자식을 챙기는 살가운 어미의 모습이 가슴에 와닿는다. 배고픔을 참으며 사랑스럽게 (자식이) 먹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보는 어미가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 애틋하다. 부모나 자식을 해코지했다는 뉴스를 흔하게 접하는 요즘이다. 그 사람들보다 나은 고양이라는 (고양이가 낫다는) 생각이 든다.
프라이팬에서 몸을 녹이던 닭가슴살 구운 것을 넉넉히 따로 담아서 줬다. (제 먹을 걸 새끼에게 양보한 어미가 기특해서다. 그런데) 요 앙큼한 꼬맹이 녀석 좀 봐라! 제 것은 두고 엄마 것을 먼저 먹으려고 달려든다. 코앞에 줘도 다시 어미의 그릇으로 다가간다. 어미가 뒤로 물러나기에 말을 걸면서 서로 멀찌감치 떼어 놓았다.
"안되지 안 돼! 엄마도 먹어야 너를 보살필 거 아니냐. 엄마는 엄마 것 너는 네 것 먹어라 알았지? 아이고 착하다 말도 잘 듣네."
내 말을 듣고 내다보던 친구가 우습다고 (손뼉을 치며) 웃는다.
"가가 알아듣기는 하나?"
"알아듣는다. 얘들이 얼마나 똑똑한대(데)."
멀리 떼놓으니 그제야 어미가 마음 놓고 허겁지겁 먹는다. 친구들이 귀엽다고 손 내밀어도(지만) 한 녀석도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내미는 손은 (정겨운지) 와서 장난하고는 까슬까슬한 혀로 핥는다. 고양이가 핥고 지그시 무는 것은 친근함의 표시다. 내 손에서 우리 집 뚱보 고양이 냄새가 나나? 자기를 귀여워하는 건 어찌 눈치를 채는지 참으로 신기한 동물의 감각이 (아닐 수 없)다. 다 먹고 난 뒤(포만감이라 설까,) 아침 햇살 아래서 세수하느라 바쁘다. 만족스럽게 앞발을 들고 구석구석 핥는 것을(걸) 보니 내 마음도 뿌듯하다. 동물도 호의를 베푸는 손에는 화답할 줄 안다. 사람보다 나은 고양이 모녀를 보니 가슴이 따스해진다. 키 큰 메타세콰이아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하느님의 손길처럼 따스하게 느껴진다.
○ 메타세콰이아 나무를 언급할 까닭 없습니다
↳ 독자에게 설명해야 할 테니까
무존재의 존재
(바짓바람)
이형국
시간이 있고, 낮과 밤이 있으며, 계절이 있고, 세월이 있다. 그 속에서 삼라만상은(이) 모두 움직이고, 움직임이 끝나면 잠을 자고, 또다시 일어나서 움직이고, 그리고 잠을…….(잔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이) 이를 따른다. 혹자는 무생물이 어째서 움직이며 잠도 잔다고 억지 부리느냐고 하겠지. 그들은 잠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잠 자체가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 증명할 수 있는가. ← 다소 강압적
생生이 아니어도 생生인 존재이니, 모든 사물은 숨을 쉬고 움직이며 잠을 잔다는 말이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다. 잠이란 영과 육이 활동을 쉬면서 무의식의 상태로 놓여 있는(인) 것이다. 만물은 그 무의식 상태에서 생의 행위인 꿈을 꾼다. 불행히도 우리는 인간이 꾸는 꿈조차도 완벽히 해독해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일부 다른 사물도 잠을 자고 그중에는 꿈까지 꾼다고 확인된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의 꿈도 해석해내지는 못한 것 같다.
생물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잠잘 것으로 추정한다. 더군다나 우리 인간 중 문학을 다루는 이들(은)의 머릿속엔 나무도,(와) 풀도, 바위나 바다도, (그리고) 우주도 잠을 잔다고 상상을 한다.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니, 그들이 잠잔다고 여겨진다면 마땅히 그럴 것이다. 온 우주에 존재 여부가 미확인 된 사물, 즉 가상의 존재일지라도 자고 꿈꾼다면 (마땅히) 그런 거다.
그 사물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지는 이미 밝혀진 것이 있기도 하고 아직 미확인 된 것도 있을 것이다. 문학가들이(,) 그들이 살아있는 거라고 한다면 실제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쉼이 있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 그리고 꿈을 꾼다. 문학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문학 속의 일부 사물은(,) 가능하(이)니 불가능하(이)니 따질 필요도 없이 뭉뚱그려 상상한 것imagination(한 것)이라 한다.
문학은 있음有에 뿐만 아니라 없음無에서도 창조된다. 특히 시나 소설은 자전적 경험보다는 상상과 허구에 기반을 둔다. 수필은 자신이나 타인, 또는 사물의 경험을 기반으로 쓰이는 장르이다. 물론 문학에 나타난 사건들은 사물의 의인화 또는 의물화擬物化를 통한 다층적 시각에서의 경험이다. 시와 소설과는 다르다. 하지만 근세에 들어와서 수필에도 대중에게 읽히는 문학으로의 변모를 추구하는 추세이다.
진솔한 수필이 가진 기호嗜好적 한계는 오랫동안 수필을 비문학으로 분류하게 했다. 읽기에 재미없는 자전적 신상 명세나 신세타령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쓸모없는 잡글은 아니다. 재미있게 쓰면 된다. 하지만 수필에선 없었던無 것을 있게有 할 수는 없다. 무無라는 허구에서는 창조할 수 없다.
나는 소위(이른바) 문학적인 글쓰기를 배우고 있다. 젊었을(은) 한때 문청文靑을 꿈꾸기도 했지만, 파도 같았던 삶의 부대낌에 그 꿈은 산산이 부서져 형체도 남기지 않았다. 무의식 상태에서 가슴의 상흔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은퇴하고 삶을 정리하다 보니, 감춰져 있던 가슴의 상처가 아리기 시작했다.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부딪혀나 보자.’ 하는 마음에 평생교육관을 찾았다.
지금(요즘) 나는 유有에서 무無를 찾고, 무無에서 유有를 찾느라 허리가 꺾일 지경이다. 시詩반, 수필隨筆반 옮겨 다니면서 바짓바람을 일으킨다. 하늘이 부여해준 삶을 정리하면서 풍요로운 포만감을 누리고 있다. 덧붙어 내 목소리가 우렁우렁하면서 찰지다는 주위의 권유로 시 낭송에도 뛰어들었다. 기왕 내친 김이다.(에) 악기 하나는 해야 할 것 같아 하모니카 교습까지 뛰어들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삶에서 무존재였던 존재를 실천하는 것이리라.
과연 ‘하늘이 내 꿈을 이뤄주실까!’ (,) 그럴까.
(2022.05) (9.3매 1335자))
○ 제목이 무겁습니다
○ 다소 어색한 매칭이어서 독자를 설득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잠과 꿈 : 문학 → 교편 잡은 시절의 치맛바람과 요즘의 바짓바람을 대비 또는 연계하는
쪽으로 쓰면 어떠실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신다면
(골목)
살구나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우리 가족은 알거지가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넓은 마당에 있던 감나무와 화단의 국화, 분꽃, 칸나, 맨드라미도 집과 함께 새 주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나는 정든 집에 작별을 고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삿짐을 실은 트럭에 올라타야 했다.
(우리 집은) 상업 중심지구에 있는 주택이었지만 우리 집은 골목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조용했(하였)다. 가까이 달성공원이라는 좋은 놀이터가 있었고 그때는 무료이기도 했으나 동네 아이들은 주로 골목에서 놀았다. 차가 지나다닐(다니지 못할) 정도로 (조붓한 골목이어서) 넓지 않아서 골목은 안전했다. 남자(사내)아이들은 칼싸움, 총싸움, 구슬 따먹기, 딱지치기하며 놀았고(가 예사였고) 여자아이(계집애)들은 주로 고무줄놀이, 소꿉장난하면서 놀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 던져놓자마자 뛰어나가서 해질 때까지 골목에서 놀았다. (해 지는 줄도 몰랐다.) (아이들은) 밥 먹으라는 엄마의 고함이 담장 넘어 골목으로 퍼질 때쯤(에야 마지못해) 아이들은 흩어졌다. 특별한 놀이기구를 갖춘 놀이터가 따로 필요 없던 시절이었다.
그 골목 안 집에서 태어나 10년을 살다가 이사 간 뒤 얼마나 많이 이사했는지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한 뒤론 걸핏하면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 이후로 셋방살이(로)만 10년 넘게 (전전)하다 보니 우리(식구)는 뿌리 없는 부초처럼 여기저기 이사 다니기 바빴다.(와 진배없었다.)
가끔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대구에는 토박이 말고도 의성, 안동, 상주, 군위 등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고향을 짐작할 수 있는 독특한 어휘나 억양이 있는데 내 말투에선 특이한 사투리를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고 한다.) 부모님의 고향이 경기도여서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태어난 곳이 바로 내 고향이므로 나는 대구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대구’라고 읊조릴 적엔) 꼭 어릴 때 떠나왔던 그 집과 골목이 (자연스레) 떠오르곤 한다. 두고 온 나무와 꽃들이 보고 싶어 꼭 다시 가 보고 싶었던(은) 곳이다. 떠나온 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지만 그 골목의 정다운 정경들은 언제나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요 몇 년 동안 대구에는 재개발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고층 아파트가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아오르더니 산과 하늘의 풍경을 다 가려버릴 듯 시야를 방해한다. 꼭 괴물한테 점령당한 도시 같다. 문득 내 고향도 재개발되어 우리가 뛰놀던 골목이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그 근처를 지나다니기는 했지만, 차를 타고 휙 지나쳐 갔(쳤)을 뿐이다.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설핏 본 터라) 그 동네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비슷비슷한 상가들이 줄지어 선 길이어서 동네 입구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고향이 시골인 사람들은 마을 어귀(동구 밖)에 들어서면(설 적마다) 으레 오래된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팽나무들이 있을 (맞닥뜨릴) 것이다. 정든 나무들이 귀향을 반겨주기도 하는 그런 고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는 가장 부럽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다수 사람이) 나이 들면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그곳(고향)을 생각하면서 위안받으며 힘든 타향살이를 이겨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에겐 오래 묵어 묵묵히 고향을 지키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돌아갈 좌표가 없어진 방랑자 같은 느낌이 든다.
그 골목 어귀를 찾아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골목 입구에 있던 중국식 만둣가게가 아직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당시 줄지어 선 손님들로 북적였던 유명한 국밥집도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오빠의 돌 사진이 걸려 있었던 사진관 역시 시대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달성공원 가까이 살았다는 것, 멀지 않은 곳에 서문시장이 있었다는 기억을 더듬어 몇√번을 왔다 갔다 해봤다. 그러다가 조용한 저수지에 던져놓은 낚(시)찌가 움직이듯 어떤 기억이 번쩍 떠오르며 한(어느) 이 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서너 살 때의 일이라서 그 장면이 생각난다(생생히 그려진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엄마한테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이야기다. 그때 나는 폐렴에 걸려서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고 한다. 밤마다 잠을 못 자고 울어서 엄마가 방바닥에 내려놓지 못하고 업고 자는 날이 많았다는데, 갑자기 열이 심하게 올라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엄마는 나를 업고(은 채) 골목 어귀에 있는 병원으로 냅다 뛰어갔다. 병원 이 층에 살고 있는 원장이 야간 진료를 해줘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이내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살 가망이 없다는 거였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에게 매달려 엄마는 마지막 소원이니 주사 한 대만 놔 달라고 애원했단다. 의사는 마지못해 주사를 놔줬고 나는 그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페니실린으로 추측되는 그 약은 그 시절에 기적의 약으로 통하기도 했으니까 나는 엄마의 그 이야기를 아직도 믿고 있다. 우리 외에도 그 병원에서 치료받은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치유의 전설을 갖고 있을(지니고 살아갈)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큰길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곳)이 나온다. 그 입구(길목)에 병원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진료를 하고 있었다. 제법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여전히 병원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문 열고 들어가 볼까 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특별히 아픈 데가 없었다. 어릴 적 기억을 얘기하며 고마움을 표시할 원장도 지금은 없을 것이다. 후손이 가업을 물려받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건물을 팔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골목은 생각보다 좁아서 실망스러웠다. 어린아이의(소싯적) 세상 전부였던 골목이 어른이 된 지금 똑같은 크기로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의 추억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골목이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고마웠다.) (골목) 집들은(이) 현대식으로 형태가 바뀌고 (바뀐 터에) 골목에 아직 살고 있는 (옛 그대로 머무는) 친구(동무)들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개발이 난무하고 있는 요즘에도 이런 골목이 보존돼 있다는 건 소중한 일이다.
달성공원 뒤편에 있는 달성 토성마을은 주민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재개발을 포기했다. 대신 구청과 시청의 지원을 받아 도시재생사업으로 전환되었다.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오래된 동네 벽은 예쁜 벽화로 탈바꿈했다. 집마다 대문 앞에 개성 있는 화분을 내놓아 온 골목이 화원이 되었다. 모두의 노력으로 아름다운 골목길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듯) 뜻깊은 재생 사업이 널리 확장된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 되겠는가. 무분별한 재개발 보다 우리의 골목을 살려두는 일, 있는 그대로 원형을 살리고 더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많은 범죄 영화들이 골목의 어두운 면을 집중적으로 다루는(다룬다. 그) 바람에 사실 골목길은 범죄의 장소라는 오명을 뒤집어쓴√지 오래되었다. 골목길을 밤늦게 오갈 때면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런 영상매체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한다면 아파트만 늘어선 삭막한 콘크리트 바닥 길보다 훨씬 더 살기 좋고 낭만적인 공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엄마가 우는 나를 업고 달래려고 왔다 갔다 했을 골목길,(이었다.)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오빠 손잡고 거닐던 그 유년의 골목길,(이기도 했다.) 친구(동무)들과 뛰어놀던 추억의 골목길이 영원히 (오래도록) 남아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보며(그리며), 이 가을 쓸쓸하게 스카프 자락 휘말(날)리며 그 골목길을 걸어보고 싶다.
세월이 어루만지면
이광조
추석을 지나면서 사업을 하는 지인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사장님, 코로나 때문에 사업이 많이 힘드시지요?’(”)
전화기 너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운모는 중국 수출량이 전년도 대비 4배쯤 되고,(됩니다.”) ☞(“)독일에 보내는 기계도 8월에 이미 금년도 분 납품을 모두 끝내서 내년에 보낼 물량을 앞당겨서 만들고 있어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바쁩니다.”
코로나 때문에 위생에 (부쩍) 신경을 쓰게 된 중국√정부가(다.) 화학약품도 허용하던 일부 식품의 첨가물을 천연 재료만 쓰도록 하는 바람에 운모가 불티나게 수출되고 있다고 했다. 기계를 납품해오던 독일의 거래회사도 사업을 확장하면서 주문을 계속 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 기업들이 모두 끙끙 앓고 있는데, 사장님 회사는 정반대군요. 축하드립니다!”
기분 좋게 덕담을 주고받다가 직원들 성과급 한 번 더 주시라는 농담으로 통화를 마쳤다. 코로나 발생 이후 ‘어렵다. 문 닫는다.’는 소리만 듣다가 모처럼 접한 낭보에 내 일처럼 기뻤고, 누군가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그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세상살이가 본래 그런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런(러운)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행운이 되기도 하고,(된다.) 하는 일마다 일그러져 내리막길만 걷다가도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실마리가 풀리면서 구름 위를 노닐기도 한다. 그래서 로또√인생이란 말이 나돌기도 하니 우여곡절을 겪으며 끝까지 살아볼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지나놓고 보니, 20여 년 전 바로 이맘때 나를 골탕 먹이던 그 일도 그랬던 것 (지인의 일상처럼 일맥상통 맥락이 닿아 있는 것) 같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내 반 아이 네 명이 옆 반 아이를 때려서(때렸나 보다.) 맞은 아이가 경북대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출근길 교문에서 들었다. 그날 점심시간에 (황급히) 병원에 찾아가 맞은 아이를 위로하고 학생 아버지에게 깊숙이 허리 굽혀 사과하면서 선처를 빌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우리√반 아이들은 학생부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다.) 나는 아이들 처벌이 어떻게 될지 신경이 곤두서서 수시로 학생부의 조사 내용을 확인하며 들락거렸다. 무거운 표정을 보이는 옆 반 담임에게도 정중히 사과를 하면서 협조를 부탁했다.(드렸다.)
오후가 되자 경찰관 2명이 학교에 와서 사고 경위를 파악했고,(하였다.) 우리 반 네 아이들은(는) 다음날 북부경찰서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직접 주먹질을 한 A는 구속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버지가 IMF사태 실직자였고 어머니가 간호조무사로 일해서 어렵게 살아가는 형편이어서 치료비 부담도 큰 걱정이었다.
일을 줄여(원만히 해결해) 보려고 다음날 퇴근하면서 다시 병원에 찾아가 피해 학생을 위로하고 그 부모에게(,) 자라는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선처해달라고 빌었다. 사건이 있은 지 3일째 되던 날 학생부 소속 교사가 A를 다시 불러서 조사를 했다. 그러려니 했는데, 조사를 끝냈으면서도 몇 시간 째 아이를 교무실 구석에 꿇어 앉혀√두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담당 교사에게 가서 이미 경찰에 넘어가서 조사 받고 있는 아이니, 학생부에서는 더 이상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차분하게 얘기했다.
그런데 그가 얼굴을 붉히며,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 일로 며칠째 고생하고 있는 사람에게 뭐 잘했다고 참견입니까!”라며 소리를 질렀다.
“담임 역할을 제대로 했으면 이런 일로 여러 사람이 고생 안√해도 되잖아요(.)”라고 막말로(을) 이어갔다.
선배 교사인 나에(내)게 너무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이 들었다.) (그래도,) 법에 따라서 처벌될 일이니 더 이상 아이를 벌주지 말라고 먹혀들지 않는 (마시란) 주장을 하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날은 옆 반 담임이 복도에서 인상을 쓰면서 따지고 들었다. 맞은 자기√반 아이는 병원에 누워 있는 데, 우리 반 복도를 지나다 보면 때린 놈들은 교실에서 히히대며 설치고 있으니, 이래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창밖을 내다보는 (으로 보고 있는) 데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꼴을 보이면서(이었으나) 또 사과를 해야만 (수그려야) 했다.
경찰에서 요구하는 자료들을 (성실히) 작성해서 보내고,(보냈다.) 교감선생이나 학생부장과 수시로 의논하며(고), 교장실에 불려가서(는)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하(드리)며 고개를 조아리곤 했다. 일요일이 되어 모처럼 잊고 지내다보면 (쉴 요량이면) 가해√학생의 학부형이(부모에게서, 피해자 측과) 몇 차례 만나도 합의가 안√된다며 중재√요청 전화를 해오거나,(가 왔다.) 피해자 부모가 가해 학생을 화원 교도소에 보내고 말겠다고(며 전화로) 협박성 전화를 해오기도 (하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 남들이 퇴근하고 난 텅 빈 교무실에 혼자 남아서 A의 구속을 면하게 하려고 검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쓰기도 했다.
9월 하순에 터진 일이 12월이 중순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변호사까지 포함된 학교폭력자치위원회라는 것을 두 차례나 열면서 양쪽 학부형간의 주장을 절충하여 합의를 보게 하고,(하였다.) 그걸 근거로 (그러한 노력으로) 아이가 법정에 잡혀가는(서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월 중순 어느 날 겨울방학 보충수업을 마치고 퇴근을 하려는데 교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달포쯤 잊고 지냈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에 주눅 든 채) 교장실 문을 들어섰다. 커피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은 교장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신학년도 2학년 부장으로 임명하겠다는 것이었다. 보직을 탐하지도 않지만, 사고를 일으켜서 학교에 큰 부담을 준 입장에서 염치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사양을 했다. 그러자 교장이 솔직한 입장을 내비쳤다. 부임한 지 1년도 안되어서 (얼마 되지 않아) 사실상 교직원들의 장단점을 잘 모르는 편인데, 바로 그 사건 때문에(으로) 나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일을 파고들어 끝까지 책임을 지고 마무리하는 자세에 호감이 간다는 것이었다.
문제를 일으켰다는 껍데기에 (사건에) 치중하지 않고 수습과정을 통해 나를 좋게 봐준 교장의 안목이(과 배려가) 고마워서(웠다.) 다음날 찾아가 (못 이긴 척) 수락을 하고 내리 3년 동안 학년√부장 노릇을 했다.(맡았다.) 뻔질나게 교장실을 드나들며 눈도장을 찍어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현실이었다.) 징계를 받아도 시원찮을 사람이 부장으로 승진을 하는 걸 보면 희한한 재주를 가졌다고 동료들이 놀렸다.
학년√부장 역할이 코로나 특수를 누리는 운모공장 사장처럼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것은 아니지만,(다. 하지만,) 골칫거리로 시작된 일이 부장이라는 벼슬(?)로 이어졌다고 생각해보면 통하는 면이 없지 않는(은) 것 같다.
35년 교단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희로애락이(의 강도가) 서서히 잦아들고(엷어지고) 있다. 한때 아팠고 억울했던 일들까지도 가을을 타고 있는 나뭇잎처럼 예쁘게 물들어간다. 세월이 어루만지면 뾰족하던 기억의 모서리가 무디어지고 모든 게 둥글어지나 보다.
무임승차
이지연
5년 전이었다. 10여 년간 (오랫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처우에 전국 방문 선생님들이 분노했다. 아산센터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단체 행동의 여론을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센터에서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글이 올랐다.
지켜보기만 하던 우리 센터 선생님들도 노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우 개선을 위해 앞장서서 일하는 선생님들께 힘을 보태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나는 보수적인 성격이라 노조에 가입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하지만 처우가 좋아지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게요.”
노조 가입에 발뺌한 A선생님 말(변명)이었다. 개선을 (우리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조합원 수를 늘리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러나) 뜻을 함께 하자고 권하기는 하였지만, 강요할 수는 없었다.
다음 해에 A선생님을 제외한 우리 센터 선생님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A선생님 말처럼 보수의 성향이 강해서인지 우리 지역 다른 센터 선생님들은(도) 노조 가입을 회피하였다. 우리 센터 여섯 명 선생님이 대구의 7개 센터 중 전무후무한 조합원이 되었다. 조합원으로 가입은 하였으나 나서는 (앞장서는) 이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내가 우리 지역 대표가 되었다.
노동조합 담당자가 주선하여, 조합원 신분으로 센터장과 몇 차례 교섭을 하였다. 다른 센터 활동을 본보기 삼아 시의원, 구의원, 지자체 담당 공무원을 찾아다녔다. 다문화가정의 열악한 수업 환경과, 10여 년간 거의 변화 없는 강사료를 설명하고, 처우 개선비를 요구하였다. 다음 해 예산이 집행(편성)될 수 있도록 팔방으로 뛰었지만(,) 벽은 높았다. 지역 국회의원께 관심을 가져달라는 메일까지 보냈지만 보람이 없었다. (어도 함흥차사였다.) 힘 빠지는 일이었다.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곳 대다수가 주지 않는 처우개선비를 우리 지역에서 먼저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성과가 전무한√데다 다달이 들어가는 조합비와, 움직일 때마다 소요되는 지출은 노동조합에 가입한 선생님들 사비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2019년에는 단체 움직임이 많았다.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는 속담을 믿고 여성가족부에 수(여러) 차례 문을 두드렸다. 신문고에 글을 올리고, 담당자에게 전화 릴레이를 벌이기도 했다. 드디어 철옹성 같던 문이 조금 열렸다. (을)乙의 입장으로 매년 계약을 해야 했는데,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되어 퇴직 때까지 더 이상 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수업 수당과 방문수업 시 지급되던 교통비도 조금 올랐고, 처음으로 연 2회 명절 보너스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없던 정년이 생겨 연령이 높은 (나이 지긋한) 여러 선생님들이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당년(當年) (그해)에 그만둬야√하는 선생님들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힘들게 쟁취한 성과를 정년이 넘은 선생님들도 어느 정도는 누릴 수 있도록 해야만 했다. 임원진들이 여러 차례 상의한 끝에, 집회와 천막농성을 하자는(고) 결정을 하였다(했다). 그리하여 그해 9월에 전국 수백 명의 다문화센터 방문 선생님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여러 기자들에게 집회를 알리고, 취재 기사도 유(배)포하였다. 결의를 다지는 구호를 외치며 생전 처음 집회라는 것을 해 보았다. 청와대까지 가두(길거리) 행진도 하였다. 대표를 맡은 선생님이 여성가족부장관님께 ‘정년 2년 유예’요구를 서면으로 전달하고 집회를 마무리했다.
집회가 끝남과 동시에 한 달 계획의 천막 농성이 시작되었다. 우리 센터 선생님들은 내 뜻에 따라 기꺼이 농성까지(에) (동)참여해 주었다. 대구에서 올라간 우리는 광화문을 재차 방문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농성 첫날 당번(番)을 미리 신청했었다. 광화문 서울청사 앞에서 잡다한 소음을 들으며 텐트 안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아침에는 서울청사에 출근하는 공무원들 앞에서 피켓을 들고 출근 투쟁을 했다. 광화문에서(의) 1박√2일은 일평생 다시없을 특별한 경험이었다. 대구로 내려오는 (되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투사의 심경으로 첫날을 기록하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농성 둘째 날부터는 천막을 치는 게 불법이라며, 강제 철거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번(을 서는) 선생님들은 추위에 떨며 밤을 보내야만 했다. 매일 광화문에서는 힘든 나날이 계속 되었지만, 자발적으로 농성에 참여한 선생님들은 사명감을 갖고 투쟁했다. 다행히 길거리 농성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정년 2년 유예를 약속 받았다. 우리가 믿은 속담이 맞았던 것이다. 남들이 보면 보잘 것 없는 성과로 보였겠지만, 뭉치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한 뿌듯한 경험이었다.
우리 센터 선생님들은 정년이 유예된들 하등의 이득이 없었지만, 이타적인 마음으로 그 의미 있는 일에 동참한 것이었다. 더불어 사는 세상살이가 아닌가. 이기심 보다는 이타심을 가진 사람이 많은 사회가 아름답지 않겠나. 보수적인 성격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A선생님 같은 사람들만 있었다면, 여전히 그 무엇도 개선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좀 더 나은 처우를 위해 뛰어다닐 때 A선생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힘내라며 (격려하거나) 밥을 사 준 적이 없다. 현장에서 우리와 같이 행동을 한 적도 물론 없다. 센터에서 회의 때 만나면 인사는 나누었지만, 노조활동 이야기를 나눌 때는 자연스럽게 대화에서 배제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본인이 소외감을 느껴 스트레스를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A선생님이 우리에게 고마움이나 미안한 감정(을) 표현을 하지 않으니 우리도 그녀에 대한 배려심에 관심을 두지 (이 생겨나지) 않았다.
자식, 손주들도 어른들의 지갑이 열릴 때 더 좋아한다지 않는가. 적절한 지갑 열기는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행위이다. 만약 A선생님이 광화문(과), 의회와 구청, (그리고) 교섭장으로 뛰어다니지 않은 대신 진심√어린 감정을 표현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지각 있는 동료들인데 분명 그녀에게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했)을 것이다.
작년에는 A선생님의 아들이 경찰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위로 발령 받았을 자랑스러운 아들의 근황을 우리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녀에게서 조금이라도 이타심을 느꼈다면, 나는 그녀의 경사에 진심으로 축하했을 뿐만 아니라, 자랑하게끔 (축하와 아울러 자식 자랑) 자리를 넓게 깔아 주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니 광화문에서 투사가 된 날도 추억이 되었다. A선생님에게 화가 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희미해졌다. 감정 표현이 서투른 성격 탓에 본인은 오죽이나 힘들까 싶은 생각이 든다. 마음 놓고 자랑할 수 없는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니 측은지심이 생긴다. 우리와 그녀가 마음 터놓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우연히 찾아오기를 희망한다.
○ 무임승차를 끌어내기 위한 머리띠 맨 사연이 좀 장황한 면이 있습니다.
무명지 예찬
엄영희
손은 인생 축소판이다. 삶이 들어 있다. 올망졸망 다섯 손가락에 가장이 있나 하면 식솔이 있고, 마주 보는 이가 있나 하면 등을 지는 이가 있다. 한꺼번에 등을 굽혀 불끈 쥔 주먹으로 결기를 다지기도 하고, 마주쳐 소리 내어 남을 격려하기도 한다. 네 손가락 엎드려야 만드는 엄지척으로 죽어있던 자존감이 상사화 꽃대처럼 쑥 솟아오를 때도 있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사그라지기도 한다. 며칠 전 그런 일이 있었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있을 때였다.) 동신교에서 좌회전하면 신천대로에 진입한다. 녹색신호가 길지 않아서 한 번에 통과할 때도 있지만 출퇴근 시간이나 교통이 혼잡할 때는 두 번 정도 신호를 기다려야 통과한다. 그래선지 얌체 노릇을 하는 운전자들을(를) 자주 만난다. 좌회전 차선에서 줄 서서 신호 기다리는 차들을 무시하고 직진 차선을 달려와 바로 코앞에서 새치기하는 운전자들 말이다.
막 좌회전하려는데 화물차 한 대가 좌회전 깜빡이와 수신호를 하며 내차 앞으로 끼어들었다. 오른쪽 범퍼를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 낮게 깔린 첼로 소리에 푹 빠져있던 감성을 뚫고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마터면 접촉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짧은 순간, 차창 밖으로 내민 손바닥을 아래위로 흔들며 양보 표시하던 운전자의 손끝을 보는 순간(자)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편 손바닥을 접으며 엄지척하며 팔을 흔드는 운전자, 카카오톡 엄지척 이모티콘처럼 그의 엄지손가락만 크게 보였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험한 말은 목구멍으로 넘어오다 사라져버렸다. 뒤차가 앞차에 감사 표시하는 방법이 뭐였더라. 달려가는 자동차 꽁무니에다 대고 마음속 엄지척을 보냈다.
한동안 ‘체리 따봉’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통통하고 빨간 모양의 체리가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엄지를 번쩍 치켜든 사진이 포털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며 인기를 누렸다. ‘최고’, ‘잘했어’, ‘좋아’의 뜻을 담은 이모티콘이다.
대통령이 보냈다는 문자 메시지 화면이 기자 카메라에 찍힌 것이 논란의 출발이었다.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
문자 밑에는 동그란 눈을 뜬 ‘체리 따봉’이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대통령과(의) 사적 대화였다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로 인하여 여당 대표가 사퇴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잘했다고 치켜든 엄지가 독이 된 경우다.
손가락마다 맡은 역할이 있지만, 엄지만큼 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엄지는 쓰임이 많다. 영어 이름이 따로 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다. 치켜들면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아래로 향하면 한 생명을 꺾어버리라는 무시무시한 신호가 되기도 한다. 엄지의 ‘엄’ 어원은 어미에서 나왔다는데 그래선지 얼굴을 마주하고 골고루 돌아볼 줄 안다. 칭찬과 격려에 목마른 사람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엄지는 더 바빠질 것이다.
저마다 엄지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세상에서 유독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은 무명지인 약지藥指이다. 왜 하필이면 무명지인가? 살기 위해 까치발을 해도 시원찮을 텐데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는 무명지 아닌가. 이름을 얻지 못한 손가락, 약을 저어 먹을 때에야 쓰는 약지, 사랑을 맹세하고 결혼반지를 끼웠던, 소꿉놀이하던 친구들과 토끼풀 꽃반지를 나눠 끼던 손가락이 무명지다. 닿을 듯 닿지 않아 삑사리를 내던 피아노 소리도 네 탓이었다. 그런가 하면 혈서를 쓸 때 단지斷指하고, 피를 흘려 생명을 살려내던 손가락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내 삶이 무명지를 닮았다. 바득바득 애써 살아온 것 같은데 성과는 없고, 혼자서는 바로 서기 힘들다. 나서는 것 좋아하지 않고, 누군가가 곁에 있어 있는 듯 없는 듯 묻어가는 편이 편하다. 이름을 얻지 못한들 무엇이 (뭐 그리) 아쉬우며, 생색내어 남는 게 무엇인가.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주어진 내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살아내고 싶다. 혹여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나눌 일이 있다면 피를 흘릴지라도 기꺼이 감내하리라.
우리네 인생살이, 내남없이 엄지만 되려고 한다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시끄럽지만 굴러가고 있는 세상은 이름 없는 무명지들 때문이 아닐까. (11.0매)
○ 필력이 일취월장하십니다.
첫댓글 이번에도 숙제 하느라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나날이 좋아지고 있음에 보람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