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야성(野性)의 미녀(美女)
백무영이 깨어난 곳은 기과한 석조물(石造物)이 무수히 서 있는 곳이었
다.
오령(五靈)의 모습을 한 석조물들이 수백 개 서 있는 바, 전라의 미소녀
는 그 가운데, 백상(白象)의 등 위에 머물러 있었다.
"호호… 몸뚱이가 꽤 단단하군."
미소녀는 하이얀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는 능금 비슷한 과실을 한입 가득 깨물고 있었다.
그윽한 술 향기가 백무영의 콧속까지 흘러들었다.
'주과(酒果)… 기가 막히군. 전설상의 영약(靈藥)을 보통 과일 먹듯 하니
…….'
소녀가 먹는 과일은 전설상의 영과로 알려진 주과로서, 하나만 먹는다 하
더라도 십 년 수위의 공력이 증진된다.
그런데 소녀는 주과를 사과 씹어먹듯 먹는 것이다.
미소녀의 눈빛이 깜빡거렸다.
그녀는 백무영에게 지대한 호기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넌 누구지?"
속눈썹을 깜빡일 때마다 얼굴 가운데 음영(陰影)이 드리워지는 모습이 보
기 좋다.
"그렇게 묻는 넌 누구냐?"
백무영은 애써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옷가슴에는 혈장(血掌)이 찍힌 자국이 있으며, 가슴에도 미세한 장
흔이 남아 있었다.
미소녀는 주과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포동포동한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채 쉬지 않고 주과를 씹어먹었다.
"나의 파천쇄옥수(破天碎玉手)는 금옥(金玉)을 산산이 바수어 버리는데,
가슴에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니… 대체 너의 몸뚱이는 뭘로 만들어졌
는지 모르겠다."
미소녀는 앳되어 보였다.
그녀의 어깨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백무영은 이제야 미소녀의 얼굴을 또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오똑한 콧날에 도툼한 입술…….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런데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향기(香氣)가
없다.
밀랍인형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풋풋한 육향(肉香)을 흘리는 살아 있
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비교되겠는가?
'지극히 아름답군. 나의 어머니만큼! 그러나 이상하게도 차가운 아름다움
이다. 조각에서 보는 듯.'
"나는 묘가난(妙加蘭)이다."
"묘가난!"
백무영이 소녀의 이름을 가볍게 되뇌일 때, 소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
다.
"호호호… 나는 성묘(聖廟)의 불멸옥녀(不滅玉女)이지."
"성묘?"
백무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묘가난은 피식 웃었다.
"바보군. 이 곳이 성묘라는 것을 모르다니… 이 곳은 빙하대제(氷河大帝)
께서 영면하신 곳이며, 나는 빙하대제의 법체(法體)와 유물을 지키며 인
신공양하고 있는 불멸옥녀이다."
묘가난의 피부는 유독 희었다. 그녀는 분명 중화인이 아니었으며, 회회교
(回回敎)를 믿는 변황 부족의 미녀였다.
묘가난은 한바구니 가득하던 주과를 다 먹은 다음에 거상 위에서 사뿐히
날아올랐다.
흰 구름이 떠오르듯, 그녀의 몸뚱이가 허공에 걸렸으며, 그녀는 사뿐사뿐
허공을 밟으며 걸어 내려왔다.
'답허능공보(踏虛凌空步)를 자연스럽게 시전하다니…….'
백무영의 얼굴빛이 희어졌다.
지금 묘가난이 시전하는 경공은 무림계에서 열 명도 시전하지 못하는 초
상승 경공인 것이다.
나이 어린 소녀의 내공이 오 갑자(五甲子) 수위를 능가하고 있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넌 누구지?"
"나는… 백무영이다."
백무영은 구태여 자신의 이름을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본명을 말해 주었
다.
"호호… 어찌 되었든 잘 왔다. 근처에는 얼어 죽은 시체뿐인지라, 꽤나
적적했지. 게다가 금강구존(金剛九尊)이 채약(採藥)하느라 모두 나갔는지
라, 며칠 내내 적적했단 말이야. 너는 나의 장난감이야."
"장난감이라고?"
백무영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무공을 잃고 고난에 빠지는 것도 분한 일인데, 빙하왕국의 괴소녀에게 장
난감 취급을 받다니?
"넌 너무 지저분해. 저 호수에서 몸을 씻어야 해."
묘가난은 다짜고짜 백무영의 가슴에 일 장을 가했다.
이번에 가해진 장력은 강하지 않고 유했다.
허무공공장(虛無空空掌)이라는 수법이 시전되며 백무영의 몸뚱이는 누운
채 그대로 붕 떠올랐다.
백무영은 십오 장이나 훌훌 날아갔으며, 석상군(石像群) 둘레에 패여 있
는 호수 속으로 텅벙 빠져들었다.
호수에는 연밥이 둥둥 떠 있었으며, 함박꽃보다도 화사한 연화가 가득히
피어나고 있었다.
"푸우……!"
백무영은 호수 바닥까지 잠겼다가 겨우 물 밖으로 헤엄쳐 나오게 되었다.
묘가난은 호숫가에 서서 백무영이 애를 써서 호숫가로 나오는 걸 보며
까르르 웃었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풍만한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호호호… 재미나는데?"
"날… 더 이상 조롱하지 마라."
백무영이 소리칠 때, 묘가난은 또다시 일 장을 가했다.
이번에 가해진 수법은 비파단월(琵琶斷月).
백무영은 호숫가로 기어 나오다 말고 공중제비를 돌며 다시 호수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그러한 일은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백무영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느끼면서도 애써 웃었다.
그는 축 늘어진 채 호숫가로 헤엄쳐 나오는데, 묘가난은 전과는 다른 표
정을 지으면서 그가 헤엄쳐 나오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넌……."
묘가난의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하이얀 뺨에 홍조가 떠오
른다. 그리고 두 눈에서는 신묘한 빛이 흐르기 시작한다.
묘가난은 물가로 기어 나오는 백무영을 빤히 보며 소리쳤다.
"정말 아름답구나."
'아름답다고?'
백무영은 멍해지고 말았다.
묘가난은 가쁜 숨소리를 내며 다가섰다.
"넌 내 마음에 들었다. 흐음, 돌아가신 사부님은 내게 이러한 말을 하셨
지. 언제고 아름다운 사내를 만나면 함께 침상에 들라고. 사부님이 말씀
하신 아름다운 사내가 언제나 오는가 했더니……."
백무영은 묘가난의 목소리를 다 듣지 못하고 혼절했다.
묘가난은 쪼그리고 앉아 그의 얼굴을 옷자락으로 닦아 냈다.
얼굴에 묻은 수초(水草)가 떨어져 내리며 아름다운 얼굴이 고스란히 나타
났다.
한 일자로 다물어진 굳강한 입매, 네모난 턱의 윤곽이 남성적이다.
백무영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그의 입매는 일그러지지 않았다.
그는 수년 간 역용을 하고 지내고 있었는 바, 묘가난의 일 장에 격타당하
는 가운데 역용술이 풀리며 본래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섬세한 손가락이다.
묘가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 백무영의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이도 알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녀는 이 곳에서 태어났으며, 그
녀의 아버지는 천산남로(天山南路)를 따라 여행하다가 제칠대 불멸옥녀에
게 잡혀 온 인물이었다.
묘가난이 탄생하기 이전 남아가 하나 태어났는 바 그는 살해 되었으며,
묘가난이 태어난 후에 묘가난의 아버지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불멸옥녀에게는 가문이 없으며, 인간의 사사로운 정에 끌리어서는 아니
된다.
불멸옥녀는 천녀(天女)처럼 고결하게 살아야 하며, 빙하왕국 근처로 다가
서는 자들을 모조리 척살해야만 한다.
그것이 칠백사십 년째 깨어지지 않은 전통이며, 악마의 율법이었다.
"남자란 무자비하고 거친 족속이라 들었는데, 이 사내는 몹시 아름답다."
묘가난의 볼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감흥에 사로잡혀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묘가난은 차가운 입술에 자신의 따뜻한 입술을 살짝 올려놓았다.
가벼운 입맞춤이다.
묘가난의 볼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묘가난은 백무영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백무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바, 꽉 다문 입술이며 검미가 묘가난
의 방심(芳心)을 자극하는 것이다.
유리(琉璃)의 침전이다.
모든 게 투명한 유리질로 되어 있는 침전.
백무영은 햇살에 찬란히 반짝거리고 있는 천장을 바라보며 정신을 되찾
았다.
"여기는?"
그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묘가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움직이지 말아요. 사흘 간 더 누워 있어야 해요."
묘가난은 커다란 금배(金杯)를 들고 쌍두조상(雙頭鳥像) 머리 위에 올라
타 있었다.
삼단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몸에 꽈악 달라붙는 흑의(黑衣)인 양, 몸
의 은밀한 부위를 감추고 있는 모습이 선정미를 더했다.
"이걸 마셔요."
묘가난은 대뜸 금배를 내밀었다.
금배 가득히 우윳빛 액체가 담기어 있었다.
끈적거리는 액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청아(淸雅)한 향기가 흘러 나왔
다.
"이, 이것은 공청석유(空淸石油)인데?"
백무영의 눈이 휘둥그래해졌다.
공청석유는 만년종유동굴에서 만들어지는 영약으로, 한 방울만 있다면 백
가지 독을 없앨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장복(長服)한다면 백 년의 세월이 지난다 하더라도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주안(駐顔)의 효과가 있다.
"금강구존(金剛九尊)이 갖고 온 거예요. 호호! 금강구존은 내게 장난감이
생겼다고 몹시 좋아하고 있어요."
웃는 모습이 화사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차갑던 모습이 비할 수 없이 화
사해 보였다.
아마도 그녀의 가슴에 사랑이라는 파문이 번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강구존? 묘가난과 함께 사는 사람인가?"
"피이!"
묘가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호호… 나중에 보면 알 거예요. 하여간 지금은 공청석유를 마셔야 해
요."
묘가난은 방긋방긋 웃었다.
웃을 때마다 하이얀 치열이 드러나는 게 보기 좋았다.
백무영은 만감이 교차되는 표정을 짓다가 금배 가득한 공청석유를 꿀꺽
꿀꺽 삼켰다.
공청석유의 열기는 목구멍을 타고 오장육부 가득히 퍼져 나가는 가운데
정신이 혼미해졌다.
너무나도 진한 향기가 폐부 가득 퍼지며 활화산의 열기가 신체를 휘어
감는 가운데, 그는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얼마 후, 백무영은 차디찬 물 속에서 문득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일곱 자 깊이의 한수(寒水) 속으로 던져지는 동시에, 정신을 되찾은
것이다.
"여, 여기는?"
백무영은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의 오한을 느꼈다.
물의 빛깔은 남청색이었으며, 철골신체에 달한 백무영의 피부 깊이 극한
진기를 스미게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그 차가운 기운에 쏘이는 찰나, 몸이 얼어붙어 즉사하게 된
다.
하나 백무영의 몸에는 공청석유의 열기가 가득하기에, 극한지기에 휘어
감기고도 생존하는 것이다.
"호호… 그 곳은 한검지(寒劍池). 내가 매일 목욕을 하는 곳이에요."
묘가난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 온다.
그녀는 백무영을 한검지에 빠뜨린 다음에 먼 곳으로 치달려 가기 시작한
것이다.
"기관장치를 살펴본 다음에 돌아오겠어요. 호호! 그 때까지 한검지에서
몸을 씻고 있어요. 괜히 도망치려 하다간 금강구존에게 혼이 날 줄 알아
요."
묘가난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그녀는 말이 이어지는 사이에 십여 리
를 치달려 간 것이다.
수많은 강호기인을 알고 있는 백무영이었으되, 묘가난보다 강한 내공을
지닌 사람은 본 바 없다.
'어쩌면 천하제일의 내공이다. 함백의 내공을 정확히 측량할 수 없으되,
묘가난의 내공은 함백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백무영은 이제야 무해무변(武海無邊)이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
다.
무림계에는 무수한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있으며, 진정한 고수들은 대세
의 흐름에 좌우되지 않고 칩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여긴다면, 표면에 나서고 있는 자들은 진정한 절대자들이 아닐지
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저나 빙하왕국의 저력이 무섭다. 묘가난은 철부지 소녀에 불과한데,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금강구존은 누
구인가?'
백무영은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냉철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기는 하되, 최근 그의 삶은 마음 가득 온갖 번
뇌의 막을 펼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한검지의 한기는 점차적으로 엷어졌다.
물론 한검지의 한기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백무영의 신체가 열기에 휘어
감기기 때문에 한검지의 한기가 점점 흐리게 느끼어지는 것이다.
골수 속으로 저미어 드는 흰 기류.
백무영은 한참 동안 한검지 안에 몸을 담고 있다가 사지백해의 고통이
빠르게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음양진기(陰陽眞氣)가 번갈아 몸으로 흘러들며 그 동안의 내상(內傷)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이다!'
묘가난은 특이한 요상법(療傷法)으로 백무영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
다.
창궁법사도 고치지 못했던 혈맥(血脈)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문득, 그는 가공할 한기의 정체를 느낄 수 있었다.
'물 속에서 엄청난 한기가 치솟아 오른다. 그것이 바로 한검지를 한검지
로 만든 것이다!'
백무영은 호기심을 느끼며 물 속으로 몸을 가라앉혔다.
물 속은 청광(靑光)에 뒤덮이고 있는 바, 보배로운 빛이 동쪽 전면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압력을 이겨 가면서 잠수해 갔으며, 결국 보광과 더불어 한
기를 일으키는 물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검(劍)!'
백무영은 한 자루 검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검은 사 척 길이였으며, 지극히 무거웠다.
손에 만져지는 촉감만으로도 그것이 만년한철(萬年寒鐵)과 자금사(紫金
砂)의 합금(合金)이라는 게 느끼어졌다.
백무영은 검을 끌어안은 채 한검지 밖으로 걸어 나왔으며, 그 순간 한검
지 외부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거대한 굴이 자욱한 안개에 휘말리기 시작하며, 동굴 벽에 성에가 두껍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한검지는 언제 그리도 차가웠더냐 싶게 한기를 상실해 버렸고, 이
제는 동굴 안이 빙굴(氷窟)로 화하는 것이다.
"이 구슬이 한기를 일으켰다."
백무영은 사 척 거검의 검자루 가운데 박힌 용안(龍眼)만한 구슬을 바라
봤다.
구슬은 냉광주(冷光珠)의 종류인 바 그 빛깔이 푸른 가운데 자색을 띠고
있어, 보기만 하더라도 정신이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백무영은 자색과 청색이 뒤엉키어 기기묘묘한 광채를 흘리어 내는 구슬
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유심히 바라봤다.
구슬 표면에 호랑나비 날개 무늬 같은 얼룩무늬가 떠올라 있는 게 보인
다.
순간, 백무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럴 수가? 이것이 설마… 전설상의 영금(靈禽)으로 알려진 북극신조(北
極神鳥)의 내단(內丹)이라도 된단 말인가?"
백무영은 만상의경(萬象醫經)이라는 기문벽서 안에서 읽은 내용을 문득
기억했다.
북극신조는 붕(鵬)의 일종으로, 북해에서 산다.
북극신조는 극음의 성질을 천 년 넘게 흡수하는 가운데, 몸 안에 내단을
형성하게 된다.
북극신조의 내단은 극천빙극단(極天氷極丹)이라고 하며,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음기를 지니고 있다.
백무영은 미끌미끌한 구슬을 손에 쥐고 있는 가운데, 손바닥 가운데 양지
혈(陽池穴)을 통해 스며드는 한기로 인해 손바닥이 얼어 버리는 듯한 통
증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강하게 쥐었으며, 문득 구슬이
손아귀에서 퉁기어졌다.
백무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딱 벌렸으며, 우연의 일치로 인하여 황홀한
빛을 발하던 구슬은 그의 입술 속으로 쑥 들어왔다.
"우… 우욱!"
백무영은 기겁을 하며 구슬을 뱉어 내고자 하였으나, 허사였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 그의 식도를 타고 굴러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정녕 감당하지 못할 오한이 몸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오장육부가 꽁꽁 얼어붙는 듯, 혈관 가득 빙하가 흐르는 듯, 전신이 단단
한 얼음으로 변화되는 듯한 고통은 참기 힘들 지경이었다.
백무영은 두 손으로 복부를 휘어 감으며 쓰러졌으며, 순간 그의 전신 땀
구멍에서 흰 기류가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흰 기류는 극한신무(極寒神霧)였기에, 한무에 닿은 곳은 순간적으로 두꺼
운 얼음에 뒤덮였다.
츠으읏- 츳-!
흰 김은 점점 더 짙게 피어 올랐으며, 백무영은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느껴 왔던 모든 고통 가운데 가장 지독한 고통에 사로잡히며 의식을 잃
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절대 신음 소리를 흘리지 않았다.
그는 버릇 마냥 입을 꽈악 다물고 모든 고통을 안으로 삭이는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백무영은 따스한 기운이 가슴을 통해 스며드는 걸 느끼며 약간이나마 의
식을 되찾았다.
그는 유리의 침전에 있었는 바, 그가 누워 있는 곳은 푹신한 침상 위였
다.
그의 가슴으로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전해지고 있었으며, 나긋나긋한
팔다리가 몸을 휘어 감고 있었다.
그리고 가쁜 숨결이 몸을 녹이고 있었다.
'꿈치고는 좋은 꿈이다.'
백무영은 천천히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게 꿈이 아니라, 사
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바보! 죽을 작정을 했나요?"
귓속으로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지금 그의 품안에는 따뜻한 동체가 안기어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녀가 그의 가슴 속에 몸을 파묻고 있는 것
이다.
그녀는 정향 꽃부리 같은 입술로써 백무영의 혈도 요소요소를 세밀히 핥
아 주고 있었다.
마치 어미 개가 새끼 개를 혀로 핥아 주듯이…….
"묘가난."
백무영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자 했다. 하지만 묘가난의 몸뚱이로 인해 쉽
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묘가난은 포동포동한 팔과 다리로 백무영의 몸뚱이를 억압하며 생긋 웃
었다.
"한 시진만 참아요. 호호! 내가 혓바닥을 통해 태양천력(太陽天力)을 흘려
넣지 않으면 전신 혈맥이 얼어붙고 만단 말예요."
치기 어린 목소리이다.
묘가난은 가공스러운 내공의 힘을 발휘해서 백무영의 신체에다가 태양천
력이라는 양강한 진기의 힘을 흘려넣고 있었다.
"내가 일각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얼어 죽었을 거예요. 남자들이란 하나같
이 우매하다더니……."
묘가난은 혀를 끌끌 차면서 봉긋한 가슴을 백무영의 깡마른 가슴에 압박
시켰다.
유실이 야릇한 간지러움을 안기어 준다.
여인을 안아 본 경험이 상당한 백무영이다. 여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달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묘가난이 주는 성적인 유혹은
막대한 것이었다. 묘가난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은 야성의 미녀이다.
그녀가 주는 매혹이란 원시적인 매혹이었다.
창을 통해 흘러드는 햇살에 반짝거리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넘실거림
은, 산 속에서 제멋대로 자라난 산수유 이파리의 방만함 그대로였다.
무르익은 봄처럼 신선한 여체.
백무영은 애써 눈을 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자 했다.
묘가난의 입술은 그의 가슴을 천천히 핥았다.
그녀의 가쁜 숨결이 귓속으로 흘러들었고, 그녀가 약간 힘들어 하고 있다
는 게 느끼어졌다.
한 시진이 흐른 뒤, 묘가난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바보짓을 하지 말아요. 나의 귀여운 장난감! 당신이 죽어 버리면
나는 다시 심심해진단 말예요."
묘가난은 백무영의 볼에 입술을 가볍게 맞추었다.
이어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까르르 웃었다.
"호호… 난 목욕을 하고 오겠어요. 그 동안 금강구존이 그대를 보살펴 줄
거예요."
묘가난은 말하며 위로 떠올랐다.
그녀는 한 줄기 희뿌연 연기로 화해 자취를 감췄다.
그녀가 시전한 경공은 비무잠둔(飛霧潛遁).
중원에서는 오래 전에 실전된 절학이다.
'묘가난… 매력적인 여인이다. 그러나 묘가난의 왕가(王家)는 중원무림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해 온 악마의 왕국…….'
백무영은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묘가난은 귀엽고 순진하며 매력적인 소녀이다.
그녀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을 수 없을 정도.
하나 그녀의 신분과 자신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천만
리 넘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가 이러저러한 번뇌에 휘말리고 있을 때, 방 안으로 거대한 금빛 그림
자들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누린내와 비린내가 역겹게 풍기며 금빛 그림자가 침상 둘레를 빙
둘러 포위했다.
"금빛 원숭이!"
백무영은 기겁하며 몸을 일으키고자 했다.
아홉 마리의 거대한 금빛 원숭이가 침상 둘레로 내려선 것이다.
놀라운 건 금빛 원숭이들이 금관(金冠)을 머리 위에 쓰고 있다는 것이며,
방 안으로 접어들 때 경공을 시전했다는 것이다.
금모신후.
성성(猩猩)의 종류 중에서 가장 영활하고 강한 짐승이다.
지혜가 십 세 소년 정도이며, 칠백 년 이상을 산다.
힘이 신력에 달해 호랑이를 산 채로 찢어 죽인다.
금모신후는 세상에서 사라진 짐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홉 마리씩이나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다.
금모신후 가운데 한 마리는 손을 지그시 내밀어 백무영이 일어나지 못하
게끔 가슴을 눌렀다.
그 힘은 마차 열 대를 밀어 버릴 정도로 막대한지라, 백무영은 일어서려
다 말고 도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뭘 하라는 거야?"
백무영은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금모신후 가운데 하나가 그에게 무엇인가를 전했다.
그것은 기이한 나무 뿌리였는데, 쓰면서도 강한 향기를 흘리고 있었다.
"먹으라고? 이것을?"
백무영이 그렇게 말하자, 금모신후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모신후는 사람의 말을 거의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묘가난이 누누이 말하던 금강구존(金剛九尊)은 바로 아홉 마리 금모신후
로군!'
금모신후는 빙하왕국의 수호신들이었다.
그들은 묘가난이 태어나기 삼백 년 전부터 빙하왕국을 지키며 살아왔다.
어디 그뿐이랴?
묘가난의 무공은 거의 대부분 금모신후들에게 전수받은 것이다.
아홉 마리 금모신후는 각기 다른 종류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으며, 왕부의
불멸옥녀는 왕법에 따라 그것을 터득한 후에야 왕부비고(王府秘庫)로 들
어가 비전절기를 익히게 되는 것이다.
금모신후가 전하는 영과는 만년등과(萬年藤果)라는 영약이었다.
금강구존은 자연스럽게 서 있는 듯하되, 실은 구궁진(九宮陣)을 펼치고
있었다.
금강구존은 과거 이 곳을 찾은 중원무림의 기인들을 무참히 찢어 죽인
바 있는 존재들.
하나, 금강구존이 짓고 있는 표정은 차라리 천진스러워 보였다.
백무영은 어쩔 수 없이 만년등과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만년등과가 침과 섞이는 찰나, 녹아서 향액(香液)이 되어 뱃속으로
흘러드는 동시에 청아한 기운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감을 느꼈다.
동시에 그는 사지백해 가득 전에 느끼지 못했던 웅휘한 기운이 가득 차
있음을 느꼈으며, 특히 하단전(下丹田)에 엄청난 잠력이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북극신조단의 기운이 몸 안으로 흡수되기만 한다면, 내공이 회복될지도.'
그는 내가조식으로 자신의 혈도를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혈도 가운데 막힌 부분은 삼 개 혈도로서 뒤통수의 옥침관(玉枕關)
이 그 첫째이고, 앞가슴 단중혈(檀中穴), 일월혈(日月穴)이었다.
'세 개의 혈도만 타통이 된다면…….'
백무영은 스스로의 힘으로 인해 혈도를 뚫고자 노력했다.
그는 노력을 시도한 직후, 극렬한 고통에 사로잡혔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그가 만년등과를 복용하고 난 후, 이번에는 두 개의 천년설련실(千年雪蓮
實)이 건네어졌다.
설련실은 만년설 아래에서 자라나는 영약이다.
그 가치는 만년등과에 버금간다.
두 가지 모두 구하기 힘든 영약인 바, 이 곳에서는 지천으로 널리어 있는
것이다.
묘가난의 내공이 가공스러워진 이유는, 금강구존이 설산을 헤매며 영약을
구해다 주었기 때문이리라.
백무영은 두 개의 천년설련실에 이어, 다섯 개의 백사신담(白蛇神膽)을
복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쌍두혈선백사(雙頭血線白蛇)의 내단으로, 다섯 개를 복용하면 백
독불침지체(百毒不侵之體)에 도달하게 된다.
묘가난은 백무영을 제 목숨처럼 사랑하게 되었기에 자신이 복용하는 영
단을 아낌없이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백무영을 자신의 신랑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곧 의전에 따른 혼례
를 치룬 다음에 그와 합환(合歡)의 의식을 치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가 부를 정도야. 영약으로 배가 불러 보기도 처음이네그려, 금강구존."
백무영은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금강구존은 만에 하나 그가 도망갈지 모르니 철저히 지키라는 명을 받았
는지라, 시뻘건 눈을 휘둥그래하게 뜬 채 구궁진세에 따라 그의 퇴로를
완전히 봉쇄했다.
"목이 마르단 말야. 천녀설련실이 너무 달았기 때문이야. 단 걸 많이 먹
으면 목이 마르게 되지."
백무영은 여유 있게 말하며 은병에 손을 대었다.
은병에는 청수가 가득 담기어 있었다.
그는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청수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이어 그는 창문 쪽을 힐끔 보며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난 가야 돼."
그가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금강구존이 거대한 금색의 장벽을 형성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백무영은 달려가던 기세가 있었는지라, 금강구존의 몸뚱이에 부딪칠 수밖
에 없었다.
찰나 그는 월이화영(月移花影)으로 몸의 자세를 가다듬었으며 색혈일식
(索血一式)의 수식(手式)으로 금모신후 한 마리의 눈가를 찔러 갔다.
무공을 잃어버렸다고는 하나, 초식의 구사는 여전히 정묘하다.
그의 손이 떨치어지자, 금모신후 한 마리가 카아카! 소리를 내며 그의 완
맥을 거머쥐고자 했다.
순간 백무영의 손은 금모신후의 금나수(擒拿手)를 피해 단선을 끌었으며,
직후 방 안 가득히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마리 금모신후의 오른쪽 눈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백무영은 색혈일식으로 금모신후의 오른쪽 눈알을 찔러 버린 것이다.
노한 포효 소리, 금모신후들의 눈빛이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치란 말이야, 원숭이들아!"
백무영은 두 손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그는 금모신후의 몸뚱이에 매서운 공격을 계속해 댔다.
그가 알고 있는 초식은 수만 가지에 달한다.
금모신후가 내외공, 초식을 두루 익히고 있다 하더라도, 강호에서 산전수
전을 다 겪은 백무영의 공격을 피하기 힘들다.
하물며 금모신후들은 묘가난에게 명령을 받은 바 있어, 공격하는 걸 애써
자제하고 있는 입장이 아니던가?
백무영은 금모신후의 눈과 음낭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두 곳 다 생사가 달리어 있는 사혈이다. 금모신후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
겠다는 듯, 거칠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노한 울부짖음 소리가 커진다.
그리고 금모신후 가운데 눈이 찔리어 피를 흘리는 금모신후가 참다 못해
금모권(金毛拳)을 힘차게 휘둘러 댔다.
'그래, 기다렸다!'
백무영은 쾌재를 부르며 날아드는 주먹을 바라보며 몸의 자세를 비스듬
히 틀었다.
일순 거대한 주먹이 그의 가슴 일월혈(日月穴) 부위에 부딪쳤고, 펑! 소
리와 함께 그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퉁기어 올랐다.
백무영의 입술에서는 핏물이 줄줄 흘러 나왔다.
그를 후려친 금모신후는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드는 듯 재빨리 다가서서
그의 몸뚱이를 받아 내고자 했다.
그 때 백무영은 유룡(遊龍)처럼 몸을 뒤집으며 발끝으로 원숭이의 복부를
걷어찼다.
"미련한 원숭이! 네가 날 쳤어?"
펑-!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금모신후의 얼굴이 추악하게 찡그려졌다.
금모신후는 자신의 호의가 거절되었다는 게 분하다는 듯, 포효를 터뜨리
며 재차 일 장을 후려쳤다.
'기다리고 있었다. 또다시 일 장을 가해 다오.'
백무영은 재빨리 몸을 뒤집었다.
이번에 들이닥치는 장력은 그의 단중혈에 거세게 부딪치며 폭음을 일으
켰다.
쾅-!
백무영은 실 끊어진 연처럼 떠올랐다.
그의 몸뚱이는 천장에 부딪쳤다가 공중제비를 돌며 떨어져 내렸다. 코와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귓구멍에서도 피가 흘러내
렸다.
백무영은 휘청거리며 유리 바닥에 내려섰다.
"또 치란 말이야!"
백무영은 그래도 쓰러지지 않았다.
솔직히 매를 맞는데 있어서는 천하에서 가장 대단한 재주가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백무영이다.
그는 육신이 으스러지는 순간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틸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
일 권 일 장에 격타당한 상처는 엄청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이해 금모신후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여 일부러 두들겨맞는지?
"또 쳐 보란 말이야!"
백무영은 피투성이가 된 채 우두머리 금모신후를 향해 몸을 내던지듯 덤
벼들었다.
그는 자모연환퇴(子母連環腿)의 공격을 시전하였으며, 우두머리 금모신후
는 흠칫 놀라며 뒤쪽으로 피하고자 했다.
백무영은 다가서며 침을 뱉어 냈고, 극히 사나운 표정을 지어 금모신후의
비위를 자극했다.
금모신후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어찌 인간에 비할 수 있으랴?
금모신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백무영의 머리를 향해 일 장을 후려갈
겼다.
우르르릉- 꽝-!
우레치는 소리와 더불어 먹물 같은 진기가 백무영의 얼굴 부분으로 날아
들었다.
백무영은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돌렸다.
'이 순간이 고비다!'
그의 뇌리 속으로는 그러한 생각이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절대절명의 순간, 먼 곳에서 묘가난의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안 돼! 그는 내 신랑이야!"
묘가난은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폭음 소리를 듣고 놀라 어기비행술
을 시전하며 달려드는 것이다.
묘가난의 호통 소리가 들리는 찰나, 우두머리 금모신후의 장력이 위세를
잃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
금모신후의 일 장은 백무영의 뒤통수에 정확히 부딪쳤다.
그 자리는 옥침관(玉枕關) 부위였다.
퍽-!
소리가 나며 백무영의 몸뚱이가 힘껏 떠올랐고, 단단한 유리 천장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유리 천장과 부딪치는 순간, 폭신한 동체가 그의 몸뚱이를 껴안았다.
"바보! 왜 도망가려다가 이렇게 두들겨맞나요."
묘가난이다. 그녀는 속눈썹에 눈물방울을 매달고 있었다.
백무영은 눈을 희미하게 뜨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어설픈 미소가 머금
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동부, 바로 빙하신부(氷河神府)이다.
이 곳은 빙하대제(氷河大帝)가 중원천하를 꺾을 무공을 연성하던 장소였
다.
빙하대제의 신상은 동굴 가운데 안치되어 있었으며, 백무영이 깨어난 곳
은 빙하대제의 신상이 빤히 올려다보이는 옥단(玉壇) 위였다.
그는 의식을 잃은 채 이틀을 보냈는데, 그 사이 의복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몸에 걸치어진 의복은 초야(初夜)의 신랑이 입는 붉은 예복이었다.
금강구존은 모두 절을 한 자세로 머물러 있는 바, 황홀한 금빛의 털이 군
데군데 빠지고 몸에 화상(火傷) 흔적이 가득했다.
아마도 묘가난의 포악한 공격으로 인해 하루 종일 시달리다가 그러한 꼴
이 된 것 같았다.
백무영은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머금어졌다.
묘가난은 처음으로 옷을 걸친 채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의 몸은 황금 교룡피(蛟龍皮)에 휘어 감기어 있는 바, 굴곡 완연한
몸매가 역력히 두드러지는 모습이 옷을 걸치고 있을 때보다 선정적이었
다.
그녀의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 위에는 꽃으로 만든 화관(花冠)이 올려
져 있었다.
그녀가 접어들자, 동굴 안에 화향이 감돌았다.
머리 위에 얹혀진 꽃에서 흘러 나오는 향기가 아니라, 그녀의 몸에서 풍
기어 나오는 육향(肉香)이 고혹(蠱惑)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제 걱정할 필요 없어요."
묘가난의 볼에 볼우물 두 개가 깊이 패였다.
"……!"
백무영은 누운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참 아름다운 눈빛이야!'
묘가난은 행복감에 겨워 하고 있었다.
"호호… 그대는 특이체질이에요. 금강구존에게 연달아 심장을 격타당하고
도 내외상이 하루 만에 완쾌되다니? 왕부비고에서 본 책에 보면 금강지
체(金剛之體)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정랑(情郞)은 이미 금강지체에 도달
했나 봅니다."
묘가난은 백무영을 정랑이라 칭했다.
그처럼 아름다운 소녀에게 정랑이라고 불린다면,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듯한 쾌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황금빛 가죽옷에 감싸인 몸매가 이전보다 탐스러워 보인다.
옷이 날개라는 말대로, 벌거숭이 상태보다 훨씬 성숙된 아름다움이 느끼
어진다.
"우리 둘은 하나가 될 거예요."
"하나?"
"몸을 합한다는 거지요. 흐응, 난 그 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지 못해요. 내
가 아는 건, 비급에 쓰인 게 고작이지요."
"난 중원인(中原人)이야. 묘가난은 날 사랑해선 안 돼."
"짐작하고 있어요. 하지만……."
묘가난은 입술을 잘강 씹는다.
유난히도 긴 속눈썹 끝으로 흰빛이 반짝거린다.
그녀는 밤새 내내 율법에 대해 고민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
는 중대한 맹세를 한 것이다.
"율법에 따른다면, 불멸옥녀는 사랑에 빠져선 안 돼요. 그리고 한 남자를
선택해 운우지야(雲雨之夜)를 보내고 나서 잉태를 해야 하며,남아가 태어
나면 죽이며, 여아가 태어나면 차대의 불멸옥녀로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잉태를 시킨 남자는 제 손으로 죽여야만 합니다."
묘가난은 손을 쳐들었다.
물 밖으로 끌려나온 은어(銀魚)의 비늘처럼 희다.
오랫동안 가물었던 대지에 내리는 첫눈의 차가운 속살보다도 희다.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난 그대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
"허나, 죽이지 않아도 되는 법칙이 있어요."
"뜻밖이군?"
"만에 하나, 정랑이 빙하왕국의 전진을 제수받아 제이의 빙하대제로 화신
할 수 있다면 가능해요."
"빙하대제?"
"그분은 무적의 무신(武神)! 그분은 일생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분이시지
요. 그분의 진전이 절전이 된 이유는, 그분의 절기를 올바로 이해할 인재
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묘가난은 손가락으로 빙하대제의 조각을 가리켰다.
빙하대제는 변황에서 달마조사처럼 여기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일생 내내 싸웠으며, 싸울 때마다 이긴 인물이다.
그가 이기지 못했던 싸움은 단 한 번에 불과하다.
솔직히 그 한 번의 싸움이 없었더라면, 그는 이미 자신의 천년제국(千年
帝國)을 세웠을 것이다.
그와 싸워 양패구상한 인물은 당시 중원의 혜성으로 솟아올랐던 절대무
존(絶代武尊)!
그는 후일 절대무영검류(絶代武影劍流)를 중원에 남긴 인물이다.
두 사람은 칠 주야 내내 싸웠으며, 십오만 초를 겨룬 끝에 양패구상하고
말았다.
검초에 있어서는 절대무존이 이겼으며, 장권 초식에 있어서는 빙하대제가
이겼다.
하여간 그 날, 성숙해(星宿海)에서의 싸움 이후 두 사람 모두 강호를 떠
나야만 했던 것이다.
빙하대제는 절대무존에게 이기지 못한 대가로 영원히 빙하지곡에 머물러
야만 했다.
또한 절대무존은 자신의 문파를 창건하지 못한 채, 탁발승이 되어 천하를
떠돌다가 고독히 죽어 가야만 했던 것이다.
"빙하대제의 후계자가 된다면, 나와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어요."
묘가난의 눈빛은 애절해졌다.
백무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고독해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며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한 말이나, 나는 이 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 없소."
"흐윽!"
묘가난의 얼굴빛이 새파래졌다.
백무영은 차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 듯,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
며 말을 이었다.
"난 해야 할 일이 많은 녀석이오. 난… 가슴 속에 한(恨)이 많소. 물론 태
어나서부터 이 곳에서 산 낭자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오. 하
지만 난 가야 하오."
"가지 못해요."
묘가난의 눈에서는 암코양이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날 때 반짝이는 듯한
냉광이 폭사되었다.
"가야 하오."
"가면 죽이겠어요."
"그래도 가야 하오."
"어리석군요."
묘가난의 눈에서는 눈물이 핑글 돌았다.
그녀는 난생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온갖 정성을 다해 대접했거늘, 백무영이 떠나겠다고 하다니?
"난 중원무사, 그리고 이 곳은 중원무림의 기인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
진 장소. 내가 이 곳에 머문다면, 날 지켜보고 있는 전대기인들의 영혼이
날 증오할 거요."
"지금 이 순간의 행복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단 말인가요?"
"내겐 그렇소!"
백무영은 새삼 다짐해 말했다.
묘가난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눈빛을 더욱 새파랗게 했다.
그녀의 옷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그녀는 끓어오르는 살기를 애써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백무영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낭자가 바란다면, 내기를 할 수도 있소!"
묘가난의 눈이 호도알처럼 동그래졌다.
다 죽게 되어 누워 있는 백무영이 대체 무슨 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싸워 이기는 사람, 마음대로 하기로 합시다!"
"호호호… 미쳤군요. 감히 나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
까?"
묘가난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여러 가지 무학을 익히고 있소. 그것은 빙하왕국의 무공에 비해 뒤지
지 않는 것이오."
백무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키는 묘가난에 비해 한 자 이상 컸다.
묘가난이 그의 얼굴을 보고자 한다면 고개를 반짝 쳐들어야 했다.
묘가난은 방긋방긋 웃기 시작하며 입술을 살포시 벌렸다.
"좋아요. 호호호! 대신, 싸우고 나서 진다면 나와 함께 여기서 살며 빙하
대제의 무공을 함께 연구해야 합니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中天金)! 중원무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소!"
백무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