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정규영 시 해설 자아인식에서 탐색하는 존재의 진실 김 송 배 (시인. 한국현대시론연구회장) ‘나’를 통한 자아 인식과 성찰 현대시의 구조는 대체로 시적 상황 설정에서부터 결론인 주제의 창출까지 그 시인의 자아인식에서 다양하게 분사(噴射)하는 삶의 궤적(軌跡)에서 재생하는 존재의 의미를 투영하는 시법을 선호하는 경향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는 한 시인이 탐색하려는 시적 진실이 자아(自我)의 인식을 통해서 존재의 문제에 대한 명민(明敏)한 해법을 구명(究明)하는 인생론의 발흥이기 때문에 한 편의 작품에서 현현되는 소재나 주제의 흐름이 그 시인의 의식이 어떤 지향점으로 표현되고 있느냐에서 우리는 그의 진실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일찍이 독일의 시인 H. 헷세는 그의 글 「싯다르타」에서 ‘자아, 그 의미와 본질을 알려던 자아였다. 내가 피하려고도 하고 정복하려고도 하던 자아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정복할 수는 없었으나 속일 수는 있었다. 다만 그것을 도피하여 한때 숨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실제 세상에서 이 자아같이 나의 생각을 괴롭혔던 물건은 없었다’라는 명언으로 자아를 담론하고 있다. 여기 상재하는 정규영 시인의 시집에서 특히 나타나는 시적 현상은 ‘나’라는 자아의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먼저 ‘솔밭길을 걷는데 / 늙은 소나무가 묻기를 / 너는 뭘하며 살았나 하네 // 하많은 세월을 살았건만 / 나는 그 말에 대답이 궁하여 / 그만 할 말을 잃었네(「할 말을 잃었네」 중에서)’라는 어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에서도 ‘너는 뭘하며 살았나’하는 물음에 명확한 해답을 적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는 지금도 존재의 문제에 깊이 천착하면서도 다변적이고 다원화한 인생론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철학자 데카르트도 불완전한 존재는 완전한 존재를 향해서 자기를 초월한다고 하는데 이는 정규영 시인이 집착하는 존재의 양상들이나 내면에 잠재한 가치관들이 어떻게 발원하고 있는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심오한 해법을 구현하려는 시적인 노력의 일단으로 이해하게 된다. 내가 사는 곳이 흔들린다하여 내가 둥둥 떠다닐 손가 내가 뿌리를 내리고 살면 될 것을 내 사는 곳이 탁하다하여 탁한 물 먹었다 티를 낼 손가 내가 탁한 물 걸러 먹고 살면 될 것을 비가 끝없이 퍼붓는다하여 어찌 내가 그것을 다 담을 손가 그냥 내가 품지 않고 살면 될 것을 바람에 흔들리고 흙탕물에 산다하여 찢어지고 예쁘지 아니한 꽃을 피울 손가 그저 살아온 만큼 내 꽃을 피우고 살면 될 것을 --「연꽃이 말하길」 전문 정규영 시인의 인식은 단호하다. 그는 그 자신이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 ‘연꽃’이라는 사물을 차입하여 의인회의 시법으로 ‘내가 사는 곳’이라는 이 현세의 물정을 ‘흔들린다’, ‘탁하다’, ‘퍼붓는다’는 등의 상황으로 ‘바람에 흔들리고 흙탕물’이라는 살벌한 현실을 인식하면서 이 현실과 화해하는 생존법을 탐구하고 있다. 그는 ‘뿌리를 내리고’, ‘탁한 물 걸러 먹고’, ‘그냥 내가 품지 않고 살면 될 것을’이라는 자인(自認)에서 인생의 모험을 수용하면서 순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결론으로 적시한 ‘찢어지고 예쁘지 아니한 꽃을 피울 손가 / 그저 살아온 만큼 내 꽃을 피우고 살면 될 것을’이라는 ‘연꽃’의 말을 명징(明澄)한 가치관으로 정립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공감영역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괜한 울음 울었던가 눈뜬 것이 고역길 길고길다 했건만 갈길이 끝나 되돌아 보니 아차 하는 일들에 아쉽기만 하누나 눈물 머금고 갈길을 천년송에 물으니 천년송이 대답하길 미련 없이 그냥 가라하네 --「그냥 가라하네」 전문 이제 정규영 시인은 인식에서 성찰로 의식의 흐름을 전환하고 있다. ‘갈길이 끝나 되돌아 보니 / 아차 하는 일들에 아쉽기만 하누나’라는 어조처럼 아쉬움만 남아 있다. 그래서 그는 ‘천년송에 물으니’ 대답은 ‘미련 없이 그냥 가라하네’였으니 어쩌면 성찰의 의미가 인생 허망과도 상관성이 있지만 진실이 내재된 무(無)이거나 공(空)의식이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욕심을 부리면 / 어찌 그리도 / 버리기도 어렵고 / 주기도 어려운가(「마음」 중에서)’라는 진솔한 ‘마음’을 표출하고 있어서 그의 성찰은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에 대한 인식의 단정은 금물(禁物)이지만 ‘나는 헤맴이어라’, ‘나는 무념이어라’, ‘나는 머물지 않음이라’, ‘나는 포옹이어라’(이상 「바람이어라」 중에서)라는 단정으로 ‘나=바람’이라는 등식으로 자아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시법이 차원 높게 현현되고 있다. 2. ‘세월’ 속으로 사무치는 ‘그리움’ 이 세월이라는 시간성과 우리 인간들은 불가분의 상관성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 시인들도 이 세월과 무관한 창작은 어렵다. 인생의 행로가 바로 세월과 동행하는 현장이어서 많은 시인들이 이 세월과의 인연들을 작품으로 현시(顯示)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 현재까지 세월과 더불어 삶을 이어온 연륜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에서 우리들에게 부여된 칠정(七情) 오욕(五慾)이 생존과 생명에서 중요한 체험을 획득하게 되고 거기에서 우리 시인들은 소중한 이미지를 추출하게 된다. 정규영 시인도 이와 같은 체험에서 재생된 정감(情感)의 이미지(喜怒哀樂愛惡慾)가 작품의 중심에 투영되면서 형상화하거나 승화한 그의 어조를 의미 있게 들을 수 있어서 공감한다. 그가 이처럼 세월의 흐름을 통해서 ‘덧 없이 가버린 하많은 날들이지만 / 그래도 서로를 잊혀버리진 않았기에 / 오늘 이렇게 벗님을 마주할 수 있으매 / 자네도 옛 생각을 그리워할 수 있지 않나(「살구야 너를 보니 고향 그립다」 중에서)’라는 추억에 잠기는 것이다. 철모르고 살다가 철드니 욕심이라 욕심으로 살다가 세월가니 늙음이라 황혼이 아름답고 서러워질 즈음에 지난 세월 모두가 꿈만 같구나 아! 세월아 세월아 너는 나를 두고 어디로 갔느냐 --「세월아 세월아」 전문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는 그 세월, 그 인생 ‘황혼이 아름답고 서러워질 즈음에 / 지난 세월 모두가 꿈만 같구나’라는 회상의 아쉬움이 현현되고 있어서 ‘세월과 늙음’의 대칭적인 내면에는 정규영 시인의 사유(思惟)가 떠가는 시간성에서 다각적인 상념을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쁜꽃들 피고지고 낮 잊어질 즈음에 주름진 내 얼굴 꽃 보기가 두려워질세 들녘에 오곡이 풍성하여 기쁘련만 잃어버린 세월 저편 그리운 얼굴들 산천이 닳고닳어 낮아질 즈음에 내 모습 늦가을의 저 들판이로세 달이 가고 별이 지니 새날이련만 구름따라 넘어 온 길 황혼녘에 섰네 --「세월 저편에 그 얼굴들」 중에서 여기서의 시간성은 ‘주름진 내 얼굴’이나 ‘내 모습 늦가을 들판’, ‘잃어버린 세월 저편’ 그리고 ‘황혼녘’ 등의 어조는 청년과 장년, 노년을 예비하는 시간성에서도 ‘그리운 얼굴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에게서는 애절한 그리움으로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서 ‘세월=그리움’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오가는 세월 수많은 인연 속 우리의 만남은 희망의 인연 언제나 우리는 그 순간들을 고통의 옷을 벗는 행복미소 --「인연」 중에서 다시 정규영 시인의 그리움은 ‘오가는 세월’이라는 무형의 관념에서 생성되었으나 그 범주(範疇)에는 친구나 고향 등 다양한 인연들과 접맥하고 있다. ‘그대와 나 우리 소중한 인연 / 생명이 있는 한 우리의 순간 / 언제나 늘 시공을 초월하여 / 그대와 인연 됨은 행복한 기쁨’이라고 결론 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 만남은 희망의 인연’으로 ‘사랑하는 친구야 그리운 내 친구야 / 조그만 오솔길 돌고 돌던 등교 길에 /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함께 보냈었지 / 눈물이 핑~ 하니 옛 그리움 더하누만(「가슴 한번 쓸어나 주겠나」 중에서)’이라고 회심의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 또한 ‘파릇한 새싹이 돋는 봄날에 / 아지랑이 뭉개뭉개 피어 오르는 / 고향의 들녘이 그립습니다(「언제나 그 자리에」 중에서)’라거나 ‘오이매국에 고구마도 맛나고 / 할머니가 해놓은 찬장의 반찬 / 실겅에 꽁보리밥 그립기만 하다(「꽁보리밥」 중에서)’와 같이 이 그리움의 미학은 향수(鄕愁)뿐만 아니라, 그가 지나온 공간 어디에서나 간절한 그리움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3. 사랑학의 진원지 ‘당신’에 대한 예찬 우리들에게서 사랑은 참으로 값진 위상으로 자리잡고 안온한 정감을 제공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최상의 삶의 방식이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사랑이란 영혼의 궁극적인 진리’라고 했다. 아마도 사랑이라는 불꽃은 우리들 영혼까지도 화해할 수 있는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인간 행동의 규범이다. 정규영 시인도 이 사랑학의 진원지가 어디인가를 탐색하고 있으며 이를 실천하려는 욕망에 불타고 있다. ‘꽃을 잡으면 / 향기가 남겠지요 // 마음을 얻으면 / 사랑의 향기가 가득하겠지요 // 그래서 나는 / 당신의 마음을 잡을래요(「마음을 잡을래요」 전문)’라는 어조로 ‘당신’이라는 화자에 영육(靈肉)을 집중적으로 투영하면서 교감하고 있다.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게 참 좋습니다 나는 당신이 있어 참 행복합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참 좋습니다 때론 나를 바라봐 달라고 떼쓰고도 싶지만 그러면 당신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아 그냥 당신이 바라보는 곳으로 함께 바라볼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이시여 나는 그냥 당신이 참 좋습니다 --「나는 당신이 참 좋습니다」 전문 그렇다. 정규영 시인은 ‘당신’의 마력에 심취해 있다. 그는 ‘나는 그냥 당신이 참 좋습니다’라고 단순하게 직설적으로 전하는 화자 ‘당신’은 보편적인 사랑(혹은 애정)의 대상이 아닌 듯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사랑의 마음 없이는 어떠한 본질도 진리도 파악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 인간들은 오직 사랑의 따뜻한 정으로써만 우주의 전지전능에 접근할 수 있어서 모든 것이 포근히 안길 수 있는 동력이 사랑을 인간생활의 최후의 진리이며 최후의 본질이라는 명언을 상기하게 한다. 그는 작품 「흔들리지 않는 마음」 중에서도 ‘밤이 오면 그리움에 은하수 오작교를 걷는다 / 온 밤내 영롱한 별들이 아무리 유혹해도 / 달이 가고 별이 지쳐 눈을 감아도 / 님을 향한 내 노래를 끝없이 부른다’는 ‘님(당신)’을 향한 예찬을 멈추지 않는다. 이제 잠시라도 당신이 보고파 모든 시간들이 아쉽기만 하는 그런 그리운 날이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과 하나이고 싶습니다 당신과 영원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무엇이라 불러도 나는 사랑으로 당신을 부르는 그런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 날이 되었습니다 2」 전문 다시 정규영 시인은 지금 사랑에 대한 미완성을 영원한 완성으로 성취하려는 의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리운 날’과 ‘당신과 영원히 하고 싶’은 심려와 기원이 동시에 ‘사랑으로 당신을 부르는 / 그런 날이 되었’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다. 그는 다시 ‘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 내 슬픔이 오로지 내 운명이련가 / 생각하며 살다가 그대를 만나 / 내가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 된 / 행복한 날이 되었습니다’라고 오로지 사랑의 대상인 ‘그대’만을 위한 운명을 수용하면서 이제는 ‘슬픔을’ 버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랑학이 정립되고 있다. 이 밖에도 작품 「전하고자 하는 마음」 「이미 사랑해요」 등에서도 그의 애절하면서도 진지한 사랑의 의미를 명징하게 전해주고 있다. 박목월 시인은 어느 글에서 ‘참으로 사랑은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연소시키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우리들의 삶을 보람찬 것으로 이룩하기 위하여 사랑이 소중하다’는 사랑론을 말해주고 있어서 정규영 시인의 사랑학도 단순성의 남녀간의 애정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삶에서 보람을 찾는 인생행로의 한 구도임을 알 수 있다. 4. 자연 사물과 교감하는 서정성 정규영 시인은 안온하게 서정성을 탐구하는 서정시인이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그의 『서정시집-Lyrical Ballads』 서문에서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 발생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는 외적인 사물에서 투영하는 내적인 관념들이 그 시인이 자연미와 인간의 영교(靈交)를 노래하는 지극히 자연 친화적인 시법을 말하는 것이다. 정규영 시인도 친자연의 정감을 떨칠 수가 없이 자연과 인간의 동일한 시점(視點)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점을 간과하지 못한다. 그가 응시하는 대자연 사물관은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자연물에게서 영감을 얻고 이미지를 추출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시론에서는 현재시제(現在時制)의 사용이라고 한다. 서정시에서 가장 본질적인 시법인 동시에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순수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의 이끼가 낀 도랑가 담벼락에 봄소식을 알리는 버들강아지 부끄러워 가린 얼굴 누구만 같고 여드름 송글송글 뽀얀 얼굴에 티 가슴 속에 몽글 몽글 피어나는 설렘 빨갛게 익던 산수유 누구만 같았네 천년 늙은 저 소나무 아직도 푸르고 동글동글 솔방울은 헤아릴 수 없는 미련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 그 만큼이네 --「내 마음 깊은 곳에」 전문 그렇다. 그는 ‘버들강아지’나 ‘산수유’ 또는 ‘솔방울’이라는 자연친화의 사물에서 우리 인간들이 당면한 ‘세월’과 함께 거기에 수반하는 부끄러움이나 ‘설렘’ 그리고 ‘미련’ 등이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술렁이고 있다. 그리고 ‘이끼가 낀 도랑가 담벼락’이나 ‘천년 늙은 저 소나무’ 등의 자연 환경은 참으로 순박한 시흥(詩興)을 일으키고 있다. 높고도 푸르구나 뭉게 구름 예쁘다 살랑 미소 누굴 위해 그리도 정답더냐 소녀의 순결 순정 혼자만 담은 듯 어쩌면 그리도 아련하기만 하던가 수많은 꽃닢 얼굴 모두가 어여뻐다 어찌도 잎마다 새롭기만 하더냐 푸르른 하늘 흰 구름 속에 빠져 속에 둔 미련 너를 보니 그립구나 --「코스모스」 전문 이 ‘코스모스’에서는 지상의 ‘소녀의 순결 순정’이 천상의 ‘푸르른 하늘 흰 구름’과 상호 대칭을 이루면서 ‘코스모스=너’라는 의인화의 시법은 정답고 아련하고 어여쁘고 또 새롭고 그립게 발현되고 있어서 우리의 감정이입(感情移入)으로 공감하게 되고 미(美)를 성립시키고 있다. 일찍이 독일의 극작가 쉴러는 ‘자연으로 존재’하는 시인을 ‘소박한 시인’ 그리고 ‘상실한 자연을 추구하는 시인’을 감상적 시인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는 시인이 순수한 자연으로 서 있는 동안에는 순전한 감성과 이성,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과 자율적인 행도 능력이 분리되지 않고 대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미지를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피었다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뽐내려 하지 아니 않았다 생긴대로 피었을 뿐 손길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 그래도 나는 나로서 나이다 비록 들꽃이라 부른다해도 --「들꽃」 전문 벼슬하는 나리가 저리도 고울까 이름도 순수한데 자태마저 곱구나 아침 이슬 방울 방울 유리구슬 달아 향기 팔지 아니하고 선비정신 지키니 천만년 세월가도 나리인가 하노라 --「나리꽃」 전문 이 두 편의 작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들꽃’은 들꽃 자체가 ‘나’라고 의인화하고 있으며 ‘나리꽃’은 ‘나리인가 하노라’하고 그 꽃은 쳐다본 화자(시인)가 집적 말하고 있다는 점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를 시학에서는 비정적(非情的) 타자성(他者性)이라는 말로 자연은 인간의 정서나 사회에 좋은 혜택을 준다는 낙관론에서 출발하고 있다. 자연의 존재근거를 인간정신에 둘 때 자연은 인간적 가치로 충만되고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은 또는 일체감의 현상으로 변한다. 이것을 감상적 오류(誤謬)라고 하는데 자연의 인격화에서 ‘들꽃’은 들꽃 자신이 우리 인간들에게 ‘나는 나로서 나이다’라고 주관적으로 분사(噴射)하고 있으며(이를 시한에서 동화(同化)라 함) ‘나리꽃’은 우리가 그 꽃을 쳐다보면서 ‘이름도 순수한데 자태마저 곱구나’라는 개관적인 어조로 노래(이를 투사(投射)라 함)하고 있어서 서로 어떻게 사물을 보았느냐에 따라서 달리 표현되기도 하는 시법이다. 우리가 자연서정시를 창작할 때 가장 중요한 시법으로 널리 활용하고 있다. 정규영 시인도 이러한 자연 사물을 동화와 투사의 시법으로 잘 활용하고 있어서 우리들 공감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정규영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서 우선 ‘나’라는 자아인식에서 성찰로 출발하여 ‘세월’이라는 대명제를 내세우고 인생행로에서 우리들의 일차적 관념인 그리움을 노래하면서 그의 사랑에 대한 원류를 탐색하고 ‘당신’을 예찬하고 있다. 그는 다시 자연과 교감하는 자연친화적인 서정성을 추구하는 다양한 시법으로 정규영 시학을 명료(明瞭)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주된 화자로 사용하는 중심에는 그가 ‘갈대’, ‘푸른솔’, ‘몽돌’ 그리고 ‘잡초’(이상 「기다림」 중에서)라는 사물화하는 시법도 특이하게 흡인된다.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