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역에서 어럽게 전철을 바꿔 타고 서현역에서 내렸다. 정자역에서 서현역까지는 전철 두 정거장이다. 정자역에서 내려 서현역으로 갈아타려고 보니 다음정거장이 미금역으로 돼있었다. 미금역에서 반대차선이 서현으로 가는 것이라서 반대 차선으로 갔다. 그런데 반대차선이 서현역으로 가지 않는단다. 지하철 안에는 안내요원으로 보이는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안내요원께 물어보니 위로 다시 올라가서 다른 안내요원에게 물어보란다. 휴! 어럽다.
계단을 올라가서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보여서 물어보니 전철노선도를 한참을 들어다본다. 그리고는 저쪽으로 가란다. 알려준 대로 정거장에 도착해서 보니 왕십리로 가는 방향이었다. 뭐가 이리 복잡해 한숨이 나왔다. 어럽게 서현역에 도착해서 내렸다.
그녀가 알려준되로 kt백화점으로 올라가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1층이었다. 이곳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세 곳이었다. 어디로 나가야 되지 두리번거려다. 언니지? 듣었던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분명 맞는데 머리는 하얀 백발을 하고서 나를 반겼다. 우리는 그렇게 오 년 만에 만나서 함께 포옹하고 반가움을 나뉘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 그녀가 이끄는 대로 삼계탕집으로. 들어갔다. 식당이 넓었다. 넓은 홀에는 두 테이블만이 손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넓은 식당이 지금 저녁시간인데 손님이 이렇거나 없어서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한방 삼계탕을 시켰다. 따끈하게 나온 삼계탕은 너무나 맛이 있었다. 그녀와 내가 이렇게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십 년도 더 넘은 것 같다. 그녀와는 전화통화는 가끔 했지만 무엇이 그리 바쁜지 만나자, 식사하자 하면서도 함께 얼굴 마주 보며 식사하는 시간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개포동에 있는 경기여고 교실에서 같은 책상에서 공부하며 만났다. 그때 나는 나의 잃어버린 여고시절을 맛보기 위해서 경기여고 부설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 반에는 한 30명 정도의 학생들이 30대에서 6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선생님이 어느 날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적어내라고 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식이라고 적어내었다. 나는 그녀가 적은 것을 보았다. 남편이라고 적고 있었다. 의아해서 물어보았다. 그녀는 싱글거리며, 뭐! 남편이 최고 좋지 하였다.
그녀는 퇴근하는 남편을 종종 마중 간다고 하였다. 남편이 퇴근할 때면 그녀가 집에 있으면 마중 나오라고 한다고 하였다. 둘이 손을 잡고 팔짱 끼고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지곤 했었다.
그녀와 커피집으로 옮겨서 수다를 떨었다. 자신은 남편이 월급을 받으면 한 번도 그 돈을 온전히 써보지 못했다고 했다. 시어머니께 많은 돈을 보내드렸다고 했다. 아마도 시동생들 학자금으로 시어머니 용돈으로 보내드린 것 같았다. 시아버지도 공사엔가 다니셨는데도 결혼 전부터 받은 아들의 월급을 결혼 후에도 계속 요구했다고 했다. 그녀가 내게 몇십 만 원만 빌려줘 하며 심심찮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한 번은 자신들도 자식을 키워야 해서 돈을 더 이상드릴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시댁을 남편과 찾아갔단다. 남편은 도저히 그 말을 못 하겠다고 해서 그녀가 시어머니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안방으로 들어갔었단다. 무릎을 끌으며 있는데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나왔단다. 시어머니께 더는 돈을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리자 그래, 너희들도 돈이 쓸데가 있겠지 알았다고 했단다. 이제는 시댁에 돈을 보내는 부담에서 해방되어서 홀가분했단다. 그러나 삼 개월이 지나자 왜? 돈을 보내지 않으냐고 전화가 왔단다. 어머님이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냐고 하자 그 달 한 달 만이지 계속 이럴 줄은 몰랐다고 했단다.
그런데도 시아버지가 종종 자신들을 보면 너희들은 무얼 했느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혀를 차셨다고 하였다. 그녀가 결국은 우리가 시동생들 학자금 보내드리지 않았어요. 했단다. 그러자 며칠 지나서 시누이에게서 전화가 왔단다. 언니가 월급 타서 돈 보냈냐고 했단다. 그래서 우리라고 했지 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며 쓸쓸히 웃었다.
그녀가 그랬다. 우리가 이제 그 나이가 되었네, 하며 웃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40이 넘었는데 장가를 가지 않았단다. 아들 장가가서 며느리한테 용돈은 고사하고 손주도 구경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우리 시대의 아니 우리 웃세대의 결혼생활은 아들에게 부모부양 혹은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요구하는 부모들이 있었다. 더구나 자식이 아닌 그 배우자에게 요구했었다. 요즘으로는 가당키나 하는 일인가 말이다.
아들 며느리를 수시로 부르며 아들부부가 둘만이 갖는 시간을 주지 않은 분들이 있음을 가끔 보게 된다. 본인들은 밖에 나가서 효자 효부 아들이라고 자랑하지만 조그만 안을 들어다 보면 곯물되로 곯은 가족 관계가 드러난다. 부모는 자식을 지배해야만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오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가족은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는 관계지 상하 관계가 아님을 간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