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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가족이 있는 곳으로.
표중산은 뇌룡장을 나와 무한 곳곳에 위치한 사업체를 둘러봤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일 수 없었기에 적어도 열흘에 한 번은 하는 일이었다.
어느 정도 이골이 난 일이었기에 이틀이면 모든 사업장을 돌아볼 수 있었다. 오늘도 그렇게 계획된 동선을 따라 사업장을 돌아본 후, 다시 뇌룡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뇌룡장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상당히 인적이 없는 곳이 몇군데 있다. 그 중 한 곳에 지나가는데 섬뜩한 느낌이 목덜미를 훑었다.표중산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역시......'
이미 예상했던 바다. 그래서 혼자 나선 것이다. 아니, 혼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적의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표중산을 은밀히 따라는 세사람이 있었다.
"호오, 생각보다 눈치가 제법이구나."
사방에서 동시에 나타난 다섯 사람을 확인한 표중산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너무나 사이하고 막강했기 때문이다. 표중산도 그리 약하지 않는데 아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를 이렇게 핍박하는 이유가 뭐요? 채금상단의 사주를 받은 거요?"
표중산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도 당당하게 말했다. 그 기개에 구대흉마들이 크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어차피 살아 돌아가지 못할 테니 마음껏 지껄여라."
"살아 돌아갈지 그렇지 못할지는 두고 봐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다섯 흉마가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설마 네놈을 따라온 떨거지 셋을 믿고 그러는 것이냐? 가소롭구나. 크하하하핫!"
표중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들은 강악과 당백형 그리고 엽광패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타난 것이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숨어 있을 필요 없으니 얼른 나서라!"
흉마의 말에 세 사람의 모습이 드러냈다. 그들의 얼굴도 표중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설마 자신들의 기척을 알아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거 생각보다 대단한 놈들을 끌어들인 모양이구나."
강악이 그렇게 말하며 다섯 흉마를 노려봤다. 흉마들은 그런 강악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봤다.
"네놈이 굉뢰번천장이겠군."
"뇌룡이다."
강악의 말에 흉마들이 인상을 썼다.
"뇌룡? 네놈이 뇌룡이란 말이지? 크크크크."
흉마들을 죽인 흉수가 바로 뇌룡이었다. 흉마들끼리 특별한 의리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흉마를 죽였으니 복수는 해주고 싶었다.
"아주 운이 좋군. 복수까지 할 수 있게 되었어."
흉마들이 몸에서 살기가 뒤섞인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그 기운이 어찌나 막대한지 강악을 비롯한 세 사람이 흠칫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날 정도였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아무리 봐도 이름 없는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정체나 알자. 네놈들 대체 누구냐?"
강악은 그렇게 말하고 흉마들을 노려봤다.
채금상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는 들었고, 그들이 표중산을 습격할지도 모른다고 할 때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뇌룡장에는 휼륭한 무사들이 많았다.
강악은 엽광패에게 그것을 맡겼다. 엽광패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엽광패는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였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채금상단을 한 번 살폈다. 그리고 그때 흉마들 중 하나를 먼발치에서 확인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강악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일 자신과 당백형이 따라오지 않았다면 저들을 엽광패 혼자 어떻게 막아낸단 말인가.
강악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흉마들은 느긋했다. 일단은 이곳에서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의 실질적인 목적은 채금상단을 돕는 게 아니었다. 채금상단은 그저 부수적으로 따라온는 것 하나일 뿐이었다. 진짜 목적은 뇌룡장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동안 설친 대가를 받는다 생각해라."
"그게 무슨 말이냐?"
"나머지는 지옥에 가서 염라대황에게 물어봐라. 크하하핫"
강악과 당백형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서로를 한 번 바라봤다. 흉마들의 말과 행동이 좀 이상했다. 왠지 별로 싸울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다섯 흉마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반적인 무인이 아니었다.
명예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비겁한 짓이나 도망치는 것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작전은 표중산을 잡는 것이었다.
휘릭.
흉마 하나가 순식간에 몸을 날려 표중산을 덮쳤다. 표중산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미처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흉마 하나가 홀연히 앞에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헉!"
표중산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흉마의 손이 훨씬 빨랐다.
쩡!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흉마의 손이 뒤로 튕겨났다. 표중산의 목을 막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상종 못할 놈들이구나."
강악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의 손에서 뇌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빠지직.
강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엽광패에게 말했다.
"외총관을 데리고 장원에서 돌아가라. 여긴 나랑 독 놁은이가 맡을 테니까."
엽광패는 그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다섯 흉마들은 그 하나하나가 결코 강악이나 당백형보다 못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빠져도 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뭘 고민하고 있느냐! 방해하지 말고 어서 가라니까!"
당백형까지 그렇게 말하자 엽광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사람의 말이 옳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방해가 될 뿐이다. 실력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표중산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 전 갑니다."
엽광패는 그렇게 말하고 표중산을 재빨리 들쳐 멨다. 다섯 흉마가 손을 쓰려고 했지만 강악이 그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콰르릉!
다섯 줄기의 뇌전이 쏟아져 나갔다. 다섯 흉마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 그것을 피해야 했다.
그 사이 엽광패는 벌써 표중산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실로 대단한 경공이었다.
"쯧, 재빠르군. 그래도 명색이 십대고수라는 건가?"
흉마 중 하나가 한 말에 강악과 당백형의 표정이 변했다.
"저놈이 누군지 알고 있군?"
엽광패의 정체는 뇌룡장에 있는 자들도 잘 모른다. 더구나 외부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정체를 안다는 건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설마, 네놈들 은왕의 졸개냐?"
"졸개라니?"
꽈과광!
거센 장력이 흉마의 외침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강악은 손을 마구 휘저어 그 장력을 해소하며 눈을 빛냈다. 그냥 찔러봤는데 그대로 걸려들었다. 저들은 은왕의 하수인들이었다.
"그냥 졸개들 치고는 꽤 대단한데?"
"우리는 졸개가 아니라고 했다. 구대문파도 어쩌지 못한 우리를 감히 누가 졸개로 부린단 말이냐!"
그 말에 당백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구대흉마였군. 넷이 죽었다고 했으니 숫자도 딱 맞구나."
당백형의 말에 다섯 흉마들의 눈이 사나워졌다. 구대흉마 중 셋이 죽은 것은 이미 밝혀진 일이지만 아직 흑수검마에 대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운남의 곤명 근처에서 사라졌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었다.
"죽었다고? 그럼 흑수검마가 죽었단 말이냐?"
다섯 흉마의 눈에서 흉광이 번득였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사실 다른 동료가 죽었다는 건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이곳에 잡아 뒀어야 할 사람 하나가 뇌룡장으로 돌아갔다는 점이었다.
눈짓을 주고받던 흉마 중 하나가 슬며시 뒤로 빠졌다.
강악과 당백형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재빨리 몸을 날렸다. 더 이상 시간을 끌게 둘 수는 없었다.
꽈르르릉!
쉬쉬쉭!
뇌전이 줄기줄기 뻗어나갔고, 비침이 하늘을 빽빽하게 메웠다.
쐐쇄쇄쇄엑!
수백 개의 비침이 쏟아졌고, 흉마들은 코웃음을 치며 온몸에서 기를 뿜어냈다.
콰과과광!
거대한 폭음이 울리며 자욱하게 먼지가 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코앞도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이들에게는 그저 조금 불편한 정도에 불과했다.
퍼버버벅!
권각이 마주치는 소리가 울렸다. 강악이 아예 흉마들 틈으로 들어가 마구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흉마들에게 포위된 형국이었는데, 강악은 전혀 밀리지 않고 그들을 상대했다.
당백형은 외부에서 흉마들의 다리로 암기를 날리거나 강악이 조금이라도 위기에 몰리려 하면 달려드는 식으로 손발을 맞췄다.
하나가 사라져 이제 넷이 된 흉마들이 당황스런 눈을 감추지 못했다. 혈왕단으로 강해졌기에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한데 넷이서 고작 둘을 상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사실 구대흉마는 협공에 익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명이 하나씩 붙들고 싸웠다면 조금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차륜전을 벌였다면 훨씬 쉽게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넷이 동시에 공격을 하다 보니 미묘하게 호흡이 어긋났다. 강악은 그 미묘한 틈을 파고들었고, 당백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흉마들이 그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들도 수많은 실전을 거쳐 왔다. 한때는 구대문파와 맞서지 않았던가.
"물러나라!"
흉마 중 하나가 그렇게 외치며 온몸에서 기운을 폭발시켰다.
콰과과과광!
적아를 가리지 않는 공격이었기에 남은 흉마들도 기겁을 하며 물러나야 했다.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자, 기운을 폭발시킨 흉마의 낭패한 몰골이 드러났다. 넝마가 되어 버린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가벼운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한 것이다.
비록 피해를 조금 입긴 했지만 덕분에 강악과 당백형이 떨어져 나갔다. 이제는 다시 그런 수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강악과 당백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흉마들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쉽게 싸움을 끝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엽광패는 표중산을 들쳐 메고 뇌룡장을 향해 쏜갈같이 사라졌다. 상당히 뛰어난 경공 실력을 가졌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뇌룡장 근처에 도착한 엽광패는 황급히 멈춰 서야 했다.
"저, 저놈들 뭐야?"
엽광패는 황당한 얼굴로 뇌룡장을 바라봤다. 정체불명의 무리가 뇌룡장을 포위하고 있었다. 모두 흑의를 입었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새 표중산도 엽광패의 어깨에서 내려와 몸을 숨긴 채 흑의인들을 유심히 살폈다.
"생각보다 채금상단의 힘이 대단하군요."
표중산의 말에 엽광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정도 무사들을 일시에 동원할 수 있다면 그 힘이 결코 오대세가의 아래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니, 어쩌면 능가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실력인데......"
엽광패쯤 되는 고수는 상대의 자세나 움직임만 봐도 대강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다. 그가 판단하기에 지금 뇌룡장을 포위한 흑의인들은 정협맹의 정예무사보다 더 뛰어난 듯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저놈들이 습격을 하기 전에 발견해서, 안 그랬으면 피해가 끔찍했을 거야."
엽광패의 말에 표중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표중산은 조심스럽게 적들을 좀 더 살피려다가 깜짝 놀랐다. 엽광패가 몸을 드러낸 채 그들을 향해 걸어갔기 때문이다.
"노, 녹룡대주님!"
엽광패는 등 뒤로 손을 몇 번 흔들어 주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으라고. 아무나 십대고수라 불리지 않아.
외총관은 숨어 있다가 기회를 틈타 뇌룡장 안으로 들어가. 여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저놈들 만만치 않으니까 조심하고."
엽광패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마치 쭉 늘어나는 듯했다.
"으하하하하! 이놈들 여기서 뭘 하느냐?"
콰과과광!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엽광패는 어느새 거대한 도를 꺼내들고 사방을 휘저어댔다.
도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막강한 도기가 쏟아져 나갔다. 흑의인들을 휩쓸고 지나간 도기는 허공에서 폭발했고, 그때마다 커다란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흑의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엽광패에 크게 당황했다. 일순 그들의 포위망이 크게 흔들리며 일부가 무너졌다.
표중산은 은밀히 숨어 있다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헛!"
"잡아라!"
표중산을 발견한 흑의인들이 그를 막아서려 했지만 엽광패가 일으킨 도기의 폭풍에 휘말려 버렸다.
콰과과광!
"크아악!"
표중산은 뇌룡장의 담을 훌쩍 뛰어 넘었다. 그의 뒤를 따라 흑의인들이 속속 담을 넘었다.
엽광패가 일으킨 소란 덕분에 뇌룡장에 있던 모든 무사들이 순식간에 싸울 준비를 했다. 뇌룡대는 물론이고 녹룡대도 달려 나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을 대비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이 담을 넘어 들어온 표중산이었고, 그 뒤를 이어 뛰어 들어온 흑의인들이었다.
"쳐라!"
누가 소리쳤는지 모르지만 그 외침을 신호로 녹룡대가 우르르 몰려갔다. 녹룡대는 속속 담을 넘어 들어오는 흑의인들을 그대로 덮쳤다.
처음 담을 넘던 흑의인들은 미리 대기하던 녹룡대의 공격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두 동강 나야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흑의인들이 당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하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흑의인들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뇌룡장에서 흑의인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무사는 뇌룡대와 녹룡대뿐이었다. 다른 무사들은 원래 실력이 모자랐기에 그들을 절대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뇌룡대와 녹룡대가 주로 싸우고 일반무사들은 무공을 모르는 식솔들을 보호했다. 물론 흑의인들이 작정을 하고 달려들면 그조차 불가능하겠지만.
"크윽! 대체 이놈들은 뭐야!"
녹룡대원 중 하나가 소리쳤다. 흑의인들의 실력이 정말로 대단했기에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그런데다가 숫자도 많으니 정말로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나마 실력이 뛰어난 편인 녹룡대는 나았다. 뇌룡대는 싸움이 점점 치열해질수록 몸에 입는 상처의 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흑의인들은 녹룡대보다 뇌룡대가 더 무서웠다. 뇌룡대의 전법은 한결같았다. 품에 잔뜩 가지고 있는 신선단과 신선고를 이용한 싸움이었다.
고통 때문에 악귀같이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드는 뇌룡대의 모습은 전설속의 혈강시보다 더 무서웠다.
그렇게 뇌룡장 안에서 싸우는 동안에도 담장 밖에서는 연방 폭음과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엽광패와 흑의인들의 싸움이었다. 엽광패가 하도 설쳐대는 통에 흑의인들은 뇌룡장을 제대로 공격할 수 없었다. 포위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포위망에 구멍이 잔뜩 뚫린 상태에서 흑의인들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자, 뇌룡장 안에 머물던 식솔들과 일반 무사들이 조심스럽게 장원을 빠져나갔다.
소명학은 그들을 지휘해서 한 명도 다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뇌룡장 안에는 녹룡대와 뇌룡대만 남아 흑의인들과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엽광패는 신나게 도를 휘둘렀다.
흑의인들 중 그의 도격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엽광패도 예전의 엽광패가 아니었다. 거의 매일같이 강악과 당백형에게 시달려 실력이 대폭 상승했다.
그런 엽광패의 공격을 쉽게 막으려면 상당한 고수라야 했다. 흑의인들 중 그런 고수의 수는 몇 되지 않았고, 그런 고수들은 굳이 엽광패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
엽광패는 힘차게 도격을 휘두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겉으로는 신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아무리 십대고수라지만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렇게 많은 수의 무사들을 상대로 계속 싸우면 언젠가는 지치기 마련이다.
아직은 그런대로 버틸 만했지만 언제 힘이 떨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직은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언제 눈먼 칼에 맞을지 모른다.
일단 작은 상처라도 나면 지속적으로 체력이 떨어져 결국은 파탄에 일고 말 것이다.
엽광패의 뇌리에 품에 있는 신선단 하나가 떠올랐다.
뇌룡대가 먹는 신선단인데 혹시나 하고 하나 받아 놓은 것이다. 아무리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신선단을 떠올리자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도 함께 떠올랐다. 엽광패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더욱 힘차게 도를 휘둘렀다.
퍼버벙!
"크아악!"
폭음과 비명이 울리자, 엽광패는 민첩하게 몸을 회전시키며 도를 휘둘러 주변을 한바탕 휩쓸었다.
'절대 다치지 말아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고통을 당하기는 싫었다. 그럼 안 다치면 된다. 엽광패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도를 휘두르고 몸을 날렸다.
한곳에 머물러 싸우면 다칠 확률이 더 높다. 적들에게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줘선 안 된다. 특히 이렇게 실력 차가 뚜렷한 경우에는 더 그렇다.
엽광패의 몸이 쭉 늘어나듯 삼 장 정도 이동했다. 사방으로 도기가 쏟아져 나갔고, 다시 이동했다. 흑의인들은 그런 엽광패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엽광패는 또 몸을 날리려다가 갑자기 등줄기에 올올이 돋아나는 소름에 깜짝 놀라 몸을 위로 솟구쳤다.
콰과광!
엽광패는 공중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 이동하려던 곳에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만일 그냥 몸을 날렸다면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했을 것이다.
공중에 떠오른 엽광패는 급히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인지 살폈다. 상황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엽광패의 눈에 흉마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젠장! 그 노인네들은 대체 뭘 하는 거야?"
엽광패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강악과 당백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공중에 떠오른 엽광패가 다시 아래로 떨어져 내리자 밑에 있던 흑의인들이 눈을 빛내며 검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엽광패는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그게 그리 쉬울 것 같으냐?"
엽광패는 몸을 뒤집어 머리가 아래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도에 내력을 집중했다.
찌르르르.
엽광패의 도가 진동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하아압!"
엽광패는 몸을 회전시키며 새하얗게 달아오른 도를 힘차게 휘둘렀다.
콰콰콰콰!
엄청난 도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 바람 사이로 수백 수천의 도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과과과과과광!
땅거죽이 뒤집어지고 돌과 흙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도기의 비가 뒤덮은 곳에 흑의인들은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핏물로 녹아내렸다.
그렇게 아수라장으로 변한 곳에 엽광패가 사뿐히 내려섰다.
"어이, 노괴! 덤빌 거면 빨리 덤벼라. 시간 없으니까."
엽광패는 도를 어깨에 메고 손가락 하나를 까닥여 흉마를 도발했다.
흉마는 그런 엽광패의 모습에 혈광을 뿜어내는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혈왕단을 먹은 이후로 참을성이 거의 없어졌다. 이런 빤히 보이는 도발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크하하하! 어디 혓바닥이 뽑히고 이빨이 다 부서져도 그따위 말을 할 수 있는지 보겠다!"
흉마가 몸을 날려 엽광패를 덮쳤다. 엽광팬느 침착하게 도를 휘둘러 흉마의 공격을 막았다.
콰아앙!
기와 기의 격돌에 사방으로 기파가 몰아쳤다. 엽광패와 흉마는 잠시 서로의 무기를 맞댄 채 힘겨루기를 하다가 눈부신 속도로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쾅! 쾅! 쾅!
도와 검이 부딪칠 때마다 폭음이 일었고, 사방으로 불꽃과 기의 파편이 튀었다.
근처에 있던 흑의인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잠시 둘의 싸움을 지켜보다가 일부만 남아 감시하고 나머지는 모두 뇌룡장의 담을 넘었다.
그것을 본 엽광패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젠장!"
퍼버벙!
엽광패는 더욱 열심히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흉마의 실력과 경험이 엽광패보다 조금 위였다. 도를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하아압!"
엽광패는 이를 악물고 도를 휘둘렀다. 서둘러 눈앞의 적을 처리하지 않으면 뇌룡장이 위험해진다고 생각하니 점점 더 마음이 급해졌다.
쉬각!
"큭!"
흉마의 검이 엽광패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결국 파탄이 난 것이다. 뇌룡장에 있는 자들이 걱정되어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드러난 빈틈을 구대흉마쯤 되는 고수가 놓칠 리 없었다.
엽광패는 옆구리에서 피를 쏟으며 뒤로 물러났다. 흉마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을 빛내며 바짝 따라붙었다.
"이런 젠장!"
엽광패는 더 이상 옆구리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냥 두 손으로 도를 쥐고 힘차게 휘둘러 버렸다.
쩡!
도와 검이 부딪치자 엽광패가 더욱 빠르게 뒤로 날아갔고, 흉마는 뒤로 살짝 물러나 멈춰섰다.
흉마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십대고수라더니 고작 그 정도인가?"
흉마의 조롱에 엽광패의 눈이 돌아가 버렸다.
엽광패는 지금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은 것만 아니라 상처를 통해 안으로 들어와 몸속을 한바탕 휘저은 검기 때문에 내부도 엉망이었다.
"으드득, 넌 죽이고 만다."
엽광패는 이를 갈며 재빨리 품에서 신선단과 신선고를 꺼냈다. 급한 김에 일단 신선단부터 먹었다.
"크아아아악!"
폐부를 쮜어짜내는 비명에 흉마가 깜짝 놀랐다.
"저 미친놈, 뭘 하는 거냐? 독이라도 처먹고 죽으려는 거냐? 큭큭큭."
흉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엽광패에게 다가갔다.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든 것이다. 엽광패는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이런 젠장! 뭐가 이렇게 아파!"
예쩐 무영에게 당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다. 새삼 뇌룡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괴물 같은 놈들.'
엽광패는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신선고를 바를 시간은 없었다. 벌써 흉마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크아아아!"
부우웅!
엽광패가 발작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고 빠른지 흉마는 화들짝 놀라 급히 위로 솟구쳐 올랐다. 앞으로 다가가던 도중이라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엽광패는 비스듬히 위로 후드러던 도를 억지로 비틀었다.
"크아압!"
우드득!
팔의 근육과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게 도의 방향이 위로 바뀌었다.
"이런 미친놈!"
흉마가 다급히 아래로 검을 휘둘러 엽광패의 도를 막으려했다. 하지만 반응이 조금 늦어 버렸다. 엽광패의 한 수는 흉마의 빈틈을 정확히 찔렀다.
쩡!
콰드득!
흉마는 자신의 검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하반신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바닥을 꼴사납게 구르며 엽광패에게서 떨어진 흉마가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엽광패를 노려봤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하반신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바지가 갈가리 찢어졌고, 허벅지에서부터 아랫배가 있는 곳까지 수많은 상처가 생겨 버렸다.
"크으으윽!"
엄청난 통증이 일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흉마의 눈에서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감히!"
"쿨럭! 감히 뭐? 큭큭큭. 그리고 보니 앞으로 네놈 사내구실은 못하겠구나. 뭐, 어차피 노괴라서 상관없나?"
엽광패의 조롱에 흉마는 다시 자신의 하체를 살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뜬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흉마는 그렇게 말하며 한 발 한 발 엽광패에게 다가갔다.
엽광패는 허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한 손으로 막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신선단 덕분에 체력과 내력을 단번에 회복했지만, 그 모든 것을 쏟아부어 방금의 한 수를 만들어 냈다. 흉마가 그것을 버틴 이상 자신의 패배였다.
'그래도 혼자 가지는 않는다.'
엽광패가 흉마를 노려보며 입강에 비웃음을 걸었다. 도발이었다. 흉마는 그 도발에 제대로 넘어가 앞뒤 재지 않고 엽광패에게 달려들었다.
'끝이구나.'
엽광패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아 있는 내력을 모조리 옆구리를 쥔 손으로 끌어모았다.
목숨을 내주는 순간 손을 뻗을 생각이었다.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크아아아!"
흉마가 괴성을 지르며 엽광패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번쩍!
엽광패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나 눈부신 섬광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을 감기 직전 흉마가 꼴사납게 뒤로 날아가는 광경은 분명히 봤다.
엽광패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꾹 감은 채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손에 모았던 내력도 모두 흩어 버렸다.
엽광패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한 사내의 등이 보였다.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사내가 돌아서서 빙긋 웃었다. 엽광패도 따라서 웃었다. 사내가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엽광패는 주저하지 않고 그 단약을 받아 삼켰다. 청량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그렇게 심각했던 내상은 물론이고 갈라진 채 터져나간 옆구리로 아물었다.
"뇌룡장은 어떻게 되었소? 장주."
엽광패의 물음에 무영이 빙긋 웃었다. 엽광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두 분은 어디 있습니까?"
무영의 물음에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엽광패가 벌떡 일어섰다.
"아차! 그 노인네들!"
"노인네? 그러니까 네놈이 날 그런 식으로 부르고 다녔단 말이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엽광패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이 보였다. 강악과 당백형이었다.
"거 구대흉마, 구대흉마 하더니 꽤 세더구나. 좀 힘들었다."
무영은 다급히 그들에게 다가가 서둘러 상처를 봐주었다. 신선단으로 내상을 다스리게 한 후, 신선고로 몸의 상처를 치료하자, 강악이 순식간에 몸을 날려 엽광패의 뒤통수를 때렸다.
퍽!
"에라, 이놈아."
"크악!"
엽광패는 뒤통수를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저지른 일이 있어 뭐라 항변하지도 못했다.
"자,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무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뇌룡장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죽기 일보직전에 있던 뇌룡대와 녹룡대를 구해야 했다.
물론 그들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보다 훨씬 뇌기에 대한 장악력이 늘어난 무영은 수많은 벼락의 비로 흑의인들을 단숨에 제압해 버렸다.
무영에게 제압당한 흑의인들은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저 기절했을 뿐이었다. 지금 그들은 뇌룡장에 있는 가장 큰 연무장에 포박되어 있었다.
그렇게 뇌룡장을 정리한 무영은 즉시 밖으로 나가 엽광패도 구해야 했다. 엽광패와 싸우던 흉마 역시 죽이지 않고 제압했다. 물론 무공을 폐했다. 그의 단전은 뇌기로 인해 완전히 녹아 버렸다.
무영은 세 사람을 이끌고 다시 뇌룡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을 넘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뇌룡대와 녹룡대, 그리고 표중산과 소명학이 무영을 맞이했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표정과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장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인사에 무영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무영은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가족이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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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눌즐감
감사
감사합니다.
다시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감동
즐감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