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07
7월3일[성 토마스 사도 축일/연중 제1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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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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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X1lRyQRTNk
[의정부교구 김지수 아우구스티노(백석동본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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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홀로 어두컴컴한 회의와 불신의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던 토마스 사도!>
전승에 따르면 토마스 사도는 성격이 조금은 내성적이었지만 마음이 무척이나 너그러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다른 그 어떤 제자들보다도 충실히 스승님을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받았던 심리적, 정신적 충격이 엄청나게 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토마스 사도의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그는 점점 자신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의지하고 희망할 대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것입니다.
다른 열 제자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는데,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이유도 뻔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의욕이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졌습니다. 그 결과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처박혀 있었을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실망감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얼마나 실망하고 좌절했으면 예수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나 베드로 사도의 증언도 그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간 토마스 사도는 홀로 어두컴컴한 회의와 불신의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너무나 기뻐 환호하고 용약하고 있는데 토마스 사도 혼자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토마스 사도는“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증언하는 다른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런 토마스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뒤에 발현하셨는데, 토마스 사도가 그토록 바라고 있던 뚜렷한 증거를 하나 하나 보여주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 순간 토마스 사도는 마치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모든 저항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약한 믿음은 한 순간 크게 비약하게 되었습니다.
연못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폭우가 와서 진흙들이 많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연못이 흐려졌습니다. 원래 연못 안에는 크고 예쁜 비단잉어들이 살고 있었는데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잉어의 멋진 자태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진흙탕 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부족한 우리들 영혼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흙으로 흐려진 연못 같은 우리들의 눈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잡다한 걱정거리들, 유혹거리들로 우리의 영혼이 흐린 상태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진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작업입니다. 그 작업이 바로 침묵이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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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axKOJvlo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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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을 믿지 않는 이유가 과학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는 의심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사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봤다고 하면 믿어야 할 텐데요. 그런 이유는 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직접 자기 손으로 예수님 상처를 만져봐야겠다고 말합니다. 증거가 확실해야 믿겠다는 사고입니다.
과학적 사고를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화론만 과학적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많이 이용하기는 하지만, 과학적이지는 않습니다. 진화라는 말 자체가 발전한다는 뜻이고 저절로 발전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배워야 하고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흡수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퇴화하는 게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들은 유전자 변이로 설명하려고 하지만, 몸에서 유전자가 변이된 것을 암세포라 부릅니다. 더 완전해지는 변이는 없습니다. 개가 유전자가 변이되면 두 발로 걷고 말도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제가 신앙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창조론도 이치를 따지는 과학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성적 사고를 한다고 자부하는 현대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을 만나게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자임을 피조물이 알아주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는 아버지에게 자녀에게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영화 ‘블랙’은 헬렌 켈러와 같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여 자신이 사람인지 동물인지도 모르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이 아이에게 엄마, 아빠란 말 한마디 듣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써 가며 교육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가 엄마, 아빠란 말을 했을 때 그들의 모든 고생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원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당신을 알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눈을 감아버리고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도 하느님을 믿었다가 점점 과학자가 되어가며 의심하고 하느님을 버렸던 이가 있습니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알려는 마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31세의 파스칼은 심오한 종교적 경험을 합니다. 그 경험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체험을 기억하기 위해 양피지에 써서 옷 안쪽에 꿰매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의 글을 보면 오늘 토마스 사도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 성령의 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철학자와 학자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확신,
확신,
감격,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너의 하느님.
너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 이외에 이 세상과 온갖 것에 대한 일체의 망각.
하느님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길에 의해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
환희,
환희,
기쁨,
환희의 눈물.
나는 당신에게서 떠나있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당신이 보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당신을 저버리고, 피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오직 복음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지도자에게 전적인 순종.
이 땅에서의 잠깐의 노력을 통해 얻는 영원한 기쁨.
나는 당신의 말씀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파스칼의 신과의 만남과 그에 따른 개종은 그의 유명한 작품 ‘팡세’를 포함하여 그의 철학적, 신학 저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조금은 잔인한 말이지만 지금 길을 찾고 있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면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냥 믿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믿기를 원하면 반드시 만납니다. 믿기 싫은 이유는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데 창조자가 있다면 창조자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가 있는 편을 택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사는 고통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사고를 하더라도 믿고 싶으면 반드시 믿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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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은 ‘줄’ 서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더 빨리 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덜 복잡하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는 ‘줄’ 서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버스가 한 대 오면 승객들이 버스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버스는 정류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정차했고, 승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승차하려고 좁은 문을 향했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등교하기 위해서는, 출근하기 위해서는 버스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차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는 차에서 승객을 안으로 밀어 넣었고, 버스 안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같았습니다. 지금은 자동차가 많이 보급되었고, 지하철도 노선이 늘어서 예전처럼 만원버스를 경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버스가 올 때까지 길게 줄을 서서 스마트 폰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비행기 여행을 하면서 입국과 출국을 위해서 줄을 서는 일이 있습니다. 출국을 위해서는 3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라고 합니다. 대기하는 사람이 많기도 하고, 뜻하지 않는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터미널이 바뀌기도 하고, 출발 시간이 바뀌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입국을 위해서도 줄을 서야 합니다. 보통은 1시간 정도 기다리게 됩니다. 어떤 직원은 빠르게 입국 심사를 하지만 어떤 직원은 까다롭게 입국 심사를 하기도 합니다. 앞에 심사 받는 사람이 서류에 문제가 있으면 직원은 아예 문을 닫고, 심사 받는 사람을 데리고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 줄에 서 있으면 평소보다 늦게 입국하게 됩니다. 입국과 출국의 절차만 간단해도 여행의 피로가 많이 감소할 것 같습니다. 저도 환승하는 과정에서 비행기를 놓칠 뻔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연착하였고, 환승하는 비행기의 터미널이 바뀌었습니다. 서둘러서 뛰었지만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다행히 저처럼 늦은 승객이 7명이 더 있어서 직원은 닫았던 문을 열어주었고, 저는 무사히 다음 목적지 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산하기 위해서 줄을 섰습니다. 제 앞에 있는 분이 미사 반주 봉사하는 자매님이었습니다.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매님이 이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라면서 제 카트에 있는 것들까지 계산해 주었습니다.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떠올라서 웃었습니다. 줄과 관련해서 재미있게 읽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양파 한 뿌리가 생각났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옛날 못된 할머니가 살았는데, 죽고 나서 보니 착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에, 악마들은 할머니를 불바다 속에 던져 버렸다. 그래도 이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뭔가 구제할 거리가 없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단 하나의 선행을 기억해 내고는 하느님께 고했다. 할머니는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 양파를 가지고 가서 할머니가 양파를 붙잡고 나오게 하라. 만약 불바다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가지만, 양파가 끊어진다면 불바다에 남게 되리라.' 수호천사가 내민 양파를 붙잡고 할머니가 조심조심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다른 죄수들이 할머니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고!’ 그녀가 이 말을 하기 무섭게 양파는 뚝 끊어져 버리고 할머니는 불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천사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떠났다고 한다.”
그렇습니다. 나만 잘 살겠다고 하는 이기심의 줄은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하지 못합니다. 더 많이 채우려는 권력과 재물 그리고 명예의 줄 또한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하지 못합니다. 시대를 탓하고, 부모를 탓하는 불평과 원망의 줄도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줄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의 줄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처럼, 절망의 터널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는 그 희망의 줄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센 풍랑에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왜 이리 믿음이 약하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줄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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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24-29: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오늘은 사도 성 토마스 축일이다. 토마스라는 말은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복음에 나타나는 대로 토마스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는 말로 보인다. 쌍둥이라는 것은 형제가 있는 쌍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토마스 사도는 페르시아와 인도에 가서 선교하던 중, 마드라스(현: 첸나이)에서 순교하였으며, 그곳에 성 토마스 성당을 지어, 지금 중앙 제대 아래 안장되어있다. 인도에서는 성 토마스가 인도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으며, 많은 신자가 세례명으로 토마스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성 토마스는 건축가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는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후에 토마스에게 나타나신다. 왜 곧바로 나타나시지 않고 그렇게 늦게 나타나셨을까? 그것은 토마스가 다른 사도들에게 계속 이야기를 듣고 더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뵙고 믿게 될 준비를 하시느라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소망을 들어주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이제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토마스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사람들의 모습이며, 이 고백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오늘 복음에서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말씀하신다. 의심하는 제자가 스승의 몸에 난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였다. 토마스는 우리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믿음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해서 얻으신 영광이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예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도 신앙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절대로 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쳐서 얻으신 영광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새로운 태어남을 의미하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태어남이다. 이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 토마스 사도와 같이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계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우리도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토마스 사도께 도움을 청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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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모든 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자신만 만나지 못하였다면 과연 그 기분이 어떨까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결코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 가득 찬 말이지만, 이 말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도 만나고 싶다는 토마스의 열망이 함께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이는 믿지 못하는 토마스를 위한 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토마스가 제자들에게 하였던 말을 마치 그 자리에서 함께 들으셨던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한 그 순간에도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최고의 신앙 고백이, ‘결코 믿지 못하겠다’던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님께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릴 때조차, 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토마스에게 하셨던 것처럼 다시 찾아오시어 우리가 다시 당신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께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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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는 힘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4-29)
1) 여기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은, 토마스 사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데도 믿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8-9)
사도시대 이후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또 거의 대부분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으면서도,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직접 뵐 수 있다면 좋고, 직접 뵙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는 힘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힘입니다. <이 말을 “믿으면 보인다.”, “믿으면 깨닫는다.”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니까 믿어야 한다.”가 아니라, “믿으니까, 보이지 않아도 본다.”입니다.>
2) ‘본다.’, 또는 ‘보인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에도 연결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이 말에서 ‘보이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 증명할 수 있는 것’ 등을 뜻합니다. 그리고 좀 더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현세적인 것, 허무한 것’ 등을 뜻합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증명할 수 없는 것,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을 뜻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얻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또 누구든지 자격만 갖춘다면 그것을 얻어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희망’을 ‘믿음’으로 바꿔도 뜻이 같습니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3) 바로 앞의 19절을 보면,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토마스 사도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문을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26절)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제자들이 박해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그들이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음을(마태 28,17)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다른 제자들이 토마스 사도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전한 것이었을 뿐이고, 자신들의 신앙을 증언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토마스 사도가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해서 토마스 사도만 탓할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증언’은 ‘말’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믿음 덕분에 ‘삶’이 완전히 변화되어 있어야만 ‘말’로 하는 증언에 힘이 생기는 법입니다. <변화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4) 우리가 하는 선교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활동은, 또는 복음 선포 활동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하는 활동입니다. ‘믿음으로써 변화되어 있는 나의 삶’은, ‘나의 믿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믿기 전과 믿은 다음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없고 이도 없다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전해 주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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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성체 분배를 하다 보면 신자의 얼굴보다는 손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때때로 여기저기 갈라진 틈 사이로 기름 때인지 흙먼지인지 모를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손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험하게 살아 온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손가락의 한 마디가 없는 손도 있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붙어 나무껍질 같아 보이는 손도 있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직접 대화하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힘들고 고단하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느끼게 해 주는 손입니다. 성체를 건네는 사제의 손을 숙연하고 미안하게 만드는 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손과 손이 만납니다. 한 손은 십자가의 상처가 남아 있는 손입니다. 뚫린 못 자국의 아픔과 핏자국이 아직 가시지 않은 손이지만, 괜찮다며 먼저 내밀어 주는 손입니다.
또 하나의 손은 확신을 바라는 손입니다. 또다시 실패할까 두려워 믿고 의지하지 못하는 손이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손입니다. 자신의 손짓 하나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오만과 자만의 손이며, 타인의 말과 감정을 듣지도 함께하지도 못하는 매정하고 비정한 손입니다.
그러한 두 손이 만납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손가락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상처 입고 구멍 뚫린 손에 가 닿습니다.
그 한 번의 만남을 통하여 토마스가 모든 것을 깨달을 수는 없었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상처의 아픔이, 그 십자가 죽음의 고통이 바로 자신 때문이었음을 말입니다.
이 두 손의 만남은 어쩌면 공감의 마음일 것이고, 어쩌면 외면에 대한 미안함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아 보십시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느낌을 통하여 그의 지나온 삶에 공감하고, 조금은 미안함이 깃든 사랑을 만나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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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토마스 사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한때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토마스의 불신앙’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토마스 사도를 질책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를 통하여 신앙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합니다. 그는 당시 부활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였던, 믿지 못하였던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활은 그야말로 초유의 사건입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쉽게 믿지 못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마르 16,11.13 참조) 부활은 그만큼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발현을 통하여 이런 토마스에게,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토마스 이야기의 결론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부활을 확인하려 하고 믿지 않았지만, 부활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넘어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 전하는 행복 선언입니다. 이는 당시의 제자들이나 사람들보다 지금 부활을 믿는 이들을 향한 말씀이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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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뵈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런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의 의심을 야단치지 않으시고, 토마스의 방식에 따라 그를 믿음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바라신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토마스는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외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두고 직접 “하느님”이라고 외친 이는 토마스가 유일합니다.
조금 전까지 의심이 가득하였던 인물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바로 믿음의 인간으로 변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시작부터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사실을 토마스가 직접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믿음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당신을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당신을 따르는 이들,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당신을 따라나선 이들이야말로 참으로 대단한 믿음을 지닌 이들이고 행복한 이들임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닌 우리 모두가 제자들만큼, 아니 제자들보다도 더 행복한 이들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라고 말합니다.(코린토 1서 12장 9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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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0,27)
미학 교재로 자주 사용되는 ‘존 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은 어쩌면 ‘단순히 보는 것’의 의미를 넘어서 그 ‘이면의 것을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길잡이와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에게는 본다는 것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나의 눈으로 보고 인식하는 대상이나 존재와의 관계 맺음이고, 이차적이며 본질적인 것은 보여지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존재 곧 하느님과의 관계 맺음으로 나가는 것이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토마스 사도의 보고 싶다, 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상처를 넘어서, 그 상처 이면의 의미를 보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관계 맺음을 위한 마음의 표현과 표출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오늘은 열두 제자 중 한 분이신 토마스 사도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녀가셨던 날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으므로,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고 한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20,25)라고 동료들에게 말합니다. 이 표현은 믿을 수 없고 믿지 않겠다는 표현이라기보다 더 믿고 싶고, 더 굳게 믿기 바라는 강한 원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토마스의 의문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제기해 온, ‘예수께서 정말로 죽은 이들 가운데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는가?’라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확신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바탕이며 토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1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5,13~14)라고 말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어떤 사람인지는 요한복음에 2번 등장합니다. 토마스는 스승이신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그곳으로 가자고 했을 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11,16)라고 할 만큼 용기 있게 맞서는 현실주의자로 나옵니다. 또한 그는 의문이 생기면 꼬치꼬치 캐묻는 학구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세상을 떠나실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사의 자리에서도,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14,5)라고 반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질문 덕분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14,6)라는 대답을 예수님에게 듣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경험을 기억하고 있던 토마스 사도이었기에 지극히 단순하게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라고 했던 것입니다. 단순한 만큼 진리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의 의문에 응답하시듯 다시 나타나시어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0,27) 그러자 토마스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자기 손을 대보거나 넣어 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얄팍한 몸짓은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모독이며 믿음의 걸림돌이 될 뿐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상처가 곧 자신에 대한 사랑의 흔적임을 깨닫고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미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으로부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의 진리 앞에 그의 의심은 오히려 부활의 진리를 향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의심은 의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온전히 믿기 위한 디딤돌, 도약판과 같습니다. 주님은 그런 토마스 사도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라고 말씀하신 것은 토마스에 대한 질책보다 미구에 당신을 보지 못하고 믿을 모든 사람에 대한 주님의 축복입니다. 이로써 토마스 사도의 의문은 부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모든 사람에게 향한 좋은 신앙의 본보기입니다. 아울러 토마스의 고백은 부활을 믿는 모든 사람이 주님께 고백해야 할 신앙 고백입니다.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필요한 신앙의 자세는 바로 토마스처럼 진리를 향한 갈망과 회의 그러나 진리를 발견한 다음에는 기꺼이 인정하고 진리에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 또한 지금 품고 있는 신앙의 의문과 회의 앞에 처절하게 싸우고 그 진리를 온몸으로 터득한 다음에는 토마스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기로 합시다. “네 손을 넣어 못 자국을 확인해 보아라.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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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기 삶이 너무 고단하고 힘들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모두 힘들다는 것입니다. 특히 직장 생활은 자기와 전혀 맞지 않았지만, 그만두면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해서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집에 가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 사고만 치는 아들, 계속 잔소리만 늘어놓는 아내로 인해 집에 아예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자기 어려울 때만 도와달라고 찾아오지, 평상시에는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적인 말도 서슴지 않고 말하니 친구와의 만남도 불편함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현자를 찾아가 어려움을 하소연했습니다. 이 현자는 양팔을 쭉 펴라고 하더니만 손바닥 위에 여러 권의 책을 올려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충분히 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서 도저히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현자가 말합니다.
“손 위의 책들이 바로 당신을 지금 힘들게 하는 고민입니다. 지금 편해지려면 책이 줄어들어야 가능하겠지요? 그렇다면 형제님이 가지고 계신 힘들게 하는 고민의 책 중에서 무엇을 빼시겠습니까? 직장, 아버지, 아내, 자녀, 친구…. 빼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땅에 모두 떨어뜨리고 말 것입니다.”
현자의 말이 정답입니다. 모든 고민을 다 들고 갈 수 없습니다. 자기 혼자 고민을 다 들고 있겠다는 것은 욕심이고 겸손하지도 또 지혜롭지도 않은 모습입니다.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과 또 함께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이런 용기를 갖춘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일화는 예수님 부활에 대한 공동체의 증언을 믿지 않고 특별한 체험을 요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지금을 사는 우리 모습에서 너무나도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면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하느님의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자기 삶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손길이 지워지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죽음 이후 다락방에 숨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처음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혼자만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혼자 행동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고 또 믿음도 잃었던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가 내려놓아야 할 것, 또 함께해야 할 것, 그리고 주님께 의지해야 할 것을 따져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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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 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 거기에 있었고,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였으며 예수님께서 고별사를 할 때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한 용맹심과 충성심이 높은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0,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힘과 능력에 믿음을 두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믿음을 둡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드레 뒤에 다시 오셨는데 그것은 토마스에 대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섬세한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버려두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토마스는 감히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챘고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신 말씀이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토마스가 했던 말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제자는 토마스가 처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진정한 하느님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믿음이었듯이 오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던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길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토마스의 훌륭한 점은 형제들의 증언을 의심하면서도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심과 싸울 때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토마스는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기에 믿음의 최종적 자리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시험받고 도전받아야 합니다.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예수회 존포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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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고픈 믿음>
요한 20,24-29 (예수님과 토마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보고픈 믿음>
보지
못하였기에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에
보고플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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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생택쥐베리의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린왕자는 장미의 진심을 읽지 못하고 그에 상처를 받아, 장미를 떠나 지구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던 장미가 사실은 흔한 존재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에 지구에서 만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이야기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네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하게 된 것은 네가 네 장미꽃을 위해서 들인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잊어버렸어”.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은 참으로 이에 대해 동의하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랑, 우정, 진심과 같은 감정들과 나아가 햇살, 바람과 같은 실제적인 것들까지도 실제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 안에서 종교에 대한 믿음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이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늘어난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흔히,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원한다.”,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신보다는 이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과학이 오히려 종교에 가깝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현대 시대에서 종교의 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있고 물질 만능 주의는 팽배합니다. 무신론자들이 많아지면서 사랑과 윤리를 가르치는 종교의 가르침은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성적인 문화와 많은 재물의 가치를 높이 사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신앙인들의 태도에서도 발견됩니다. 성당에 나오긴 하지만 그저 형식적으로 미사만 드릴 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확신이 없는 경우도 많고 특히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그 생활에 너무 집중하는 나머지 주일에 드린 미사의 내용이나 예수님의 말씀은 쉽게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토마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이 주님을 봤다고 증언하지만 그는 그것을 결코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자주 예언하셨던 가르침이 부활인데, 그는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동료 제자들의 증언에도, 그는 직접 주님의 상처를 보고 만져야만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따뜻한 손을 내미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고 토마스가 대답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 말씀 속에는 주님의 축복과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평화만이 토마스의 의심을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의심과 평화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즉, 의심이 인간의 것이라면 이를 잠재우는 평화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평화를 전달하시고자 스스로 당신의 상처를 드러내 보이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예수님을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과 사건들은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물론이고 성인들의 이야기, 신앙으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그러하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하느님의 은총 역시 그렇습니다. 이처럼, 신앙적 측면에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은총, 언제나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의 위로, 부족한 것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은 때로는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마치 사랑과 우정, 혹은 햇살과 바람처럼 우리의 주변에 실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를 내 두 눈으로 보고, 내 두 손으로 만져 보고야 믿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에 앞서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던 그분의 사랑의 상처에 감사하며 오히려 이를 기뻐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독서에서 이야기하듯, 우리는 이 사랑의 상처 안에서,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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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의 신원>
"더불어 삶의 이로움"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시편117,1)
하느님 찬양과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성무일도 독서시 바오로의 "우리는 지금도 세상의 쓰레기처럼, 인간의 찌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1코린4,13ㄴ) 고백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비운 겸손한 삶인지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오늘 7월3일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쌍둥이로 불리며 이름도 쌍둥이라는 뜻이나 누구와 쌍둥이인지는 모릅니다. 사도는 특히 용기와 열정, 솔직함에서 뛰어납니다. 우리는 그의 용기있고 솔직한 질문 덕분에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귀한 말씀도 듣습니다. 예수님이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다로 돌아가려 할 때 다른 제자들처럼 물러서거나 망설임없이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외쳤던 열정의 사도였습니다.
의심 많았던 토마스는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의심을 거두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 최초의 사도입니다. 토마스가 아니곤 이런 고백을 할 사도는 없을 것입니다. 새삼 제자 공동체 형제들의 서로 다름이 풍요로운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즉시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토마스는 물론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신앙을 위해서는 토마 사도의 불신이 믿는 제자들의 신앙보다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행적은 전승과 <토마스 행전>이라는 위경을 통해 전해집니다. 이에 의하면 사도는 서기 52년 남부 인도를 방문해 7개 성당을 세웠고 72년 마두라스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인도 케랄라주의 말라바르 전례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토마스 사도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사도는 인도에서 목수로도 일했기에 신자들은 사도를 건축가와 목수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며,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2년 토마스 사도의 순교 1900주년을 맞이하여 사도를 인도의 수호자로 선언합니다.
혼자서는 살 수도 없거니와 혼자서의 신앙 역시 약하고 불안합니다. 더불어 교회 공동체의 축복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교회 공동체내의 다양한 형제들 덕분에 우리의 배움도 참 풍요롭습니다. 오늘 토마스 사도는 교회 공동체를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문이 다 잠겨 있는데도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며 평화를 선물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벽은 문으로" 변함을 깨닫습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공동전례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에게는 귀한 조언이 됩니다.
“배워서 쓸 수 없는 공부는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을 키워주는 공부가 진정한 공부다.”<다산>
공부의 궁극 목표는 더불어 공동체에 기여하는데 있음을 봅니다. 공동체 형제들이 모두가 나름대로 나눔으로 공동생활의 풍요로움입니다. 새삼 교회 공동체에 속한 각자가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독특한 재능이나 능력은 개인의 것이라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공동자산임을 깨닫습니다.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반이요, 나머지 반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다산의 목민심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뜻)라는 말도 있듯이, 자기 자신을 닦는 수신 공부가 먼저요, 수신의 궁극목표 역시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의 신원을 잘 보여줍니다. 아침성무일도시 독서와도 일치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각자,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요 하느님의 한가족’ 교회 공동체에 속한 신원을 확인하고 강화해 줍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서 보다시피 완성형의 교회공동체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하는, 또 계속 지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 있는 유기적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는 말그대로 삼위일체적 차원의 교회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한가족”이고 “거룩한 성전”, “하느님의 거처”라니 얼마나 은혜롭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말마디인지요! 그대로 우리 교회공동체의 신원을 알려줍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 진리를 그대로 깨닫게 해주고 실현시켜 줍니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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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토마스를 따라서>
“저의 주님, 저희 하느님!”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토마스를 따르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의심하거나 불신하신 적이 없으니 우리가 믿음으로의 여정을 주님을 따를 이유가 없지요.
반대로 토마스는 제일 의심이 많고 믿지 못하던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제일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에 도달했으니 토마스처럼 의심 많고 믿지 못하는 우리는 토마스가 우리 모델로 딱 맞지요.
그런데 우리는 토마스의 믿음 여정을 본받아야 하지만 의심과 불신도 토마스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한 토마스처럼 딱 부러지게 불신해야 하는데 우리는 확고히 믿지 못하면서도 불신의 자기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에, 그리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지 않고 대충 의심하기에 의심을 끝장내지 못하고 여전히 의심에 머물곤 하지요.
우리는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 토마스처럼
자기의 불신에 솔직할 수 있고 의심에 철저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토마스는 제자들 공동체를 떠나있다가 8일 만에 나타납니다. 왜 떠나있었을까요? 어디 있었을까요?
진짜 절망했고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떨거지들과도 절연하고 완전히 혼자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절망해본 사람은 압니다. 절망의 절연입니다.
어쩌면 동굴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서 고독하게 자기와만 싸우지 않고 분명히 하느님과 마주하며 하느님과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제자들 공동체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할 때 토마스처럼 자기 절망 안에만 갇히지 않고, 하느님과 마주하며 하느님과 싸웁니까?
어쨌거나 이런 과정의 여드레가 지난 다음 공동체에 돌아왔는데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부활 체험은 공동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 혼자서 부활 체험했더라도 체험한 뒤에는 공동체와 나눕니다.
부활과 생명과 사랑과 기쁨은 어디에 갇히지도 않고 그것들을 내 안에 가두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동굴에 혼자 있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공동체로 돌아온 토마스에게 나타나시고 이제 부활을 믿으라고 하시는데 부활을 믿으라고 하심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때 토마스는 비로소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분이 하느님이시고 자기의 주인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의혹과 의심은 말끔히 가시고 주님만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토마스의 믿음 여정을 따르라고 주님의 초대를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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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ㄴ)
<믿음을 통한 부활!>
오늘 복음(요한20,24-29)은 '예수님과 토마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첫 말씀은 이렇습니다. "열두 제자가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요한 20,24)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른 제자들이 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ㄱ) 하고 말하자, 토마스는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ㄴ)
이번에는 토마스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토마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예수님께서 우리를(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토마스의 불신앙의 모습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매 순간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을 위해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우리의(나의) 부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나를) 부활시키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단순한 믿음, 굳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으로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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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XBHIqUqVA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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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 27)
사랑의 깊이는
상처의 깊이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가 입힌 상처에
우리의 손을 뻗어
다시 넣어 봅니다.
의심 많은 우리가
가야할 곳은 오직
하느님의 사랑뿐입니다.
하느님의 상처가
우리를 아름답게 합니다.
하느님의 상처로
우리가 살아갑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상처입니다.
주님 상처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주님 상처에서
의심이 믿음으로
치유됩니다.
서로의 상처에서
복음이 선포됩니다.
복음의 십자가에서
인생의 의미를 묻습니다.
사랑의 상처가
부활의 기쁨이 됩니다.
사랑의 상처에서
다시 토마스의 믿음이
뜨거워집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는 생생한
우리 삶의 자리에서
오늘도 환하게 빛납니다.
상처에서 살고 있고
십자가에서 깨어나는
우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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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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