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996DA3335C5B490A0F)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등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등대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알렉산드리아등대라고도 한다. 등대는
이집트의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명에 의해 BC 280년부터 BC 247년까지 33년에 걸쳐 축조되
었는데, 당시의 건축술로 183미터짜리 석조건물을 지었다는 것은 불가사의하고도 남을 일이다. 등대
는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의 파로스섬에 세워졌다. 등대를 축조한 뒤 건축 책임자는 알렉산드리아와
파로스섬을 1260미터 길이의 제방으로 연결해놓았다.
파로스는 그리스어로 등대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음 두 가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첫째 파로스섬은
원래 다른 이름으로 불리다가 등대가 축조된 뒤부터 파로스섬으로 불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둘째 파
로스등대를 등대의 효시라고 하지만 등대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일반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등대
라는 의미의 파로스는 로망스語群에 속하는 여러 나라 말에 상굿도 남아있어 프랑스에서는 파레, 이
탈리아에서는 파로, 포르투갈에서는 파롤, 스페인에서는 파라고 부르고 있다. 영어에서만 Light hou
se라는 멋대가리 없는 신조어로 불린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03063E5C5B4A060D)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BC 331년 인도 원정을 떠나면서 건축가 디노크라테스에게 신
도시 알렉산드리아 건설을 명했다. 대왕은 정복하는 나라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신도시를 건설하여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는데, 현재는 수십 개 가운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만 남아있다. 대왕은 인
도를 정복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병사했기 때문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준공을 보지는 못했다. 대
왕 사후 마케도니아제국의 군벌들 간에 영토 분할협정이 체결되어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시
리아‧아라비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2
세(재위 BC 283~BC 246)가 파라오 位를 물려받았을 때 준공되었다. 신도시가 준공되자 그는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이전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금세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아시아‧유럽에서 가장 번창하는 도시가 되었다. 모
든 인재와 재화가 알렉산드리아로 모여들었다. 물류가 늘어나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부왕의 명에
의해 건설 중이던 파로스등대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등대는 그가 죽기 1년 전인 BC 247년에 준공되
었다. 등대의 위용은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도 등장할 만큼 당대에 이미 세계적인
건축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폼페이우스‧안토니우스를 비롯하여 수
많은 명사들이 파로스등대를 찬미하는 글을 남겼다. 파로스등대는 프톨레마이오스왕조(BC 305~BC
30)의 번영을 이끄는 길잡이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8C23D5C5B4B0B0E)
파로스등대는 높은 기단 위에 거대한 3단의 석조건물로 축조되었다. 건물 안쪽은 화강암과 석회석으
로 튼튼하게 지었고 바깥쪽은 대리석으로 마감했다. 건물 꼭대기까지는 외벽을 타고 지어놓은 나선
형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기단은 사각형, 중간 부분은 8각형, 윗부분은 4각형으로 만들었다. 건물
외벽은 이집트의 많은 신들로 장식되었다. 건물 맨 꼭대기에는 농업생산과 출산을 담당하는 이시스
여신의 청동상을 세워 알렉산드리아와 백성들을 돌보도록 했다. 처음에는 조명시설이 없었지만 로마
제국 때 맨 꼭대기에 조명시설을 설치하여 낮에는 거대한 거울로 햇빛을 반사하여 위치를 알렸고, 밤
에는 횃불을 피워 뱃길을 안내했다.
1160년, 에스파냐의 랍비 베냐민은 지중해를 건너 육로로 중국까지 갔다 돌아온 여행기를 히브리어
로 써서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둘러본 감동을 가장 상세하게 기
록해놓았다. 특히 파로스등대에 대한 찬사가 두드러졌는데, 지중해를 지날 때 160㎞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웅장한 건축물이었다고 감탄했다. 12세기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많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어울려 살았으며,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진기한 상품은 모두 알렉산드리아
로 모여들었다가 주변국으로 다시 팔려나갔다.
1183년에는 에스파냐의 이슬람교도 주바이르가 메카 순례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 알렉산드리아를 방
문했다. 주바이르는 「메카 순례기」에서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을 비롯하여 찬란한 마케도니아문명을
대표하던 건축물들이 대부분 무너져서 잔해만 나뒹굴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파로스등대는 15
00년 세월을 견디며 장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파로스등대는 아프리카‧유럽‧중동지
역 여러 명사들의 순례기나 여행기에 등장하는데, 1303년 지진 때 반파되었다가 1323년 두 번째 지진
으로 완파되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버렸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09FB395C5B4C9210)
1480년 아라비아의 맘루크 술탄은 파로스등대가 서 있던 자리에 카이트바이 성채를 세웠다. 등대는
완전히 파괴되고 흔적만 남아있었는데, 맘루크는 등대의 유적 가운데 성한 대리석을 이슬람식 성채
축조에 사용했다. 수백 년 동안 망각에 잠겨 있던 파로스등대는 1994년 다시 인류 문명사에 얼굴을
내밀었다. 프랑스 고고학자 장이브 앙페뢰가 알렉산드리아 해안에서 6㎞ 떨어져 있는 해저에서 등대
의 잔해 일부를 발견한 것이다. 발굴단은 파로스등대 맨 꼭대기에 화강암으로 설치되어 있던 높이 4.
5미터, 무게 12톤의 이시스 여신상을 인양했다. 이어 발굴단은 고대도시 헤라클레이온과 메노우티프
를 발굴하여 파로스등대의 퍼즐을 완성했다. 발굴단은 국제법에 따라 모든 발굴 유적을 알렉산드리
아박물관에 인계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한국의 자동차 생산량이 멕시코에 밀려 2년 연속 세계순위가 떨어진 실태는 기업과 정부가 머리를 맞데고 그 대응책을 강구하는게 수순 으로 여겨 집니다. 몇 의원의 5.18 비하 발언을 두고 온나라가 국력을 쏟는 행태야 말로 망국으로 가는 비생산적 처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활기찬 한주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