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저기 흙 묻은 사람들이 가네
다시 벼와 찰보리를 기리고 섬기는 곳으로 가네”
잊힌 정경 안에 기거하던, 사람의 본모습을 길어올리는 시선
인간 시선의 구석과 그 구석 속 존재들을 밝히고, 그들에게 시의 자리를 내어주었던 이덕규가 네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보인다. 문학동네시인선 189번 『오직 사람 아닌 것』이다. 그 스스로 자임하듯 시인은 “캄캄한 흙속에서 사람이라는 종자로 싹을 틔운 최초의 기쁨”(「농부」)으로서, 자연의 이야기를 시로 풀어낸다. 자연은 사람이 태어난 장소이자, 지금은 멀리 떠나온 집이다. 사람이 떠난 빈집은 일견 황폐하고 허름해 보이지만, 그 속은 오히려 사람 아닌 것들이 왕성히 움직이는 터전이 되었다. 자연을 잊고 인위의 논리를 내세우다 오히려 병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보란듯이, 밀려난 생명들이 찬란한 활기를 뽐낸다. 이덕규는 이들 ‘오직 사람 아닌 것’이 사람보다 앞서 걸으며 선보이는 아름다운 선례를 ‘농부’이기에 가능한 세밀화로 포착해낸다.
■ 시인의 말
당신이 곤고했던 농부의 몸에서 내린 밤
집 앞 텃논에 평생 새긴 별보다 많은 발자국이 한순간 환하게 하늘로 올라가는 걸 보았습니다.
나는 이제 저 어둑해진 텃논의 유업을 밝히기 위해
날마다 맨발로 소를 몰고 나가
캄캄한 무논을 갈아엎는 심정으로 당신의 빛나는 발자국을 따라가겠습니다.
2023년 3월
이덕규
목차
시인의 말
1부 그 밤으로 가는 달구지
흰죽/ 백중(百中)/ 소식/ 청명/ 때와 일/ 그 밤으로 가는 달구지/ 우리, 오래된 미래/ 황소 배미 전설-우는 논두렁/ 흙 묻은 맨발들의 저문 노래/ 도깨비/ 참붕어 한 마리/ 밥벌레/ 융릉/ 풍경
2부 묵정논
농부/ 입동/ 가을걷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빈손으로 떠난 오직/ 사람 아닌 것들의 목록/ 가자! 부처님 절 받으러/ 파업/ 빈자리/ 혼밥/ 백 년 만의 폭염 속으로/ 그 많던 일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부정(不淨)/ 비행기 똥-스티로폼/ 그래도 잡초는 힘이 세다/ 묵정논/ 통나무와 놀다/ 다디단 종점
3부 꽃은 꽃을 버리고 기꺼이 사람의 일을 따라나섰네
촛불을 끄다/ 꽃의 장례/ 11월/ 도굴/ 글썽거린다는 것은/ 상처 없이 피가 나오는 날도 있었다/ 물위의 독서/ 마음 이끄는 이 누구신가/ 비 올 확률 오십 프로/ 분신(焚身)/ 이제 막 눈이 녹으려 할 때/ 돈을 밟고 오다/ 견성한 개는 주인을 물어 죽이기도 한다/ 말귀/ 이름 허물기/ 칼의 성혼 선언/ 맥낚시
4부 사람에 발이 묶여
낙심(落心)/ 섬/ 먼 곳/ 나무의 뒷모습/ 고독의 진화/ 곰으로 돌아가는 사람/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한 켤레/ 우는 인형/ 독버섯/ 귀곡성/ 업어주는 사람/ 사람에 발이 묶여
해설 | 발굴하는 자와 발굴되는 자
이순현(시인)
작가 소개
이덕규
글작가
1961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밥그릇 경전』 『놈이었습니다』 등이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시작문학상,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