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정갈함이 깃든 언어, 그 순백의 문장에 바치는”
석미화 시인, 『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 』
㈜여우난골 출판사로 새롭게 단장한 2021년 시인수첩 시인선 세 번째 시집으로 『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 』가 출간됐다. 2010년 『매일신문』신춘문예와 2014년 『시인수첩 』 신인상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는 석미화 시인의 첫 시집이다.
등단 11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에서 석미화 시인은 겸재 정선이 다다른 사물과 사유의 깊이에 기대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하고 참신한 작법을 펼쳐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동양’이라는 거칠고 낯선 풍경인데, 시인은 이를 ‘죽음’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통해 새롭게 썼던 것이다. 석미화 시인만의 광활한 내륙, 이제 우리가 그 깊이를 아우를 차례다.
출판사 서평
“정갈함이 깃든 언어, 그 순백의 문장에 바치는”
새롭게 단장한 ㈜여우난골의 2021년 시인수첩 시인선 세 번째 시집으로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가 출간됐다.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2014년 <시인수첩> 신인상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는 석미화 시인의 첫 시집이다.
등단 11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에서 석미화 시인은 겸재 정선이 다다른 사물과 사유의 깊이에 기대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하고 참신한 작법을 펼쳐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동양’이라는 거칠고 낯선 풍경인데, 시인은 이를 ‘죽음’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통해 새롭게 썼던 것이다. 석미화 시인만의 광활한 내륙, 이제 우리가 그 깊이를 아우를 차례다.
“당신의 검은 눈 속에서 죽은 별이 서걱거리고”
석미화 시인은 유독 ‘유목’이란 단어와 상당한 친연성을 맺고 있다. 삶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음의 ‘유목민’일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사태를 “당신의 검은 눈 속에서 죽은 별이 서걱거리고”(?당신은 유목을 떠나고?)라며 압축한다. 성좌로 엮인 밤하늘의 지도를 통해 별을 쫓았던 유목민, 시인은 그들의 일대기를 꿈꾸며 척박하지만 영성(靈性)이 가득한 삶과의 공존을 도모한다. 그가 천 년을 돌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닿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의 전갈은 밤새 쌓이고 쌓였지요 눈은 거침없고 사방 흰 두루마리를 미리 펴주었습니다 몰아치는 눈발을 안섶에 여미고 가는 행적, 손을 뻗어 쓰다듬으면 되돌아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서역, 당신이 보았던 산마루 바라듯 그 남은 하루를 돌아들면
또박또박 쓴 정자체를, 긴 밤 소사나무 위에 내린 눈발의 획들을, 행간마다 내려앉는 당신의 숨소리를, 그 나머진 못다 읽은 멀고 먼 폭설이었습니다
- ?왕오천축국전? 부분
혜초의 여정을 이처럼 충만하며 강렬하게 표현한 문장은 없을 것이다. 한낱 승려의 몸으로 ‘천축국’으로 가는 구원의 여정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었을까.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혜초가 천축으로 가는 길을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자신의 발자국에 깃든 성찰의 무게를 가늠했던 것처럼 시인도 일상의 모든 시간을 심안(心眼)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방향이 심상치 않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그를 못 봤나요 아무도 없었어요 저녁 눈 속으로 들어갔나요 저기 어딘가 흰 산이 우는 소리 따라갔나요”라는 문장에서처럼 혜초의 여정만이 아니라 그 너머까지 확장된다.
“저 흰 꽃을 얹고 마주한 눈빛 어둠인 채”
석미화 시인의 문장은 아침 숲의 고요처럼 정갈하다. 정중동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인의 말에서 그는 “메타세쿼이아를 보고 온 날이면 천 개의 가지가 손가락뼈에 서걱거린다”고 쓰는데, 놀랍게도 시인이 경험한 일상의 모든 시간이, 그리고 그가 경험한 모든 사물이 시인과 삼투하고 호명하면서 서로의 생(生)을 투과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아울러, “네가 떠나가던 곳의 높고 가지런한 날씨 저 끝에는 그 무엇도 두지 말 것”이라 고백하면서 스스로를 여백으로 몰입하고, 다시 쓰려는 모습도 엿보인다.
이 시집의 백미는 언어 속에 깃든 정갈함이다. 무욕과 무취에 가깝도록 자기 자신을 비우고 비운 후에야 닿을 수 있는 여백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조는 시인의 시,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요컨대, 이 문장들은 “무수한 감정의 진자운동”을 통해 여백으로 가득한 무(無)로의 회귀를 꿈꾼다.
색채가 정경 앞으로 훌쩍 돋을새김한 겸재의 (西瓜偸鼠)를 모티프로 한 이 작품은 겸재가 도달하고자 한 사물/정조의 안과 밖을 분명히 지향하고 있다. 사물의 인과를 통해 무수히 진자운동하는 시인의 감정이 또한 수묵처럼 무겁고 장중하며 느리게 우리를 파고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집을 통해 석미화 시인의 문장에 내재한 속살의 풍경과 그 뚜렷한 내음을 알게 되는데, 이때 풍경과 내음이란 ‘정갈함’으로 수렴되며 첫 시집을 상재하기까지 시인이 추구한 삶의 윤리와도 맞닿는다.
언젠가 강바닥을 퍼내자 슬리퍼가 딸려 나왔다 왜 혼자 거기서 죽었지, 말들이 떠돌았다
아이들은 가끔 고열을 앓았다 흙마당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당고모는 물고 있던 칼을 강 그림자 바깥으로 던졌다 백동전을 주으러 가는 새벽
강은 매일 허옇게 변해갔다 한 번씩 서로의 몸을 엮어 물살을 거슬러 올랐다
우리는 영구차 먼지 속에서 미루나무처럼 크고 싶었다
- ?흰 강? 전문
송재학 시인은 이 작품을 두고 “석미화 시의 출발점이자 소실점”이라고 쓴다. 특히 ‘흰 강’이 ‘흰 죽음’과도 맞물리는 아찔한 경계라고 간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바닥을 퍼내자 나온 슬리퍼, 죽음의 흔적이자 소문에서 생성된 말들이 떠돌았다. 석미화 시의 출발점이자 소실점이 여기 ‘흰 강’에 있다. ‘흰 강’이란 환유가 주검이라는 재(灰) 속에서 생의 이유를 남기면서 질문을 이끌어낸다. 아이와 당고모라는 병과 주술 사이의 공감각이 ‘흰 강’의 서정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영구차 먼지 속에서 미루나무처럼 크고 싶었다”라는 진술과 마주친다. 이 진술의 외부는 주검의 흔적을 통과하면서 신산한 세계를 무르팍걸음으로 헤쳐나가려는 민감한 장치가 가득하다. 그러기에 시인의 ‘흰’ 죽음은 생과 반복 교차하는 정신을 발명하고 있다.
“한 가닥 길고 긴, 어쩌지 못할 눈빛”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석미화 시인이 추구한 정갈함의 두 번째 단락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것은 ‘죽음-이미지’로 시인이 지향하는 윤리와 생(生)의 습속들이 속속들이 만나는 접경을 형성한다.
특히 시인에게 던져진 ‘죽음-이미지’들의 어둡고 음산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종교적 구도로서의 ‘구원-이미지’가 선명하다. 요컨대, 새벽 지하철 안, 소녀는 바닥에 처박힌 듯 별안간 눈을 뜬다 울음은 입 밖으로 흐르지 못한다 진흙 인형처럼 물결을 붙들다가 실눈을 뜨면 뱀이 지나가는 열기 검은빛의 물속”(?몸에 못이 박히면 눈이 생긴다?)은 “이제 어디로 갈까요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그를 못봤나요 아무도 없었어요 저녁 눈 속으로 들어갔나요 저기 어딘가 흰 산이 우는 소리 따라갔나요”(?왕오천축국전?)라는 ‘영성의 시학’을 통해 새로운 동공을 산출하는 것이다.
시인의 문장에 가히 폭발적으로 등장하는 죽음-이미지는 시인의 윤리의식과 맞물리며 시인만의 독특한 작법까지 발전했다.
글쎄 그게, 줄곧 서 있던 누이인 줄 알았다 누란의 미라 몸빛인 줄 알았다 길바닥 얼어 죽은 가이아, 거죽 속 삐져나온 어미인 줄 알았다
이 저녁엔 넘쳐나는 것이 안부인가 마저 묻지 못했다
누가 그녀들에게 길을 물었을까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저 몸이라는 곳, 여자 넷 여사제 같은 얼굴 어디에도 대답은 없다
한 가닥 길고 긴, 어쩌지 못할 눈빛, 제 그림자를 노려보고 있다 내가 맞닥뜨린 바닥에서 검은 백합 꽃술 찐득한 진액이 번져 나왔다
- 「네 여자」 전문
이 작품은 자코메티의 조각 가 소재가 되었다. 해설을 잠시 인용하자. “길 위에 네 여자가 있다. 네 여자는 누이이고, 누란의 미라이면서, 가이아이고, 어미이다. 생사처럼 우리를 감싸고 우리를 덮으면서 우리 고통의 근원을 따라 헤매는 스스로의 페르소나이다. 고통과 축복에게 길을 묻는 비애가 있다. 그러기에 저녁의 안부를 쉽사리 챙기지도 못한다. 그 안부는 네 여자의 고통과 축복이면서 동시에 길을 가야만 하는 훨씬 더 깊은 나의 ‘찐득한’ 검은 백합 꽃술의 고통이다. 여기서 고통과 축복은 등가의 감정이라는 게 시인의 의도이다.”
석미화의 첫 시집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를 읽는 것은 수면 위를 걷는 것처럼 아찔할 것이다. “한 가닥 길고 긴, 어쩌지 못할 눈빛”의 문장들이 독자들을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물의 미사
물도서관
―로니 혼은 아이슬란드의 빙하가 녹은 물을 스물네 개의 유리 기둥에 담아 물도서관이라 이름 지었다
걸어가는 여인 ―자코메티의 조각을 보고
향나무는 향기가 잘려나가고
흰 강
몸에 못이 박히면 눈이 생긴다
생일
하양
물의 나라
오월이었다
명지
그리고 물차가 지나갔다
리넨 생각
2부
후투티
왕오천축국전
그 집은 아직 희다
당신은 유목을 떠나고
거긴 아마도
시오랑
꿈 ―얼룩
사촌들
스무 살 ―그해 우리들에게 무기력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폭설의 입구
냉장고 문에 붙여둔 나비
설탕이 녹는 동안
토르소
그림자 발굴
3부
밤에
크리스마스이브
가족
하지(夏至)
민락동
화가
흰 꽃은 흰 꽃을 흔들고
달팽이
그녀의 골반
디 아워스
타워크레인
두부 생각
우주 달력
4부
네 여자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
향로를 보러 가지 않겠어요
아마포를 깔고
화서(花書)
일요일의 언덕
근친
흰 벽의 애인들
인어
명옥헌
―한 시인이 도착했을 때 나비 두 마리가 놀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여자는 눈이 멀었고 딸은 얼굴이 꽃같이 예뻤다고 했다
졑
무무
해설 | 송재학(시인)
흰 산으로 남은 슬픔의 이해
작가 소개
석미화
글작가
1969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2014년 [시인수첩] 신인상을 받았다. 2019년 ‘아르코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첫 시집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