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일 (금) 촬영.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지리산 대화엄사"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남악(南岳) 지리산(智異山)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아우르며, 한반도를 대표하는 오악(五岳)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 명산 남쪽 자락에는 오늘날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온 대표 명찰 화엄사가 있다. 신라 때부터 화엄종찰의 면모를 드높이며 사세(寺勢)를
확장하였고 조선시대에 중흥을 걸쳐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의 역사와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전해오는 사찰이다.
2018년부터 시작한 불교중앙박물관의 교구본사 특별전은 어느덧 네 번째 전시를 맞이하였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지리산 대화엄사에 전해오는 2건의 국보를 비롯해 다양한 문화재를 서울에서 선보이게 되었다.
구례 천은사, 여수 흥국사, 곡성 태안사, 곡성 서산사, 순천 동화사 등 말사를 대표하는 많은 문화 유산도 함께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 전시를 통해 화엄사의 역사와 문화, 위상을 다시금 조명하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전시장 입구 로비에 전시해 놓은 화엄사의 사진 중 일부입니다.
화엄석경, 華嚴石經
<화엄석경>은 오래전부터 화엄사상을 드높였음을 보여주는 화엄사의 대표적인 성보이다.
석경은 불교 경전을 돌판에 새긴 것으로서, 우리나라에는 화엄사의 <화엄석경>을 비롯하여 경주 창림사지 부근에서 출토된 <법화석경>,
경주 칠불암에서 발견된 <금강석경>, 서울 영국사지의 <법화석경>만이 남아있다.
화엄사 <화엄석경>에 대한 최초의 기록에는 신라 문무왕대 의상(625~702) 대사가
화엄사 장육전을 세웠을 때 석경으로 그 벽면을 장식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석경에는 벽에 고정하기 위한 구멍과 홈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화엄석경>은 임진왜란 당시왜적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 약 1만 4천여 점의 조각으로 전하고 있다.
화엄사 말사의 문화유산
화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로, 전라남도 동남지역의 사찰을 통할하고 있다.
수많은 성보가 전하는 화엄사만큼이나, 화엄사의 말사에서도 수많은 문화유산이 전하고 있다.
화엄사의 말사로는 여수 흥국사, 구례 천은사, 곡성 태안사, 순천 동화사, 곡성 서산사를 비롯하여 약 43여 곳이 있다.
말사의 대표적인 성보로는 동화사의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와 오십삼불로 추정되는 <석조불좌상>, 천은사의 <금동불감>,
태안사의 <청동대바라>, 흥국사의 <십육나한도> 등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많은 성보는 사찰의 유구한 역사의 한 면을 보여준다.
천은사 삼장보살도, 泉隱寺 三藏菩薩圖 / 보물, 조선 1776년.
천은사 <삼장보살도>는 신암 화련 스님을 포함한 14명의 화승이 함께 제작하여, 1776년(영조 42)에 천은사 대법당에 봉안된 불화이다.
화면 중앙에는 천장보살, 좌우측에는 각각 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그 권속들을 함께 배치하였다.
화면에 비하여 많은 권속들이 표현되었으나
짜임새 있는 화면 구성과 단정한 인물묘사, 섬세한 문양 표현 등 비교적 안정적인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천은사 목조 가섭, 아난입상 / 조선 1693, 구례 천은사.
이 상은 1693년에 색난(色難) 스님이 수조각승으로서 7명의 조각승, 1명의 야장과 함께 조성한 상이다.
두 상 모두 인자한 상호와 의습의 표현방식에서 색난 유파의 특징을 잘 담고 있다. <발원문>에 따르면, 석가불상과 십육나한상 등의
여러 존상과 함께 조성되었으며 17세기 후반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한 색난파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천은사 수도암 목조아미타불좌상 / 조선1646년,구례 천은사 수도암(천은사)
천은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수도암의 <목조아미타불좌상>은 1946년 승일(勝日) 스님에 의해 조성되었다.
이 상은 승일 스님이 수조각승으로서 조성한 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상으로, 그의 작풍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계란형의 얼굴, 둥굴게 처리된 턱, 오른팔에 표현된 뾰족한 옷주름,
몸체와 머리의 측면이 얇게 처리되는 점 등 상의 세부표현에서 승일 스님의 독창적인 표현이 확인된다.
천은사 금동불감 / 고려 말 - 조선 초 14세기, 구례 천은사, 보물
천은사 <금동불감>은 나옹 혜근(1320~1376)스님의 원불(願佛)로 전한다.
불감 내벽의 정면에는 비로자나불회도, 좌우측 벽면에는 각각 약사삼존불과 아미타삼존불이 표현되었으며,
양쪽 문 안쪽에는 금강역사를 돋을새김하였다. 불감 내부에는 현재 2점의 금동불상이 전하고 있다.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지만, 불감 뒷면의 명문을 통해 불감을 제작한 장인과 불상을 조성한 스님, 발원자들의 이름이 확인된다.
태안사 청동대바라 / 조선 1447년, 곡성태안사, 보물.
2점 모두 동일한 크기와 형태를 지니고 있는 1조의 바라이다.
표면의 중심부에는 굵은 돌기가 솟아있고, 그 중앙에는 바라를 사용하기 위해 끈 등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다.
직경이 92cm에 달하는 이 대형 바라는 손에 들고 치기보다 어는 곳에 고정해 놓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명문에 따르면, 1447년(세종 29) 효령대군(1396~1486)이 발원하여 조성하였고, 이후 1454년(단종 2)에 다시 개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과 비교해 보면 바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겠네요.
태안사를 찾아 가서도 볼 수 없었던 바라를 이 곳에서 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태안사 범종 / 조선 1581년, 곡성 태안사, 보물.
태안사 <범종>은 한마리의 용으로 구성된 용뉴(龍鈕)와 음통이 있고, 천판(天板)에는 입상화문대(入狀華紋帶)를 갖추고 있다.
몸체에는 상,하대와 연곽(蓮廓)등이 표현되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범종의 특징을 따르고 있으나,
범자문양의 표현이나 연곽의 위치 변화 등에서 조선시대의 특징도 함께 확인된다.
명문에 따르면, 1457년(세조 3)에 처음 주조하였으나 파손으로 인해 1581년(선조 14)에 다시 제작했다고 한다.
서산사 범종 / 조선 1730년, 곡성 서산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종의 정상에 쌍룡의 용뉴가 있고, 반구형의 천판을 쌍룡이 발로 딛고 있다.
상대(上帶)를 대신해 원형범자문 8개가 장식되어있고, 종신(鐘身)에는 연곽과 보살상을 배치했다.
쌍룡으로 표현된 종뉴, 입상화문대와 당좌가 표현되지 않는 점 등에서 조선 후기 범종의 양식을 보여준다.
곡성 서산사는 1935년에 창건하였지만 곡성 관음사 대은암의 관음보살상과 범종을 봉안하고 있어 전통산사의 법등을 잇고 있다.
극락전에는 조선시대 아담한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두마리의 용으로 표현된 종뉴, 표현되지 않은 입상화문대 및 종의 몸체에 새긴 명문 등을 통해 조선 후기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범종과 대화사 조각승 색난의 시주.
흥국사 십육나한도 / 조선 1723년,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 보물.
흥국사 <십육나한도>는 부처님의 제자 십육나한을 그린 것으로, 1723년(경종 3) 응진당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화면 중앙부터 가섭, 아난존자와 십육나한을 배치하고, 양쪽으로는 범천, 제석천과 권속들을 모셔 나한을 호위하는 듯한 구성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의겸 스님이 수화승으로 참여한 작품으로, 의겸 스님만의 뛰어난 수묵, 담채기법과 유려한 필선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흥국사 제석도 / 조선 1741년,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8ㅔ기를 대표하는 화승인 의겸 스님과 함께 활동한 긍척 스님이 1741년(영조 17)에 그린 제석도이다.
조선시대에는 불법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그린 제석도를 법당에 봉안하여 도량을 수호하고자 했다.
이 그림에서도 화면 중앙에 정면을 보고 앉은 제석천이 선견성(善見城)이 그려져 있는 부채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제석천으 나타내는 특징이다.
흥국사 목조석가불좌상 / 조선 1741년, 흥국사의승수군유물전시관.
흥국사 <목조석가불좌상>은 상 바닥면의 묵서를 통해, 1741년(영조 17) 숙행 스님이 팔상전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상임을 알 수 있다.
상의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입꼬리가 올라가 옅은 미소르 띤다.
대의(大衣)는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나, 오른쪽 팔이 살짝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순천 동화사는 <조선사찰사료> <개운산동화사중창기>에 의하면,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경내 중앙에 자리한 동화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탑이다.
이중 기단에 3층 탑신과 상륜부를 올렸는데, 전체적으로 세장(細長)하다.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988년 석탑의 해체 당시 1층 탑신석 상부 중앙의 원형사리공에서 사리 4과와 함께
사리함인 <청자음각연판문호>, <녹유리사리병>, <금동소탑>, 수정 등의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청자와 녹유리를 이용해 사리기를 만든 점 등을 통해 고려 전기 사리구의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동화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고려 전기, 순천 동화사(화엄사성보박물관)
1988년 삼층 석탑의 해체 당시 1층 탑신서 사리공에서 <청자음각연판문호>, <녹유리사리병> 2점, <금동소탑>, 수정, 사리 4과 등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동화사 <삼층석탑>의사리장엄구는 청자와 녹유리로 만든 사리기의 사용 등에서 고려 초기 사리기의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동화사 석조불좌상 / 조선 1682년, 순천 동화사(화엄사성보박물관)
순천 동화사에서 조성된 불상으로 유사한 불상이 다수 전하고 있어
다불(多佛) 또는 오십삼불(五十三佛) 신앙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복장문>을 통해 1682년(숙종 8) 색난 스님이 제작했음이 확인되었다.
불상은 비슷한 신체 비례와 자세, 착의법을 보이나 세부 표현은 달라 분업 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리산에화엄을 열다.
지리산의 명찰을 대표하는 화엄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화엄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 <구례속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755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대 활약한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한국화엄종을 처음으로 연 의상(625~702)대사가 머무르며 화엄의 가르침을 전파하여 화엄십찰 가운데 한 곳으로 꼽기도 했다.
고려 시대의 화엄사는 영주 부석사와 함께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명성을 이어 갔다. 홍경선사와 정인왕사에 의해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대각국사 의천(1055~1101) 스님이 화엄사에 들러 연기조사 진영에 참배하며 <유제지리산화엄사>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 1424년(세종 6)에 이르면 불교 종단은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로 축소되었는데,
화엄사는 선종 18사 중 한 곳으로 공인되었으며 지리산의 대표적인 사찰이자 고찰로서 위상을 유지하였다.
화엄사 동오층석탑과 사리장엄구.
화엄사 대웅전 앞마당에 위치한 <동오층석탑>은 단층 기단에 오층의 탑신부를 갖췄다.
5층 옥개석 위에는 사각의 노반석과 복발, 간주, 보주를 함께 새겨 올린 상륜부가 남아있다.
석탑의 세장함, 단층 기단, 정연하지 못한 면석의 결구 방식은 고려 석탑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근거로 <동오층석탑>의 건립 시기를 10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1999년 <동오층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청동원통형사리함>, <녹유리사리병>, <금동광배>. <연화질緣化秩> 등과 같은 다수의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었다.
특히 <연화질>에는 화엄사의 중창 불사를 주도한 벽암 각성(1575~1660)스님이 대공덕주로 이름을 올려 17세기 무렵 각성 스님의 주도로
<동오층석탑>을 중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말여초 석탑 양식의 변화 양상을 드러내는 귀중한 사례이면서,
후대에도 석탑을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신앙적 면모까지 증명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다.
화엄사 서오층석탑과 사리장엄구.
화엄사 <서오층석탑>은 2중 기단에 오층의 탑신부, 노반석과 간주, 보주만이 남은 상륜부를 갖춘 모습이다.
특히, 하층과 상층 기단의 면석에 십이지와 팔부중을, 초층 탑신석에는 사천왕을 면마다 부조했다.
이중 기단과 중층의 탑신을 갖춘 점은 신라 석탑의 전형을 보여준다.
<서오층석탑>에서는 신라부터 고려에 이르는 다양한 시대의 사리장엄구가 함께 수습되었다. 이 가운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필사한
종이편과 납석과 나무로 만든 소탑은 8-9세기 신라에서 유행한 조탑 신앙을 증명하고 있다. 더불어 전불(甎佛) 등을 만들 때 사용했을
<청동불상범>도 수습되었는데, 당시 불상 제작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렇듯 <서오층석탑>은 다양한 부조를 표현한 신라 말의 석탑 양상은 물론, 석탑에 담아낸 신앙의 면모를 증명하는 사례다.
서오층석탑 사리장엄구 / 통일신라-고려, 화엄사성보박물관, 보물.
1995년 화엄사 <서오층석탑>의 해체수리 작업 중 발견된 통일신라부터 고려에 이르는 시기의 사리장엄구이다.
1층 탑신부의 사리공에서 <녹유리사리병>, <청자양이병>과 통일신라시기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탑인(塔印)을 한
다라니 편 등의 지류 뭉치 등이 발견되었고, 상층 기단부 내 적심에서는 <청동불상범>, <청동뒤꽂이>, <수정옥> 등이 발견되었다.
소동종 / 고려 후기, 화엄사성보박물관.
백자 청화 "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 조선 1489년, 동국대학교박물관, 국보.
<백자 청화홍치2년 명 송죽문항아리>는 화엄사 각황전에서 꽃 공양에 사용되었던 한 쌍의 화병 중 하나이다.
구연부(口緣部) 안쪽에는 "홍치2년(1489년, 성종 20)" 이라는 명문이 있고
기면(器面) 전체에는 값비싼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농담에 변화를 준 소나무와 대나무를 그렸다.
화엄사를 다시 일으키다.
화엄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전쟁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화엄사의 대규모 재건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는 벽암 각성(1575~1660) 스님을 꼽을 수 있다.
각성스님은 조선 후기 불교계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위상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스님의 주도하에 화엄사는 17세기 초
대웅전을 중심으로 중건이 시작되었다. 최근 밝혀진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시주질>에 왕실 관련 인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대웅전 재건 또한 왕실의 후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각황전은 본래 장육전으로 현재 명칭은 1702년(숙종 28)에 숙종(재위 1674~1720)에게서 받은 이름이다.
각황전의 중건은 계파 성능 스님이 관장하였고, <상량문>을 통해 숙빈 최씨(1670~1718)와 영조(재위 1724~1776)가 후원자로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엄사는 왕실의 지원을 통해 차차 대가람의 면모를 회복하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예조사격 /조선 1702년, 화엄사성보박물관.
<예조사격>은 1702년(숙종 28)에 예조(禮曹)에서 내린 화엄사의 사격(寺格)에 대한 문서이다. 각황전의 중건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자,
조정에서 문서를 보내 화엄사가 선(禪)과 교(敎)를 아우르는 "선교양종대가람"임을 밝혔다.
당시 화엄사의 높은 사세를 짐작해볼 수 있다.
서산대사발우 / 조선 후기, 화엄사성보박물관.
발우는 사찰에서 쓰는 식기로, 스님들이 공양할 때 사용된다. <서산대사발우>는 목재에 옻칠을 해서 만들었다.
이 발우는 선조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세운 서산 휴정(1520~1604) 대사의 공을 인정하여 가사와 함께 하사한 것이다.
서산대사가사 / 조선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화엄사성보박물관.
<서산대사가사>는 25조(條) 4장(長) 1단(短)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상품(上上品)의 품계에 속하는 홍색의 홑가사이다.
포도송서문 바탕에 백개(白蓋)와 등롱(燈籠)을 수놓고, 색채가 다른 일월광첩(日月光貼)을 부착하였다.
뒷면의 묵서(墨書)에는 묘향산 일대 청룡사에 거주하던 두추(斗樞) 스님이 시주한 사실과.
시주를 권하고 침재(針裁)를 한 양공승(良工僧) 환우(煥宇) 스님의 법명이 적혀 있다.
교지 / 조선 1626년, 화엄사성보박물관.
1626년(인조 4)에 인조(재위 1623~1649)가 벽암 각성(1575~1660) 스님에게 내린 교지이다.
남한산성을 축성한 공으로 인조가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의 칭호를 내리고 의발(衣鉢)을 하사했음을 밝히고 있다.
벽암 각성 스님과 화엄사의 재건
벽암 각성(1575~1660) 스님은 조선후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고승이다. 선(善),교(敎)에 두루 박식한 학승이지만,
나라가 혼란하던 시기에 임진왜란에 참여하고,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국가수호에도 힘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626년 인조(재위 1623~1649)로부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라는 시호를 받기도 했다.
각성 스님은 또한 전쟁으로 피해입은 불교계의 복구를 위해 전국의 다양한 사찰들의 중창불사를 진행하였는데,
화엄사 또한 1630년경부터 각성 스님 주도하에 대웅전 중수와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조성 등 다양한 중창불사가 진행되었다.
현재까지 화엄사에는 인조로부터 내사받은 교지와 가사 등 각성 스님과 화엄사의 각별한 인연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벽암대사가사 / 조선 1626년,화엄사성보박물관.
<벽암대사가사>는 19조(條) 3장(長) 1단(短)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상품(中上品)의 품계에 속하는 대가사로, 주황색의 직은단(織銀段)에 아청색 안감을 댄 겹가사이다. 연화문, 용문, 운문 등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문양의 표현과 일월광첩(日月光帖)에 남은 금사의 흔적은 문관 관복의 흉배와 유사하여, 왕의 하사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모든 세상을 다 그려낸다네.
心如工畵師(심여공화사). 能畵諸世間(능화제세간) <화엄경> <야마천궁보살설계품>
신익성 초상 / 조선 17세기, 개인 소장.
신익성(申翊聖 1588~644)은 정숙옹주(1587~1627)와 혼인하여 선조(재위 1567~1608)의 부마가 된 인물이다.
뛰어난 학식과 재능, 명문(名文)과 명필(名筆)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으며,
화엄사 <벽암선사비,1663>와 화엄사 대웅전의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1635> 등 관련 기록을 통해 불교계와의 교우도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속 신익성은 흰 수염이 수북하고 는빛은 형형하다.(윤두서 자화상>처럼 얼굴만 남아 있는 점이 이채롭다.
대웅전 비로자나삼신불회도 복장낭 및 동경
부처님을 조성한 불상과 불화에는 신성성과 생명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리, 경전 등 복장유물을 납입한다.
불화의 경우 복장낭(복장주머니)이나 후령통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화엄사 전각의 불교회화에는 이와 같은 복장유물의 사례가 잘 남아있다.
대웅전 <비로자나삼신불회도>에는 복장낭 1점과 동경 2점이 성보박물관에 전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을 통해 각 폭별로 복장낭과 동경이 불화의 상단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복장유물.
화엄사 대웅전에 봉안되어있는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3m에 달하는 대형의 크기로, 17세기에 조성된 목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다.
또한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교조각 중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로 구성된 삼신불의 유일한 예로서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2015년과 2020년에 이루어진 석가모니불상과 노사나불상의 조사에서는 불상의 내부에서 <시주질>과 <후령통>, 다수의 전적류를 포함한
복장유물이 수습되었다. 전적류는 당시 스님들의 강원 교육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치문경훈>과 <선요>등 뿐만아니라
<대혜보각선사서>와 <묘법연화경>의 희귀본도 발견되었다.
<시주질>에는 삼신불의 존명고1635년(인조13)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 왕실후원자, 청헌, 응원, 인균 등 제작을 담당한 승려 장인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조성을 주도한 벽암 각성(1575~1644) 스님과 선조의 아들인 의창군 이광(1589~1645)과
사위인 동양위 신익선(1588~1644) 등이 시주에 참여하여 화엄사와 왕실간의 인연이 불상 조성에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예술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복장 유물에서 확인된 조선후기 왕실과 불교계의 관계 등 그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올해(2021년) 6월 국보로 승격되었다.
노사나불 후령통 / 조선시대, 화엄사성보박물관, 국보.
대웅전 노사나불상 복장 유물.
노사나불상에서 수습된 복장유물은 77건 78점이다. 그 중 불상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것은 미개봉된 후령통 1점, 시주질 1점이 있다.
이외에 오방경 1점, 다라니 1점과 전적류 23종 73건 74점 등이 함께 봉안되었다.
불상에서 수습된 다양한 전적들은 주로 남부지역에서 다시 펴낸 경전이 많고, 강원(講院)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전적들도 많아 당시 경전의
유통과 스님들의 교육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외 불교의식집이나 비단장정본 등 조선전기 희귀본이 포함되어 있다.
후령통-1건1점(전적류 73건 74점, 오방경-1건 1점(다라니 1건 1점). 시주질- 1건 1점(20매), 총계 77건 76점.
석가모니불 후령통 / 조선시대, 화엄사성보박물관, 국보
화엄사 대웅전 석가모니불상 복장 유물.
석가모니불상에서 수습된 복장유물은 54건 62점이다. 불상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것은 후렴통 1건, 시주질 1건이다.
이외 개봉된 후렴통 내에서 발견된 오방경 6점, 다라니 1점과 전적류 16종 50건 53점이 함께 봉안되었다. 수습된 다양한 전적 중에는
경전뿐만 아니라 불교의식집, 작법 관련 전적 등 스님들의 수행이나 의례 등 사찰 내 생활과 관련된 전적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후렴통- 1건 1점(전적류 50건 53점), 오방경-1건 6점(다라니 1건 1점), 시주질 1건 1점(12매) 총계 54건 62점.
계파 성능 스님과 가광전의 중건
벽암 각성(1575~1660) 스님의 주도하에 시작된 화엄사의 재건 활동은 그의 입적(入寂)후에도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각황전 역시 당시 중건된 전각으로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각성 스님의 유지를 받든 계파 성능 스님이 중건을 관장하였는데,
성능 스님의 정확한 출생연대는 알 수 없으나 북한산성을 축성하기도 하였으며, 1711년에는 조정으로부터 팔도도총섭의 지위를 받았다.
1699년에 시작된 장육전 재건 공사는 1702년 완료되었다.
<상량문>을 통해 대시주자로 영조(재위1724~1776)와 모친인 숙빈최씨(1670~1718)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1699년은 숙빈 최씨가 귀인에서 정1품 숙빈의 첩지를 받았으며, 연잉군(영조의 군호)으로 봉해지는 등 모자에게 기념비적인 해이다.
그래서 장육전 중건은 왕실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불사임을 알 수 있으며 각황전은 영조의 원당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공사가 끝난 시점에서 숙종(재위 1674~1720)은 직접"법을 깨달은 황제가 사는 집(覺皇寶殿)"이라는 뜻의 사액을 내렸다..
각황전 석가모니삼세불회도 복장낭 및 동경.
화엄사 각황전에는 당당한 위용의 <목조석가모니삼세칠존불상>과 함께 붉은색이 돋보이는 세 폭의 <석가모니삼세불회도>가 모셔져 맀다.
이 세폭의 불화에는 불화의 여법함과 신성성을 증명하는 복장유물이 불화 상단에 안치되어 있었다.
각 폭마다 복장낭과 동경이 안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현재 복장낭 3점과 석가모니불회도 동경 1점이 성보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석가모니삼세불회도 복장낭 및 동경 / 조선후기, 화엄사성보박물관.
화엄사 각황전에 봉안된 <석가모니삼세불회도>의 복장유물로 현재 3점의 <복장낭>과 1점의 <동경>이 전해온다.
<복장낭> 안에서는 후령통과 수구다라니가 발견되었다.
후령통에는 각황전 <석가모니삼세불회도>의 증명법사인 경봉 지원 스님, 인암 정오 스님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어, 이 복장낭이 불화와 함께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경>은 "중석가불타(中釋迦佛陀)..."라고 적혀 있어 <석가모니불회도>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근현대의 화엄사.
화엄사는 연기조사가 창건한 이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오늘날까지 연연히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부용 영관(1485~1571), 부휴 선수(1543~1625), 벽암 각성(1575~1660) 스님으로 이어지는 선맥과 강맥 그리고 염불수행으로
화엄사는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54년 불교정화운동을 계기로 동헌 태현(1896~1963) 스님의
제자들이 정착하여 화엄문도를 이루었으며, 오늘날의 화엄사에까지 법맥이 이어지고 있다.
각황전과 대웅전의 옛 사진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좌로부터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은 금년에 보물에서 국보로 격상되었습니다.
(2019년 8월 19일 촬영)
첫댓글 드디어
지리산 대화엄사 "화장" 특별전
견문록 올려 주셨군요.
언제나처럼 그 정성과 열정에 감탄이요 감동입니다
많은 분들이 참관하셨으면 했는데
칠복이님의 견문록으로 많은 분들이 직, 간접으로 참관하실거 같습니다.
우연히 제 모자와 손에 꽃비가 내렸습니다 ㅠㅠ
저도 다시 많은 공부가 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칠복이님의 대화엄사 화장의 전시를
일목요연하게 사진으로
해설로 올려주시니
직접 본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것 같습니다
직접 가서 볼수없는 귀한 보물들이 전시된
너무 아까운 전시이니
불자님들이 많이 참관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