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1월 13 ~ 14일 (금/토)
1. 산행지 : 지리산 천왕봉 (경남 산청군 시천면 / 함양군 마천면 경계에 위치) 1,915m
2. 산행코스 : 백무동탐방센터 -> 하동바위 -> 참샘 -> 소지봉 -> 망바위 -> 장터목대피소(1박) -> 제석봉(1806m) -> 통천문
-> 천왕봉(1915m) -> 중봉(1874m) -> 써리봉(1602m) ->치밭목대피소 -> 유평마을 -> 대원사 (총거리 : 18km)
3. 날씨 : 흐림 그리고 맑음
4. 동반자 : 김인영, 소재림, 조진경, 그리고 나
5. 교통편 :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아침 7시 ~ 11시), 대원사 ~ 원지 (택시 35,000원), 원지 ~ 남부터미널(2시20분 ~ 6시)
<탐방기>
동서울터미널에서 7시에 백무동가는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함양과 인월(남원군)을 경유하여 백무동에 아침 11시에 도착한다. 4시간이 소요되었다.
등산화 끈을 단단하게 묶고, 근처 슈퍼에 들려 주전머리 거리를 추가하여 배낭에 넣는다. 식수를 챙기려는 나에게 슈퍼주인은 참샘에서 식수를 준비할 것을 권한다. 산행들머리인 백무동탐방지원센터 근처에는 눈이 쌓여있지 않고 포근한 날씨에 벌거벗은 나무가지들만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백무동야영장을 통하여 산행입구에 들어선다. 이곳에서 장터목대피소로 가는 길과 세석대피소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장터목대피소까지의 거리는 5.8km, 세석대피소까지는 6.5km이다.
우리는 오늘 장터목대피소에 올라 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천왕봉에서 해돋이를 보려한다. 출발이 11시 20분이다.
등산로에 들어서니 산죽군락지에는 아직 잔설이 있다. 낙엽이 떨어진 삭막한 숲길에 산죽의 초록잎과 잎에 쌓인 흰 잔설이 겨울 산행임을 깨닫게 해준다.
백무동 산행들머리에서 1.8km를 오른 곳에 하동바위가 있다. 백무동에서 하동바위 이정목까지는 50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하동바위 이정목이 있는 계곡에는 다리가 놓여 있어 계곡을 건너 산행을 계속한다. 오르막 길이라 아이젠을 차지 않아도 그렇게 미끄럽지가 않다. 그러나 내려오는 산꾼들은 아이젠을 착용하고, 더러는 스패츠도 착용하고 내려온다.
기왕 겨울 산행으로 온 등산이니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더라도 눈에 빠지며 오르고 싶다.
하동바위에서 샘물이 있는 참샘까지는 800m의 거리이다. 약 30여분이 소요되었다.
돌 축대를 쌓은 곳에서 샘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바가지에 물을 받아 한모금 마셔본다. 이가 시리다. 그리고 식도를 따라 흐르는 물은 짜릿한 시원함을 준다. 물병에 물을 받고 짐을 다시 꾸렸다.
그리고 돌 계단길을 다시 오른다. 줄곧 오르막 길이 계속된다.
잠시 숨을 고르는 능선길에 다다른다.
잎 떨어진 가지에 [겨우살이]가 자라고 있다. 여름에는 나뭇잎에 가려 그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벌거벗은 가지에서는 사철 푸른 잎과 푸른 줄기를 가지는 겨우살이는 쉽게 발견된다. 겨우살이는 기생성 상록활엽소관목이다. 줄기와 잎에 엽록소가 있어 자체 광학작용이 가능한 기생식물로 우리나라가 원산지이며, 대만, 일본, 중국, 유럽에서 자란다. 주로 참나무, 물오리나무, 밤나무, 자작나무 등에서 기생한다. 줄기가 세개로 갈라지며 서로 엉기어 둥우리 모양으로 자란다. 잎자루가 없으며 잎의 가장자리도 밋밋하다. 4월에 연한 노란색의 꽃이 잎사이에서 핀다. 꽃 모양은 종모양이다. 암수딴그루로 10월~12월에 연노란 둥근 열매를 맺는다. 꽃말도 나무에서 강하게 기생하는 인내를 나타내듯 '강한 인내심'이라 한다.
요 며칠 전에 TV에서 겨우살이의 효능에 대하여 소개한 바가 있다. 항암과 고혈압, 당뇨에 효능이 있다고 소개하여 만병통치약처럼 소개되어 행여 겨우살이보기가 더욱 어려워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참샘의 이정목에서 이곳 소지봉 이정목까지의 거리는 400m이다. 오르막길을 정신없이 오르면 나도 모르게 평지에 도착한다. 그리고 산행에서는 운동장이라 할수 있는 평평한 곳이 인상적이다. 지리산 산행에서 이와 같은 넓은 평지는 이색적이다.
소지봉은 1312m의 고도를 가지고 있다. 소지봉에 가까이 오면서 나무에 잔설들이 얼어붙어 비로소 겨울산행의 맛을 더욱 나게 한다. 좋은 비경을 카메라에 남고 싶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린다. 그러나 기온도 고도에 따라 내려가 손이 곱아온다. 장갑을 낀 손을 옴지락거리며 시린 손을 풀어보려 애쓰며 걸음을 옮긴다.
겨울 산행의 진경인 상고대가 잔 나뭇가지에 맺혀 그리운 어머님의 백발을 연상시킨다. 이곳에 안겨 한없이 의탁하고 싶다. 떠나신 어머님의 모습을 부둥켜 안고 몸부림치는 마음으로 그 모습을 담아보려해도 어머님의 포근한 가슴을 느낄수 없어서인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계속 셔터를 눌러댄다.
오늘의 바람 방향은 서풍이다.
소지봉에서 1.3km를 올라온 망바위는 완전 서풍에 노출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백무동에서 이곳 망바위까지의 오르막은 산능선의 동쪽길로 서풍을 막아준 산능선의 덕택에 포근한 오름이었다. 얼굴을 때리는 지리산 바람은 매서운 회초리의 바람이다. 그러나 피하고 싶지 않는 회초리의 바람이다. 삶의 후회를 나무라는 아버님의 교훈이 담겨있다. 이 회초리라도 맞아야 후회 속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내가 다시금 새 희망으로 반성과 각오로 삶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 발 아래의 계곡을 휩쓸고 올라오는 바람은 눈보라를 안고 와 쏟아붙듯 하얀 바람을 몰아친다.
망바위에서 장터목대피소까지의 1.5km산행로는 능선의 서쪽허리를 오른다. 오른쪽 볼과 귀를 하얀 안개바람이 하염없이 때린다. 망바위를 지난 오르막은 가끔은 평지와 내리막길로 안내한다. 그 잠시의 내리막에서 엉덩방아를 찢곤 겁에 질려 아이젠을 꺼내 등산화에 신었다.
그리곤 설경에 심취되어 일행의 맨 꽁무리에 붙어 따라간다. 잠시 후에 그 모습이나 인적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막혔던 시야에 장터목대피소의 건물이 나무사이로 보이며 조그만 둔덕을 오르니 대피소의 뒤안길에 다다른다.
백무동에서부터 시작한 5.8km의 오늘 산행 종착지이다. 3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평소보다 40여분정도가 더 소요되었다. 상고대와 설경이 나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도착시간은 3시이다.
안부에 자리잡은 장터목 대피소는 남과 북이 트여 남쪽으로는 중산리가 내려다 보인다. 낮은 기온과 북서풍으로 제석봉으로 오르는 계단의 봉우리에 있는 구상나무와 잎 떨어진 낙엽활엽수에는 상고대가 극치를 이룬다. 그리고 계속 불어오는 서풍은 흰서리가 된 안개 눈보라가 되어 연하봉에서 오는 길의 광장을 매섭게 몰아친다.
1703.7m에 위치한 장터목대피소는 135명의 인원을 수용한다. 백무동탐방센터로부터 5.8km, 중산리탐방센터로부터는 5.3km, 세석대피소로 부터 3.4km의 거리이다.
식수는 대피소로부터 100여m 아래로 내려가야한다. 그러나 식수가 결빙되어 200여m를 내려간 제2식수원에서 공급이 가능했다. 그러나 다음 날의 보도에 의하면 지리산 모든 식수원이 결빙되어 식수를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고 보도되었다.
도착한 대피소는 등산객을 위하여 1개의 실을 개방하였다. 방 배정은 5시이후에 한다고 방송한다. 밖의 온도는 영하 9.7도이다.
목재로 지어진 대피소는 난방이 되어 훈훈하다. 특히 방풍이 잘되어 포근하였다.
욕심으로는 이곳에서 0.6km 떨어진 제석봉 전망대에서 일몰을 보려했으나 방 배정시간과 안개바람으로 포기한다.
장터목대피소의 1박 요금은 성수기에는 8,000원, 비성수기에는 7,000원이다. 겨울은 비성수기에 해당되어 인터넷 예약시 7,000원을 카드결제하였다. 배포되는 담요는 1인당 2장으로 1장당 1,000원씩 받는다. 그러나 성수기에는 1인당 한장씩만 배포되기도 한다.
저녁을 준비하면서 방 배정을 받고 입실한다. 평일과 낮은 기온으로 대피소의 침상은 다 차지않았다. 8시에 소등하고 잠을 청하나 들뜬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아 오랫동안 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는 1,8km의 거리로 1시간정도이면 충분하다.
오늘의 일출시간이 대략 7시 38분이라하여 땀이 나지 않도록 서행산행을 계획하여 6시 이후에 출발키로 하였으나 새벽 4시에 깬 잠은 2장씩 배포된 담요를 겉어버렸다. 취사장에 내려가 누릉지를 끓여 아침식사로 가름하고 5시10분에 장터목대피소를 출발한다. 천왕봉에 도착시간이 너무 이르면 천왕봉을 넘어 중봉에서 일출을 보기로 한다.
서행한 천왕봉까지의 산행이었으나 소요시간이 1시간10분이다. 아직도 일출까지는 1시간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를 제외한 다른 산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인증삿으로 후레쉬를 터뜨려 천왕봉 정상석을 안고 기록을 남기고 떠난다.
천왕봉을 지나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의 반대편 길로 내려서며 중봉으로 향한다.
중봉, 써리봉, 치밭목대피소, 유평리, 대원사의 코스는 재림이의 안내로 첫 지리종주를 하였던 코스였다. 천왕봉에서 대원사까지의 거리는 12km이며, 치밭목대피소까지의 3km 산행은 절경이다. 특히 재림이와 종주한 시기가 10월1,2,3일이어서 천왕봉과 중봉의 고도에 단풍이 아주 아주 곱게 들어 나의 혼을 빼았았었다. 오늘도 이 코스는 나에게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치밭목대피소에서 대원사까지의 하산의 길은 약 9km이나 너덜길과 외길이 계속되었다. 실로 이 코스의 하산길이 걱정이 된다.
여명이 밝아온다.
뒤돌아 본 천왕봉은 흰 눈의 계곡 줄기들을 그려내며 고도 1915m의 위엄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단지 중봉의 고도가 1874m여서 가까운 봉우리로 보인다.
중봉의 도착시간이 7시가 채 못되었다. 아직도 일출까지는 30여분을 더 기다려야한다.
이 추운날씨에 중봉 정상에 텐트 2개가 쳐있다. 이들에 의하면 어제의 일몰이 아주 아름다웠다한다. 그러면서 일몰을 보았느냐 묻는다. 일몰과 일출을 보기위하여 이곳에서 비박을 했다는 얘기이니 부러움에 앞서 존경스럽다.
해가 떠 오른다.
매일 떠 오르는 해 일진데 목이 메어오는 감명이 올라옴은 무슨 이유일까?
소망을 빌거나 반성도 없었다. 단지 무념(無念)이었다.
해는 이젠 우리에게 밝음을 주며 창공으로 올랐다.
이 잠시의 일출을 보기 위하여 그토록 조바심치며 기다렸단 말인가! 허탈했다. 결국 인생이란 기대와 허탈의 연속인 것을 .....
다시 배낭을 메고 하산을 재촉한다.
떠 오른 태양에 어두운 산행길에 그렇게 환하게 인도해 주던 보름이 지난 하현달은 조그만 하나의 한 조각 송편으로 변하여 운무하는 구름과 더불어 그의 갈 길을 재촉하고 있다. 새벽 산행에서 이 하현달이 우리를 비추어주지 않았다면 달아빠진 나의 랜턴은 나의 걸음을 비척거리게 했을 것이다. 고마움에 뒤돌아 본 반달은 세월과 침묵이란 가르침을 나에게 남기고 서쪽 하늘로 기울고 있었다.
천왕봉을 지나 중봉에서 일출과 놀다가 도착한 써리봉에서 천왕봉과 중봉을 뒤돌아 본다. 고고함으로 서 있는 천왕봉과 그 친구 완만함의 중봉은 서로를 어우러 주고 있었다.
치밭목대피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치밭목대피소는 국립공원에서 관리하는 곳이 아닌 사설 대피소이다.
오늘도 검게 그을린 얼굴의 산장지기가 그곳을 지키고 있다.
식수는 약 50m를 내려간 곳에 식수장이 있다. 물량이 많았으나 오늘은 가는 물줄기가 가끔은 끊긴다.
조그맣게 마련된 취사장에서 버너를 키고 라면을 끓여 이른 점심을 먹는다. 10시50분이다.
배낭을 꾸려 11시20분에 치밭목대피소를 떠난다.
새재갈림길 이정목에 도착한다.
새재까지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다. 택시요금이 새재에서 원지까지 40,000원이라 한다. 새재는 대원사 -> 유평리 -> 새재의 콘크리트 포장길로 자동차가 다닌다.
이정표에서 새재까지는 3km이니 탈출구로 이용이 가능할 것이다.
너덜길은 계속된다.
바위가 흘러내려 생긴 너덜길이 통행로이다. 아이젠이 거추장스러워 벗었다.
지난 산행 시 이 길은 빨치산들의 통로였다는 안내문을 대원사를 지난 주차장 근처에서 본 적이 있다.
외길로 다른 길은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은 좁은 길이다.
빨치산은 프랑스어 Partisan에서 유래되어 당원, 동지, 당파 등을 의미하며 정규군이 아닌 비정규군으로 적의 배후에서 교통수단 파괴, 무기나 물자의 탈취, 인원을 상살하여 적을 교란시키며 정규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요즘은 게릴라라는 용어를 더욱 많이 사용한다.
우리나라의 빨치산 효시는 1946년 10월로 거슬로 올라간다. 이념을 달리한 남조선노동당이 대구사건으로 불법단체로 인정되어 탄압을 받으며 산으로 피신한 좌파인사들이 효시이다. 이후 1948년 8월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며 남노동당원을 중심으로 지리산, 오대산, 태백산 등지에서 조선인민유격대가 만들어지며 빨치산의 활동이 본격화되었고, 한국전쟁에서 패잔병이 된 북한군이 합류하여 깊은 산으로 들어가면서 빨치산의 활동이 최고조에 달한다.
최후의 빨치산은 1963년 박정희대통령의 지리산 토벌작전에서 생포된 정순덕이다.
1963년 11월 12일 최후의 빨치산 소멸 (산하의 썸데이서울에서 따옴)
전쟁이 끝난 뒤도 10년 뒤였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쫓겨가고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가 선글라스 낀 작달막한 장군이 나라를 틀어쥐었고 그가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 대통령이 된 뒤의 일이었다. 지리산 인근 마을에서 총성이 울렸고 한 명이 시체가 되어 널부러졌다. 다른 한 명은 살아남았지만 엉덩이에 총알을 맞았다. 피를 너무 흘린 나머지 건물 안으로 옮겨졌을 때 허연 형광등이 오렌지색으로 보일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결국 다리 하나를 잘라야 했고 그 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는다. 피고의 이름은 정순덕. 남한에서 살아남았던 마지막 빨치산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자였다.
...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그 애국심을 본받자는 이들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그녀가 죽기 전에 받았던 그 경의를 대해 구태여 폄하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일생을 살펴 보면 선생님이고 나발이고, 애국심이고 무엇이고 그저 안스러운 마음 뿐이다. 그녀는 1933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건 ‘정감록’에 심취했던 할아버지가 고향을 버리고 심심산골 지리산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버지는 대충 훈장 노릇을 할 정도로 글줄이나 익혔지만, 딸에 대해선 완고했다. 글을 알면 시집가서 시집살이 고되다고 편지할까봐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이다. 10여년 전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야학을 취재했을 때 나는 똑같은 말을 들었다. “우리 때는 시집가서 편지한다고 글을 안가르쳤어요.”
나이 열 여섯 살에 입 하나 덜자고 정순덕은 인근 마을 성씨네로 시집을 간다. 1950년 1월이었다. 다행히도 남편은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알콩달콩 정을 쌓아가던 무렵 전쟁이 터지고 원래 빨치산세가 강하던 산청 지역은 일찌감치 인공 치하에 들어간다. 남편은 인공 치하에서 팔자에 없는 감투를 썼고 전세가 뒤집히자 그 감투는 목을 자르는 작두가 됐다. 농투산이 남편은 무슨 사상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이 후퇴하면서 발휘했던 그 꼼꼼한 학살의 공포는 남편을 산으로 내몰았다. 부부의 생이별이었고 고난의 시작이었다. 가난도 가난이려니와 걸핏하면 찾아와 빨갱이 남편 내놓으라며 치고 밟는 경찰과 청년단의 횡포는 수십년 지난 뒤까지도 정순덕의 치를 떨게 할 정도였다.
1951년 겨울, 정순덕은 남편의 옷가지와 식량을 싸들고 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꿈처럼 남편을 만나지만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은 스무 날도 못되었다. 남편은 곧 죽음을 당했고 그녀는 빨치산의 일원으로 살아야 했다. “ 적은 것을 여럿이 갈라 먹을 수 있도록 요리를 해야하고, 또 부상병을 간병하는데도 여성의 손길이 필요”(정순덕의 증언)했고 그녀 또한 그 대의에 동의했기에 산에 머물렀지만, 사실 그녀는 내려올 수도 없었다. 일자무식에 남편은 죽어 없고, 빨치산의 마누라로 공인된 여자가 산을 내려간들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전투 훈련을 받았고 빨치산이 됐다. 물론 그녀에게 정치적 열망 같은 건 없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이념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돌아갈 곳 없는 절망감과 남편의 원수들에 대한 증오, 해 주는 것 없이 괴롭히기만 했던 나라에 대한 환멸 그 모든 것이 뭉쳐진 결심이 아니었을까. 허무하게 죽어버린 남편과 달리 그녀는 끈덕지게 살아남았다. 그녀가 몸서리치게 기억하는 지리산 대성동 초토화 때에도 죽음을 면했고, 이현상, 박영발 등 빨치산 총수들이 죽어갈 때에도 그녀는 살아남았다.
2차대전 때 참전했던 일본군 병사가 계속 숨어 지내다가 필리핀이나 동남아시아 밀림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리지만 그건 치안이 확보되지 않은 상하(常夏)의 밀림에서의 타잔같은 삶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순덕은 춘하추동 분명하고 겨울에 산에서 잠을 자다간 동태 꼴이 되기 십상인 지리산에서 13년을 치러 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체포로 남한 빨치산의 역사는 영원히 막을 내렸다.
체포 뒤 사형을 구형받았을 때 그녀는 “조금이라도 감형하면 개놈이다!”라고 외쳤고, 국선변호인에게도 “집어치워! 어서 죽이기나 하라고!”라고 악을 쓰기도 했다. 그녀가 50년대에 체포되었더라면 사형을 면치 못했겠지만 이미 ‘망실 공비’로 분류되던 마지막 빨치산에게 재판부는 약간의 ‘정상’을 참작한다. 판결문은 이렇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행위는 형벌의 책임이 무겁기는 하나 농촌에서 무식한 아녀자로서 16세에 결혼, 신혼 6개월만인 625전쟁 때 남편을 따라 입산한 것이 동기가 되어 정치적인 확고한 신념 없이 13년 동안 산에서 짐승 같은 생활을 하면서 남편의 희생물이 된 정상을 참작한다.” 그래서 무기징역이었다.
그로부터 그녀는 23년을 복역한다. 풀려난 뒤에는 음성 꽃동네에도 몸을 의탁했고, 인형 눈도 붙이고, 봉투도 만들면서 생을 이어나가야 했다. 지리산에서의 13년을 제외하면 그 전이나 후나 그녀는 항상 바닥이었다. 그래도 전쟁만 아니었다면 소작 붙여먹는 농사꾼의 아내로서 순풍순풍 7남매쯤 낳아서 그 중에 잘된 자식의 효도를 받으며 호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의 폭풍은 그녀의 인생을 완벽하게 망가뜨렸다. 비전향 장기수들을 잠깐 취재하면서 고향도 남쪽이고 가족도 남쪽에 있는 이들이 왜 다 늙어서 북한으로 가려고 할까 고민한 적이 있는데 정순덕을 생각하면 그 답이 풀리는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가치없거나 비참하지만은 않았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치하하고 존중하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정순덕은 북으로 가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송환 대상에서 제외된다. ‘비전향’ 장기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향서를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전향서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양심선언(?)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2004년 뇌출혈로 쓰러져 인천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묘비명은 이런 것이었다.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전사 하나된 조국의 산천에 봄꽃으로 돌아오소서.” 박복한 나라에 태어나 평생 몸 한 번 편히 하지 못하고 살았던 기구한 여인 (물론 그녀도 민간인 학살의 죄는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의 묘 앞에 바쳐진 그 정도 헌사도 쉽게 용납되지는 않았다. HID 즉 대북첩보부대 출신 ‘청년 동지회’들이 그 묘비를 망치로 들부숴 놓았던 것이다. 그때 저승의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63년 11월 12일 그날 총알이 내 심장에 박히뿌렸어야 되는 긴데. 그래가 동무들처럼 아무 데나 파묻힜으면 이 꼴은 안봤을 낀데.
따스한 햇볕아래 눈이 녹는다. 그 눈 사이로 양지꽃의 새순이 제법 자랐다.
3월이면 노란 꽃을 피우며 역사의 아픔을 다독거려 주리라.
계속되는 너덜길을 내려와 축대가 쌓여 있다. 혹 이곳이 빨치산의 비트로 사용되었던 곳은 아닐까?
장터목대피소로부터 12km의 거리를 8시간에 걸쳐 내려왔다.
이곳부터는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원사까지는 1.6km의 거리가 남아있다. 더욱 불편한 것은 내리막길이 콘크리트 포장으로 지친 다리를 더욱 괴롭히는 것이다.
대원사까지 불렀던 택시에 도착을 알리니 택시는 우리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작년 장마에 산사태가 나 피해를 입은 집들이 반쯤 흙에 파묻힌 채다. 이런 모습을 보면 개발이 두렵다. 물론 개발하지 않아도 천재지변에 의하여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자연 파괴와 무분별한 개발에 의하여 기후가 변하고 지형이 변하여 천재지변의 발생빈도와 그 정도가 심화되고 있으니 걱정이다. 이런 수해를 요즘은 산행을 하며 흔히 볼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금본주의에 의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있는자의 불법 개발과 위정자들과의 청탁개발이 자연을 파괴한다. 자연을 두려워하며 자연을 유지하여 후손에 안전하게 물려주려하는 자는 이들에 밀리어 벼랑 끝에 내몰려 그들의 소리는 메아리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무시된다. 우리는 이들을 지원하고 같이 동참해야하지 되는 것은 아닌지....
원지에서 서울에 가는 버스는 2시20분이다.
택시기사에게 시간내에 도착가능여부를 물으니 가능하다며 운전을 서두른다.
고마워 40,000원을 지불했다. 유평리까지는 35,000원이라고.
원지에서 중산리까지는 30,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나 35,000원이라고 기사는 말한다.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기분좋은 산행이었고, loose time이 없이 진행된 일정이어서 더할 나위없이 기분이 좋았다.
인영이는 아들의 직장근처에서 사왔던 홍족이 맛있었다며 아들에게 전화를 해 그 위치를 물어 선릉역 부근에 있는 족발집에 우리를 안내하고 산행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우리는 1박 2일의 별세계를 다녀왔다.
|
첫댓글 지리산 터줏대감의 토굴에 붙어있는 "산중가" 로 답하네.........
날마다 산을 봐도 볼수록 좋고
물소리 노상 들어도 들을수록 더욱 좋네
그 가운데 저절로 귀와 눈 맑게 트이니
내마음 신선이네
지금봐도 지리의 여명과 일출은 장관일세. 특히 여명의 붉은띠를 잘 담아낸 것 같네.
연하일휘(煙霞日輝) 란 이를두고 하는 말 아니겠는가?
내가 담아내지 못했던 멋진 영상들과 공감이 가는 정성스런 후기를 남겨주어 고맙고
수고 많았네.
명품 산행기 잘 감상했네... 빨치산에 대한 연민도 느끼고... 우리의 현재 삶이 매순간 고맙다는 겸손한 마음도 들고... 쌩큐...
“예로부터 이 봉우리에 오른 사람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 우리처럼 이렇게 명쾌하게 살펴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점필제 김종직 유두류산기에서
좋은 벗들과 함께한 산행이 어찌 예전의 선비들의 유산과 다르리오 .............
설경도 멋지고 일출은 더더욱 장관이고...........어찌 말로 表現 할 수 있을까![?](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얼굴을 감싼것 보니 바람이 많이 불었나보네.소백산 처럼.![흐흐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47.gif)
해단식을 하셨군 ..근데 부르지않고 즈들 끼리 홍족으로 살짝했단 말이지.....몸에 배어 있을 지리산 정기를 조금씩 나눠주는 것이 아까웠을까....ㅋㅋㅋ
탁족을 빼놓아 서운했던가 보구먼.![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
행여 같이 가자고 할까봐 겁먹는 사람도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