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질전직(惡質前職) 죄로 유죄판결 형무소에서 다카하시씨 등은 별다른 가혹 행위는 당하지 않았다. 옥수수 삶은 것으로 끼니를 떼웠는데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946년 10월30일 다카하시씨는 징역 1년6개월의 선고를 받았다. 죄명은 「악질전직」(惡質前織)으로서 「…평북 내무부장을 역임, 조선 민족을 압박 착취한 일본인 관료」라는 게 기소사실의 전부였다. 『판사가 「최후 진술을 하라」기에 이렇게 말했지요. 「내가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는지는 모르나 조선인을 착취한 기억은 없다」고 했지요. 이에 대해 판사가 말하기를 「개인적으로는 양심적으로 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주의 제도의 한 조직원으로 활동했으므로 착취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두 달쯤 강제 노역(짚신 만들기, 옷 수리 등)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46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날 형무소 당국자가 갑자기 다카하시 등을 불러내더니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징역 2년형 이하의 자들을 석방한다』면서 내보내 주었다. 나와 보니 일본인들은 거의 철수한 뒤였다. 신의주에 있다가는 언제 또 붙들려갈지 모르겠다 싶어 흥남에 있는 제53 소련군 수용소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일단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가 돌려보내진 일본 군인들과 귀환선을 기다리는 민간인 5000여 명이 몰려 있었다. 흥남 질소비료공장의 직원 사택과 독신자 아파트에 수용돼 있다가 1947년 3월 그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 뒤 아직 한번도 한국에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에는 친구도 많습니다만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가보고 싶은 마음이야 왜 없겠습니까만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발길을 자꾸만 잡아당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한번 가볼 생각입니다.』 * 친일파의 과잉 충성이 문제? 해방 뒤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국은 조직적으로 총독부 고관들을 검거, 재판에 넘겼다. 특히 검사, 판사, 경찰관, 친일파, 밀정 등이 무더기로 당했다. 독립운동가와 사상범들에게 유죄판결을 많이 내렸던 평안복심법원 검사장 야마자와(山澤佐一郞) 등 5명은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되었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獄中에서 病死했다. 다카하시씨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때 그 직책에 있었으므로 당한 것이지 나쁜 짓을 한 건 없다고 했다. 압제의 책임을 제도에 떠넘기는 논법인데, 이런 말도 했다. 『創氏改名 문제만 해도 그렇다. 원래 취지는 일본식 이름으로 改名하기를 원하는 한국인들에게 길을 터 주기 위해 한국인도 일본 이름을 가질 수 있도록 이 제도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시행 과정에서 군수 등 일선 행정 기관의 한국 관리들이 과잉 충성을 하기 시작했다. 創氏改名의 실적을 높이려고 강제적으로 이름을 바꾸도록 했고 이것이 다른 행정 기관을 자극하여 경쟁적으로 에스컬레이트되었다. 흰옷을 입지 못하도록 한 것도 그렇다. 위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하라고 권장한 것뿐인데 말단 기관에서는 강제가 되었다. 심지어 흰옷을 입은 한국인에게 페인트 칠을 하고 돌아 다니는 관리도 있었다. 지방 순시에서 이런 걸 보고 나 자신도 시정을 지시한 적이 있었다. 한국어 교육도 금지시킨 것이 아니었다. 일본인 교장이 있는 학교에선 대체로 한국어 교육이 계속됐는데 한국인 교장들은 대부분 한글 교육을 철폐했다.』 이렇게 되면 식민지 압제의 책임은 모두 제도와 친일파에게 떠넘겨지고 총독부 관리들이 짊어질 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진남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하야카와씨(早川善藏)는 일본 서민의 입장에서 다카하시씨와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하야카와씨는 70세 노인인데 공해방지회사의 고문으로 있다. 그즈음은 과거 진남포에 살았던 사람들을 끌어 모아「진남포 종전(終戰)의 기록」이란 책을 만들려고 분주하게 쫓아다니고 있었다. 패전 때 약 1만8000명의 일본인이 진남포에서 살았다. 그 가운데 2200명이 진남포 향우회를 조직, 매년 한 번씩 만나고 있다. * 3·1운동과 관동 대지진의 목격자 하야카와씨는 3·1운동과 關東대지진이란, 한국인에게는 잊을 수 없는 2대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다. 『나는 홀어머니와 함께 진남포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3·1운동 때는 다섯 살이었는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구경하고 있다가 저절로 이 물결에 휩쓸려 같이 옆에서 행진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기억하는 건 데모군중이 질서가 있었다는 것, 결코 폭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경찰서 앞에까지 행진한 데모대는 돌을 던지기 시작했는데 그때 누군가가 나를 달랑 들어냈습니다. 그 뒤 우리 집에서 불이 났는데 어머니는 외출하시고 저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도 어느 조선인이 저를 구출해주었지요. 關東 대지진이 난 그날, 나는 도쿄에 옮겨와 살고 있었는데, 분명히 보았습니다. 정장을 한 어느 일본인이「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고 소리지르며 폐허 속을 달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방 뒤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서 당한 것은 自業自得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할 사람들이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3·1운동이 일어나도 우리 집 같은 일본 서민들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에게 나쁜 짓한 게 없는데…』 진남포에서 일본인 세화회장을 지내면서 철수를 지도한 사람은 마츠바라씨(松原寬)였다. 70代 후반의 마츠바라씨는 당시 진남포에 있던 일본 광업제련소의 서무과장이었다. 이 제련소는 구리·아연·텅그스텐 등을 제련하는 동양굴지의 大제련소였다. 종업원이 3000 명. 패전 뒤 야베 제련소장은 『이 시설은 보존해야 한다. 조선에 넘겨 주더라도 깨끗하게 주자』면서 관리에 철저를 기했다고 한다. 1945년 8월말부터는 再가동이 시작될 정도였다. * 고생담 과장하는 일본인들 도쿄제국 대학 출신의 마츠바라씨는 1944년 5월에 현지 부임했다가 패전을 맞았다. 1945년 겨울에 혹독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만주로부터 일본 피난민들이 진남포로 몰려들었고 기근에다가 전염병까지 번져 어린이들이 잇따라 죽어갔다. 그해 겨울에 847명의 일본인 사망자가 생겼는데 대부분이 어린이들이었다. 火葬이 금지돼 얼어붙은 땅을 파고 시체를 묻는 데 혼이 났다고 한다. 마츠바라씨는 일본인들을 인솔, 걸어서 38선을 넘어 인천이나 부산에서 귀환선을 타도록 조처했다. 부인은 아기를 업고 걸었기 때문에 가슴살이 파여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인천에서 귀환선을 타기 직전 어느 한국인 신문기자가 소감을 묻더란다. 마츠바라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쟁에 졌으니 할 수 없다. 돌아가면 힘을 합쳐 재건에 노력하겠다. 당신들도 그렇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기자는 『지금은 그런 말은 하는데 일단 배를 탄 뒤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겠느냐?』고 다그쳤다. 마츠바라씨는 『이미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앞으로는 서로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극동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오늘의 불행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선 안된다』고 대답했다. 마츠바라씨는 귀환 뒤 일본 광업(주)의 부사장까지 승진했다가 1968년엔 가시마 석유 회사를 설립, 사장·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상담역으로 1주일에 이틀만 회사에 나온다. 이 회사는 일산(日産) 15만 배럴의 정유공장을 가진 큰 석유 회사다. 한국에는 1962년에 딱 한번 갔다고 했다. 이즘 일본에서는 철수민에 의한 북한 탈출기가 많이 출판되고 있었다. 「공포의 반도」란 책의 표지 선전문은 「고문과 감옥 생활을 이겨내고 귀환한 일본인(전 조선 총독부 경찰관)의 혈루(血淚)의 기록!」이라고 절규했다. 해방 직후의 한반도를 마치 수용소군도처럼 그리고 있는데 36년간의 압제를 2년간의 고생담으로 상쇄하겠다는 것인지, 나로선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일본인 스승에게 朴 대통령 고백, 『언제 살해될지 모르지만…』 패전 이후 한국에서 그래도 대접받으면서 쫓겨난 사람들은 학자나 교육자였을 것이다. 식민지 통치 기관의 一員이었음에는 분명하지만 학문과 師弟之間이란 본래의 성격상 인간 관계가 그렇게 급변하지는 않았다. 패전때 총독부 박물과장 대리였던 아리미츠씨(有光敎一)는 戰後에도 한국에 남아 호우총 등 중요한 발굴을 지휘했다. 그는 귀환 뒤에도 교토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韓日 고대사 연구에 노력했고 金元龍 교수(서울대) 등 많은 한국인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故 朴正熙 대통령의 대구사범 시절 담임선생이었던 기시씨(岸米作). 朴 대통령보다 15세가 위인 기시씨는 히로시마 사범학교를 졸업. 1928년에 한국에 건너가 17년 동안 교육계에 있었다. 그 동안 대구사범 교사, 김제여고교장, 충남 학무과장 겸 視學官을 역임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고교교장, 초급대학 교수로 일했고 1980년에 퇴직했다. 그는 1982년에 펴낸 회고록(비매품)에서 朴 대통령의 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한국측 여행업자가 朴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나는 잘라서 거절했다. "일본 신문을 읽으면 朴 대통령은 과거 일본 군부 사람처럼 냉혈적으로 느껴져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나는 한국에 도착한 뒤에야 일본 신문의 보도가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1977년 9월25일 서울의 일본 음식점에서 대구사범 동창회가 열렸다. 내가 여기에 초대된 것을 알고 朴 대통령이 나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한국 국회의원 R군, 변호사 K군이 다음날 나를 안내, 청와대로 데리고 갔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오전 10시가 되었다. 비서관이 우리를 데리고 집무실로 갔다. 비서관이 문을 노크하니 朴 대통령이 싱긋이 웃으며 마중을 나와 악수를 청했다. 朴 대통령은 나를 응접 소파로 안내했다. 앉자마자 『연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고 물었다. 70을 넘겼다고 했더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사범학교 시절엔 올백을 한 새까만 머리카락의 젊은 분이었는데…』라고 했다. 『저의 일본말이 알아 듣기 힘들지요. 저는 공식적인 자리에선 일본어를 일체 사용하지 않습니다. 일본 정치가들과 만나도 반드시 통역을 둡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다 알아 들을 수 있으니 걱정마십시오.』 그러나 대통령의 일본어는 발음도, 話法도 정확했다. 과연 일본사관학교에서 배운 정확, 신속, 과감의 기풍이 일본어에도 살아 있는 듯했다. R군과 K군이 이야기 도중에 한국말을 하면 朴 대통령은 눈짓을 하여 일본말을 하게 했다. 잠시라도 내가 대화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화제는 일체 정치 이야기를 피하고 신변 잡담, 회고담 등으로 시종했다. 내가 『각하…』라고 하니 대통령은 『선생님, 제발 각하라는 말만은 쓰지 마세요. 스승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면 곤란합니다』고 했다. 예정 시간인 10시30분이 되었기에 일어나려고 했더니 대통령은 『좀 더 이야기합시다. 비서관한테는 제가 이야기해 놓겠습니다』면서 탁상의 전화로 무어라고 얘기했다. 내가 방문기념으로 휘호를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더니 대통령은 『나는 글씨를 도무지 못 씁니다. 더구나 선생님한테 드릴 정도는 못됩니다』고 사양했다. 그래도 졸랐더니『선생님께서 일본에 돌아가신 뒤 열심히 연습하여 한 자 써보내겠습니다』고 했다. 50분이 지나 다시 일어서려고 하니『섭섭합니다. 기념 사진이라도』라면서 관저를 한 바퀴 돌면서 사진도 찍고 국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국화를 가장 좋아합니다. 일본에서도 지금쯤 국화가 한창이겠지요?』 대통령은 나를 다시 室內로 데리고 가더니 준비한 선물을 보여 주었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내 딸과 아내에게 줄 것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요즈음은 정치 일정 때문에 바빠서 오늘은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 안됐습니다. 내년 4월에는 조금 여가가 생길 것 같으니 그 때 꼭 오십시오』 대통령은 현관까지 나와 나를 전송했다. 대통령은 현관에서 감개무량한 듯 이야기했다. 『저는 쿠데타의 책임자로서 부하들을 이끌고, 자동기관총을 들고 이 현관으로 돌입했었습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無血점령을 했습니다. 그런 내가 이 집의 주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운명의 불가사의를 느낍니다. 그러한 저이기 때문에 언제 나 자신이 살해될지 모른다고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 총독부 인맥의 韓日 유착 10·26 사건 두 해 전 朴 대통령이 다가오는 운명을 예감 했는지,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지만 각오는 돼 있다』고 말했다는 것도 흥미있지만, 기시씨의 글에는 일본식 교육에 대한 무의식적인 자부심이 나타나 있다. 朴 대통령의 절도 있는 태도에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육의 성과를 확인했다는 감상. 이것은 나이 많은 일본인들이 朴 대통령이나 고등문관 시험 출신의 한국인 관료들에게 대해 갖는 거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日帝시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비록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만났다 해도 서로가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이 시대에 韓日 관계를 주도했던 兩國의 인맥을 보면 일본쪽에선 한국과 만주 경험을 가진 관료출신, 한국쪽에선 조선 총독부 근무 경험을 가진 인사가 많았다. 공통적인 교육, 공통적인 관료 생활의 경험이 벌써 정서적으로 양쪽을 밀접하게 엮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쪽의 기시(전 수상), 시이나(전 외상), 다나카(전 수상), 야쓰기(우익거물·한일회담 막후 조정자), 고다마 요시오(우익 거물·한일 회담 막후 조정자), 마에다(駐韓 대사·총독부관리)등은 모두 한국·만주 경험자이며 한국쪽의 崔圭夏(전 대통령·만주국 관료), 金東祚(전 주일 대사·총독부관리). 李湖(전 주일 대사·경성지법 검사), 申鉉碻(전 총리·고문행정과 합격), 金永善씨(전 주일대사·총독부 시절 군수)등이 그렇다. 수많은 만주 및 일본사관학교 출신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984년 당시에도 진의종 총리, 윤길중 국회 부의장 등 고등 문관 시험을 거친 총독부 관료 출신들이 한국 지도층의 중심에 있었다. 구보다, 야기씨 등 일본에 있는 조선 총독부 인맥이 1960,1970년대에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두 나라의 상층부를 관통하는 이런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日韓협회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한국쪽 인사들도 대충 총독부 관료 출신이다. 패전 때 경북 도지사를 했던 김대우씨(사망)는 큐슈제국대학 공대를 나와 총독부에 들어갔던 사람이다. 해방 뒤 한때 反民特委에 걸려 법정에까지 섰던 사람이다. 日韓협회에서 내는 회보「우방」에는 김대우씨에 대한 글이나 그의 기고문이 자주 실렸다. 도쿄제국대학을 나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조선 총독부 산금과(産金課)에 근무했던 임문환씨(전 농림부장관·부산 플라자 호텔회장)도 韓日협회의 단골손님처럼 깍듯한 예우를 받고 있다. 이밖에도 부완혁(패전 당시 선산군수·전 율산 회장), 김윤석(체신국 근무·건국대 교수), 윤우경씨(경찰·前치안국장), 이익흥(전 내무장관) 등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같은 총독부 관료출신이었지만 장경근 씨(사망·자유당 시절 정책위의장)는 일본으로 망명한 뒤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排日정책의 입안자라고 하여 그랬다는 것이다. 장경근씨에 대한 냉대와 퍽 대조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호즈미씨의 뒤를 이어 경성 일본인 세화회 회장으로 취임, 거류민 철수를 지도했던 이는 경성부윤을 지냈던 후루이치 스스무(古市進)였다. 이 사람은 귀환한 뒤 무역선의 사무장이 되었다. 1952년 6월 이 무역선은 목재를 싣고 부산항에 들어왔다. 당시 국무총리는 장택상. 두 사람은 軍政 시절부터 친면이 있었다. 張총리는 후루이치에게 특별히 상륙허가를 내주고 만나기도 했다. 후루이치는 총독부 관료 출신인 윤우경(당시 치안국장)으로부터는 식사대접도 받았고 김대우, 최하영(뒤에 심계원장)과도 만났다. 張 총리의 4촌 형인 장직상과는 상담(商談)을 하기도 했다. 이 사실이 나중에 族靑系 국회의원들에 의해 크게 문제가 되어 張 총리는 물러났다. 후루이치는 10여년 전에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