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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증권 배구팀은 이제 없다. 그러나 고려증권 출신 선수들 대부분이 배구계에 남아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류중탁 전 대표팀 감독이 현역 시절 입었던 등번호 1이 새겨진 고려증권 유니폼.(사진 김동하) |
이성희(41) GS칼텍스 감독, 박삼용(40) KT&G 감독, 박주점(43) 한국도로공사 감독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여자프로배구팀 감독”이라고 답했다면 배구 팬으로서 기본은 된다.
그럼 여기에 진준택(59) 대한항공 감독, 류중탁(48) 전 국가대표팀 감독, 정의탁(47) 남자청소년대표팀 감독, 장윤창(48) 경기대 교수를 추가한다면 어떨까. 배구 올드팬이라면 어렵지 않게 답을 알아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1998년 해체된 고려증권 배구팀 출신이다. 사라진 지 10년 만에 부활하는 고려증권의 흔적을 찾아 떠나 본다.1983년 남자 실업배구는 경사를 맞았다.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서비스(현 현대캐피탈)가 배구단을 창단한 것이다. 두 팀은 그때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코트를 뜨겁게 달궜다.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서비스가 자웅을 겨루던 1995년 11월 삼성화재가 실업 배구에 뛰어들었다.
1998년 고려증권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삼성화재는 77연승 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실업 시절부터 2005년 프로 원년까지 겨울리그 9년 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삼성화재의 독주가 이어지면서 배구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게 됐다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배구 팬들은 고려증권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느끼곤 했다.
전설이 시작되다1983년 1월 한국 남자배구의 미래를 짊어질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장윤창 등 7명의 선수가 고려증권 유니폼을 입었다. 장윤창의 영입을 조건으로 창단을 결정한 현대자동차서비스가 이의를 제기하는 등 그해 겨울 배구계는 시끄러웠다.
그러나 대한배구협회의 설득 등 여러 우여곡절 끝에 두 팀 모두 그해 4월 열린 제1차 실업연맹전에 출전했다.
고려증권은 장윤창을 중심으로 류중탁, 김인욱, 이원재, 이은규, 김성범, 남태성, 김상권으로 멤버를 꾸렸다. 선수가 부족해 감독인 우철우까지 선수 명단에 넣었다.
류중탁 전 대표팀 감독은 “선수가 없어서 라이트에서 뛰어야 할 (장)윤창이가 센터로 뛰기도 했다”고 당시의 어려운 선수 사정을 설명했다.
고려증권은 장윤창의 파괴력 있는 스파이크, 류중탁의 센터 블로킹을 앞세워 첫 출전한 실업연맹전에서 2위에 올랐다.
장윤창과 류중탁을 빼면 선수 구성에서 고려증권에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던 현대자동차서비스는 3위를 했다. 우승은 금성사의 몫이었다.
1984년 정의탁이 입단하면서 전력이 크게 향상됐다. 현역 시절 블로킹과 시간차 공격 그리고 속공의 귀재라는 평가를 들었던 정의탁 남자청소년대표팀 감독이 센터에 자리를 잡으면서 장윤창이 제자리인 라이트로 돌아갔다. 강재규와 나정균 등 레프트 자원도 새로 들어왔다.
그해 출범한 대통령배전국남녀배구대회에는 남녀 실업 16개 팀과 대학 4개 팀 등 20개 팀이 출전해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 수준의 대회로 자리를 잡았다.
고려증권은 4강전에서 실업 강호 현대자동차서비스를 꺾고 올라온 경기대를 가볍게 물리치고 초대 챔피언이 됐다. 장윤창은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블로킹 부문에서는 이종경, 이세호(이상 경기대)에 이어 3위에 올랐다. 류중탁도 문용관(현대자동차서비스) 전 대한항공 감독에 이어 블로킹 부문 5위, 공격종합 부문에서 이인(현대자동차서비스)에 이어 2위에 오르는 등 맹활약했다.
우감독은 이들을 이끌고 1985년 제2회 대통령배대회에서 또 다시 정상에 올랐다.
고려증권의 연속 우승이 시작되는가 하는 순간 현대자동차서비스가 제동을 걸었다.
현대자동차서비스는 대학 우수 선수 영입에 뛰어드는 한편 이탈리아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던 김호철을 끌어왔다. 문용관 등 기존 전력에 이세호, 이종경, 이채언(이상 경기대), 노진수(성균관대) 등이 합류하면서 전력이 배가됐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고려증권은 현대자동차서비스에게 우승 트로피를 쉽게 내줄 팀이 아니었다. 1986년 진준택 감독이 팀을 맡으면서 공격적이었던 팀 색깔이 바뀌었다.
고려증권하면 떠오르는 끈끈한 수비와 조직력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수비와 조직력이 좋다는 건 팀 내 의사소통이 잘 이뤄진다는 뜻이다.
류 전 대표팀 감독은 공격보다는 수비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블로킹 하나를 더 잡아내기 위해 점프를 했고 공을 건져 올리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류 전 감독과 진감독은 궂은 일을 도맡아 한 선수로 182cm의 단신 레프트 홍해천을 꼽았다. 성남 송림고 감독을 맡고 있는 홍해천은 리베로가 없던 시절 최고의 수비 선수였다. 두 감독은 “어떤 공도 다 리시브했다”며 홍해천을 기억했다.
고려증권은 1990년대에 접어들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무렵 고려증권은 장윤창, 류중탁, 정의탁, 이경석 등 주력 선수들의 노쇠화와 더불어 신인 선수 영입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서비스를 포함한 다른 실업팀들과 벌인 스카우트 경쟁에서도 밀렸다. 현대자동차서비스는 1988년부터 1993년까지 김동천, 마낙길, 임도헌(이상 성균관대), 윤종일, 하종화, 강성형(이상 한양대), 제희경(경기대) 등 내로라하는 대학 스타들을 영입했다.
반면 고려증권은 유망주로 평가 받던 김은석이 1991년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하는 등 세대교체에 어려움을 겪었다.
진감독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생각으로 팀을 꾸렸다. 190cm의 작은 키로 센터를 본 이재욱이 베테랑 정의탁의 뒤를 받쳤고 이경석의 뒤를 이을 세터로 서울시청에서 뛰고 있던
이성희를 데려왔다. 이성희와 함께 고려증권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선수가 어창선과
박삼용이다.
고려증권 배구의 백미는 현대자동차서비스와 겨룬 1996년 슈퍼리그 결승(4차 대회) 4차전이다. 당시 고려증권의 결승 진출을 놓고 이변이라고들 했다.
현대자동차는 임도헌, 강성형, 마낙길 등 국가대표 주전 공격수에 206cm의 장신 센터 제희경까지 이름값 만으로도 고려증권을 압도했다.
두 팀의 대결은 ‘다윗(고려증권)과 골리앗(현대자동차서비스)의 싸움’으로 표현됐지만 시리즈의 뚜껑이 열리자 경기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고려증권이 3-2, 3-0으로 2연승하며 앞서 나갔다. 현대자동차서비스는 3차전에서 3-0으로 이겨 한숨을 돌렸다.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4차전은 3시간 45분의 대접전이었다. 1세트는 15-11로 고려증권이, 2세트는 17-16으로 현대자동차서비스가 이겼다.
당시에는 듀스 때 17점 상한제가 적용됐다. 마지막 5세트는 랠리포인트제로 진행됐고 듀스 상한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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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택 전 대표팀 감독은 고려증권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했다.(사진 김동하) |
고려증권이 3세트를 15-9로 가져가면서 승부가 기우는 듯 했으나 현대자동차서비스가 듀스 접전 끝에 4세트를 16-14로 잡아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5세트, 두 팀이 한 점씩 주고받는 가운데 체육관은 선수들과 관중들이 내뿜는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14-14에서 현대자동차서비스는 16-15로 첫 역전에 성공했다. 우승까지는 1점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고려증권은 박선출의 속공으로 16-16 동점을 만들었고 이어 라이트 문병택의 오픈 공격이 성공해 17-16으로 다시 앞서나갔다.
현대캐피탈 강성형의 강타가 후위에 있던 고려증권 레프트 최성영의 손에 걸렸고 세터 이성희는 이수동에게 토스했다. 이수동의 스파이크가 현대자동차서비스 코트에 꽂히면서 길었던 승부가 끝났다.
이성희는 1996년 슈퍼리그 최우수선수로 뽑혔고 이수동은 대회를 빛낸 새로운 얼굴로 각광을 받았다.
역사 속으로우승 가능성이 없다는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게 한 고려증권의 앞날은 순탄해 보였다. 그러나 곧이어 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는 고려증권에게 재앙이었다.
1997년 12월 5일 고려증권은 1,800억여 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 처리됐다. 진감독과 류코치는 어려운 회사 사정을 전해 듣고 있었지만 이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고려증권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면서 출전한 대회는 1997년 11월 전남 여천에서 열린 1997년 한국배구대제전 2차 대회가 마지막이었다.
1997-98시즌 슈퍼리그 개막이 눈앞에 다가왔으나 회사의 부도로 선수들은 당장 잠을 잘 곳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선수단 숙소와 체육관은 채권단의 압류로 사용할 수 없었다.
슈퍼리그 참가 자체가 불투명했지만 대한배구협회의 지원으로 원정경기 비용을 겨우 마련했다. 호텔은 꿈도 꾸지 못했고 장급 여관을 돌아다녔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월급 한 푼 받지 못했다. 훈련을 하기 위한 체육관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류 전 감독은 “그때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선수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선수들도 생활인 아닌가. ‘경제적인 문제로 더 이상 뛰기 힘들다’는 선수들에게 어떻게든 경기는 하자고 설득했는데 정말 마음이 아팠다. 특히 그해 신인으로 들어온 선수들은 마주 볼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고려증권은 리그 불참 사태는 피했다. 그해 슈퍼리그가 끝난 뒤 팀은 사라졌지만 리그 일정은 끝까지 치렀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앞날이 막막하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진감독의 회상이다. 남은 것은 우승 트로피와 상장 그리고 유니폼, 배구화, 배구공뿐이었다.
선수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새로운 팀을 찾은 선수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1998년 고려증권의 마지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 가운데 삼성화재 손재홍(33,186cm)만이 아직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10년만의 귀환’ 대한항공 진준택 감독1998년 고려증권을 끝으로 코트를 떠났던 진준택(59) 감독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문용관(48) 전 감독에 이어 프로배구 대한항공의 지휘봉을 잡은 진감독을 만나기 위해 7월 8일 경기도 신갈에 있는 대한항공 연수원을 찾았다.
대한항공 선수단은 이날 전용체육관이 딸린 새로운 숙소로 이사했다. 진감독은 흰머리가 조금 더 는 것을 빼고는 1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진감독은 “선수 시절 뛰었던 팀은 물론 코치, 감독을 맡았던 여러 팀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팀이 고려증권”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1981년부터 카타르대표팀을 이끌던 진감독은 1985년 귀국해 이듬해 창단 4년째를 맞는 고려증권을 맡았다. 당시 고려증권에는 장윤창, 류중탁, 정의탁, 이경석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즐비했다.
1984년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 원년 우승에 이어 제2회 대회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주축 선수들의 나이가 들어 가면서 조금씩 팀이 흔들렸다.
고려증권과 같은 해에 창단한 현대자동차서비스는 물론 한국전력, 대한항공, 금성사 등에 밀려 3위도 불투명했다.
그때 진감독은 고려증권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은 수비와 조직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어떤 종목이든 단체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팀워크다. 팀플레이는 조직력을 바탕으로 나온다.”
진감독은 간판스타인 장윤창, 정의탁, 류중탁 등에게 팀플레이에서 후배 선수들의 모범이 되라고 요구했다.
진감독은 “배구에서도 스타플레이어가 필요하다. 승패의 고비에서 해결사 구실을 하는 선수다. 그러나 팀에 스타 선수가 꼭 있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라면서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강조했다.
그가 꼽은 이유는 배구를 잘하는 선수든 못하는 선수든 공을 때릴 수 있는 기회는 딱 한 번이고 아무리 스타 선수라고 해도 팀워크를 소홀히 하면 그 기회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진감독은 “조직력 강화라는 말은 쉽지만 설명되지 않는 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선수들이 갖고 있는 수동적인 생각을 능동적으로 바꾸는 데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선참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감독은 “선수들 스스로 생각하는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그렸던 팀플레이가 이뤄졌다. ‘이 맛에 감독을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말했다.
고려증권 선수들은 6명 모두가 공격수였고 수비수였다. 블로킹에 리바운드 된 공이 코트 옆 광고판을 넘어가도 선수들은 끝까지 따라가며 몸을 날렸다.
고려증권은 1987년 서울에서 열린 제25회 박계조배전국남녀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예전의 실력을 되찾았다.
마지막 시즌고려증권은 1세대와 2세대로 나뉜다. 장윤창, 류중탁 등이 활약한 시기가 1세대다. 1세대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지는 시기에 진감독은 특유의 조직력으로 정상을 지킬 수 있었다.
장윤창, 류중탁, 정의탁, 이재필, 이경석 등 1세대가 물러난 뒤 이성희, 이수동, 박삼용 등 2세대가 들어섰다. 이들은 선배들보다 높이도 낮았고 이름값에서도 밀렸다. 그러나 이들은 1996년 슈퍼리그에서 우승했다.
진감독은 “2세대 선수들은 스스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선수들 덕을 많이 본 셈”이라고 털어놨다. 현대자동차서비스와 맞붙은 1996년 슈퍼리그 결승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묘사됐다. 진감독은 그해 우승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우승 다음해부터 시작된 어려운 시기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눈치 빠른 몇몇 선수는 모기업의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부터 다른 팀에 견줘 회사의 지원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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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준택 감독은 대한항공을 맡아 10년 만에 남자배구로 돌아왔다.(사진 김동하) |
1997년 가을 코칭스태프는 다가올 시즌에 대비한 회의를 했다. 고려증권은 그때까지 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전지훈련을 겸한 극기훈련을 했다.
진감독은 류중탁 코치와 함께 훈련지 숙소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회사 관계자를 만났다. “그때 회사 관계자가 ‘이번에는 좀 어렵겠다’고 말했다. 훈련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고려증권은 부도가 났다.
“선수들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때 진감독은 무력감을 느꼈다. 선수들에게 “유종의 미를 거두자”라는 틀에 박힌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팀의 미래도 회사의 앞날도 모두 불투명했다. 팀 해체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고 ‘팀을 인수할 기업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IMF 외환 위기로 현대자동차서비스, 대한항공, LG화재 등 다른 팀들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었다.
“회사 관계자가 와서 ‘주거래 은행인 주택은행으로 팀을 넘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했다.” 한순간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 했다. 대한배구협회에서도 팀을 유지하는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포항제철, 동부그룹 등 몇 개 기업이 인수 대상자로 거론됐지만 논의에 그쳤다. 현실은 냉정했다. 구조조정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고려증권 배구팀은 그렇게 사라졌다.
1998년 슈퍼리그에서 우승하면 인수 기업이 나타날 수 있고 인수 대상 기업을 찾기도 수월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막연한 희망이었다.
고려증권은 1998년 슈퍼리그 3차 대회 진출에 실패했다. 2차 대회 마지막 경기인 삼성화재전에서 0-3으로 졌다.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진감독은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 아무 말도 못하겠더라”고 회상했다. “수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짧은 말이 오갔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당시 체육관에는 부도가 난 고려증권 사원들이 찾아와 응원을 했다. 진감독은 “사원들이 외치던 응원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고 떠올렸다.
선수와 코칭스태프 모두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고려증권! 고려증권!”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뒤로 하고 선수들은 짐을 챙겨 코트를 떠났다. 진감독도 아무 말 없이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인연진감독은 고려증권이 해체된 뒤 2001년부터 한중대 레저스포츠학부 전임교수로 강의를 하는 한편 학교 여자배구팀을 이끌었다.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교수직을 떠나 다시 코트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진감독은 “고려증권 감독을 그만둔 건 팀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면서 “내가 못해 팀 성적이 나빠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당시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 모두 직장을 잃어버렸다. 다시 돌아온 이유는 제대로 물러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주변에서는 10년의 공백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실업과 프로는 다르다” “고려증권 때와 선수 구성이 다르지 않느냐”는 등 여러 말이 나오고 있는 걸 진감독은 잘 알고 있다.
진감독이 고려증권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때와 현재 배구계 상황은 많이 다르다. 프로화가 됐고 외국인선수가 뛰고 있다. 외국인선수 스카우트는 한 시즌 성적을 좌우하는 최대 변수다.
“배구와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베테랑 감독다운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진감독은 대한항공의 문제점에 대해 “대한항공만의 색깔과 장점이 없다. 삼성화재, 현대캐피탈 등에 견줘 공격력, 블로킹, 수비력, 조직력 등 단 한 가지도 앞선 게 없다”고 진단했다.
진감독이 꺼낸 해법은 조직력과 스피드다. “힘과 높이가 좋은 팀도 조직력이 뛰어나고 빠른 팀에게는 이길 수 없다. 배구는 개인이 아닌 팀 경쟁이다.”
고려증권을 12년 동안 이끌면서 수많은 우승을 이룬 진감독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대한항공의 팀 컬러로 나타날 전망이다.
공교롭게도 두 팀의 유니폼 색상이 비슷하다. 고려증권 유니폼은 하얀색, 빨간색, 파란색으로 구성됐다. 대한항공은 전체적으로 하얀색이 주를 이루고 빨간색과 파란색이 들어 있다.
선수단 전용 숙소와 체육관을 마련하지 못해 이곳저곳 돌아다닌 것도 비슷하다. 대한항공은 그동안 인천에 있는 한 아파트를 선수단 숙소로 썼다. 훈련은 인하대체육관에서 했다.
고려증권은 1991년 선수단 숙소와 전용체육관을 마련하기 전까지 떠돌이 신세였다. 진감독은 “예전 고려증권 선수단 숙소와 체육관이 이 근처에 있었다. 신갈과 이래저래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진감독은 전력 강화 문제와 관련해 “외국인선수는 레프트 쪽으로 알아보고 있다. 라이트에는 김학민(25,193cm) 등 선수가 많은 편이다. 그리고 세터를 집중적으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진감독은 “고려증권 시절 이수동 같은 선수가 대한항공에도 있어야 한다”면서 “대한항공은 선수 구성으로 볼 때 이끌어 볼 만 한 팀”이라고 말했다.
전 고려증권 레프트 이수동1993년부터 1997년 4월까지 고려증권에서 레프트로 뛴 이수동(38)이 정든 유니폼을 벗은 곳은 고려증권이 아닌 LG화재였다.
그는 프로배구 출범을 앞둔 2004년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LG화재는 이수동에게 은퇴식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고려증권 유니폼을 입고 은퇴식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이뤄질 수 없었다.
이수동은 홍익대 졸업을 앞둔 1993년 겨울 고려증권에 입단했다. 유망주가 아니라 자리를 잡기가 어려웠다.
이수동이 팀에 합류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소 앞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신인 선수들이 하게 마련인데 유독 이수동만 빗자루를 잡았다.
주무는 신인 선수들 가운데 만만한 이수동에게 일을 하게 했다. 이수동은 “지명도가 있는 다른 신인 선수들에게는 지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이제는 지난 일을 생각하면서 편하게 얘기하지만 그때는 속이 쓰렸다. 눈을 쓸면서 가슴 속에서 투지와 오기가 생겼다.
대구 수성초등학교와 경북사대부중고를 나온 이수동은 몸은 배구부에 있었지만 마음은 엉뚱한 데에 가 있었다.
이수동은 “그 시절 배구보다는 당구를 더 열심히 쳤다”고 했다. 일년에 두 번 가는 소풍 말고도 여러 차례 ‘소풍’을 갔다. 여기서 소풍은 합숙소에서 도망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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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동은 고려증권이 해체된 1998년 상무 소속으로 뛰었다.(사진 김동하) |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몇 번씩 마음을 먹었지만 할 수 있는 건 배구 뿐이라는 생각에 배구부에 남았다.
홍익대에는 동기에 얹혀서 들어갔다. 홍익대 관계자의 눈에 띈 선수는 이수동이 아닌 권대진(한국배구연맹 심판)이었다.
홍익대에 진학한 뒤 이수동은 선수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운동을 했다. 그러나 고려증권 외에 다른 실업팀들은 이수동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학 4학년 때 고려증권과 연습경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수동은 몸을 날리며 공을 건져 올렸고 큰 소리로 동료들을 독려했다. 공격 기회가 오면 과감하게 스파이크를 때렸다.
그런 이수동을 고려증권 진준택 감독이 지켜보고 있었다. 큰 키는 아니었지만 다른 선수들보다 팔이 길어 공을 걷어 올리는 데 유리하고 코트 안팎에서 동료 선수들을 독려하는 이수동이 눈에 들어왔다.
이수동은 “운이 좋았다. 나중에 감독님이 농담 삼아 ‘조용하게 뛰었으면 너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화려한 조명팀 분위기를 한창 익히고 있던 이수동은 1994년 연습 도중 오른손을 크게 다쳤다. 의욕이 앞선 결과였다. 당시 이수동의 주치의는 배구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다. 완쾌돼도 장애가 있을 수 있다는 진단이었다.
꼬박 6개월 동안 재활치료와 운동에 매달린 끝에 코트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경기를 하기에는 무리였다.
이수동의 부상으로 왼쪽 공격이 무뎌진 고려증권은 1995년 슈퍼리그 2차 대회에서 라이트 문병택마저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양 날개가 꺾였다.
결국 고려증권은 3차 대회에서 한국전력에게 발목을 잡혀 4강이 겨루는 4차 대회에 못 나갔다.
다음해 슈퍼리그 출전을 앞두고 고려증권은 결승 진출은 고사하고 예선 탈락까지 점쳐졌다.
1996년 슈퍼리그 개막전에서 고려증권은 현대자동차서비스와 맞붙었다. 이수동과 문병택이 부상에서 돌아왔지만 고려증권은 현대자동차서비스와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3-1로 이겼다.” 고려증권은 1996년 슈퍼리그에서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달렸다.
한국 남자배구 사상 명승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1996년 슈퍼리그 결승(4차 대회) 시리즈에서 이수동은 펄펄 날았다.
이수동은 결승 4차전 5세트 17-16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스파이크를 현대자동차서비스 코트에 내리꽂았다.
이수동은 코트 바닥에 몸을 날리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배구를 시작한 뒤 우승을 처음 해봤다. 그 시즌만큼 배구를 즐겁게 한 적이 없었다.”
남은 자의 슬픔고려증권은 2년 연속 슈퍼리그 우승을 노렸지만 힘이 부쳤다. 1997년 슈퍼리그에서 고려증권은 3위에 그쳤다.
그해 4월 이수동은 상무(국군체육부대) 유니폼을 입었다. 그런데 전역 후 당연히 다시 입을 줄 알았던 고려증권 유니폼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수동은 일병으로 진급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증권 관련 소식을 들었다. IMF 외환 위기로 부도를 맞았다는 것이다.
“돌아갈 팀이 없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이수동은 고려증권의 마지막 순간을 동료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상무에서 전역한 이수동은 한국전력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런데 어색한 게 많았다. ‘고려증권 선수로 뛰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1년 만에 팀을 다시 옮겼다. 대학 시절 가고 싶었던 LG화재였다.
“나이 서른이 된 선수를 불러 준 LG화재가 고마울 뿐이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던 이수동의 입가에 쓴웃음이 비쳤다.
이수동은 “고려증권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삼성화재와 좋은 승부를 할 수 있었을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많은 배구 관계자가 고려증권과 가장 색깔이 비슷한 팀으로 삼성화재를 꼽는다.
그러나 이수동은 “팀 창단과 전력 보강 과정을 비교하면 고려증권과 삼성화재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다윗’ 고려증권과 ‘골리앗’ 삼성화재라는 것이다.
2004년 코트를 떠난 이수동은 지도자 수업을 받지 않았다. 이수동은 그 이유에 대해 “나는 지도자가 될 그릇이 아니다. 지도자는 아무나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2005년 11월 일식집을 열었지만 지난달 정리했다. “평소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일식에.” 영업 부진 때문에 문을 닫은 건 아니라고 했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이제 곧 마흔이 된다. 내 인생에서 첫 번째 전환점이 고려증권에서 뛰었던 때라면 두 번째는 이제부터다.” 이수동은 스포츠 관련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배구와 인연을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세 차례 열린 고려증권 올드스타전에서 선, 후배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고려증권을 기억하는 팬들이 환호성을 보냈고 취재진도 관심을 보였지만 사라진 팀에 대한 아쉬움은 지울 수 없었다.
올드스타전 때 선배 선수들은 이수동에게 은퇴식을 치러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수동은 “나와 내 동기들이 주인공인 자리가 아니다”며 사양했다.
“가끔씩 팀이 재창단되는 상상을 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선, 후배들과 함께 정식으로 은퇴식을 치르고 싶다”
SPORTS2.0 제 112호(발행일 7월 14일) 기사
분당•용인=류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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