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 터
김인현 교수(고려대 법대)
경북 영덕 축산항출신, 영해중 23회, 영해고 20회졸업
captainihkim@korea.ac.kr 수필집 “바다와 나(범우사, 2017년)
이름부터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식구들만 알고 부르는 단어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북 영덕군 축산항 죽도산의 아래에 있는 300평 정도의 물기가 남아있던 땅을 말한다. 지금은 더 이상 웅덩이가 아니기 때문에 “웅덩이”의 형체를 알 수 없다.
어느 때부터인가 웅덩이 터라는 것이 나의 인식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연을 날리거나 배추 뿌리를 캐 먹으려면 이리로 가야했다. 택용이집의 마당을 지나야했다. 남의 마당을 지나니 출입구가 없었다. 높은 흙이 있는 부분이 있고 낮은 부분도 있었다. 낮은 부분은 물기가 있는 땅이었다. 조심해서 이 위로 우리는 올라가야했다. 그 위에는 배추뿌리가 남아있었는데 이를 캐 먹으면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물기가 있는 부분에 얼음이 얼면 학동들은 그 얼음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놀았다.
아버지는 어느 겨울날 우리 형제를 불러서 연탄재를 모으러 가자고하셨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모은 연탄재를 리어커에 담아서 웅덩이 터의 얕은 곳에 부어 넣었다. 몇 년을 거쳐서 이런 일을 했다. 아버지는 사람을 시켜서 흙을 사와서 연탄위에 덮었다. 이렇게 하니 이제 웅덩이 터는 주변의 땅과 같이 평평해졌고, 웅덩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제대로 된 한 필지의 땅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 땅을 충분히 활용하고자 했다. 여기에 각종 야채를 심어서 식구들 반찬으로 쓰고, 남으면 장에 가져다 파시기도 했다. 상추를 기르셨는데, 상추수확이 좋아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었다. 가지도 심었던 야채의 하나였다. 한번은 배추도 심었는데, 우리 배추는 김장배추처럼 포기가 지지 않고 옆으로 퍼지는 배추가 되어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웅덩이 터에서 산출이 가장 성공적으로 된 채소는 애호박이었다. 아버지는 애호박 씨 20개 정도를 심어셨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니 새싹이 돋아나고 성장했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오면 이 놈이 커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조금 지나니까 길쭉하게 생긴 호박이 줄기 마디 마디사이에 열리기 시작했다. 조금 커지자 몇 개씩 따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따고 난 다음에도 계속하여 호박이 열리는 것이었다. 하나의 호박줄기에서도 10여개의 호박은 따낸 것 같다. 이를 가져다가 어머니가 호박장을 끓여주시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된장국을 만들 때 애호박을 찾는다. 이 애호박은 대궁에 바로 호박이 열리는 것이 일반 호박과 다른 점이다.
조부님은 우리가 살던 집, 웅덩이 터 그리고 항구입구에 또 필지를 가지고 계셨다. 포항조선소에 신조를 건조하던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 빚을 지고 말았다. 몇 년동안 법원에서 노란 딱지가 날아들었지만, 조부님은 애써 외면하셨다. 급기야 채권자들은 강제집행에 들어왔고, 집의 가재도구와 이 3필지가 모두 경매의 대상이 되었다.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서 대책을 논의했지만, 방법은 없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이 많은 식구 집도 절도 없이 어디가서 살거냐”고 걱정이 태산같았다. 아버지는 자존심을 죽이고 상경하여 고모부와 고모에게 부탁을 하기로 했다. 결국 고모가 채무를 변제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서 웅덩이땅의 실제소유자는 고모가 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고모님은 항구앞의 한 필지만 자신의 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두었다. 집안이 오갈 때 없는 방랑자 신세가 되었을 것인데, 그나마 웅덩이 터가 있어서 최악의 상태를 면하게 해주었다. 완전한 필지로 대접을 받지 못하던 웅덩이 터가 큰 효자노릇을 한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내가 배를 타면서 제법 수입이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나를 부르더니 웅덩이 터에 출입구를 내어야겠다고 하면서 마침 주인이 판다고 하니 사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100만원을 주고 몇 평을 샀다. 그래서 이제는 웅덩이 터가 출입구까지 갖추어, 더 이상 택용이 집 마당을 지나갈 필요는 없게 되었다. 이제는 어엿한 한 필지가 된 것이었다.
경락이 된 다음 명의는 조부님에게서 장손인 형이름으로 넘어왔다. 그 후 아버지는 내가 배를 타면서 모은 돈으로 집안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하시며, 웅덩이 터를 나의 명의로 하라고 하셨다.
내가 결혼을 하면서 대전에 집을 장만하기 위하여 웅덩이터를 매각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많이 섭섭해하셨다. “아가야, 내가 심심하면 나가서 일하던 터인데... 없어지면 어떻하노”.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마지막 남은 집안의 재산인데, 판다고 하니 어머님은 많이 섭섭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매각한 돈은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의 아파트의 종자돈이 되었다. 후대의 자손들의 삶에 기초가 되는 집장만에 쓰인 것이니 본래의 웅덩이 터가 가지던 효용보다 큰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고향을 방문하여 그 쪽을 지날 때에는 옛날 생각에 잠기곤 한다. 무엇보다 추운 겨울날 아버지,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 둘 까지 모두 나와 연탄재를 모으던 일, 어머니가 들락 날락하시면서 수확의 기쁨을 누리던 곳, 시장에서 야채를 팔아서 얼마 돈을 가지고 돌아오실 때 밝은 표정, 길을 내기 위하여 몇 년을 궁리하시던 아버지의 진지한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비록 웅덩이터는 더 이상 우리 집의 소유가 아니다. 그렇지만, 웅덩이 터는 물건으로서 소유자인 우리 집안에 아주 아주 큰 기여를 하고 우리 손을 떠나갔다. 가족 간의 아름다운 추억을 나와 우리 남매들에게 깊이 남겨준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기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