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대립
원제 : Odds Against Tomorrow
1959년 미국영화
감독 : 로버트 와이즈
제작 : 해리 벨라폰테, 로버트 와이즈
출연 : 해리 벨라폰테, 로버트 라이언, 셜리 윈터스
에드 베글리, 글로리아 그레이엄, 킴 해밀턴
윌 쿨루바
제목이 '흑백의 대립' 이라면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깊이있는 드라마를 연상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곤경에 처한 두 남자가 은행털이를 모의하는 내용입니다. 개봉작 중 제목이 어긋난 작품 중 하나죠. 원제도 좀 마땅찮아요. Odds Against Tomorrow 는 내일에 대항하는 확률게임 뭐 그런 직역인데 불리한 확률의 게임을 한다는 뭐 그런 뜻으로 영화 후반쯤에 은행털이를 하느냐 마느냐의 논쟁 때 유사하게 등장하는 대사 입니다. 간결히 해석하면 '내일은 없다' 정도지요.
'사운드 오브 뮤직'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명작 로버트 와이즈의 연출입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로버트 와이즈가 그 두 편의 영화로 유명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훨씬 전부터 많이 알려진 감독입니다. 두 감독상 수상작은 비교적 후기작이에요. 그렇다고 '상처뿐인 영광'으로 확 알려진 것도 아니고 이미 1945년 발 루튼 제작 공포물 중 최고작으로 꼽히는 '신체 강탈자'를 연출했고, 1949년 소품 필름 느와르이자 복싱 영화 중 열 손가락에 드는 수작 '셋 업'을 완성했습니다. '지구가 멈추는 날(51)'은 초기 SF의 수작으로 알려져있죠. 1956년 '트로이의 헬렌' 같은 야심작의 연출이 맡겨질 정도였습니다. (결과는 처참한 실패, 하지만 동년 '상처뿐인 영광'이 떠서 만회했죠)' 1958년 걸작 잠수함 영화 '전우여 다시 한 번' '그리고 수잔 헤이워드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긴 '나는 살고 싶다' 같은 사회물 등 기복이 좀 있을 뿐 꾸준히 수작을 만들어내는 감독이었습니다. 60년대 두 번의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은 오히려 때늦은 수상이었지요.
그런 로버트 와이즈 작품이고 그가 물이 오른 1959년에 만들었고, 은근히 걸작 잘 골라내는 로버트 라이언 주연이고 흑백 어쩌구.... 하는 제목에서 사회물 느낌도 나고 그러니 기대가 제법 된 영화지요.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나 봐요.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보다는 대단치 않았습니다. 똑같은 은행털이 모의 영화라고 해도 1955년 리처드 플라이셔의 '전율의 토요일' 의 다소 하위 버전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이것저것 이야기를 많이 벌린 그 영화보다는 딱 두 남자의 곤경으로 압축한 점은 간결하고 좋긴 했죠.
경찰 출신의 버크 라는 노인이 은행털이를 공모할 사람을 물색합니다. 그를 방문한 두 명은 자니 잉그램(해리 벨라폰테) 이라는 흑인 싱어와 얼 슬레이터(로버트 라이언) 라는 중년 백수 입니다. 은행털이 같은 위험한 범죄를 기꺼이 하려면 상당한 곤경에 빠져야 하고 나름 튼튼하고 용감해야 합니다. 자니와 슬레이터 두 사람 모두 상황이 매우 안 좋습니다.
슬레이터는 우발적 폭력과 과실치사로 두 번의 전과가 있는 늙수그레한 백수입니다 그는 착한 여자 로리(셜리 윈터스)를 만나 함께 살고 있는데 노리가 일을 하면서 슬레이터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존심도 상하고 늙어가는 나이는 영영 일 다운 일을 못할까 싶은 불안감에 시달리게 합니다. 로리는 괜찮다고 하지만 슬레이터는 하우스키퍼 역할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가 늘 불안합니다.
자니의 상황은 더 안 좋습니다. 그는 흑인이고 아내와는 이혼했고 이혼한 아내가 초등생 딸을 키우고 있습니다. 음악과 노래에 소질이 있어서 밤무대에서 활동하지만 경마를 좋아해서 빚을 지게 되었고 건달 고리대금업자 바코에게 수천 달러의 빚을 지고 협박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서부시대도 아닌 20세기에 은행털이 범죄를 저지르는 건 어지간한 악당이 아니라면 쉽지 않은 일, 슬레이터와 자니는 처음에는 버크의 제안을 무시하지만 점점 상황이 안 좋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그와 손을 잡게 됩니다. 특히 자니는 바코가 자니의 전처와 딸을 들먹이며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되지요. 슬레이터는 흑인 혐오주의자인데 파트너가 흑인이라는 걸 알고 처음에 거절했다가 결국 궁지에 몰려 승낙하게 됩니다. 이렇게 밑바닥까지 추락한 곤란한 상황의 두 남자가 버크 라는 늙은 여우 같은 남자의 계획에 의하여 은행털이를 시도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안타까운 범죄물이죠.
안타깝다는 표현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스티브 맥퀸의 '겟어웨이' 이전의 미국 영화는 좀체로 범죄가 성공하고 끝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전략대작전' 같은 군대 코미디 같은 경우가 예외적이었죠. 결국 주인공의 실패가 뻔히 예견되는 영화지요. 그리고 아무튼 위험한 범죄가 벌어지면 부득이 다치거나 큰 피해가 생기기 마련이지요. 더구나 영화의 초충반부는 아무 잘못이 없는 자니와 슬레이터의 가족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죠.
내용을 보면 '위기의 두 남자'가 어울리지만 '흑백의 대립'이란 제목은 정말 영 아닙니다. 물론 엔딩 부분을 보면 다소 상통하는 내용이 나오긴 합니다. 만약 슬레이터가 흑인을 경멸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어쨌든 훨씬 수월하게 일이 풀렸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종문제를 다룬 사회적 주제가 그리 깊게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시드니 포이티어 외에는 흑인 유명 배우가 없던 시절이었고 로버트 라이언 급의 배우가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타이틀 1순위는 해리 베라폰테 입니다. 해리 벨라폰테는 배우 보다는 가수로 유명했는데 '카르메 존스' 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나오고 기세가 좋던 시절이라 로버트 라이언보다 크레딧에서 상위를 점했습니다. 시드니 포이티어와는 달리 영화에 그다지 많이 출연하진 않았습니다.
로버트 라이언은 주연, 조연 가리지 않고 출연하는 장신 배우지만 수작을 잘 골라내는 능력은 출중합니다. 워낙 좋은 영화에 많이 출연했죠. '십자포화' '폭력행위' '셋업' '어둠속에서' '무법지대' '자랑스런 사나이' '낙동강전투 최후의 고지전' '왕중왕' '사상 최대의 작전' '발지 대전투' '특공 대작전' 등등 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다작으로 주 조연 가리지 않았습니다.
위기의 두 남자에 대한 내용이지만 다소 불필요하게 비중있는 조연 전문 두 여배우가 출연하여 그들의 비중이 늘어나는데 오히려 영화의 진행에는 좀 방해되는 느낌입니다. 셜리 윈터스는 로버트 라이언을 먹여살리는 착한 연인인데 이 배우의 출연 분량을 늘려주기 위해서 짧게 처리해도 되는 장면은 불필요하게 길게 늘리는 느낌입니다. 다소 반복되는 똑같은 말싸움 같은. 글로리아 그레이엄은 옆집의 약간 밝히는 여자로 나오는데 없어도 지장없는 캐릭터지요. 나름 연기 잘하는 두 여배우를 낭비한 느낌입니다. 아무나 출연해도 되는 역할인데.
씁쓰레한 범죄 스릴러이고 벼랑끝에 내몰려서 결국 저지르지 말아야 할 범죄에 빠지는 두 주인공도 안타깝지만 그들과 연류된 주변 인물들이 더 측은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안된다는 교훈이 남는 영화인데 '흑백문제'에 대한 주제는 아주 엷어서 확실히 제목은 미스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로버트 와이즈의 범죄 스릴러 중에서만 꼽아도 '셋업' '전신 언덕의 집' 보다 뛰어나진 않았습니다. 물론 기본 이상은 보여주는 영화지만 크게 기대할 필요는 없는, 딱 감독의 이름값 정도 하는 영화입니다.
ps1 : 아무리 바닥까지 내려가는 어려움이 있어도 나쁜 길에 빠져서는 절대 안되지요. 주변에 나이도 많은 노인이 되어 바닥까지 내려간 분이 있었는데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다 보니 불과 몇 년 만에 완전 인생 역전을 했습니다. 이런 분을 두 분 정도 아는데 세상에 늦은 시기란 없고 언제든 치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ps2 : 로버트 라이언과 셜리 윈터스의 대사가 인상깊게 기억납니다.
"이러다 노인이 되면 어떡하지?"
"당신은 지금 이미 노인이야"
ps3 : 셜리 윈터스의 간절한 대사 때문에 더 안타까운 영화입니다. 은행털이를 계획중인 로버트 라이언에게 제발 당신만 떠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우릴 방해할 수 없다며 날 떠나지만 말라고 애원하는 장면. 물론 어떻게 보면 나이든 민폐 남자가 없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만...
ps4 : 해리 벨라폰테는 95살의 나이로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출처] 흑백의 대립 (Odds Against Tomorrow, 59년) 벼랑 끝에 몰린 두 남자|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