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지금도 멜로, 지진희
취재 : 이근하 기자 | 사진(제공) : 이끌엔터테인먼트
예상 밖이다. 특유의 눈빛을 하고 느리게 대화를 이어나갈 것만 같은 ‘멜로 장인’ 지진희는 없다. <언더커버> 종영 인터뷰로 만난 그는 의외의 입담꾼이었다. 배우이기 전 50대 중년 지진희의 일상과 생각들.
작품 종영을 맞아 진행하는 배우 인터뷰는 일종의 공식이 적용된다. 극을 마친 소감이라든지 배역에 대한 해석이라든지 연기하며 느낀 아쉬움이라든지, 통상적인 질의로 시작된다. 지진희는 이 틀을 뒤집었다. 유쾌한 자문자답으로 대화의 문을 열어주었다.
지진희는 <언더커버>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남자 이석규로 분했다.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하는 캐릭터다. 상대역 김현주와는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 <애인 있어요>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이다.
“자, 현주 씨랑 호흡은 어땠냐고요?(웃음) 쉽지 않은 만남이죠. 두 번 만나기도 어려운데 세 번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선 어려워요. 다신 쟤는 안 만나겠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이번에 멜로가 강한 작품이었다면 안 만났을 거예요. <애인 있어요>가 워낙 많은 사랑을 받아서 그 연장선 느낌이 들거나 비교될 수 있거든요. 네 번째 만남은 더 쉽지 않을 것 같긴 한데 또 만나게 되면 시트콤은 어떨지.(웃음) 그것도 10년 후쯤. 이미지가 구축돼버리면 서로한테 마이너스일 것 같아서요.”
기대보다 비중이 적었던 액션 신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번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없었느냐고요? 액션이 더 많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제일 좋아하는 게 봉고차 액션 신인데 그걸 찍으면서 여기 손을 다쳤어요. 엄지는 휘어 있고 새끼손가락은 약지와 붙질 않아요. 다른 작품을 찍는 중이라 물리치료 받을 시간이 없네요. 근데 뭐, 사는 데 별로 불편한 건 없어요. 비 오면 좀 쑤시는 것 말곤.”(웃음)
초면인 인터뷰어와 인터뷰의 어색함을 덜기엔 충분한 자문자답이었다.
작품을 마치면 꼭 인터뷰에 응하시더라고요. 똑같은 질문도 많을 거고, 답변을 되풀이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닐 텐데요. 기자 분들을 생각했어요. 얼굴 보고 말하는 거랑 문서로 써서 전달하는 거랑 뉘앙스가 다른 거니까. 코로나 때문에 이렇게 마스크를 쓰고 칸막이를 둔 채 인터뷰 중이지만, 만나서 할 수 있는 거면 해야죠.
<언더커버>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은 아니잖아요. 작품이 흥행하지 않으면 배우들이 대면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던데. 마무리 짓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시청률은 3~5%였지만 우리 드라마를 시청해준 분들께 이렇게 마무리해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이 인터뷰를 얼마나 보시겠어요.(웃음) 그래도 시청자 입장에선 ‘잘 마무리했구나. 얘는 뭐하고 있구나’ 생각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보답의 의미라는 거죠? 그렇죠. 금요일, 토요일 밤 11시 드라마를 봐주셨단 자체로 감사해요. 방영 시간 확정되고서 ‘망했다’ 했어요. 어떻게 다 챙겨볼 수 있겠어요. 내 가족들한테도 그냥 자라고 했는데.(웃음)
작품 이야기를 더 해볼게요. 시놉시스에서 ‘이석규’ 캐릭터를 처음 접했을 때 느낌은요? 흥미로웠어요. 근데 한 가지 이해 안 되는 게 어떻게 하나뿐인 아빠를 버리고 살 수 있을까. 국가를 위해 첩보활동을 했다고 쳐도 왜, 대체 왜? 감독님께 계속 말씀드렸어요. 말이 안 된다고. 그러면서 저도 계속 생각한 거죠. 이 캐릭터가 왜 그런 인생을 살았는지. 결론은 연수(극 중 아내)를 무지하게 사랑한 거예요.
공감이 안 되는 연기를 할 땐 괴리감이 들겠어요. 제가 그 정도로 심도 있는 연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고요.(웃음) 저는 표현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잖아요. 뭘 표현해야 하는지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건 확실히 차이가 있어요. 예전에는 감독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요즘은 아니에요. 같이 얘기하고 이해하면서 연기해요.
# 50대 멜로
지진희는 리메이크작과 멜로물을 유난히 맡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장르들이 지진희를 필요로 한다. 그는 배우를 “선택받는 입장”이라고 했다. 그러니 선택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언더커버>까지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어요. 대표작을 꼽아보면요? 대표작이라기보다는 터닝 포인트였죠. 30대에는 <대장금>, 40대에는 <애인 있어요>. 50대가 끝나려면 9년 남았으니까 그 안에 뭐 하나 생길 것 같아요. 아, 지금은 <언더커버>.(웃음)
‘지진희’ 하면 ‘꽃중년’, ‘중년멜로’ 같은 키워드가 당연하듯 붙어요. 본인도 당연하게 생각하나요? 아뇨, 끊임없이 노력하죠. 멜로를 계속 찍으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더 찍고 싶어요. 그 나이대 사랑을 이야기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미스티>, <부부의 세계>처럼 더 다양한 사람들을 충족시켜야 하는 작품이 필요해요. 그 안에 5060의 사랑 이야기도 있어야 하는 거고요.
중년의 사랑에 대한 니즈가 왜 늘어난 걸까요? 지금 제 나이 또래분들이 20대였던 때가 드라마를 가장 많이 보던 시절인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세대는 짤이나 유튜브를 보지, 드라마는 잘 안 보잖아요. 드라마 애청자 세대가 중년이 됐으니 그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드라마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청자 입장에선 멜로 연기하는 배우의 외형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도 노력 중인가요? 외모에 정답은 없어요. 시청자가 원하는 지점이 있을 거고 제작사, 방송사가 바라는 부분도 있을 거니까. 어쨌든 배우로서 그 나이에도 사랑의 감정이 생기게 하는 비주얼은 갖춰야 할 것 같아요. 그걸 충족시키기 위해 준비하는 거고요. 살찌는 건 쉬워요, 빼는 게 어렵지. 그러니까 일단 빼둬야죠.
멜로물을 연기하는 진희 씨를 본 주변 반응은요? 그런 얘기는 안 해주더라고요. 와이프는 해주긴 하는데 좋은 얘기는 안 해요. 뭐라고 했더라? 제대로 좀 하래요. 어떻게 연기가 늘질 않는다고.(웃음) 동료 배우 중에선 이종혁이 “아놔, 형은 멜로도 하고 좋겠다”고 하길래, “이 xx야, 그럼 너도 술 좀 끊고 관리해”라고 해줬어요.
개인적으로 짐작했던 진희 씨 이미지랑 실제가 달라요.굉장히 솔직하네요. 아까 언급했던 시트콤 장르도 되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이제까지 제의가 없었던가 봐요? 맞아요. 저 완전 솔직해요. 시트콤 섭외가 없었던 건 저도 미스터리라고 생각해요. 이미지? 그런 건 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웃음)
연기한 지 올해로 23년째에요. 그 시간에 연기력의 변화를 말한다면요? 당연히 달라졌고 나아졌죠. 바닥이었으니 나아질 수밖에요. 연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왜냐? 그만큼 경험이 많아지니까요. 연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는 거니까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도움이 되죠. 근데 고정관념을 갖고 연기를 보면 안 돼요. 우리가 흔히 “누가 연기를 잘한다”고 말하잖아요. 되게 위험한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은 연기를 못하는 게 되는 거예요. 작품이라는 큰 틀을 봐야죠. 틀 안에서 연기의 밸런스가 맞아야 해요. 조화를 따질 것이냐, 내가 돋보일 것이냐. 어리석은 애들은 자기만 돋보이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오래 못 가더라고요. 다른 사람 죽이는 건 결국 날 죽이는 것과 같거든요. 상대가 잘돼야 나도 돋보일 수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저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옆 사람이 부족해 보인다” 이런 건가요? 딱 그런 거라고 할 순 없어요. 많은 분들이 작품을 보시면서 연기 지적을 하세요. 그럴 수 있죠. 근데 제작진이 그 배우를 선택했을 땐 이유가 있거든요. 뭐든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선입견이 있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어요.
자신은편견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편견) 있죠. 있는데 편견을 되도록 갖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필모그래피를 보니 매년 한 작품은 하는 것 같아요. 주기적으로 누군가 저를 선택해주는 거죠. 너무 감사한 일이에요. 어떤 애는 저더러 “정말 좋겠다. 형은 어떻게 그 나이에 김현주랑 박한별 사이에서 멜로를 할 수 있어. 나는 이미지가 이래서 안 돼”라고 해요.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어요. 그것도 편견 아닐까요.
가진 자의 여유 같은데요? 성격이에요.(웃음) 내 이미지가 이래서 안 된다고요? 이미지를 바꾸면 되잖아요. 그게 얼마나 걸리든. 가령 다이어트요. 인터넷에 나오는 팁 아무거나 6개월만 해보세요. 무조건 살이 빠져요. 너무 힘들긴 해요. 생활 패턴을 바꿔야 하는 거고. 그래도 누군가는 해냈단 말이죠. 가능한 일이라는 거예요.
# 세월의 흔적
촬영 스케줄이 있는 날을 제외하곤 매일 운동한다. 힘주고 걷는다거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는다거나, 어떤 형태로든 운동은 빼먹지 않는다. 취침 시간은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 컨디션을 최고로 유지해야 연기 활동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살아온 만큼 나이 듦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골프 실력이 굉장하다면서요. 골프 예능 출연 계획은 없나요? 저 골프 엄청 잘하죠.(웃음) 임진한 프로님 유튜브 채널에 나갔었고. 또 하나 나갈 게 있는데 촬영 중인 드라마 때문에 9월은 돼야 하지 않을까 해요. 유튜브를 안 하면 안 되는 시대가 됐어요. 제 채널도 만들 생각이에요. 쉬지 않고 업로드할 수 있는 콘텐츠로 뭐가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
TV와 유튜브의 경계가 희미해지긴 했다지만, 배우가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는 게 소위 ‘급’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할 줄 알았어요. 어떤 배우들은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촌스러운 거죠. 급을 나눈다는 자체가.
올 초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나이 드는 게 좋다”고 한 장면을 봤어요. 정확히 어떤 점이 좋은가요? 일단 서른한 살이 될 때도 기분이 좋았어요. 아주 어릴 땐 스무 살이 되면 성인이니까 뭔가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아니더라고요. 집도 없고 경제권도 없고. 서른이 되면 또 뭐든 될 것 같았는데 그때도 아니에요. 하, 이게 뭐지. 누구는 되는데 난 안 되는 건가. 1971년생 제 나이가 늘 격변의 현장에 있던 시대에요. 교복이 있다가 없어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던 시기. 그런 걸 다 겪고 살았더니 연륜이 늘어요. 나이가 들어서 좋다는 건 그런 거예요.
세월과 함께 여유가 생긴 거네요. 여기서 저기까지 걸으면 5분이 걸려요. 그럼 저는 뛰어서 3분 만에 가요. 나머지 2분은 제 것이 되는 거니까. 그런 게 재밌어요. 예전에 자주 가던 커피숍 아주머니가 “너는 잘될 줄 알았다. 누가 후다닥 후다닥 다니기에 보니까 너였다. 네가 한 번도 걷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하셨어요. 물론 그땐 체력이 좋았어요.(웃음) 내가 처한 상황에서 돈, 시간을 최대한 아끼면서 살았어요. 그러니까 50대의 내가 너무 기대되는 거예요. 아낀 시간만큼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또 다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잖아요. 골프에 빗대볼게요. 열 살까지는 골프를 무작정 쳐요. 10대부터 30대까지는 골프가 마음대로 안 되고, 40대가 되면 내가 원하는 게 조금 돼요. 50대가 되면 자유자재로 칠 수 있어요.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나쁜 점을 생각하면 끝도 없이 많겠죠. 근데 굳이 왜 그런 걸 생각하면서 살아요. 내가 온 힘을 다해 산다는 게 중요하지.
얼핏 인생 강의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요. 마지막으로 차기작 계획이 있나요? <더 로드: 1의 비극>에서 저널리스트 역을 맡았어요. 국민앵커인데 과거가 약간 구려요. 과거로 인해 큰 사건에 연루돼요. 속았어요.(웃음) 국민앵커라고 해서 앉아서 뉴스 진행하는 것만 할 줄 알았더니 맨날 뛰어다니고. 옷도 머리세팅도 <언더커버>랑은 확 다른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출처 : https://woman.chosun.com/mobile/news/view.asp?cate=C01&mcate=M1002&nNewsNumb=202106777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