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輓詞) [ 계동 전경창 선생을 애도하며 ]
전적(典籍) 전방경(全方慶)
天挺斯人作國楨
淸姿勁節稱先聲
哀聞鶴禁悲亡鑑
影斷鵷班但記名
傳業中郎雖可倚
無兒伯道亦傷情
送君旅櫬歸鄕國
風雪江皐涕自橫
하늘이 이 사람을 낸 것은 나라의 상서로움 일으키려는 뜻
맑은 자태 굳센 절개는 앞서 인도하는 소리에 알맞았네
슬프게도 소식 들으니 태자궁에선 거울을 잃었음을 슬퍼하고
그림자가 조정의 반열에서 끊어지니 다만 이름만 기억하네
사업을 전함에 중랑장(中郎將)은 비록 기댈 곳이 있으나
아이 없는 등백도(鄧伯道)는 마음 슬퍼하도다.
고향 선산을 향하는 그대의 널을 전송(傳送)하노라니
눈바람이 강 언덕에 부는 데 눈물이 저절로 흐르네
● 중랑장은 딸이 돌아옴에:
후한 말 좌중랑장 채옹의 딸 채염이 흉노의 포로가 되어 12년 동안 그곳에서 살다가 조조의 힘으로 돌아온 뒤 비분강개의 심정을 읊으며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었다. 악부시집 금곡가사 호가십팔박〈樂府詩集 琴曲歌辭 胡笳十八拍〉
● 등백도(鄧伯道)는 아이가 없으니:
등백도는 진나라의 등유(鄧攸)이며 백도는 자이다. 등유가 석륵(石勒)의 난에 어린 아들과 죽은 아우의 소생인 어린 조카를 데리고 피난하였다. 그는 도중에 두 아이를 다 온전히 데려가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마침내 자기 아들을 버리고 조카만 보호하여 데려갔는데, 후에 그는 끝내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슬퍼하여 “ 천도가 무지하여 등백도로 하여금 자식이 없게 했다” 하였다. 진서 권90 등유열전 〈晉書 卷90 鄧攸列傳〉
[출처] 국역 계동선생문집 [國譯 溪東先生文集]
● 전경창 [ 全慶昌 ]
개설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계하(季賀), 호는 계동(溪東). 판서 전백영(全伯英)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전순(全珣)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관직은 검열·정언에 이르렀다.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한때 가야산에서 학문 연마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중대함을 강조하며, 전담 사신을 파견하여 해결할 것을 상소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계동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경창 [全慶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방경(全方慶)
선조 7권, 6년(1573 계유 / 명 만력(萬曆) 1년) 3월 7일(정해) 2번째기사
문과 복시 합격자 명단
문과 복시(文科覆試)의 방(榜)이 났는데, 1등 세 사람은 조정추(趙廷樞)·이홍인(李弘仁)·강선경(姜先慶)이고, 2등 이하는 김한(金僴)·이기(李璣)·한인(韓戭)·송숙(宋璹)·한극해(韓克諧)·변이중(邊以中)·이등림(李鄧林)·유덕개(劉德蓋)·김복경(金復慶)·이덕수(李德秀)·전경창(全慶昌)·신경룡(申景龍)·홍인걸(洪仁傑)·이공(李珙)·문승수(文承洙)·강의호(姜義虎)·권춘란(權春蘭)·성영(成泳)·
전방경(全方慶)·홍세공(洪世恭)·나윤침(羅允忱)·윤승훈(尹承勳)·김제민(金齊閔)·권식(權寔)·이무일(李無逸)·권가행(權可行)·최명순(崔命順)·주덕원(朱德元)·조여강(趙汝剛)·김수(金粹)이었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2장 B면
【영인본】 21책 25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출처] 선조 7권, 6년(1573 계유 / 명 만력(萬曆) 1년) 3월1일-3월29일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