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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 Letter(202) 2018. 5. 30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부부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26:39,42)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안부를 전합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성공적인 생애를 마치신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날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주님께서는 전날 저녁 늦은 시간까지 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아마 무척이나 피곤하셨을텐데도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새벽 오히려 아직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셔서 기도하려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 이 친밀한 교제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 뜻에 굴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바로 굴복에 있습니다. 굴복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한 항복이란 의미입니다. 항복하면 모든 갈등은 끝나게 됩니다. 왜 우리는 때때로 갈등하며 씨름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신의 뜻, 자신의 야망, 자신의 생각을 이루려는 강렬한 욕망 가운데 머물고자 할 때 갈등은 일어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항복하겠습니다’라고 결심하면 모든 갈등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7-9) 최고의 굴복은 순교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결심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씨름하시던 갈등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굴복입니다.(롬12:1-2)
문대헌 형제 가족이 비자 문제로 귀국하였습니다. 모든 국가에서 점점 비자 문제가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형통하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비자 문제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형통하게 인도하여 주시도록 기도하여 주세요.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선명한 소명과 비전(Clarity of Calling & Vision)
들어가는 말
좋은 보석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감별하는 기준에는 Clarity(선명성), Color(색깔), Cutting(다듬어진 모양새), Carot(보석의 용량)이 있다. 우리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부르심에 선명하게 드려져 있는가? 삶과 사역에서 있어서 분명한 색깔을 나타낼 수 있는가? 규모가 있고, 잘 훈련되어진 삶인가? 인격과 성품의 용량(capacity)이 얼마나 포용적인가? 지도자와 일꾼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추구하는 비전과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1. 오직 한 가지 사명(One Mission)
예수님의 생애는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삶의 중심이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대제사장의 기도문의 서론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수님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주 분명한 사명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네비게이토에게 하라고 주신 사명은 무엇인가? 이것을 부르심이라고 한다. 부르심을 따라 행하였을 때 그 이루어지는 결과를 바라보는 것을 비전이라고 한다. 다시 한번 우리의 부르심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Our Calling is to advance the Gospel of Jesus and His Kingdom into the nations through spiritual generations of laborers living and discipling among the lost.
우리의 부르심은 일꾼들의 영적 세대를 통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예수님의 복음과 주님의 나라의 진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하시기를 원하시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여 헌신하였다.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중대한 공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느6:3) 부르심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깊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다른 지체의 부르심이나 비전과 비교해서 우월하거나 못하다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하고 있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부르심, 미션(사명)이 무엇인가? ‘내가 그 자리에 없으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엄청난 손실이 되는 것을 하는 것’이다.
►빌리 그래함은 도슨 트로트맨의 장례식에서, “고인은 ‘나는 이것 저것 무려 40가지 일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늘 ‘나는 이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세 가지의 경우가 있다고 한다.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이며(Do wrong thing)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며(Do nothing)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Do many things)
개구리는 평생동안 3가지 밖에 볼 수 없다고 한다. 먹을 것을 보고, 적을 보고, 그리고 자기의 배우자(partner)를 본다고 한다. 우리도 많은 일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명(부르심)에 집중하여야 한다.
(개인적인 간증-캠퍼스 사역과 전도에서 힘들 때 찾아오는 생각들)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고 설교하는 일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며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데, 캠퍼스의 젊은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며, 그들을 제자로 삼고 일꾼으로 세우는 이 일을 위해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네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주님의 나라에서 엄청난 손해가 날 것이다. 주님, 힘이 들고 어려움이 있어도 제가 하겠습니다고 굴복하곤한다. 이것이 사명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대신할 수 없는 그 일이 바로 우리를 불러주신 소명의 고귀함이다>
◾주님의 제자와 일꾼으로 성장하는 것, 주님의 일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 그와 같은 일꾼들이 지속적으로 세대를 통하여 일어나게 하는 것, 나아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2. 경건한 고집으로(Godly Stubbornness)
고집이란 의미는 좋은 뜻으로 사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 고집쟁이, 고지식하다는 좋지 않는 영향이다. 그러나 고집에도 경건한 고집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고집이다. 경건한 고집을 말한다.(Godly Stubbornness) 고집을 부리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굽히지 않는 자기 신념을 말한다.
느헤미야는 경건한 고집을 가진 하나님의 지도자이었다.
(1)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곁길로 가지 않겠다는 고집을 유지했다.
이것은 외부적인 유혹이나 공격에는 결코 빠지거나 좌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느6:2-6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저희가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보내되 나는 여전히 대답하였더니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게셈이 하나님의 역사를 중지하기 위한 계략을 알고 결코 그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았다. 이유는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그들이 다섯 번이나 유혹하였지만 결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느헤미야의 단순한 대답 속에는 놀라운 고집이 있었다.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중대한 역사를 위해서는 한 눈 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5번이나 No라고 하였다.
경건한 고집에는 단호히 NO라고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2) 경건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동참하지 않겠다는 고집이다.
이것은 내부적인 유혹이나 공격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느6:10-13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깨달은즉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저희가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만약에 느헤미야가 성소로 도망하여 숨게 될 경우에는 다른 백성들도 낙심하여 도망을 갔을 것이고 성벽 건축의 중대한 공사는 중단되었을 것이다. 만일 느헤미야가 성소에 들어갈 경우에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어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됨으로 믿음의 담대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소는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민18:7)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순종하기 위한 경건한 고집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음모와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게 한다.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궤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대적들의 실상은 느헤미야를 해코자 함이었다. 오노 평지의 아무도 없는 들판에 불러내어 그를 죽이기를 꾀하였다. 자기 일에 열심인 자는 자기를 보호한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믿음의 담대함과 용기를 누리게 된다.
우리는 열왕기상 13장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사명에서 돌이켜서 타인의 유혹이나 하나님 이외의 제3자의 음성에 현혹되어 곁길로 향할 때 자기를 해치게 된다. 유다의 무명의 선지자는 우상 숭배 가운데 분향하는 여로보암을 책망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돌아갔다. 그때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로부터 또 다른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 순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음성 이외의 다른 사람의 감언이설이나 위로나 동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굶주리던 순간 같은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의 음성에 유혹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왕상13:9)고 하신 그 음성 그대로 경건한 고집을 유지하였어야 하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유혹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왕상13:26) 그를 유혹하였던 늙은 선지자의 좋지 못한 의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
경건한 고집은 No라고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요셉은 No라고 하는 삶에 있어서는 명수(名手)이었다. 언제까지 No라고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다 이루기까지 결코 사람들의 이야기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만 주파수를 맞추고 그 뜻에 굴복하셨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2:12-13)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에 대해서는 <Saying No> 라고 할 수 있는 고집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본인 스스로 듣고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순종하며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음성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된다. 영적인 삶을 파괴하며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아래의 우화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어느 날 개구리들이 논에 있는 물속에서 놀다가 그 물에 비친 높은 산의 그림자를 보면서 서로 말하기를 우리 저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보자는 흥미 있는 의견이 나오자 대부분의 개구리들은 말도 안 된다고 빈정되며 반대하였고 그 중 10마리가 매우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서로 굳은 결심을 하고 산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하였다. 개구리들이 등산을 하기 위해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동물들이 모여 들었다. 모여서 자기들끼리 웅성대며 여기저기서 하는 소리는 대부분 불가능한 일을 한다고 빈정거리는 말들이었다. ‘아니 저 작은 발로 저 높은 산꼭대기를 어떻게 올라가! 절대로 못 갈걸!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걸’ 그런데도 개구리 열 마리는 종종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도중에 토끼들을 만났는데 자기들의 꿈의 목표를 애기해주자 토끼들은 앞니를 쭉 빼며 깔깔깔 웃으며 뭐, 그 작은 발로 저 높은 산을 올라간다고? 말도 않되! 잘못하면 너희들 도중에 다 죽게 된다고! 그 말을 듣자 이미 피곤하고 힘들다고 느낀 다섯 마리가 포기하고 돌아섰다. 남은 다섯 마리는 약간 갈등이 되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꾸준히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좀 더 올라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상수리나무 숲을 지나게 되었다. 거기에서 다람쥐 몇 마리가 벼락같이 나무에서 내려오더니 “아니 이산에는 없는 개구리들이 웬일이니? 개구리는 합창을 하듯 ‘이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중이야’라는 대답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람쥐들이 ”너네들 정신 나갔니?“ 여기서부터 얼마나 길이 험한데 빨리 돌아가야 살 수 있어” 그러자 개구리 두 마리가 단념하고 미안하다고 큰 눈을 껌벅껌벅 하더니 돌아가 버렸다. 남은 세 마리가 입을 굳세게 다물더니 종종 걸음으로 계속 진행해 올라갔다. 그 모습을 험한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던 산양 한마리가 뿔을 바위에 긁으면서 코를 실룩거리며 소리쳤다. “그런 발로는 절대로 못 올라간다. 지금이라도 내려가는 게 상책이야, 죽고 싶으면 계속 올라가고“ 또 두 마리가 포기해 버렸다. 이제 개구리는 달랑 함 마리만 남았다. 이 한 마리 남은 개구리는 끝까지 올라가서 결국 산꼭대기에 올랐다. 정상을 정복한 이 한 마리 개구리가 천신만고 끝에 산을 내려오자 그동안 도중에서 만났었던 동물들이 큰 호기심을 가지고 몰려와서 묻기 시작했다. ‘어이 개구리! 대체 그 비결이 뭐였니? 어떻게 산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었니?’ 개구리가 말했다 ‘뭐라고?’ 모든 짐승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성공한 비결이 뭐냐니까?’ 개구리가 또 말했다. ‘뭐라고? 도대체 뭐라 하는 거야?’ 알고 보니 이 개구리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였던 것이었다.”
부정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개구리들은 중도에 다 포기하고 정상을 오를 수 없었는데 오직 부정적인 말을 듣지 못한 개구리만이 결국 정상에 도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잠19:27)
3. 소망은 오직 주님께(Hope is in God)
우리가 생의 위기를 당하는 순간에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히스기야는 생애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사38: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기억(Remember)하여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억꺼리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만한, 인정하실 만한 추억꺼리를 만들어야 한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한 일들을 추억하여 주시도록 간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후계자를 임명하고 죽을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여호와께서 왕에게 이런 말씀을 전하셨다. ‘너는 이제 네 후계자를 임명하고 죽을 준비를 하여라. 네가 살아남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현대어성경) 생의 위기를 대비하여 자신을 대신(대체)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C. Everett Koop는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 보다 인생에 더 큰 책임, 더 큰 특권은 없다.”고 하였다.
또한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자신의 지난 삶을 호소하였다.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2vs) 우리는 생의 위기를 대비하여 평소에 진실된 마음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함을 보게 된다. 생의 위기를 당하였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체면(공적)이라도 평소에 쌓아두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할 수 있는 명분이라도 쌓아야 한다.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마음과 전심으로 주님을 위해 살았음을 상기할 수 있는 선행을 준비해야 한다.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지만,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생애 위기를 대비하여 자신의 삶이 언제나 깨끗하고 명예롭게 잘 마감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 더 많이 사랑하고 도와주고 후히 베푸는 삶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 때에 좀 더 사랑할 걸, 좀 더 베풀 걸, 좀 더 도와줄 걸 하며 후회하지 않는 생이 되어야 한다.
느헤미야의 삶은 거룩한 희생과 헌신의 삶이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성,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회복하며 소성케 하는 일에 온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을 바쳤다. 어떻게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느헤미야의 헌신은 하나님께 전적인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느헤미야는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이 하나님께 기억되기를 기도하였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일들을 사람은 기억할 수 없고 알아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행위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할 수 있다. 느헤미야는 항상 자신의 헌신과 수고와 억울함을 돌아보며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은혜와 복을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억하여 주시고 도와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하였다.
•느1:9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느4:14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5: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13:14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어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느13: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을 명하여 몸을 정결케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느13:31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 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이다. 히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의 삶은 이 땅에서는 자신들을 나그네로서의 삶으로 여겼다. 언젠가는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삶을 그리워하였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히11:13-14) 우리의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 돌아갈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오직 소망은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하나님께 두고 맡겨주신 사명을 힘을 다하여 감당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4:10)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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