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안식년’ 보내는 손미나앤컴퍼니 손미나 대표 여행작가, 인생학교 교장 그리고…인생 3막 준비 중 "직업 빨리 구하는 것보다 나를 탐구하는 시간이 중요"
"가족오락관 최종점수, 몇 대 몇~"
"학생들의 도전을 응원합니다."
"일요일 밤 KBS뉴스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KBS 대부분의 프로그램 진행을 맡던 간판 아나운서가 있다. 바로 손미나(47)씨다. 시청률 20%가 넘는 가족프로그램부터 KBS뉴스9까지 채널을 돌리면 항상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던 그가 2007년 회사를 떠났다가 아나운서가 아닌 손미나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여행작가로서 책을 쓰고 그동안 경험으로 강연을 하는 등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손미나 대표를 만나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는지 들었다.
손미나 대표
출처jobsN
◇“행복하니?” 멍하게 만든 의사의 한마디
손미나 대표가 처음부터 아나운서를 꿈꾼 건 아니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었고 대학교 3학년 때 어학연수 겸 떠난 스페인에서 진로를 결정했다. 당시 스페인에서 시위가 있었고 어떤 일인지 궁금해 직접 현장을 찾았고 또 본 것을 친구에게 전해주는 게 재밌었다. 그때 호기심이 많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은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 '내가 가장 쓸모 있게 쓰일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은 뭘까' 고민 끝에 찾은 답이 아나운서였다. 시험을 보고 1997년 KBS에 입사했다.
당시 인기 프로그램 시청률이 30% 이상을 기록하던 방송 전성기에 도전 지구탐험대, 도전! 골든벨, 가족오락관, KBS뉴스9 등을 맡으며 간판 아나운서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 2004년 떠난 휴가에서 만난 이탈리아 의사가 손 대표의 인생을 바꿨다. "머무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저는 일 얘기만 한다는 거예요. '일 말고 손미나는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봐라, 너는 지금 행복하니?'라고 묻는데 대답을 못 했습니다. 충격이었죠. 정말 기본적인 것을 놓치고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유학을 떠났다. 두 가지 이유였다. 첫 번째는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인지 찾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클레르 샤잘은 50대에도 혼자 나이트 라인 뉴스를 진행하고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에 메인 앵커를 맡아요. 성별과 나이 상관없이 능력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죠. 한국 여자 아나운서는 그런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떠나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현장에서 취재도 하고 싶었죠. 내가 공부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유학을 떠났습니다."
도전! 골든벨을 진행하는 모습(좌), KBS뉴스9 진행하던 손미나 대표
출처고동현 유튜브, KBS 페이스북 캡처
◇아르헨티나·프랑스·쿠바…여행작가로
세계의 기자, 카메라맨, 앵커와 함께 어울리면서 저널리즘 석사 과정을 마쳤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스페인에서 살다 온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책은 40만부 이상이 팔렸고 이 덕분에 스페인 홍보대사로 임명돼 활동하기도 했다. 2007년 그는 돌연 사직서를 냈다. 공든 탑 스스로 무너뜨리는 격이라면서 모두가 반대하고 걱정했지만 '나의 길'을 찾고 싶었다.
"퇴사 후 일본, 아르헨티나, 프랑스, 페루 등을 다니면서 보고 배운 것으로 책을 썼어요. 그중 아르헨티나에서 겪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르헨티나에 3~4개월 동안 머물면서 여행을 다니다가 사진, 동영상 등 모든 자료가 담겨있는 카메라, 컴퓨터 등을 도둑맞았어요. 어쩔 수 없이 더 머물러야 했죠. 여행 마지막 날 인디안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제 얘길 듣고 '지금 당장 많은 걸 잃은 것 같지만 사실 넌 잃은 게 아무것도 없어. 네가 잃어버려 슬픈 물건들은 태어날 땐 네 것이 아니었던 거잖아. 너를 봐. 두 팔과 두 다리가 있어. 다시 일어나 걸으면 돼'라고 말하더군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경험이었고 그 친구가 해준 말을 지금도 곱씹으면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도전할 힘을 냅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1년에 한 번씩은 책을 냈다. 그곳에서 촬영한 영상은 편집해 유튜브에 올렸다. 손대표는 유튜브 채널 '미나언니TV'를 운영하고 있다. 바쁜 와중에 2014년에는 허핑턴 포스트 편집인을 맡았다. 2013년 아리아나 허핑턴이 한국 지사를 위해 함께 일할 사람을 모집했고 손대표에게 먼저 편집인을 제안했다. 아리아나 허핑턴이 원한 편집인은 방송 미디어 경험이 있는 사람, 여행을 많이 한 사람, 책을 써본 사람이어야 하고 여자여야 했다. 손미나 대표는 자신의 이력과 잘 맞는다고 생각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허핑턴 포스트 한국지사 편집인으로서 활동했다.
여행을 통해 다양한 자아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맨 오른쪽은 쿠바에서 생활하면서 살사 댄스를 배우는 모습.
출처손미나 인스타그램, 본인 제공
◇손앤컴 설립…인생 학교 교장 맡아
편집인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손미나앤컴퍼니(손앤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세계에서 넓은 견문을 쌓은 사람이 모여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 사회에 변화를 끌어 내고자 만든 글로벌 컬처에이전시였다. 허핑턴 포스트 편집인, 손앤컴 대표로 활동하던 중 ‘인생 학교’ 서울 분교를 맡았다. 인생 학교는 인문학과 실생활의 접목을 위해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세운 학교다. 조금 더 나은 사람, 나은 삶을 찾고자 하는 어른을 위한 곳이다. 런던, 파리, 멜버른 등을 이어 서울에도 문을 열었는데 이때 손미나 대표가 서울 분교 교장을 맡았다.
“2008년 초 알랭 드 보통과 인터뷰를 했었어요. 당시 그는 어른들에게 꼭 필요한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고 그해 영국 런던에 첫 학교를 열었어요. 2010년 초반 프랑스에 머물 때 파리 인생 학교에서 수업을 들어보고 한국에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즈음 서울 분교 설립을 결정해 제가 관련 프로그램도 추천해주고 도움을 주던 중 운영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공식 모집 기간에 지원을 했고 심사를 통해 손앤컴이 운영을 맡았습니다.1년 정도 준비하고 2015년 서울 분교를 열었습니다. 저는 ‘가슴 뛰는 직업을 찾는 법’, ‘선택 잘하는 법’ 강의를 맡았어요. 그밖에 다양한 연사를 초청해 대화 잘하는 법, 돈 걱정 없이 잘 사는 법 등 강의를 했죠.”
수강생은 초등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했다. 그중 선생님, 종교인이 많았다. 다들 누군가 자신에게 인생 상담을 해오는데 나도 모르기 때문에 수업을 들을 곳이 필요해 찾아왔다고 한다. 그들을 위해 강사를 초청하고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그렇게 2018년 초까지 인생 학교를 운영했다.
알랭 드 보통과 함께.
출처손미나 인스타그램
◇인생에 중요한 ‘쉼표’ 인생 3막 준비 중
여행을 다니며 책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 인생 이야기를 나누던 손미나 대표는 현재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내가 가는 길이 꽃길이다'를 출간하고 안식년을 보내는 중이라고 말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까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어요. 강연과 방송·인터뷰·책을 통해 인생의 쉼표, 균형 잡힌 삶에 대해 얘기했죠. 그러나 정작 저는 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가지면서 하나씩 비워내기로 했어요. 의미 없는 활동이나 약속부터 허핑턴포스트 편집인, 인생 학교 교장 등을 내려놨습니다.”
이런 그의 결정과 삶의 방식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한참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한 달 동안 여행을 갔다. ‘가장 힘차게 달려야 할 때 숨을 고르는 시기가 있어야 더 잘 달릴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 덕분이었다. 이런 가르침이 지금의 손미나를 만들었다. 인생 1막은 아나운서, 2막은 내가 선택한 삶을 살며 다양한 나와 세계를 발견했다면 3막에선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을 채우고 삶의 균형을 잡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바쁜 일상에 치이는 사람들에게 조언도 잊지 않았다.
“취업이나 직장생활이 정말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직업을 빨리 구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 만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많은 경험을 통해 내가 누군지 탐구하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해요. 그 후 자신이 오랫동안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택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다 지치면 쉬면 되고요. 불안하지만 천천히 그리고 온전히 본인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