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새벽은 안개를 낳고 떠다니는 영혼, 그 중에서도 상처받은 영혼들을 감싸주고 있으리 (허형만·시인, 1945-)
+ 안개
흐려진 얼굴 잊혀진 생각 그러나 가슴 아프다. (나태주·시인, 1945-)
+ 안개
면사포를 길게 늘인 새벽의 정령 세작처럼 스며들어 어둠을 헐고 초야의 단꿈 속에 매복 중이다. (이현우·시인, 충북 괴산 출생)
+ 안개
앞산 애기 봉 감기 걸리지 말라고
하얀 목도리 두르고 있네.
아침 해 뜰 때까지 (유응교·건축가 시인, 전남 규례 출생)
+ 안개
기다리세요 잠시 후면 떠나리니 머리 풀고 굿거리장단 춤 한 번 춘다고 바람난 여인이라 바라보지 마세요 살다 보면 주절거리는 것보다 신바람 나게 춤 한 번 추는 것이 덜 아프니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송정숙·시인)
+ 안개비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이 세상 풍경들은 모두 푸르스름한 모기장 속에 갇혀 있다.
인간이 아무리 빗방울을 잘게 썰 수 있다 한들 이런 조화를 이룰 수 있으랴.
물방울까지 이렇게 잘게 써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박성룡·시인, 1932-2002)
+ 아침 안개 속에서
몹시도 곤했던 모양이다 하늘과 바다와 산과 강들이 아직도 잠이 쏟아지는 모양이다
안개 속에서 5분만, 아니 십 분만 더 투정하는 소리
종일 더 잔들 이 땅의 주인들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세상이 보이지 않으면 단 5분도 기다리지 못 하는 속물들의 근성
아무 상관 말고 네 상한 몸 개운해질 때까지 그래, 푹 더 자거라 (도지민·시인)
+ 안개 엄마
안개가 온 산을 품에 껴안고 있는 걸 보면 팔이 퍽 큰가 보다.
어릴 적 우리 삼형제 품에 꼭 껴안던 우리 엄마다
한없이 좋은 우리 엄마처럼 사랑을 퍼 주는 안개. 엄마 사랑 넉넉히 마시고 있는 산. (서향숙·아동문학가)
+ 산과 안개
어느 날 보니 안개는 배가 엄청 크더라
글쎄, 그 큰 산 대관령을 통째로 삼키고 산 없다! 시침 뚝 떼더라
어느 날 보니 대관령은 가슴이 엄청 넓더라
글쎄, 그런 안개를
포옥 감싸 숨겨 주고 안개 없다! 점잖게 앉아 있더라 (유희윤·아동문학가)
+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김광규·시인, 1941-)
+ 피어라 안개
밤마다 뒤척이는 잠의 머리맡에 그대 있어 두물머리에 섰다 남과 북 갈래를 버리고 하나 된 강에 하얗게 물안개 핀다 피어라 안개 뭍과 물 산과 강 경계를 지우고 남과 여 너와 나 분별도 버리고 피어라 피어라 안개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이기도 한 안개의 다른 이름은 스밈 안개가 겹으로 겹으로 피었다 그대에게 스밀 때다 안개에 젖어 안개에 스며 그리하여 그대의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까지 피어라 피어라 안개 (김민서·시인, 서울 출생)
+ 안개의 식사법
사람을 먹는다 밤을 새워 늙은 아내 병수발을 하고도 이른 아침 마른논에 듣는 비 소식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흐뭇한 아버지를 실오라기 하나 안 남기고 순식간 먹어치운다
소를 먹는다 바위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로 번뜩이는 뿔을 가졌으나 가려워본 적 없는 누렁이를 털 하나 안 남기고 통째 먹어치운다
어허 잘 먹었다 트림도 안하고 아버지 발걸음 소릴 뱉는다 누렁이 워낭소리를 뱉어낸다
잘 익은 열매를 먹고 남은 씨앗들을 청맹과니 내 안에 떨어뜨린다 (원무현·시인, 1963-)
+ 안개침엽수지대
먼지들이 습기를 빨아들인다 말라서 가벼운 것과 젖어서 가벼운 것들의 치열한 혼인 빛이 직선을 꺾고 바퀴들은 원을 내려놓는다 안개가 내리고 서서히 세상은 눈을 뜬 채 눈먼다
안개가 지독해야 안개 너머를 꿈꾸고 자기의 안쪽을 염려한다 안개가 극심해야 세상은 눈을 버리고 오래된 귀를 연다 나는 온몸으로 청각이 되어 있다 눈을 믿는 자는 권력을 믿는 자
자욱한 습기가 먼지들을 끌어안는다 안개, 안개주의보 ─ 멀고 새로운 것들, 가깝고 오래된 것들의 소리를 온몸으로 유념한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소리들에 하나하나 페이지를 먹이며 안개지대 한 가운데를 통과한다
내 안에서 해가 지고 달이 진다 (이문재·시인, 195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안개숲 / 김충규
나무들의 혀가 바람을 감아들였다 흰 뼈가 드러났다 피 철철 흘리며 시간이 걸음을 멈췄다 화석 속에 살던 물고기가 나뭇잎을 물고 계곡으로 사라졌다 적막의 지느러미가 날렵하게 흔들렸다 이내 안개가 왔다 죽은 자들이 제 무덤 속으로 안개를 끌어들였다 마른 내장을 꺼내 적시는 숲의 늑골 사이에서 시간은 무수히 알을 낳았고 알 수 없는 섬광이 안개 사이로 비쳐들었다 제 속의 너무나 많은 구멍들, 그 구멍들 속으로 스며든 안개를 나무들은 힘겨워했다 땅에 구멍을 파고 눈감고 들어가 누울까 안개 너머 멀리 한 세상이 씨앗들을 터뜨렸다 적막의 지느러미가 별들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섬광을 잠재워버린 안개는 안개 속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구멍들은 구멍 속으로 들어갔고, 그때 숲의 내장엔 소화되지 못한 온갖 나무들 뿌리가 엉켜 들고 있었다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문예공모 시 당선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등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오월문학상 수상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
안개지역 / 배한봉
습기찬 바람 속에 나는 서 있다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뒤엉킨, 곧 무너질 듯 위태로운 다리 위에 나는 서 있다 눈 뜨면 안개 뿐인 이곳을 사람들은 희망을 노래하며 건너갔다 절망하면 불안 때문에 발을 헛딛게 되니까 산다는 것은 안개와 같으니까 가끔씩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싸움과 슬픔에 지친 마음들끼리 술 마시면서 주먹을 펴면 차가운 바람들만 스칠 뿐인 이곳을 나도 이제 희망을 노래하며 지나가려 한다 세계는 슬몃 태양을 밀어올리고 갓 깨어난 새들이 날아오를 때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현대시 》로 등단 시집 『흑조 』『우포늪의 왁새 』『악기점 』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 계간 <시와 생명> 편집위원 웹진 <詩鄕>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