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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불자.. 불자면 됐지 굳이 아함을 왜 붙여 하는 것이리라 뉴욕에도 "금강경 독송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활동이 뜸해진 것 같다. 보다 활성화 되면 좋을 터인데.. <금강경>을 매일 10독 또는100독 한다는 불자님들.. 분명 금강불자라 해도 좋을 터인데.. 그렇다고 그들을 '금강불자'라 하면 좀 어색하다 마찬가지로 '화엄불자'도 어색하지만.. '아함불자'는 쓸만하다. 왜냐면.. 이때까지 소승불교 경전이라 하여 찬밥신세였던 <아함경>을 새롭게 봐달라는 바램과 의지룰 담고 있기에^^.. 그런데
그 사건은 소승불교라 하여 천시하였던 초기불교를 새롭게 주시하는 계기가 되는데.. 그들은 니까야를 소개했다.. 그 니까야는 바로 아함경 내용과 같은 것이라 한다. <아함경>의 슬픈 역사를 아시나요? 지금 우리가 보는 <잡아함경>은 상좌부파인 설일체유부의 경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했다 대소승 경전이 함께 번역되었는데.. 중국에서 소승불교는 버리고 대승불교를 택하니 소승경전인 이함경은 한문으로 번역되기만 했을 뿐 창고에 버려진 채 19세기에 이른다. 물론 대승불교 논서의 기반인 세친논사의 <구사론>은 <아함경>이 텍스트인 관계로 근본 교리는 <아함경>을 떠날 수 없었다. 서양이 동양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 남방 불교가 서구에 소개되어 니까야를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하여 소개하였고, 19세기 말 일본은 한문본 대장경 속에 아함경이 있음을 세계에 알리면서 초기 경전을 연구하는 학자 사이에 아함경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남방 불교가 서구에서 관심을 받지 못했다면 아함경은 여전히 창고 속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이때 취해진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아함경>이 아닌 <니까야>다 우리나라에서 자리도 잡기 전에 다시 창고로 갈 형편에 처해진 것이다. 그런 가여운(?) 처지를 이해한다면.. 아함불자라는 말에 자비를 보여 줄 듯 한데.. 왜 거부감을?.. 아함경의 원본인 산스(크리트)어인 범어 본은 사라졌으며, 산스어를 번역한 한문본이 원본 구실을 한다. 하여 한문본이 과연 원본과 같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한글로 번역되었다고 하나 한문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적지 않다. 니까야는 영어본이 원본처럼 인정받고 있다. 그에 반해 한문본인 <고려대장경>은 불교 원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아함경이 찬밥되는 것은 경 자체 힘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신통한 일이 있다 그런 것이 불만인지.. 상좌부를 공부하는 학인 가운데 몇몇은 아함경을 아예 심학을 표방하는 대승불교 경전으로 배달 보낸 자도 있는 것 같다. (아함경 컴플렉스가 아닌가 하는데..) 묘하게도 <아함경>의 그 내용이 니까야의 기본 흐름과 결이 맞지 않는다. 결이 맞지 않는다는 점이. 아함경이 창고 속에만 있으면 아니 되는 이유가 된다. 아함경 기록자와 남방불교의 니까야 기록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지점이 똑같지 않다는 것. 현존하는 <잡아함경>이 상좌부 유부의 경전이 아닌 대중부 경전이었으면.. 남방 상좌부에서는 단번에 <대승불교 잡아함경>이라 이름 했으리라. <잡. 1-1. 무상경>에 '공'이 언급되지만.. '무상하다[無常]'고 관찰한 것과 같이, '그것들은 괴로움[苦]이요, 공하며[空],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잡. 1-1. 무상경> 비슷란 내용의 <쌍니. S22:12-14>에는 무상, 고, 무아를 언급할 뿐 '공'이 빠져 있다. 그러니 니까야를 신봉하는 불자라면 당연히 <잡아함경> 기록자가 공을 후세에 삽입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잡아함경>이 대승 불교를 받아들인 증거라 하고 싶겠지. 그런데 역으로 대승불교는 불교가 상좌부와 대중부로 갈라지는 데 대중부를 전승한 불교라 하면.. 대중부는 일끼감치 세존의 가르침을 심학으로 통찰하고, 공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었던 게 아니내는 것이다. 오히려 유부는 공 대신에 실유를 주장한 부파다. 그런 부파 경전인 <잡아함경> 안에 <335. 제일의 공경>이 전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공이야말로 세존의 진설이 아닌가. 그리고 경전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일점일획의 오차없이 문자없이 구전으로 천년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경에 대한 제자들의 경외심과 태도를 주목하고 있다면 경을 함부로 첨삭했다는 주장은 펼치지 못하리라. 지 마음에 아니 든다고 후세에 삽입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자신의 경박함을 드러냐는 증거일 뿐. 아함불자는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무상, 고, 무아 그리고 공을 가르쳤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존의 가르침은 완전해 지기에.. 아함불자라는 명함을 돌리려면.. 일체는 실재로 존재하는 실유가 아닌 일체는 마음에서 생긴다는 심연생을 의심하지 않는 불자다. [석양 속에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관세음보살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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